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대체 언제부터 서재하의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재하의 분위기가 진지했다. 이경은 가만히 재하를 보았다.
“대답 안 해? 너, 내 사람이잖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서 전무님 사람인지.”
“나, 위해서 일하잖아. 진심을 다해 성의껏.”
“그건.”
“내 변호인이라며. 나한테 맞춤 서비스한다며?”
“…….”
“네 사람이다 말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재하가 버럭 성질을 냈다.
“전무님.”
“내려.”
“…….”
“내리라고, 차이경.”
재하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경은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자마자 재하의 차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차 뒷모습만 봐도 알 것 같다. 서재하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이경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이게 이렇게 화가 날 일이야? 어이없어. 화를 삭이며 이경이 로펌 건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앞에 서 있는 성현과 마주쳤다. 이경은 얼른 그에게 인사를 했다.
“지금 퇴근하십니까?”
“서 전무 왔었다며?”
“네.”
이경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닙니다.”
서재하 이상한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경은 이 정도는 별일 없는 수준이라 여겼다.
성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어느새 닫힌 엘리베이터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팀장님.”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이경이 용기를 내어 성현을 불렀다.
“응.”
성현이 엘리베이터 버튼에서 손을 내리고 이경을 돌아보았다.
“서 전무님 사생활, 왜 김 실장님께 따로 보고드리는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서 전무가 알아 오래?”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식사 자리에서 봤을 때는 관계가 좀 묘하게 느껴져서요. 회장님이나 부회장님이나. 서 전무님도 그렇고.”
이경이 변명하듯 조금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뭐가 궁금한지 알겠어. 회장님이 허락하신 일이야. 부회장님한테 서 전무 얘기, 해도 좋다고.”
이경의 말에 성현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바로 원하는 답을 해 주었다.
“아, 그럼 제가 회장님께도 보고 올릴까요?”
“김 실장이 진짜 누구 사람일 것 같아?”
성현이 피식 웃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아.”
이경은 단번에 상황이 파악되었다. 김 실장이 전해도 될 만한 얘기만 부회장에게 전달한다는 의미였다. 사실상 이경은 권 회장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단 말이다.
“그 집 복잡하지?”
성현은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으로 손을 뻗었다.
“네.”
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처럼만 해. 차 변호사, 잘하고 있으니까.”
성현이 엘리베이터에 타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경은 성현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잘하고 있다는 그 말 한마디에 가슴 가득 뿌듯함이 들어찼다.
“내일 봐.”
빙긋 지은 미소와 함께 성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경은 닫힌 엘리베이터를 한동안 쳐다보며 발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이경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온 이경은 나현과 눈이 마주쳤다.
“차 변호사, 좋은 일 있었어요? 서 전무랑 나가서 걱정했더니.”
“별일 없었어요.”
나현의 물음에 대답을 하고 이경은 책상 앞에 앉았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왠지 즐겁게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하고 있다는 성현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를 맴돌며 이경에게 힘을 주었다.
이경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11시 무렵, 재하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이경은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작게 한숨을 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차이…….”
—주소 보내 줄 테니까 거기로 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재하가 끊었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도 뚝 끊어 버렸다.
양아치. 이경은 인상을 찡그리며 애꿎은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름만 봐도 고급 술집이었다.
일 다 못 했는데. 또 왔다 갔다 하며 시간 잡아먹을 생각을 하자 짜증이 왈칵 났다.
하지만 금방 짜증을 가라앉혔다. 잘하고 있다는 성현의 말이 귓가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경은 사무실로 돌아가 가방과 텀블러를 챙겨 나왔다. 재하에게 가기 전 텀블러를 씻을 생각이었다.
휴게실로 향하는 이경의 걸음을 들려오는 말소리가 붙잡았다.
“차이경, 눈물 날 정도로 열심히 해서 좀 짠하네.”
흘러나온 자신의 이름에 이경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짠하기는. 서 전무 따까리 하라고 데려왔더니만 슬금슬금 우리 팀에 발 걸치고.”
“윤 변호사님이 짠해서 끼워 줬나 보지. 계약 1년밖에 안 했다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건설 팀 변호사들이었다.
“수상해. 차 변호사한테 관심 있냐?”
“관심은! 내일모레가 우리 시아 돌이다. 큰일 날 소리를 해.”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에 이경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대로 로펌을 빠져나온 이경은 잔뜩 가라앉은 기분으로 택시를 탔다.
어느새 재하가 오라는 술집에 도착했다. 술집 안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서재하 이름을 대자, 곧바로 이경을 어느 룸으로 데려갔다.
안으로 들어간 이경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언젠가 호텔에서 보았던 하준오였다.
이경은 재하와 준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바로 각서를 꺼내 준오의 앞에 놓았다. 준오는 각서를 받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작작 좀 해라, 미친놈아. 언제까지 이럴 거야.”
준오가 각서를 말아 쥐고 재하를 팡팡 때렸다.
“차이경, 가져가. 아쉬우면 네 이름 쓰든가.”
재하가 준오의 손에 있는 각서를 빼앗아 이경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경은 재하가 내민 각서를 받아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쉽지는 않아?”
“네, 별로.”
이경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준오에게 고개를 돌려 꾸벅 인사를 했다. 무언가 오해를 한 것 같으니 사과의 의미였다.
“친구예요. 저번에는 재하 장난에 장단 맞춰 준 거고. 재하, 차이경 변호사가 생각하는 것만큼 문란한 놈은 아니에요.”
준오가 웃음기 있는 얼굴로 말했다.
“네.”
그래, 적어도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자는 인간은 아닌 것 같다. 이경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서 있지 말고.”
재하가 고갯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시키실 일 없으면 들어가 보겠습니다.”
“있어. 시킬 일이 왜 없어.”
재하가 어서 앉으라는 듯 말했다.
“그럼 난, 간다. 모임에 얼굴 좀 비추고, 인마.”
“잘생긴 얼굴 봐서 뭐 해?”
자리에서 일어난 준오를 보며 재하가 말했다.
“잘생겼으니까 보고 싶지.”
준오가 재하의 어깨를 툭 치고 이경에게는 눈인사를 했다. 이경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자 준오는 그대로 룸을 빠져나갔다.
“앉으라니까? 몇 번 말해.”
성질을 부리기 직전의 얼굴이라 이경은 얼른 자리에 앉았다. 재하가 앉으라던 옆자리가 아닌 준오가 앉아 있던 맞은편 자리였다.
“차이경, 말 참 잘 들어.”
재하는 술잔에 술을 따라 이경에게 건네주었다.
“아직 업무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안 마시겠다고?”
“네.”
이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하가 술잔을 본인의 입에 바로 털어 넣었다.
“알아봤어?”
“네, 알아봤습니다.”
성격 한번 급하다. 알아보겠다고 한 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거 물으려고 오라고 한 모양이다.
“진짜?”
의외라는 듯 재하가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네.”
“능력 있네, 차이경. 아직 못 알아냈을 줄 알았는데.”
재하가 픽 웃었다.
그럼 왜 부른 거냐는 말을 삼키고, 이경은 성현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회장님도 알고 계신답니다. 김 실장님께 서 전무님 얘기 들어가는 거.”
“우리 영감님이 안다고?”
흐트러져 있던 자세를 바로 세운 재하가 이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김 실장님이 진짜 누구 사람일 것 같으십니까?”
이경은 성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건방 떨지 말고, 차이경. 윤성현이 그렇게 말했어?”
“흠. 네.”
재하의 말에 이경은 헛기침을 했다.
“김 실장이 할아버지 사람이란 증거는?”
“…….”
“네가 멍청하게 윤성현한테 놀아났는지 아닌지 어떻게 믿냐고.”
“찾아오겠습니다.”
“됐어. 내가 찾아.”
“네.”
“너 윤성현한테 내가 알아 오라고 시켰다고 말했어?”
“아닙니다.”
재하의 물음에 이경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래, 차이경이 그렇게 멍청할 리가 없지.”
재하는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대며 술을 마셨다.
“……이제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차이경.”
이경의 물음에 재하가 그녀를 빤히 보았다. 이름을 불러 놓고 말없이 쳐다만 보는 재하를 이경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나랑 잘래?”
툭 던져진 말에 이경은 잠시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재하의 말이 가슴에 박히고 테이블 아래의 손을 말아 쥐었다.
“아니요.”
이경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표정 역시 덤덤했다.
재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왜 차이경만 보면 머리 한쪽이 그쪽으로밖에 안 돌아가지? 넌 알아? 내가 왜 이러는지?”
재하 역시 이경만큼이나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너한테 욕정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치고는 꽤나 담백한 말투였다.
“글쎄요. 제가 서 전무님 타입인가 보죠.”
“건방은.”
재하는 한쪽 입가를 올렸다.
달그락, 재하가 돌리는 술잔에서 얼음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안의 시간이 잠시 정지된 것만 같다. 이경은 아랫배가 조여 와 몸을 곧추세웠다.
“입이나 한번 맞춰 볼까.”
재하는 무심한 말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럼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아실 것 같습니까?”
“한번 해 주게?”
재하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못 할 것도 없죠. 고작 입 한번 맞추는 거.”
이경이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