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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15화 (15/83)

15화

이경은 얼른 가방을 내려놓고 머리부터 단정히 묶었다. 내친김에 세수까지 하고 말끔한 얼굴로 응접실로 나왔다.

생수를 마시고 있는 재하에게 이경이 꾸벅 인사를 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침 먹고 가. 룸서비스 시켰어.”

생수병을 입에서 떼고 재하가 말했다.

“아닙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며? 최선을 다해서 밥 먹고 가.”

재하는 테이블에 생수병을 내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어쩔 수 없이 이경은 다시 가방을 내려놓았다.

재하가 씻는 사이,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소파 뒤 다이닝 룸 동그란 식탁 위에 재하가 시킨 북어 해장국 반상이 놓였다.

“왔어?”

때마침 나온 재하가 촉촉하게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다가왔다. 샤워 가운을 입은 채로 먹을 생각인지 재하는 그대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샤워 가운 차림의 재하와 마주 앉아 아침을 먹으려니 이경은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꼭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 같고.

“뭐 해? 안 앉아?”

이경이 의자 옆에 멀뚱히 서 있자 재하가 앉으라고 고갯짓을 했다.

“네.”

이경은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맞은편 재하는 이미 밥을 먹고 있었다. 재하를 따라 이경도 밥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어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경이 밥을 씹어 삼키고 입을 열었다.

“뭐가?”

재하가 시선을 들고 이경을 보았다.

“전무님 얘기요.”

“내가 불쌍하기라도 해?”

“……불쌍하기보단.”

서재하를 불쌍해하는 건 왠지 해서는 안 되는 일 같았다. 똑같이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는 친밀감은 느껴도, 감히 불쌍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정 없네, 차이경. 불쌍해해도 되는데.”

“원하신다면 해 드리겠습니다.”

“맞춤 서비스야?”

재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제 의뢰인이시니까.”

“좋네. 차이경한테 동정도 받고.”

“동정까지는 아니고요.”

“먹어. 음식 앞에서 고사 지내지 말고.”

재하가 어서 먹으라는 듯 턱짓으로 북어 해장국을 가리켰다.

“네.”

이경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였다.

***

김이 올라오는 머그컵이 이경의 앞에 놓였다. 정갈한 동작으로 이경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은 성현은 1인용 소파에 걸터앉았다.

“서 전무, 사과하겠대?”

성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경에게 물었다.

“아니요.”

이경은 고개를 저었다.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이경은 성현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일어나시면 연락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곧바로 성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니 회사로 나오라고 해서, 지금 이경은 성현과 그의 방에 마주 앉아 있는 중이었다.

“쉽게 안 할 거야.”

“대국민 사과 말고 다른 방식으로 비난을 잠재우는 건 어떨까요?”

“다른 방식?”

이경의 말에 성현이 되물었다.

“이경호 씨가 호텔 종업원으로 알려져서 재벌의 갑질이라고 더 공분을 사고 있는 상태잖아요. 이경호 씨 신분을 노출시키는 건 어떨까요?”

“계약서에 비밀 유지 조항 있어.”

성현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조항에는 성 회장님에 관해서 발설하지 말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성세연 씨에 관해서는 발설 금지 조항 없습니다. 성세연 씨의 남자 친구였다, 그로 인해 서재하 전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벌인 일이다. 이 정도로만 세간에 알려져도 여론이 좀 누그러질 것 같습니다.”

“서 전무가 절대 못 하겠대?”

“네. 그리고 서 전무님이 사과를 한다고 해도 대중들의 화가 쉽게 누그러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번 사건이 갑질 문제가 아니라 연애 문제, 사랑 문제 쪽으로 가볍게 흘러가도록 물꼬를 터 주면 여론은 쉽게 가라앉을 거라 판단됩니다.”

“폭행 사유를 가볍게 만들라.”

“갑질 문제는 사람들이 피해자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지만 연애 문제로 넘어가면 서 전무님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겁니다. 폭력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공감은 살 수 있을 겁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게 여론이니까. 한번 시도해 보자.”

성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수화기를 든 그가 이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회의할 거야. 팀원들한테 연락 돌려.”

“네.”

이경은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회의는 순조롭게 끝이 났다. WR 홍보부와 함께한 회의에서 이경의 의견이 별다른 이견 없이 받아들여졌다.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한 번 더 검토한 후, 내일 바로 기사를 내기로 했다. 회의를 끝내고 이경은 조용한 휴게실에서 재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 전무님, 차이경입니다.”

—알아.

“얘기 곧 들으시겠지만 대국민 사과는 안 하기로 했습니다.”

—차이경 공이야?

핸드폰 너머 재하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냥 네 공이라고 해.

“네.”

—수고했어, 차이경.

“감사합니다.”

이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미소는 오래도록 이경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

비난 여론이 누그러지는 건 순간이었다. 경호가 세연의 남자 친구라는 걸 밝히자 순식간에 여론이 부드러워졌다.

폭력은 나쁘지만 서재하는 이해가 된다, 나라도 눈이 돌지, 등등.

기자의 언어에서 다루기로 한 재벌들의 갑질 문제는 재하가 쏙 빠지고 방영이 되었다. 갑질 문제가 아니라 연애 문제가 되었으니 주제에 맞지 않았다.

권 회장은 일 수습을 잘했다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경의 생각이었다는 게 권 회장에게 들어갔는지, 그는 이경을 따로 집으로 불러들였다.

“저, 정말 빈손으로 가도 될까요?”

성현의 차에서 내린 이경이 운전석 문을 닫는 성현을 보며 물었다.

“음료라도 사 가려고?”

성현은 이경의 말에 피식 웃었다.

“과일이라도…….”

이경이 말꼬리를 흐렸다.

“뭐 사 가면 오히려 역정 내실 분이야. 가자, 차 변호사.”

성현은 맞은편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경은 성현을 놓칠세라 재빨리 옆으로 따라붙었다. 긴장감에 자꾸만 침을 삼켰다.

재하야 이제는 익숙한 인물이지만 권 회장님은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WR 그룹 회장이라니. 생각만으로도 목이 바짝 마른다.

“서석호 부회장님도 계실까요?”

“글쎄.”

성현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는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이경은 성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 정원에 도착한 이경은 재하의 커다란 개가 생각나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윤 변호사님.”

그때, 마중 나온 직원이 성현에게 다가왔다. 직원은 이경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두 사람을 본채로 데려갔다.

다이닝 룸으로 안내된 이경은 아무도 없는 넓은 식탁을 쳐다보았다. 저걸 다 먹을 수 있나. 이경은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작게 입을 벌렸다.

“앉아 계십시오. 곧 오실 겁니다.”

직원은 상냥한 얼굴로 이경과 성현에게 자리를 권했다.

성현은 자리에 앉기 전에 외투부터 벗었다. 긴장한 이경은 성현을 따라 얼른 외투를 벗었다.

그런 이경이 귀여웠는지 성현이 웃음을 흘렸다.

직원이 빠르게 다가와 보관해 드리겠다며 외투와 이경의 가방을 가져갔다.

직원이 나가고 성현과 나란히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젊은 남자 하나가 쓱 들어왔다.

이경은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하와 많이 닮은 얼굴, 그의 동생 서주환이었다.

“윤 변호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환은 서글서글한 얼굴로 성현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성현이 주환의 손을 잡고 가볍게 악수를 했다. 그러고는 바로 이경을 주환에게 소개했다.

“차이경 변호삽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차 변호사님. 미인이시네요.”

주환이 이경을 보며 생긋 웃었다.

이경은 입가를 끌어 올려 미소를 만들고, 주환의 코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서재하가 부러트렸다는 주환의 코는 콧대가 살짝 울퉁불퉁했다. 서재하 솜씨인가. 생각하며 이경은 주환이 내민 손을 잡았다.

“차이경, 내 변호산데.”

껄렁거리는 말투.

서재하다.

이경은 주환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재하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다이닝 룸으로 들어왔다.

“형.”

주환이 재하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웃는 낯짝 치워. 웃으면서 볼 사이도 아니고.”

“왜? 형이랑 오랜만에 밥 같이 먹어서 좋은데.”

못돼 먹은 재하의 말에도 주환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이경은 힐끔 재하와 주환의 눈치를 보았다. 재하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성현의 옆자리에 앉았고, 주환은 생글거리며 이경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후, 서석호 부회장과 강은혜 여사가 권명섭 회장과 함께 다이닝 룸으로 들어왔다. 성현은 권 회장에게 인사를 하고는 이경을 소개시켰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차이경입니다.”

“똘똘하게도 생겼네. 야무지고.”

권명섭 회장은 이경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경은 미소 띤 얼굴로 명섭에게 살짝 고개 숙여 감사 표시를 했다.

“속지 마, 영감님. 차이경 쟤 무서운 애야.”

재하가 장난기 다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참하게 생겼구먼, 무섭기는.”

“날 얼마나 쥐 잡듯이 잡는데. 영감님 하나뿐인 손자가 차이경 앞에서는 기도 못 펴.”

저 거짓말쟁이. 이경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재하를 속으로 비난했다. 쥐 잡듯이 잡은 건 서재하고, 기도 못 펴고 있는 건 차이경인데.

“차 변호사, 앞으로도 우리 손주 놈 잘 부탁하네.”

“네, 회장님.”

“영감님, 후회하지 마. 지금 고양이한테 쥐 잘 돌보라고 맡긴 격이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재하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네놈한테는 이런 여자가 딱이야.”

명섭은 재하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는 상석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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