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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21화 (21/83)

21화

“아무리 파트너 변호사라고 해도 개인적인 일에 주니어 부려 먹는 건 너무 꼰대 같지 않나?”

재하는 못마땅한 눈으로 성현을 보았다. 재하의 표정에 이경이 얼른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하겠다고 한 겁니다.”

이경의 대답에 재하의 짜증스러운 눈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경은 재하의 시선을 외면하고 성현을 보았다.

“미안해, 차 변호사.”

“아닙니다. 제가 팀장님 허락도 없이 주방을 사용했습니다. 예준이 간식 만들어 주고 싶어서요.”

“고마워.”

성현은 진심으로 고마운 얼굴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경이 꾸벅 성현에게 인사했다.

“응. 가 봐, 어서.”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경은 트렌치코트와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들어가십시오, 전무님.”

“어.”

깍듯한 성현의 목소리와 시큰둥한 재하의 목소리가 이경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

“제가 해야 할 일이 팥죽 먹는 거였습니까?”

로펌으로 가야 한다는 이경을 재하는 부득부득 삼청동의 어느 팥죽 가게로 데리고 갔다. 앞에 놓인 팥죽을 한 번 보고 이경은 재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좋아하는 거 먹이고 잔뜩 부려 먹으려고. 못 하겠다고 나자빠지면 어떡해. 먹여 놓으면 팥죽값은 하겠지.”

“7천 원어치요?”

“응, 7천 원어치만 일해.”

재하가 입가를 올리며 대답했다.

“잘 먹겠습니다.”

이경은 숟가락을 들고 팥죽을 떠먹었다. 적당히 달고, 굉장히 부드러웠다. 고명으로 올라온 밤과 함께 팥죽을 떠먹으며 이경은 하경의 생각을 했다.

하경도 팥죽을 좋아했다. 그래서 겨울이면 엄마는 자매를 위해 냄비 한 솥 가득 팥죽을 쑤곤 했다.

재하가 사 준 팥죽은 엄마가 해 준 팥죽 맛이랑 비슷했다. 이경은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더 먹든지.”

빠르게 비어 가는 이경의 그릇을 보며 재하가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더 먹으면 내가 그만큼 더 부려 먹을까 봐?”

“네.”

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그릇 값만큼만 부려 먹을 테니까 더 먹어.”

“괜찮습니다. 배불러요.”

“매일 그따위로밖에 안 먹으니까 나뭇가지 같지.”

재하는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딱히 죄송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이경은 습관적으로 사과했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티가 났는지 재하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입을 열었다.

“좀 성의 있게 죄송하든지.”

“죄…….”

여기서 또 죄송하다고 하면 성질을 낼 게 뻔해 이경은 얼른 말을 삼키고, 팥죽 그릇으로 시선을 내렸다.

말을 삼키듯 팥죽을 삼키자, 피식 웃는 재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끼를 부리는 건지, 내가 넘어가고 싶은 건지.”

한숨 같은 목소리였다.

못 들은 척하고 싶은 말이라 이경은 다시 팥죽 그릇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쩌면 또 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다 재하와 함께 밥을 먹으면 이경은 체해 손을 땄다.

호텔 한식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을 때도 체했고, 재하의 집에서 식사했을 때도 체했다. 그때보다 훨씬 편한 분위기였지만 이경은 왠지 모르게 체할 것만 같았다.

팥죽을 먹고 이제는 정말 로펌으로 가나 했더니 재하가 이번에는 호텔로 데려갔다.

“차이경 부려 먹을 시간이야.”

객실 안으로 들어온 재하가 이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엄청 부려 먹을 생각이신가 봅니다.”

객실 안으로 들어와서 이경이 제일 먼저 본 것은 소파 테이블 위에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이었다.

재하는 픽 웃으며 테이블로 향했다.

“전자 쪽에서 힘들게 빼낸 자료들이야.”

“전자 쪽이요?”

“김 실장님한테 졸랐어. 진짜 할아버지 사람인지도 알아볼 겸.”

“김 실장님, 정말 회장님 사람 맞나 보네요.”

이경이 서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서석호 부회장 사람이었다면 이 많은 양의 서류를 빼 주지 않았을 테니까.

“그건 빼내 준 자료의 질을 보고 판단해야지. 천천히 살펴보고 법적으로 걸릴 만한 것들 전부 추려.”

“설마 오늘 안에 다 해야 하는 건 아니죠?”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오늘 안에 다 해야 하는 것들이라면 집에 가기는 다 틀렸다는 소리였다.

“금요일 밤이잖아. 일하기 딱 좋은.”

“네에.”

“표정이 왜 그래? 차이경, 일 좋아하잖아.”

재하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경은 일단 가방부터 내려놓고, 트렌치코트를 벗었다. 헐거워진 머리를 단단히 다시 묶고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재하가 산처럼 쌓아 놓은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사이 재하가 커피를 가지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커피를 내미는 재하에게 인사를 하고 이경은 일에 집중했다. 하경에게 늦는다는 전화를 한 번 한 거 말고는 이경은 화장실도 가지 않고 꼼짝없이 앉아 일을 했다.

그러다 몸이 찌뿌듯해 잠시 서류에서 눈을 뗀 이경이 목을 돌렸다. 몸을 풀어 주다 힐끔 옆을 본 이경의 시선이 재하에게 멈추었다.

서류에 빠져 있는 재하의 모습이 조금 놀라웠다. 매일 양아치 또라이 짓을 하는 모습만 보다 일하는 모습을 보니 신선했다. 서재하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잘생겼으면 말로 해. 훔쳐보지 말고.”

재하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어쩌다 본 겁니다. 훔쳐본 게 아니라.”

재하의 말에 이경은 움찔했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재하가 고개를 들어 이경을 쳐다보았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일은 열심히 한다더라, 하던 안지혜 변호사의 말이 생각났다.

“피곤하시면 가서 좀 주무세요.”

“혼자?”

이경의 말에 재하가 입을 열었다.

그럼 혼자지 누구랑 자겠다고. 이경은 “네.” 대답하며 얼른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재하가 이경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당황한 이경이 재하를 내려다보았다. 재하는 뭐가 문제냐는 뻔뻔한 얼굴로 이경과 눈을 맞추었다.

“제 무릎을 베고 누우셨습니다.”

비키라는 말을 이경이 돌려 표현했다.

“그래서?”

“누우실 거면 침대 가서 누우세요.”

“저 큰 침대에 혼자 누우라고? 쓸쓸할 것 같은데? 차이경도 같이 가서 눕는다면 생각해 보고.”

“전 안 갑니다.”

이경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무릎 좀 빌려 줘. 예준이한테는 잘만 빌려 줘 놓고. 사람 차별하는 거야?”

“예준이는 아이잖아요.”

“나도 아이라고 생각해.”

재하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정신 연령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경의 말에 재하의 입가가 올라갔다.

“계속 그렇게 기어올라.”

욕을 먹었는데도 재하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이경은 서류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에 집중하고 싶었는데, 허벅지를 베고 누운 재하가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져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허벅지가 간질거렸다. 허벅지에서 시작된 간질거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경의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10여 분을 인내하던 이경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계실 겁니까?”

“왜?”

“다리가 좀 저려서요.”

이경은 다리가 저리다는 핑계를 댔다.

“밥을 많이 안 먹으니까 다리가 저리지.”

엄마 같은 소리를 하며 재하가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에 재하의 입술이 아주 잠깐 이경의 허벅지를 스쳤다.

흠칫, 이경이 숨을 들이마셨다. 서류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류가 구겨지고, 이경은 빠르게 두어 번 눈을 껌벅였다.

아까부터 불편하던 속이 확 울렁거렸다. 정말로 체한 모양이다.

재하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이경은 벌떡 일어섰다.

“주물러 줘?”

“괜찮습니다.”

식겁할 만한 재하의 말에도 이경은 덤덤한 얼굴로 대답하고, 미니바로 향했다. 미니바에서 생수를 꺼내 마신 이경은 명치 쪽을 주먹으로 쿵쿵 때렸다.

이경을 눈으로 좇던 재하가 입을 열었다.

“어디 불편해?”

“아까부터 속이 좀 안 좋았습니다. 체한 모양이에요.”

가방에서 반짇고리를 꺼내 소파에 걸터앉은 이경은 실을 바늘에 꿰었다.

“체했다면서 갑자기 웬 바느질이야? 약 사 와?”

“저는 약보다 이게 더 잘 맞습니다.”

이경은 재하에게 대답하며 엄지를 실로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바로 바늘로 푹 찔렀다. 찔린 살을 비집고 검은 피가 볼록 튀어나왔다.

“얘 독한 거 봐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지 살 찌르네.”

“휴지 좀 주세요.”

이경이 재하에게 말했다.

재하는 티슈를 뽑아 건네주었다.

“이런 거 다 미신이고 플라시보야.”

“보통은 민간요법이라고 하죠.”

이경은 재하의 말을 차분히 반박하며 오른손 엄지에도 실을 감았다. 그런 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땄다.

재하는 제 손을 따는 것도 아닌데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프지도 않냐?”

“따끔합니다.”

이경은 검붉은 핏방울을 티슈로 닦아 내며 대답했다.

“너 우리 영감님이 좋아하겠다.”

재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킷을 들고 현관 쪽으로 향하는 재하를 보며 이경이 그를 불렀다.

“어디 가십니까?”

“나 나간다고 도망치지 말고, 나 없다고 그사이 윤 변한테 일러바치지 말고.”

재하는 경고하듯 손가락으로 이경을 가리키며 말하고는 그대로 객실을 나가 버렸다.

재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돌아왔다.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약국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봉지에서 약을 꺼낸 재하는 이경의 무릎으로 툭 던졌다. 알약과 가루로 된 한방 소화제였다.

재하는 액상 소화제 병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고, 미니바로 향했다. 그리고 물을 가져오더니 이경의 옆자리에 앉았다.

“먹어.”

“괜찮…… 감사합니다.”

험악하게 구겨지는 재하의 얼굴을 보며 이경은 바로 말을 바꾸었다.

안 먹겠다고 하면 또 성질을 부릴 게 뻔해 얼른 알약 상자를 뜯었다. 알약을 꺼내 물과 함께 먹고, 한방 소화제는 슬쩍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건 왜 안 먹어? 그것도 같이 먹으랬어.”

“충분합니다.”

가루약에는 약했다. 가루약은 잘못 먹으면 쓴맛이 입안에 확 퍼져 질색이었다.

“네가 약사야? 먹으라면 다 먹어.”

재하는 이경이 테이블에 내려놓은 한방 소화제 껍질을 뜯어 내밀었다. 이경은 마지못해 소화제를 받아 들었다.

일단 물부터 머금고, 가루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재빨리 물을 마셨지만 가루가 입안에 퍼지면서 쓴맛이 둥둥 떠다녔다. 꿀꺽 물과 약을 삼키고 나서도 쓴맛이 감돌아 기분이 나빠졌다.

“여자 안 할 거면 적당히 해.”

약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재하의 심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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