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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13화 (13/83)

13화

“저 잘할 수 있습니다. 이틀 안으로 꼭 서 전무님 확답, 받아 오겠습니다.”

이경은 의지가 담긴 얼굴로 말했다.

할 수 있다. 이번에는 꼭 확답을 받아 올 것이다. 서재하가 그 어떤 지랄을 해도 참을 수 있다.

“차 변호사가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야. 오늘 같은 꼴 또 안 당할 거란 보장 있어?”

“참으면 됩니다. 참을 수 있습니다.”

내가 참는 걸 얼마나 잘하는데. 감정 죽이고 참고 버티는 거 얼마나 잘하는데. 이경은 성현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성공하고 싶어, 차 변호사? 남들보다 더 멀리,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그게 차 변호사 목표야?”

성현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이경을 보았다.

“…….”

이경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부모님이 하경을 태우고 낭떠러지로 차를 몰았던 날 이후로, 이경의 목표는 오직 동생 하경이었다.

부모님의 극단적인 선택 속에서도 살아나 준 하경이 고마워 이경의 인생 목표는 하경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돈이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필요했다.

“성공, 좋지. 누구나 다 바라는 거지. 근데 내 마음에 상처 내 가면서까지 할 정도로 대단한 거 아니더라.”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성현의 얼굴을 이경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성현의 마음속에 난 상처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이경은 문득 궁금해졌다.

“성공 같은 거 바란 적 없습니다. ……동생이 좀 아프거든요. 집에 빚도 있고. 부모님 돌아가셔서 제가 가장이라 돈이 많이 필요해요. 많이 벌고 싶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 상처를 꺼내 놓았다. 몇 마디로 간결하게 정리된 이경의 상처였지만 그 시간을 견뎌 내는 건 쉽지 않았다.

“부모님이 냉면집을 하셨어요. 진짜 잘됐어요. 근데 망하는 거 한순간이더라고요.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망할 수 있는지.”

“…….”

성현은 컵을 만지작거리며 이경을 보았다. 그의 복잡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경은 계속 말을 이었다.

“사기당하셨거든요. 냉면집 잘되니까 프랜차이즈화하자, 사장님 소리 들으셨으니 이제 회장님 소리 들으셔야 하지 않냐. 그런 말들 옆에서 계속하니까 욕심이 나셨나 봐요.”

“…….”

성현은 이경이 꺼내 놓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주었다.

“그때 아빠가 계약서 보여 주셔서 제가 다 살폈는데 문제 전혀 없었거든요. 문제없는 정도가 아니라 조건이 아주 좋았죠. 아빠 이제 회장님 되겠네, 그렇게 웃었었는데.”

이경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막상 계약하는 날 상대방이 가지고 나온 계약서에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미 다 확인했던 거라 아버지는 아무 의심 없이 도장을 찍었고.

준비하려면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상대방은 많은 것들을 요구했다. 부모님은 의심 없이 달라는 건 다 주었다. 주민 등록증, 인감, 각종 서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냉면집에 관한 모든 권리는 그 사기꾼에게 넘어갔고, 아버지 앞에 남은 것은 수억 원의 빚이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사기꾼은 이미 해외로 도망을 가서 잡을 수가 없었다.

이런 과정을 이경은 전혀 몰랐다. 공부한다는 딸 위한다고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이경은 공부한다는 핑계로 집에는 관심도 없었다.

“한참 지나서야 알았어요. 집이 망했고, 빚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 ……저희 부모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아세요?”

서글픈 눈빛으로 이경이 성현을 응시했다. 성현은 이경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동생이 어렸을 때부터 아팠어요. 심장 기형이라. 부모님이 동생 데리고 동반 자살을 시도하셨어요. 동생은 아직까지 그냥 사고인 줄 알아요. 저도 부모님이 남긴 유서 못 봤으면 그렇게 알았겠죠. 근데 유서에 그렇게 쓰여 있더라고요. 하경이는 우리가 데려갈 테니까 너는 네 인생 잘 살라고.”

그 유서를 본 이후로 이경은 하경에게 죄인이었다. 하경이 보게 될까 봐 이경은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를 주저 없이 태워 버렸다.

“차 변호사 많이 아팠겠네. 그럼 그 사고로 부모님이?”

애잔한 성현의 눈빛이 이경의 얼굴에 닿았다.

“네. 부모님은 그 사고로 돌아가시고, 동생은 다행히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어요.”

“……유감이야.”

“동생이 살아서 정말 좋아요. 동생마저 떠났으면 제가 살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이경의 그 말이 너무나 무거웠는지 성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만 정적 속에 흘러가다, 성현이 한참 만에 물었다.

“빚은? 상속 포기나 한정 승인.”

“빚 있다는 거 알자마자 살겠다고 다 했습니다. 근데 사채가 있더라고요. 그 사기꾼이 사채까지 빌렸을 줄은 몰랐습니다. 상속 포기 한정 승인 해도 그쪽 사람들은 그런 거 안 봐주잖아요. 그래도 제가 변호사라서 그런지 원금만 받겠답니다.”

이경은 피식 웃었다.

“아는 경찰 있어.”

“그냥 갚는 게 속 편합니다. 많이 갚았어요, 그래도.”

이경이 고개를 저었다.

“서 전무 일 꼭 해야겠어?”

성현은 이경의 뜻을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네, 한 번만 더 맡겨 주세요. 제가 꼭 서 전무님 확답 받아 오겠습니다.”

“차 변호사 말대로 이틀 줄게. 이틀 동안 서 전무 마음 못 돌리면 나한테 넘겨.”

“네.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이경은 다시 기회를 얻어 기뻤다. 이번에는 꼭 제대로 일을 해낼 것이다.

“다 식었다. 다시 시켜 줄게.”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성현의 말에 고개를 젓고 이경은 젓가락을 들었다.

국물은 식고 쌀국수는 불어 터졌지만 이경은 열심히 먹었다. 아까는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더니, 지금은 너무 맛있었다.

문득 이경은 고개를 들고 성현을 보았다. 성현도 불어 터진 쌀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의 상처가 궁금했는데, 결국 자신의 상처만 꺼내 놓은 셈이었다.

어쩐지 멋쩍어져 이경은 쌀국수만 열심히 먹었다.

***

—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넘어왔다.

전화를 한 지 여덟 번 만에 재하가 전화를 받았다. 이경은 그가 전화를 받아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지경이었다.

“차이경입니다.”

—알아.

“지금 어디 계십니까?”

—바빠.

“제가 계신 곳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잠깐 만나 주십시오.”

이경은 재하에게 매달렸다. 이틀밖에 시간이 없었다. 꼭 그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바쁘다고.

“주말인데 뭐가 그렇게 바쁘십니까.”

—여자랑 뒹구느라.

“각서도 안 쓰셨는데요?”

재하의 말에 이경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네 허락받고 여자랑 뒹굴란 소리로 들린다?

“허락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서는 쓰셔야 문제가…….”

—분위기 뭣같이 만들지 말고 끊어라, 차이경.

“어디 계십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이경의 말에 재하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을 정도로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이경이 그를 부르려던 찰나, 재하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래, 좋아. 와, 차이경. 호텔이니까. 근데, 각오하고 와야 할 거야. 너 이 방 안에 발 들여 놓는 순간 나랑 뒹굴고 싶어서 온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어졌다.

양아치. 이경은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니, 왜? 또 나가야 돼?”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하경이 고개를 들어 이경을 보았다.

성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이후, 이경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계속 재하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어?”

이경은 대답을 망설였다. 재하를 만나긴 해야 하는데. 그런 말을 듣자 선뜻 호텔로 가기가 꺼려졌다.

“점심 조금밖에 안 먹었다고 했지? 언니가 토스트 해 줄게.”

“나 배 안 고파. 괜찮아. 언니, 늦게 들어와? 저녁 먹을 시간 다 됐는데. 오늘도 저녁 같이 못 먹어?”

“늦게 들어오는 건 아니고. 일단 토스트 만들어 줄게.”

이경은 좁은 주방으로 향했다.

얼려 놓은 식빵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해동시키고, 채소를 꺼내 얇게 채 썰었다.

얇게 썬 양배추와 당근, 양파를 계란에 부치고, 빵을 버터에 구워 케첩과 머스터드를 발랐다. 그 위에 부친 채소를 올리고 설탕을 솔솔 뿌린 후, 다시 빵으로 덮었다.

순식간에 뚝딱 토스트를 만들어 우유와 함께 하경에게 가져다주었다. 요리를 하는 동안 이경은 재하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먹고 있어. 배고프면 저녁 먼저 먹고. 되도록 일찍 들어올게.”

이경은 하경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가방을 들고 집을 빠져나왔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하면서 이경은 재하를 설득시킬 방법을 고심했다.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스위트룸 앞이었다. 객실 앞까지 왔지만 막상 들어가려니 내키지 않았다.

그 말이 헛소리가 아니면 어쩌지. 그래도 설마. 설마 서재하가 그렇게까지 양아치일까.

이경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자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왔다는 티를 팍팍 내기 위해 머리도 하나로 단정하게 묶었다.

다시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이경은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긴장이 되었다. 몸에 힘을 주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기까지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차이경.”

재하가 의외라는 듯 이경을 보았다. 삐딱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위험해 보였다. 본능적으로 이경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시간 좀 내주세요, 서 전무님.”

일단은 재하가 멀쩡하게 옷을 입고 있다는 것에 이경은 안심했다.

“기꺼이.”

재하가 씩 웃으며 들어오라는 듯 문을 활짝 열었다.

“객실 말고, 라운지로 갔으면 합니다.”

“또 건방이네.”

재하는 이경의 손목을 잡고, 객실 안으로 끌어당겼다.

어차피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반쯤 포기한 이경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문 닫히는 소리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나랑 자고 싶어서 쏜살같이 달려왔어?”

등 뒤에서 재하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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