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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19화 (19/83)

19화

“차이경, 왜 이렇게 개방적이야?”

재하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안 할 겁니다.”

“치사하게.”

이경의 말에 재하가 술을 마셨다.

“제가 서 전무님 사람이냐고 물으셨죠?”

“넌 아니라고 했고.”

“정정하겠습니다.”

이경이 재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정정을 하시겠다?”

“네. 저 서 전무님 사람 하겠습니다. 여자 말고, 서 전무님 사람이요.”

“야망?”

재하가 한쪽 입가를 올렸다. 삐뚜름한 입술 속에 어떤 감정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 전무님, 옆에서 모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나한테 줄 서겠다? 윤성현 변호사한테 뭐 들었어?”

“송하에 오래 남고 싶습니다.”

송하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방법을 계속 생각했다. 택시에 타서 이곳으로 올 때도, 재하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이경은 송하에 오래 남을 방법을 고민했다.

문득 가장 분명하고 정확한 방법이 눈앞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김오범 대표에게 돈 주는 사람, 서재하. 서재하를 붙잡으면 송하에 오래 남을 수 있다.

“송하에 오래 남고 싶어?”

“네.”

“나랑 자면 송하에 뼈를 묻을 수 있게 해 줄게.”

말을 내뱉은 재하는 이경의 얼굴을 탐색하듯 살폈다.

“정말 그걸 원하세요?”

“나랑 자려고?”

“여자 말고 서 전무님 사람,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경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랬지.”

“그러니 저를 그렇게 하찮게 쓰지 말아 주십시오.”

이경은 재하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재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재하가 이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이경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단, 태도 분명히 해. 너 윤성현 사람 아니고, 서재하 사람이야. 윤성현보다 내가 우선이야.”

“…….”

“왜 대답이 없어?”

재하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네. 서 전무님 우선으로 하겠습니다.”

“내가 윤 변호사한테 말하지 말라는 건 말하지 마.”

“네.”

“어기면.”

“…….”

“차이경 가만 안 둬.”

경고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을 꽤나 부드러운 투로 하고는 재하는 잔 안에 있는 술을 모두 비웠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려다줄게. 타고 가.”

재하가 이경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재하는 성큼성큼 룸을 빠져나갔다.

재하를 따라 술집을 나가 보니, 앞에 차가 서 있었다. 운전기사가 뒷좌석 문을 바로 열어 주었다. 이경은 재하가 타는 것을 보고, 얼른 조수석으로 향했다.

“차 변호사.”

재하가 조수석으로 향하는 이경을 불렀다.

“옆에 타.”

“네.”

이경은 대답을 하고 재하의 옆자리에 탔다.

재하는 한껏 흐트러진 자세로 거의 눕듯이 시트에 앉아 눈을 감았다.

“송하부터 가.”

재하는 눈을 감은 채로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경은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송하에 남아 있을 수만 있다면 서재하 뒤치다꺼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따까리가 뭐 어때서.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넥타이.”

재하가 입을 열었다.

이경의 고개가 재하에게로 돌아갔다.

“네.”

“풀어.”

이미 반쯤은 풀려 있는 넥타이였다. 서재하가 넥타이 제대로 하고 있는 꼴을 이경은 보지 못했다.

이경은 재하에게 몸을 기울였다. 넥타이에 손을 대자, 재하가 바로 눈을 떴다. 재하와 눈이 마주치자 넥타이를 잡은 이경의 손에 힘이 풀렸다.

이경의 손이 툭 떨어지려는 찰나, 재하가 잡아채 다시 넥타이 위에 올려놓았다. 이경의 손에 재하의 가슴 근육이 닿았다.

“계속해.”

재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경의 귓가에 울렸다.

이경은 말없이 재하의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이경의 시선은 넥타이에 가 있었지만 재하의 시선은 집요하게 이경의 얼굴을 좇았다.

이경은 재하의 시선을 온전히 다 느끼며 넥타이를 풀었다. 넥타이를 푸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이경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넥타이를 돌돌 말아 재하에게 내밀었다.

“넣어.”

재하가 고개를 까딱였다.

주머니에 넣으라는 소리인 걸 바로 알아듣고 이경이 재하의 재킷 주머니에 넥타이를 넣으려고 했다.

“거기 말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하가 명령하듯 말했다.

살짝 내리깐 재하의 눈과 마주쳤다.

이경은 그의 깊은 눈을 바라보았다. 재하의 눈빛이 이경의 시선을 얽어맸다. 미지의 공간 같은 그의 눈빛이 버거워 이경은 바로 시선을 피했다.

재킷 주머니가 아니라면 바지 주머니밖에 없었다. 이경은 재하의 바지 주머니에 넥타이를 집어넣으려다가 멈칫했다.

선명하게 드러난 재하의 몸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그 부분이 정확하게 인지되었다.

“참아.”

“…….”

“먹고 싶어도.”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가 이경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

“여자 안 할 거면 참는 게 맞지.”

정확히 그 말이 누구를 향한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차이경인지 서재하인지.

재하는 이경이 쥐고 있는 넥타이를 빼앗듯 가져갔다. 그 바람에 손과 손이 찰나 동안 맞닿았다.

찌릿한 느낌은 애써 정전기로 치부하며 이경이 몰래 손을 허리춤에 문질렀다. 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

이경은 송하에 붙어 있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퇴근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해야 할 일들은 늘어 갔지만 이경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건설 팀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성현이 맡은 재판에 이경 외에도 세 명의 변호사가 함께 법정으로 향했다. 변호사 다섯이 붙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재판이었다.

막 법정으로 들어가려는데 성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성현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한껏 예의를 차린 성현의 말투에 이경은 힐끔 그를 보았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보면 권 회장님은 아니고. 누구지? 궁금해하는데 그는 금방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연락이 안 되나요? ……네, 제가 가겠습니다.”

성현의 말에 함께 온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재판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가긴 어디를 가.

“어디 가셔야 합니까?”

성현이 전화를 끊자마자 장 변호사가 물었다.

“아이가 아프다는데 아이 엄마가 연락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어린이집에서는 빨리 데려가라고 하는데.”

성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럼.”

변호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이경이 얼른 손을 들었다. 누군가가 가야 한다면 본인이라고 이경은 생각했다.

“어어, 그래. 차 변호사가 가면 되겠네.”

장 변호사가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 변호사, 부탁 좀 할게. 어린이집 주소는 메시지로 보내 줄게. 아이 이름은 윤예준.”

“네, 알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이경은 성현의 말에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법원을 빠져나갔다. 택시를 타자마자 성현이 보내 준 어린이집 주소를 택시 기사에게 불러 주었다.

재판에 참석하지 못해 아쉽기는 했지만, 참석한다고 해서 이경이 딱히 할 건 없었다. 이렇게라도 성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기뻤다.

택시가 어린이집 앞에 섰다. 이경은 택시기사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어린이집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예준이 때문에 왔는데요. 변호사 차이경입니다.”

이경이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아, 예준이 아버님께 말씀 들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어린이집 선생님은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어깨를 축 늘어트린 남자아이가 선생님의 손을 잡고 터덜터덜 걸어왔다.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이경을 보자 울먹였다.

낯설어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이경은 입술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안녕, 예준아. 차이경이라고 해. 아빠가 보내셔서 왔어.”

무릎을 굽혀 예준과 눈높이를 맞춘 이경이 인사를 건넸다.

“우리 아빠는요?”

예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아빠는 방금 재판 들어가셨어. 끝나면 바로 오실 거야.”

“네, 누나.”

아빠가 바로 온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예준은 방긋 웃었다.

이경은 예준을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진료를 보고 나온 이경은 예준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거짓말하면 아빠가 놀라시잖아.”

예준의 병명은 꾀병이었다. 의사 선생님도 아무 이상 없다고 했고, 예준도 거짓말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헤헤.”

예준이 이경을 올려다보며 개구진 얼굴로 웃었다.

이경은 예준을 데리고 성현의 집으로 이동했다.

성현이 알려 준 비밀번호로 문을 열자, 예준이 신발을 벗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아 마트에서 산 과자와 젤리를 뜯는 예준을 보며 이경이 입을 열었다.

“예준아, 손부터 씻어야지.”

“네.”

예준은 과자와 젤리를 뜯다 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경은 소파 위에 예준의 가방과 외투를 올려놓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참 성현다운 집이었다. 있을 것만 딱 있는 깔끔한 집.

리모컨은 반듯하게 소파 옆 협탁에 놓여 있고 티슈마저도 각이 잡힌 느낌이라 이경은 픽 웃음이 났다.

“손 다 씻었어요.”

“잘했어.”

“이제 먹어도 돼요?”

“응.”

고개를 끄덕인 이경 역시 조금 전 예준이 나온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다.

과자와 젤리를 먹는 예준의 옆에 앉아 이경이 성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예준이 꾀병이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집에 잘 도착했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이경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무릎에 올려 두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하는 틈틈이 이경은 예준을 살폈다. 예준은 텔레비전을 보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 장난감을 가지고 나왔다.

“이거 우리 아빠가 사 준 거예요.”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예준이 이경을 보며 말했다.

“와, 멋지다.”

“헤헤.”

예준은 이경의 칭찬에 웃으며 다시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이경과 눈을 맞추었다.

“난 아빠랑 살고 싶어요.”

“응?”

갑작스러운 예준의 고백에 이경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성현이 예준과 함께 살지 않는다는 건 집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성현의 생활 패턴만 봐도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 같지는 않았다.

“예준이는 지금 누구랑 사는데?”

이경이 예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엄마랑. ……근데 난 아빠가 더 좋아요.”

예준이 이경의 시선을 피하며 자동차를 손으로 밀었다.

“예준이는 아빠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이경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든 예준은 헤헤 웃고는 테이블로 몸을 돌려 과자를 집어 먹었다. 과자를 먹는 아이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여 이경은 마음이 쓰였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이경은 성현인가 싶어 얼른 핸드폰을 살폈다.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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