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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17화 (17/83)

17화

건설 팀 회의를 끝내고 이경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온 이경은 자신의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문을 등지고 있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근데 저 넓은 어깨, 왠지 익숙하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동료 변호사와 눈이 마주치자, 동료 변호사가 입 모양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서전또.

아, 또라이 서재하구나. 이경은 작게 숨을 내쉬고는 재하에게 다가갔다.

“서 전무님?”

이경이 다가가자, 재하가 의자를 빙글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녕, 차 변호사. 출세와 성공에 눈이 먼 우리 차 변호사, 오늘도 야망이 드글드글한 얼굴이네?”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을 저따위로 하는 걸까. 이경은 입술을 살짝 끌어 올렸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심심해서.”

“안 바쁘십니까?”

평일 오후, 한창 바쁠 시간인데 왜 여기 있는 거야. 이경은 존재 자체가 귀찮은 재하를 보며 물었다.

“안 바빠. 넌?”

재하가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이경을 보며 물었다.

이경이 책상 위에 벽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바쁩니다.”

“저녁 먹자.”

“5시밖에 안 됐는데요?”

“가면 6시일걸?”

어디를 가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려. 이경은 조용히 치솟는 화를 억누르며 입가를 다시 끌어 올렸다.

“안 갑니다.”

“왜?”

재하는 그렇게 이상한 말은 없다는 듯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 지나치게 얄미워 이경의 입가가 주르륵 내려왔다. 이경은 머릿속으로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을 그려 보았다.

회의록을 작성해서 회의에 참석 못 한 변호사님들에게 돌려야 했고, 강 변호사님이 맡긴 리서치와 프로보노 일환으로 맡은 소액 사기 사건 재판도 준비해야 했다.

할 일이 태산이라 지금부터 일을 해도 새벽 2시나 되어야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였다.

“엄청 바쁩니다.”

“그래 보여.”

재하가 이경의 책상에 가득 쌓여 있는 서류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식사 제안은 감사하지만 다음번에 했으면 좋겠습니다.”

“넌 밥 먹기 싫다고?”

“네.”

이경은 바로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웬일로 순순히 대답이야? 이경은 너무 쉽게 물러나는 재하를 의아한 얼굴로 보았다.

“그럼 나 먹을 동안 넌 구경만 해. 따라 나와.”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또라이. 양아치. 이경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재하는 이경의 얼굴을 보며 픽 웃고는 성큼성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사무실 문이 쾅 닫히고, 동료 변호사들이 책상에서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와, 저게 말로만 듣던 서전또구나.”

주나현이 감탄하듯 말했다.

이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서류를 챙겼다. 사무실을 나가는 이경의 뒷모습을 동료 변호사들이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온 이경은 복도에 서 있는 재하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나왔네?”

“저 돈 주시는 분에게 돈을 주시는 분의 말을 거역할 깜냥은 못 돼서요.”

“난 차이경이 이럴 때마다 좋아 미치겠어.”

재하는 씩 웃고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난 네가 이럴 때마다 죽이고 싶어 미치겠어. 이경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재하를 쫓아갔다.

재하는 정말로 죽이고 싶게 남양주까지 이경을 끌고 왔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이며 이경은 앞에 놓인 계란프라이가 올라간 수제 버거를 노려보았다.

“밥 아니고 버거니까 먹어. 너 버거 좋아하잖아.”

맞은편 재하는 팔짱을 낀 채 이경을 보았다. 자세도 불량하고, 표정도 불량하고. 뇌는 더 불량할 것 같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뭘 좋아해?”

“팥죽이요.”

“팥죽? 일어나.”

대답을 하자,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경이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수제 버거에는 아직 손도 안 댔는데 또 어디를 가겠다는 거야.

“팥죽 먹으러 가자고.”

이경이 꼼짝을 하지 않자, 재하가 말을 이었다.

“됐습니다. 언제 또 가서…….”

먹냐고. 이경은 뒷말은 삼키고 나이프와 포크를 얼른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른 수제 버거를 입에 욱여넣었다.

이경이 버거를 먹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재하가 자리에 다시 앉았다.

“차이경, 한강도 보면서 먹어.”

재하가 창으로 고갯짓을 했다.

이경과 재하의 자리는 통유리창 바로 옆자리였다. 한강이 보여야 했지만 해가 진 바람에 그냥 깜깜하기만 했다.

“어두운데요?”

이경이 힐끔 창을 보며 대꾸했다.

“차이경 시커먼 속만큼 어둡긴 하네.”

“…….”

어이가 아주 많이 없다. 누구 속이 시커멓다는 거야. 대꾸 없이 이경은 버거만 열심히 먹었다.

“차이경.”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재하가 이경을 불렀다.

“네.”

이경은 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야망인 건 봐줄 수 있어. 근데 사랑은 안 돼.”

재하의 눈은 여전히 어두컴컴한 세상 속에 향해 있다.

이경의 시선이 창에 비친 재하의 얼굴에 닿았다. 야망은 뭐고, 사랑은 또 뭐야. 아리송한 재하의 말에 이경은 살짝 콧잔등을 찌푸렸다.

“윤 변호사 좋아하지 말라고.”

재하의 시선이 드디어 어두운 세상에서 이경에게로 넘어왔다.

“……제가 언제요.”

재하의 말에 이경은 몹시 당황했지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귀만 조금 붉어졌을 뿐.

“티 나.”

“존경하는 겁니다.”

“존경 같은 소리 하네.”

재하는 못마땅한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아닙니다.”

“그래, 아니어야지. 윤 변, 나쁜 새끼야.”

“나쁜 새끼라니요.”

성현을 욕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 이경이 정색했다.

“표정 봐라. 얼굴 안 풀어?”

이경은 재하를 쏘아보다 고개를 내리고 다시 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저런 또라이랑은 최대한 말 섞지 말아야지, 다짐하는데 재하가 말을 이었다.

“난 그 새끼가 싫어.”

“말씀 가려 해 주세요.”

성현이 이 새끼, 저 새끼, 소리 들을 사람인가. 이경은 기분이 확 상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말 가려 해라 말라야.”

“아무것도 아니죠.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한 눈빛이 아니잖아, 차이경은.”

재하가 이경의 턱을 붙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과 얼굴이 가까웠다.

이경은 재하에게 턱이 붙잡힌 상태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경의 긴 속눈썹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불쑥, 재하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과 입술이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이경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 순간, 재하의 입술이 이경의 귀로 향했다.

“계속 그렇게 귀엽게 굴어. 예뻐해 줄 테니까.”

재하의 손이 이경의 턱에서 떨어졌다. 재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이경의 얼굴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왜 싫어하시는지 물어도 됩니까?”

“가서 일러바치게?”

“……그냥 궁금한 것뿐입니다.”

“서 부회장이랑 똑같잖아.”

심드렁한 말투였다. 말에 품은 뜻은 결코 가볍지 않았는데, 말투와 표정만큼은 가벼웠다. 그래서 이경은 재하가 조금은 짠하게 느껴졌다.

“야망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랑 결혼한 게 너무 똑같아. 야망 가득한 놈들이 난 그렇게 역겹더라.”

“저도 역겨우시겠네요.”

“말했잖아. 차이경 야망은 봐줄 수 있다고.”

이경의 말에 재하가 피식 웃었다.

“네.”

“반응이 뭐 이래. 좀 더 감격해도 돼.”

재하는 못마땅한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감격은 무슨. 이경은 재하의 말을 무시하고 콜라를 마셨다.

“윤 변, 네가 봤을 때는 진짜 회장님 사람 같아?”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의외라고 생각하며 이경이 되물었다.

“아니니까 서 부회장한테 나에 관련된 보고 하는 거잖아.”

김 실장 얘기구나. 이경은 재하의 눈을 보았다. 확신에 찬 눈빛에 시치미를 떼는 것도 더는 소용없겠다 싶었다.

“아버님이시잖아요. 어떤 과거가 있건. 부회장님은 서 전무님이 걱정되셨을 겁니다.”

“순진한 구석도 있네? 귀엽게.”

재하가 픽 웃으며 이경을 보았다.

“…….”

“넌 그 사람을 몰라. 걱정이 아니라 서재하 골로 보낼 데이터 모으는 중이야. 그 사람한테 아들은 서주환밖에 없어.”

그 말을 하는 재하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았다. 상처받은 얼굴이었는데, 아마 본인은 그게 상처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왜 그런 행동을 하십니까?”

상처받은 듯한 재하의 얼굴을 보며 이경이 물었다.

서 부회장이 그런 의미로 서재하의 사생활을 보고받는다면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경은 의아한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여자들이랑 놀아나는 거?”

“네.”

“서 부회장이랑 똑같이 행동하는 거야. 그 양반 여자 좋아하거든.”

재하가 한쪽 입가를 삐딱하게 올렸다.

변호사들에게 동침 각서를 쓰게 하는 이유가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변호사를 조롱하는 게 아니라 서 부회장을 조롱하는 중이었나 보다.

“제가 부회장님께 따로 보고해야 하는 이유, 팀장님께 여쭈겠습니다.”

제 아버지를 조롱 중인 남자가 마음에 걸려 이경이 입을 열었다.

“윤 변이 순순히 말해 줄 것 같아?”

“그럼 알아내겠습니다.”

“예쁜 짓 하네, 차 변호사.”

재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그러려면 최대한 빨리 로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예쁜 짓이 3초를 못 가서 문제지.”

이경의 말에 곧바로 짜증스러운 얼굴이 된 재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도 안 댄 버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안 드십니까?”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난 재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로펌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드시는 동안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됐어. 일어나, 가게.”

재하는 성큼성큼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경은 버려진 버거를 몹시 아까워하며 재하를 따라 나갔다.

얼마 후, 재하의 차가 로펌 앞에 멈추었다. 안전벨트를 풀며 들어가겠다는 인사를 하려는데, 재하가 입을 열었다.

“윤성현 좋아할 생각은 하지도 마.”

“네?”

“기분 나빠.”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경은 재하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조수석 손잡이를 잡았다.

“차이경, 대답하고 가.”

재하가 이경의 팔을 잡았다.

하는 수 없이 이경이 재하를 돌아보았다.

“무슨 대답이요?”

“윤성현 좋아하지 말라고.”

“윤 변호사님 존경하는 거라고 말씀드렸고, 설사 제가 윤 변호사님을 좋아한다고 해도 서 전무님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경은 딱 잘라 말했다.

“왜 상관이 없어.”

“무슨 상관이 있으신데요.”

“너 내 사람이잖아.”

재하가 진지한 눈빛으로 이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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