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네, 차이경입니다.”
이경이 재하의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왜 로펌에 없어?
“외부에 나와 있습니다.”
로펌에는 왜 간 거야. 이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전화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예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빠예요?”
하고 물어 핸드폰을 손으로 가리고 이경은,
“아니야.”
라고 대답했다.
—외부 어디?
“법원이요.”
—어린이 사기단 소송이라도 맡았어?
빈정거리는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준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이경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정이 생겨서 윤 변호사님 댁입니다.”
—네가 거길 왜 가.
재하의 목소리가 까칠했다.
“급한 일 때문에…….”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이경은 한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서재하 또라이.
그사이 예준이 영어 단어 카드를 가지고 나와 이경은 잠시 함께 영어 단어 카드놀이를 해 주었다.
20분가량이 지났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아빠다!”
카드놀이를 하던 예준은 현관으로 달려갔다.
아직 성현이 돌아올 시간이 아니라 이경은 의아해하며 예준을 따라갔다. 이경이 현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예준이 문을 연 후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재하였다.
“서 전무님?”
이경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여기는 왜…….
낯선 사람의 등장에, 예준이 놀랐는지 얼른 이경에게 달려와 손을 잡았다.
안으로 성큼 들어온 재하는 예준을 힐끔 보며 입을 열었다.
“이쪽이 어린이 사기단 대장?”
“어떻게 오셨어요?”
“차이경 잡으러 왔지.”
“…….”
“윤성현이랑 놀아나나 싶어서.”
재하가 허리를 숙이고 이경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도 애 앞이라고 조심하는구나 싶어 이경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우스웠다.
“예준아, 괜찮아. 아빠 친구야. 거실에 가 있어.”
이경이 예준의 등을 거실 쪽으로 살짝 밀었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실로 달려갔다.
“차이경, 상냥하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윤 변호사는? 왜 여기서 보모 노릇을 하고 있어?”
재하가 못마땅한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팀장님은 중요한 재판이 있으셔서요. 아이가 갑자기 아프다고 해서 제가 대신 데리고 있는 중입니다.”
“남의 집에서 보모나 하라고 내 사람 시켜 준 거 아닌데.”
재하는 말끝을 길게 늘이며 거실 슬리퍼를 신고 안으로 슬렁슬렁 들어갔다.
“서 전무님.”
이경은 재하를 쫓아가며 그를 불렀다.
내 집도 아니고 남의 집에 재하를 막 들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성현과 재하가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영 마음이 불편했다.
재하는 이경의 부름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예준에게 다가갔다. 예준의 옆에 털썩 앉은 재하가 아이의 어깨를 쿡 손으로 찔렀다.
예준이 재하를 돌아보았다.
“너 이름이 뭐야?”
재하가 예준에게 물었다.
“윤예준이요.”
“몇 살?”
“다섯 살.”
예준이 손가락을 활짝 펼쳐 보였다.
“제법 오래 살았구나.”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제법 오래 살았다는 말을 하는 건 세상에 서재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경은 작게 고개를 젓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예준의 간식이라도 만들어 줄 생각이었는데 냉장고에는 들어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계란 몇 개와 냉동 식빵을 겨우 발견해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빵을 전자레인지에 해동시키고, 계란을 풀어 우유와 섞었다. 그렇게 계란에 적신 빵을 버터를 두른 팬에 구웠다.
이경이 프렌치토스트를 만드는 동안 거실에서는 예준의 웃음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재하가 재미있게 놀아 주는 모양이었다.
숨넘어가는 예준의 웃음소리에 이경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누나! 누나!”
어느새 재하가 예준을 안고 주방으로 왔다.
재하는 인덕션 앞에 서 있는 이경에게 다가갔다.
“아!”
예준이 팬 위에서 구워지고 있는 빵을 보고는 입을 벌렸다.
“아직 아무것도 안 뿌렸는데.”
“먹고 싶어요. 아.”
예준은 괜찮다는 듯 다시 입을 벌렸다.
이경은 연유도 설탕도 뿌리지 않은 프렌치토스트 한 귀퉁이를 작게 잘라 예준의 입에 넣어 주었다.
“맛없지?”
“맛있어요.”
냠냠 씹고는 예준이 대답했다.
“아.”
이번에는 재하가 입을 벌렸다.
애랑 똑같이 행동하는 재하를 잠시 잠깐 한심하게 본 이경이 그의 입에도 작게 자른 프렌치토스트를 넣어 주었다.
“예준 대장, 거짓말쟁이구나. 맛이 없잖아.”
기껏 줬더니 재하는 맛없다는 소리를 하며 예준의 배를 간질였다. 예준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재하는 예준을 데리고 다시 거실로 떠났다.
그들이 사라지고 이경은 접시에 프렌치토스트를 담았다. 연유나 설탕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설탕도 없는 집에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메이플 시럽이 있어 프렌치토스트 위에 듬뿍 뿌려 주었다.
우유와 함께 접시를 가지고 거실로 가 보니 재하가 예준이 쏘는 총에 맞아 쓰러지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꽤 실감 나게 하고 있어 이경은 픽 웃었다.
“예준아, 이거 먹자.”
이경이 예준을 불렀다.
장난감 총을 내려놓고 달려온 예준은 접시 앞에 앉아 프렌치토스트를 정신없이 먹었다. 재하랑 노느라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이었다.
“드릴까요?”
소파에 앉은 재하를 보며 이경이 물었다.
“맛없어.”
“네.”
고개를 젓는 재하를 쥐어박고 싶다고 생각하며 이경이 예준의 옆에 앉았다. 잘 먹는 예준의 모습에 뿌듯했다.
예준이 마치 하경 같았다. 하경은 스무 살이고, 예준은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되었지만 이경의 눈에 하경은 늘 예준의 또래처럼 보였다.
“우유도 먹으면서.”
허겁지겁 먹는 예준에게 이경이 우유를 내밀었다.
“빨리 먹고 또 놀아요.”
예준이 우유를 꿀꺽 마시고, 재하를 돌아보았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야 놀아 줄 거야.”
재하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네!”
급하게 먹던 예준은 재하의 말에 꼭꼭 씹어 먹기 시작했다.
이경은 작게 웃고는 재하에게 다가갔다.
“안 바쁘십니까?”
“바빠.”
“…….”
“바쁜데 차이경이 여기 있잖아.”
재하가 예준과 놀아 주느라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시키실 일이라도…….”
“시킬 일이야 많지. 차이경이 윤 변호사네 보모 하느라 바빠서 그렇지.”
“죄송합니다.”
재하가 뭐라 말을 하려던 찰나, 예준이 포크를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다 먹었어요!”
놀아 달라는 뜻이었다. 예준은 바닥에 내려 둔 장난감 총을 얼른 집어 들었다.
요란한 소리가 나는 총을 겨누자,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악당 같은 표정으로 예준에게 다가갔다.
귀찮을 법도 하건만 재하는 성실하게 예준과 놀아 주었다.
이경은 그 모습을 보며 서재하는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양아치에 또라이인데 이럴 때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고.
재하는 예준과 한참을 놀아 주었다. 그러다 예준이 지쳤는지, 소파에 앉아 있는 이경에게 다가와 옆에 얌전히 앉았다.
잠깐만 쉬는 거예요, 하던 예준은 어느새 이경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서류를 보고 있던 이경은 어느새 잠이 든 예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나 열심히 놀았는지 머리가 땀으로 축축했다.
“서 전무님, 제 트렌치코트 좀 주세요.”
이경이 소파 끄트머리에 있는 트렌치코트를 보며 재하에게 말했다.
감기라도 들까 걱정이 되어 뭐라도 덮어 주고 싶은데 아무것도 없었다. 트렌치코트라도 덮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예준이 무릎을 베고 있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건방져서 귀여워, 차이경.”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던 재하가 이경을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부탁드릴게요.”
“뻔뻔한 얼굴로 부탁하니까 더 귀엽네.”
자리에서 일어난 재하가 소파 끄트머리에 있는 트렌치코트를 들고 왔다. 이경이 손을 내밀었지만 재하는 건네는 대신 조심스럽게 예준에게 덮어 주었다.
다시 소파에 앉은 재하는 잠든 예준을 가만히 바라보다 중얼거리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살다 보니 꼬마가 부러울 때도 다 있고.”
그 목소리에 이경이 고개를 들어 재하를 보았다. 재하와 이경의 눈이 마주쳤다.
재하는 말없이 이경을 응시했고, 이경은 그의 눈빛에 사로잡혀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때였다. 현관 쪽에서 희미하게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경과 재하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성현이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왔다. 성현은 이경과 함께 있는 재하의 모습에 좀 놀란 얼굴이었지만 이내 표정을 지우고 인사를 했다.
“같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차이경 변호사가 보모로 투잡 뛴다고 해서 구경 왔지.”
재하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오셨어요? 재판은 어떻게 됐습니까?”
무릎을 베고 잠든 예준 때문에 이경은 일어나지 못하고 앉아서 성현을 맞았다.
성현은 이경에게 시선을 주며 대답했다.
“나쁘지 않아.”
이경에게 다가선 성현은 허리를 굽혀 예준을 안아 들었다. 이경이 얼른 트렌치코트를 걷어 주었다.
성현은 그대로 예준을 안고, 예준의 방으로 향했다.
“보모 끝났으니까 일어나.”
“팀장님께 인사는 드리고 가야죠.”
자리에서 일어난 재하를 올려다보며 이경이 대답했다.
“윤 변호사보다 나 우선시하라고 했지?”
“네, 물론 전 전무님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인사 정도는 하고 가야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의를 밥 말아 처먹었다?”
재하가 사나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예의가 아니라 성격을 밥 말아 처먹은 것 같지만 이경은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때, 성현이 방에서 나왔다.
“차 변호사 오늘 수고했어. 고마워.”
“아무리 파트너 변호사라고 해도 개인적인 일에 주니어 부려 먹는 건 너무 꼰대 같지 않나?”
이경이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재하가 빈정거리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