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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14화 (14/83)

14화

재하가 이경을 지나쳐 소파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양주와 안주가 잔뜩 놓여 있었다. 잔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새것이었다.

테이블에 시선을 주었던 이경이 소파에 앉아 있는 재하에게 눈을 돌렸다.

“혼자 계셨나 봅니다.”

“차이경이랑 자려고 내쫓았지.”

재하가 얼음이 담긴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자러 온 거 아닙니다.”

“그럼?”

소파에 기댄 재하는 표정도 자세도 한껏 불량했다. 이경을 보는 눈이 나른했다.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대국민 사과인지 뭔지 하라고?”

“네.”

이경이 대답했다.

“내가 사람들 앞에 서서 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를 하고 나면 차이경은 나한테 뭘 줄 건데? 상처받은 내 마음, 몸으로 위로라도 해 줄 건가?”

재하는 술을 마시며 빈정거렸다.

“자존심 상하시겠죠. 서 전무님 마음 모르는 거 아닙니다.”

“뭘 알아, 차이경이.”

재하가 피식 웃으며 얼음이 담긴 술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경은 재하의 옆자리에 앉았다. 재하가 힐끔 이경을 쳐다보았다.

이경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고, 술잔을 집어 들었다.

“저도 주십시오.”

이경이 재하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이거 센데.”

“괜찮습니다.”

“꽤 마시나 봐?”

재하는 이경이 쥔 술잔을 빼앗아 가 얼음을 담아 주고, 술을 따라 건네주었다.

재하에게 잔을 건네받은 이경은 한 모금 마시려다가 코가 뻥 뚫릴 정도로 독한 술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객기 부리지 말고, 차 변호사.”

재하가 픽 웃었다.

이경은 망설이지 않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독한 향과 맛이 목구멍을 지지는 기분이었다. 콜록, 기침을 하고 술잔을 내려놓은 이경은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네, 객기 좀 부렸습니다. 저 술 잘 못 마십니다.”

“귀여운 짓도 할 줄 알아?”

“서 전무님도 객기 그만 부리십시오.”

“계속 귀엽든가, 계속 싸가지 없든가. 하나만 해.”

느릿한 말투로 중얼거린 재하가 제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혹시 사과 못 하시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뭐?”

“상처 같은 거요.”

말을 하는 이경은 점점 몸에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몸이 흐물흐물 푸딩이 된 것만 같다. 몸뿐만이 아니라 정신도 흐물흐물하다.

“상처?”

재하가 술을 마시며 이경을 쳐다보았다.

“수주 때문에 안 한 일도 했다고 뒤집어쓰셨으면서 그룹 이미지를 위해 해야 하는 사과는 절대 안 하려고 하시니까…… 특별한 이유 같은 게…… 있으신 게 아닐까 생각이…… 그런 생각이…….”

이제는 혀도 흐물흐물해진 것 같다. 이경은 발음이 불분명해지고, 말을 제대로 끝낼 수가 없었다.

“한 모금 마시고 취하는 건 심하지 않냐?”

재하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생수를 따라 이경에게 건넸다.

이경은 재하가 준 물 한 잔을 다 비웠다. 재하는 바로 하몽을 얹은 멜론도 이경에게 주었다. 얌전히 그것까지 받아먹은 이경은 눈을 몇 번 껌벅이고는 재하를 쳐다보았다.

“그냥 자존심 세우느라 사과 안 하시겠다는 거,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차이경 생각이야?”

재하가 이경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네.”

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듬을 타듯 끄덕끄덕 움직이는 고개에 재하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내 최초의 폭력이 언제였을까, 차이경?”

퀴즈처럼 던져진 재하의 말에 이경이 눈을 껌벅였다. 식당에서 옆자리 사람 팬 게 처음이 아니었어?

“학교 폭력?”

이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나 그 정도로 쓰레기 아닌데.”

재하가 못마땅한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이경이 얼른 사과를 했다.

“서주환, 그 자식 코뼈를 부러트린 게 내 최초의 주먹질이었어.”

재하가 얼음이 담긴 술잔을 가볍게 돌렸다.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서주환이 누구지, 익숙한 이름에 가만히 생각하던 이경은 짧게 “아.” 소리를 냈다. 서주환은 서재하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가 강은혜 여사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거든.”

재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열네 살, 어머니가 죽고 재하는 강은혜 여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당신이 내 어머니를 죽였다고, 악을 쓰며 따지는데 자기 엄마 괴롭히지 말라며 주환이 앞을 가로막았다. 자신과 너무 닮은 주환의 모습이 역겨워 재하는 주먹을 날렸다고 했다.

“쓰러진 서주환 위에 올라타서 미친 듯이 때렸어. 강은혜 여사가 날 강제로 떼어 놓기 전까지. 서주환 피가 내 손에 묻었는데 그것도 역겹더라.”

재하의 말투는 덤덤했는데, 목소리에서 슬픔이 읽혔다. 이경은 힐끔 술잔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보았다.

길쭉하고 커다란 손이 그의 얼굴만큼이나 고왔다. 저 예쁜 손으로 배다른 동생을 때렸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자식은 코뼈가 부러지고, 강은혜 여사는 그 충격으로 유산을 하고. 할아버지가 나 그 역겨운 모자 앞에 끌고 가서 사과하라고 시켰어. 서주환한테는 사과했는데, 강은혜 여사한테는 죽어도 하기 싫더라.”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만든 사람이라서요?”

이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 여자 유산 안 했으니까. 그 여자 찾아간 날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 봤어. 강은혜 여사 슈퍼에서 소주 사서 담배 물고 가는 걸 내가 쫓아갔었거든.”

“사모님이 거짓말…….”

“있지도 않은 애, 나 때문에 유산했다고 책임지래. 그걸 빌미로 우리 집으로 들어왔고. 그래서 싫어.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하고, 용서해 달라고 구걸하는 거.”

“…….”

이게 서재하의 아픔이고, 상처구나. 정신이 몽롱해지는 와중에도 이경은 그의 아픔과 상처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양아치에 또라이 서재하도 나처럼 상처가 있구나, 아픈 구석이 있구나. 그런 건 나랑 비슷하네. 처음으로 그에게 친밀감이 느껴졌다.

“사과를 하면 그때처럼 기분이 엿 같을 것 같아. 결국은 사과했거든.”

그때를 떠올리고 있는지 재하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이경은 재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부모님이 빌리지도 않은 돈, 꾸역꾸역 갚고 있는 것도 참 엿 같았으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사과하지 마요. ……제가 방법 찾아볼게요. 사과 안 하고 여론 잠재울 방법.”

혀가 꼬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경은 최대한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네가 뭔데?”

재하가 피식 웃었다.

“전무님 변호인이요.”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이경의 고개와 몸이 재하 쪽으로 푹 꺾였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마지막으로 맡았던 재하의 냄새가 달게 느껴졌다.

***

목이 탄다. 심하게.

눈을 문지르며 이경이 몸을 일으켰다. 시원한 물이 간절했는데, 몸을 일으키자마자 목마르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집이 아니었다. 눈을 굴려 주변을 살핀 이경은 여기가 호텔이라는 것을 깨닫고 움찔했다.

반사적으로 옷부터 살폈다. 옷은 마지막 기억 그대로다. 심지어 재킷까지 입고 있다.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온 이경은 침실을 나와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 테이블은 어제와 같았고, 재하는 소파에 커다란 몸을 잔뜩 구기고 잠들어 있었다.

이불도 없이 자고 있어, 이경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재하의 재킷을 주워 그에게 덮어 주었다.

그냥 바로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이경은 재하가 깰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 하경이.”

어제 하경에게 일찍 들어간다고 했건만 외박을 하고 말았다. 이경은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직 6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하경에게 메시지가 와 있어서 바로 확인을 했다.

[언니, 주말인데도 야근해?]

[나 먼저 잘게.]

하경이 보낸 메시지 위에 [야근] 딱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경은 잠든 재하를 돌아보았다. 야근이라고 보낸 적 없는데. 아무래도 하경에게서 계속 메시지가 오는 걸 보고 재하가 답장을 보낸 모양이다.

‘제가 방법 찾아볼게요. 사과 안 하고 여론 잠재울 방법.’

재하를 가만히 쳐다보던 이경은 어제 술에 취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입 밖으로 내뱉었으니까 지켜야지. 이경은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테이블 앞에 털버덕 앉았다.

핸드폰 파일을 뒤져, 재하와 청해 그룹 사이에서 이루어진 계약서 파일을 찾았다. 이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약서를 천천히 다시 살폈다.

그러다 조항 하나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수첩에 무언가를 끼적이던 이경은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

맞은편 소파에서 자고 있던 재하는 언제 일어났는지 이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차이경 술버릇 고약해.”

재하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제가요?”

이경은 못 믿겠다는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엉겨 붙고, 매달리고. 너 고소하려고 했어.”

재하가 피곤한 표정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영 못 믿겠지만 일단 이경은 사과를 했다.

그러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첩과 펜을 가방에 집어넣고, 재하를 보며 말했다.

“사과 안 하실 수 있도록 제가 방법 찾아보겠습니다.”

“진짜였어?”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댄 재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네.”

“난 또 술 취해서 헛소리하는 줄 알았네.”

“헛소리 아닙니다. 제 의뢰인이시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경은 재하와 눈을 맞추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차이경, 그 꼴로 그런 말 하니까 되게 신뢰감 있어 보인다.”

“……제 꼴이요?”

누가 봐도 비꼬는 말이라 이경은 가방을 든 채 후다닥 욕실로 향했다. 욕실 거울 앞에 선 이경은 흠칫했다.

묶어 놓은 머리가 산발이었다. 옷은 잔뜩 구겨져 있었고. 누가 봐도 탈출한 노비 같은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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