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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12화 (12/83)

12화

“미친 새끼.”

재하를 쏘아보며 욕을 한 이경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덩달아 흘러나온 목소리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재하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의아한 빛을 얼굴에서 지운 재하는 씩 웃으며 떨리는 이경의 턱 끝을 살짝 잡았다.

“이런 표정 재밌네.”

“…….”

“가, 차이경. 니들이 써 준 대본대로 카메라 앞에서 줄줄 읽는 거 안 해. 멍청해 보이잖아.”

“지금도 충분히 멍청해 보여.”

숨을 몰아쉬는 이경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이경은 눈앞의 남자가 서재하라는 사실도 잊고, 입을 열었다.

“말버릇 섹시하네, 차이경.”

재하가 한쪽 입술을 올렸다.

“미친놈.”

이경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다리가 덜덜 떨려 갓 태어난 기린처럼 움직임이 볼품없었다.

재하가 이경을 따라 일어나며 피식 웃었다.

휘청거리는 이경의 팔을 재하가 꽉 붙잡았다. 그의 손을 뿌리칠 힘도 없어 이경은 그대로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이경은 눈앞의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 빠르게 깨달았다. 김오범 대표에게 돈을 주는 사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남자.

팔을 붙잡고 있는 재하의 손을 잡아 떼어 내고, 이경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서 전무님. 제가 너무 놀라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경이 깍듯하게 재하에게 사과를 했다.

“이건 별로 재미없다.”

재하가 얄미운 표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이경을 보았다.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경은 재하에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걸음을 걷고 있지만 여전히 다리가 제 다리가 아닌 것 같았다.

겨우겨우 계단을 내려가 이경은 대문 앞에 다시 주저앉았다.

놀란 것도 놀란 것이지만 재하에게 감정을 드러내고 함부로 굴었다는 게 더 괴로웠다. 이경은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서재하가 사생활 전담 변호사 교체하라고 하면 어쩌지. 걱정이 불쑥 솟아 이경은 초조해졌다. 서재하를 전담하지 않으면 이경은 송하에서 그리 쓸모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차 변호사?”

그때, 성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경이 얼른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성현을 올려다보았다.

“팀장님.”

아직 심장이 안정을 찾지 못한 이경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성현만 불렀다. 성현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경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이경이 비틀거리자, 그는 양쪽 팔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서 전무랑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이경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한 순간이었다. 대문이 열리고, 재하가 롭과 함께 나왔다.

또다시 롭이 등장하자 이경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재하는 성현과 이경을 번갈아 보고는 입술을 비틀었다.

“남의 집 앞에서 연애질은.”

짜증스레 말하고 재하는 롭을 데리고 멀어졌다.

재하와 롭이 멀리 사라지자 이경은 그제야 숨을 토해 냈다.

이경의 모습에 대충 눈치를 챘는지 성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이경을 데리고 맞은편 차로 향했다.

조수석 문을 열어 이경을 태우고 성현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어. 회장님 잠깐 뵙고 올게.”

“네.”

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 문이 닫히고, 성현이 멀어졌다. 이경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던 이경은 왈칵 짜증이 났다.

서재하, 개똥이나 밟아라.

***

“개를 무서워하나.”

롭을 산책시키러 근처 공원으로 왔지만 정작 재하는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롭의 목줄을 단단히 틀어쥔 재하는 롭이 뛰어나갈 때마다 강하게 당겨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순한 롭은 이내 포기하고 벤치 앞에 배를 깔고 누웠다.

롭이 달려갔을 때 하얗게 질린 이경의 얼굴을 떠올리며 재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들 롭을 오해하기는 했다. 덩치도 워낙 컸고, 얼굴이 귀여운 상이 아니라 사나운 개로 많이들 생각했다.

하지만 롭이 애교를 부리면 보통은 귀엽다고 웃었는데, 이경은 아니었다.

‘미친 새끼.’

욕을 하던 이경의 모습을 떠올리며 재하가 피식 웃었다.

늘 무덤덤한 그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이 너무 짜릿하고 좋았다. 그러다 이내, 재하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경의 팔을 잡은 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던 성현의 모습이 심하게 기분을 언짢게 했다.

“가자.”

재하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신경 쓰여 안 되겠다. 차이경, 윤성현 뭐 하고 있는지 보러 가야지.

재하가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롭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 가까이에 왔는데, 저만치 대문을 나오는 성현의 모습이 보였다.

성현은 성큼성큼 맞은편에 세워 둔 차로 가 그대로 운전석에 탔다. 조수석에는 이경이 앉아 있었다.

“한발 늦었네.”

떠나는 차를 보며 재하가 한쪽 입술을 올렸다.

재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롭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본채 뒤편 롭의 집이 있는 곳으로 향하던 재하가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담배 피우는 건 대체 무슨 심봅니까?”

롭의 목줄을 잡은 채로 멈춰 선 재하는 담배를 태우고 있는 강은혜 여사에게 말했다.

“왔니?”

은혜가 재하를 돌아보았다. 은혜는 담배를 끄지 않고, 보란 듯이 재하 앞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세 살밖에 안 된 애한테 담배 냄새를 맡게 하면 좋습니까.”

재하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하며, 우리 문을 열어 롭을 밀어 넣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돌아선 재하는 픽 웃는 은혜의 모습에 인상을 썼다.

“여긴 개 냄새가 나니까 담배 냄새가 잘 숨겨져.”

“강은혜 여사 착각이겠죠. 추악한 냄새는 잘 안 가려집니다.”

“네 냄새 말하는 거니? 배 속의 동생을 죽게 한 네 추악한 냄새.”

은혜가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재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은혜를 가만히 보다 재하가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있긴 했었습니까? 내 동생이라는 그 아이.”

“뭐?”

“강은혜 여사가 담배 피우고 있는 모습을 봐서. 난 분명히 봤는데.”

“잘못 본 거겠지.”

은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래도 그 덕에 이 집에 밀고 들어왔으니 남는 장사네.”

한껏 비틀린 재하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자식 잃은 어미 마음을 네가 뭘 아니.”

은혜가 담배를 떨어트리고, 바닥에 발로 비벼 껐다.

“엄마 잃은 자식 마음은 아시나?”

“…….”

은혜는 재하를 한 번 노려보고는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났다.

재하는 떠나는 은혜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 복수할 건데?”

은혜의 걸음이 멈추었다.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은혜를 향해 재하가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 죽인 복수. 강은혜 여사든 서주환이든, 내 손으로 끝장낼 건데.”

재하가 휘파람을 불었다.

은혜가 부들부들 떨며 재하를 돌아보았다.

“날 때부터 몸 약한 네 엄마 죽은 걸 왜 내 탓을 해.”

“그러게, 날 때부터 몸 약한 우리 엄마한테 왜 지껄였냐고. 세컨드면 세컨드답게 평생 숨어 살 것이지.”

재하는 아직도 은혜가 이 집으로 찾아온 날을 잊지 못했다. 비가 오는 날이었고,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함께 출장을 간 날이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떠나고, 열세 살 재하가 응접실로 들어섰을 땐 엄마가 울고 있었다.

엄마의 맞은편에 앉은 은혜는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손에 얼굴을 묻고 우는 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부르며 다가가니, 엄마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을 훔치고 재하를 보며 생긋 웃었다.

아주머니한테 간식 달라고 해, 하며 부드럽게 재하의 등을 떠밀던 엄마는 눈가가 붉었다.

은혜가 찾아왔던 날 밤, 엄마는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일주일 만에 퇴원해서 돌아온 엄마는 시들어 버린 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꼬박 1년을 집과 병원을 오갔다. 그러다 결국은 완전히 재하의 곁을 떠났다.

“주환이 병원비가 필요했어.”

은혜의 말에 재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죽을병 걸렸는지 알겠네. 고작 식중독으로 며칠 병원에 입원한 거 가지고.”

“네 아빠는 연락이 안 되지, 돈은 없지. 그럼 어떡하니?”

“몇십만 원 빌릴 데가 없어서 본처 집에 찾아왔다? 강은혜 여사님, 작작 합시다.”

“……따지고 보면 네 엄마가 나한테서 네 아빠 뺏은 거야. 내가 먼저였어. 네 엄마랑 결혼하기 전부터 네 아빠는 내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말하면 부군이 개새끼라고 인증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야망 때문에 우리 영감님 외동딸 인생 망쳐 놓은 쓰레기가 내 아버지라는 게 속상하네.”

재하가 비아냥거리며 입술을 올렸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술과 달리 눈은 도사견처럼 사나웠다.

“네 아버지도 속상하실 거야. 장남이 개차반이니. 밖에 나가면 다들 네 욕밖에 안 해.”

“장수하겠네. 오래 살아서 평생 서주환 진창 밖으로 기어 나오지 못하게 해야지.”

재하가 히죽 입술을 올렸다.

은혜는 파르르 떨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은혜가 떠나고, 재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하늘은 차이경처럼 맑고 예쁜데, 내 기분은 진창에 처박힌 것 같네. 픽, 재하는 실없이 웃었다.

***

숙주와 양파가 잔뜩 올라간 쌀국수를 바라보며 이경이 젓가락을 꽉 쥐었다. 몸의 떨림은 멈추었지만 입맛이 없었다.

“먹기 싫으면 국물이라도 좀 마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성현이 입을 열었다.

“네.”

이경은 숙주와 양파를 국물 속으로 흩트리고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었다. 따뜻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작게 숨을 내쉰 이경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사람이 좀 거칠어. 버거워하는 거 이해해. 차 변호사는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내가 맡아.”

성현이 이경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이경은 성현의 말에 기분이 바닥을 쳤다. 일 처리 제대로 못 해서 결국은 손 떼라는 소리를 들었다.

잘할 수 있는데, 정말 잘할 수 있었는데.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간절한 얼굴로 이경이 성현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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