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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16화 (16/83)

16화

권명섭 회장이 상석에 앉자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정정해 보이는 명섭은 얼굴에 검버섯 하나가 없었다.

“윤 변호사, 차 변호사, 편하게 식사해.”

명섭이 성현과 이경을 챙겼다.

명섭의 태도에 이경은 긴장이 조금 풀어진 얼굴로 식사를 시작했다.

처음 먹어 보는 도미찜이 입에 잘 맞았다. 파김치는 여태껏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있었고, 갈비찜은 고기가 부드럽게 녹았다.

“차 변호사, 입에 잘 맞나?”

“네, 회장님. 맛있습니다.”

명섭의 물음에 이경은 얼른 입가를 닦고 대답했다.

“젊은 사람들은 많이 먹어야 해. 그래야 힘을 쓰지.”

“주환아, 할아버님 말씀 들었지? 푹푹 좀 먹어.”

명섭의 말에 은혜가 옆에 앉은 주환을 보며 말했다.

“그래, 주환이. 밥 많이 먹어라.”

명섭이 주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네, 회장님.”

“할아버님이라고 해야지.”

주환의 대답에 은혜가 그를 툭툭 쳤다.

“그래도 서주환이 눈치는 있어.”

재하가 입을 열었다.

“서재하.”

서석호 부회장이 엄한 말투로 재하를 불렀다. 석호는 아까부터 표정이 불만스러워 보였다.

재하는 석호를 쓱 한 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 식구 중에 서주환이 제일 눈치가 빨라서 칭찬한 건데, 불만이세요?”

“손님들 앞에 두고 잘하는 짓이다.”

“윤 변호사는 익숙할 거고, 차이경도 익숙해져. 이 집구석 개 같은 집구석이니까.”

재하가 옆에 앉은 성현과 이경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재하, 이놈의 자식. 할아버지 손님이야. 예의 갖춰. 그리고 서 부회장, 내 손자야.”

명섭은 재하를 꾸짖고는 석호에게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아들 아니고, 내 손자라는 분명한 뜻에 딸을 배신한 사위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경은 힐끔 은혜를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는 밥을 먹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석호는 명섭에게 사과를 하고는 성현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곱지가 않았다. 굳은 얼굴로 석호가 입을 열었다.

“윤 변, 좀 부드럽게 처리할 수는 없었나? 성 회장 내 오랜 지기야. 이 일로 내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아나?”

경호가 세연의 남자 친구였다는 보도가 나가자 청해 그룹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해왔다.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항의에 그쳤지만 성 회장 쪽은 제대로 당했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성 회장은 욕을 안 먹어도 애지중지하는 딸은 욕을 거하게 얻어먹었으니.

청해 그룹 쪽에서는 곧바로 세연과 경호가 연인 관계가 아니라고 반박 기사를 냈다. 하지만 멍청한 경호가 자신의 SNS에 세연과의 사진을 공개하며 사랑한다는 글을 올렸다.

WR 그룹 측은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었다.

“죄송합니다.”

성현의 얼굴은 덤덤했지만 말투는 깍듯했다.

슬쩍, 재하가 성현의 표정을 살피는 게 보였다. 그러다 이경은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재하의 시선이 이경을 놓아주지 않아 이경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WR 후계자가 중요하지 친구가 뭐 중요해.”

명섭이 한마디를 했다.

그 말에 석호는 부루퉁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럼요. 재하가 제일 중요하죠.”

은혜가 얼른 석호 대신 입을 열었다.

“부군은 아들 새끼 별로 안 중요할걸요?”

재하가 껄렁한 말투로 말했다.

“서재하!”

석호는 화가 난 얼굴로 재하를 부르다 힐끔 명섭의 눈치를 보았다.

“손님 불러다 놓고. 윤 변호사, 차 변호사 편히 먹게.”

명섭은 편히 먹으라고 했지만 이경은 벌써 체한 것 같았다. 집에 가서 손을 좀 따야겠다고 생각하며 앞에 놓인 물김치를 떠먹었다.

“차 변호사는 결혼했어요?”

분위기를 풀고 싶었는지 은혜가 물었다.

“아직 안 했습니다.”

이경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남자 친구는 있고요?”

“남자 친구도 없습니다.”

“왜 없을까? 이렇게 예쁜데.”

불륜을 저지르고, 본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여자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은혜는 다정한 얼굴이었다.

“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차이경, 연애하지 말고 계속 일에만 집중해. 환갑까지.”

이경의 말을 재하가 바로 받았다.

“에라, 이놈아.”

명섭은 재하의 말을 어이없어하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재하를 참 예뻐하는 듯했다.

“윤 변호사는 재혼 안 하나?”

이번에는 성현으로 화제가 넘어갔다. 석호의 질문에 성현은 작게 웃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숨겨 둔 여자 없어? 야망으로 결혼한 남자들은 보통 여자 하나쯤은 숨겨 두고 있잖아.”

말은 성현을 향한 것이었지만 재하의 시선은 석호에게 닿아 있었다. 석호와 은혜, 들으라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식탁 분위기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서재하의 능력에 감탄하며 시선을 든 이경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주환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주환은 미안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이경은 괜찮다는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입가를 끌어 올렸다.

“없습니다. 저도 차 변호사처럼 당분간은 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성현은 재하의 말이 석호와는 상관없는 말이라는 듯 얼른 대답했다.

“이렇게 보니 윤 변호사님이랑 차 변호사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은혜는 눈물이 날 정도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이경은 은혜의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성현과 잘 어울린다는 소리에 마음이 술렁였다.

성현이 불쾌해하면 어쩌나 싶어 얼른 그의 얼굴을 살폈다. 성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곤란해하는 미소도 아니었고, 기분 나빠 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마음이 놓인 이경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차이경, 김칫국 마시지 말고 밥이나 먹어.”

차가운 재하의 음성에 이경의 얼굴에서 빠르게 미소가 사라졌다.

나쁜……. 이경은 욕을 삼키며 물김치를 떠먹었다.

사람이 김칫국 좀 마실 수 있지. 이경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 막히는 식사 시간이 끝나고, 명섭은 이경과 성현을 따로 별채로 불러 차를 대접했다.

별채에서는 그나마 분위기가 편했다. 아마 서석호 회장 내외와 주환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명섭의 옆에 있는 재하는 양아치가 아니라 그냥 버릇이 좀 없는 손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재하를 보는 명섭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엄마와 딸을 잃은 두 사람이 그 긴 시간 동안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준 모양이었다.

“내가 이놈 사람 만들어 줄 여자면 두 팔 벌려 환영이야.”

명섭이 재하를 보며 말했다.

이번 일로 재하와 세연의 약혼이 깨졌다. 처음부터 사랑으로 맺어진 약혼이 아니라 그런지 재하는 아무런 타격이 없어 보였다.

“재하 이 녀석이 깡패라고 소문 파다하게 퍼져서 아무도 딸을 안 주려고 해.”

명섭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별걱정을 다 한다, 영감님.”

재하는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차 변호사, 여자가 봤을 때 이놈 장가갈 수 있겠어? 여자들은 개차반 싫어하지?”

명섭이 배를 먹으며 이경에게 물었다.

이경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손자를 예뻐하긴 하지만 손자를 보는 눈은 참 객관적이었다.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경은 입을 열었다.

재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따라간 이경은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미묘한 재하의 표정에 이경은 입가를 끌어 올렸다.

“왜 그렇게 생각해?”

흡사 시비를 거는 말투였다. 재하는 이경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서 전무님이시잖아요.”

“내가 돈이 많아서? 차이경 돈 좋아하잖아.”

“네, 저는 돈 좋아하지만 얼굴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많습니다.”

이경이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하하, 이놈이 나 젊었을 때를 닮아서 인물이 잘나긴 했지.”

이경의 말에 명섭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 나 사람 만들어 줄 여자면 누구든 괜찮다고 했지? 여자 배경 상관없이.”

“상관없지, 그럼.”

명섭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하의 시선이 이경에게 닿았다.

뭐 어쩌라고. 이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실실 웃는 게 수상해 보여 괜히 경계하게 만든다.

“상관없대, 차이경.”

“네에.”

진짜 뭐 어쩌라고. 이경은 재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끝을 길게 끌었다.

“회장님, 저희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성현이 명섭을 보며 말했다.

“내가 바쁜 사람들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경은 성현을 따라 얼른 명섭에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별채를 빠져나왔다. 재하는 슬렁슬렁 두 사람을 대문 밖까지 따라왔다.

“배웅은 아니고.”

인사를 하려고 몸을 돌리자, 재하가 변명하듯 말했다.

이경은 웃음을 삼키며 “네.” 대답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현이 재하에게 인사를 하자, 이경도 얼른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차이경은 내 차 타고 가.”

성현을 따라가려는데, 재하가 이경을 붙잡았다.

“저요? 저 로펌 들어가 봐야 합니다.”

“이동하는 중에 차 변호사랑 업무 얘기 나눌 게 있습니다.”

성현이 재하를 보며 말했다.

“무슨 업무? 얘가 나 뒤치다꺼리하는 거 말고 일이 또 있어?”

재하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쁜 새……. 이경은 기분이 상했다. 서재하 뒤치다꺼리하는 일 말고도 수없이 많은 일을 한다.

“UAE 건이요.”

“UAE요? 그거 저도 합니까?”

성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경이 재하의 팔을 뿌리치고 성현에게 달려갔다.

성현은 WR 그룹 전담 팀 팀장이기도 하지만 건설 팀 부팀장이기도 했다. 성현뿐만 아니라 WR 그룹 전담 팀 팀원들은 각각 다른 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경만 소속된 팀이 없어 회사에서 좀 겉돌았는데 지금 성현이 건설 팀 일에 끼워 주려고 하고 있었다.

“응, 어서 타.”

성현이 고갯짓으로 차를 가리켰다.

“네.”

이경은 들뜬 마음으로 성현의 차로 향했다. 그러다 재하가 생각나 얼른 몸을 돌려 정중한 태도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재하는 사나운 표정으로 이경을 쳐다보았다. 이경은 그의 표정에 움찔했지만 못 본 척하고 성현의 차에 빠르게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며 힐끔 창밖의 재하를 보았는데,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이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또 성질부리는 거 아닌가. 은근히 걱정되긴 했지만 지금은 UAE 일이 더 중요했다.

성질내 봤자 얼마나 내겠어, 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그게 이경의 가장 큰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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