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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11화 (11/83)

11화

“건방 떨지 말랬지, 차이경. 내 눈에 걸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재하가 이경의 턱 끝을 잡았다.

이경이 턱 끝을 잡은 재하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손에 벅차게 잡히는 재하의 손목이었지만 이경은 힘을 주었다.

“무조건 싫다고만 하지 마시고 잘 생각해 주십시오.”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안 해.”

재하는 이경에게 잡힌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성큼성큼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경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재빨리 재하를 쫓아갔다. 복도 저만치 걷고 있는 재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서 전무님.”

이경이 재하를 쫓아가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못 비킵니다.”

“윤성현이 내 대답 받아 오래? 내가 받아들일 때까지 옆에 죽치고 있으래?”

“…….”

이경은 말없이 험악하게 구겨진 재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이경도, 재하도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팽팽해졌다. 이경은 이 기 싸움에서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차이경.”

터질 듯 아슬아슬한 공기를 재하가 먼저 흩트렸다.

“네.”

“내가 너 옷 사 입히고, 밥 사 먹이니까 아주 우스워 보이지?”

재하가 이경에게 바짝 붙어 섰다. 그에게서 나는 무겁고 독한 향이 이경을 옭아맸다. 긴장감에 이경의 배에 힘이 들어갔다.

“네 말이면 다 들어주는 호구 같냐고.”

“제 기억으로는 제 말 들어주신 적 없는 것 같은데요.”

“따지기는.”

재하는 옆으로 비켜서서 이경을 지나쳐 걸어갔다.

이경은 재빨리 재하의 팔을 잡았다. 재하가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이경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재하와 이경의 몸이 밀착되었다.

밀착된 몸에서 느껴지는 재하의 근육과 체온에 이경은 흠칫했다. 재하의 시선이 이경의 눈과 입술에 차례로 닿았다.

“손대지 마. 벗기고 싶잖아.”

재하가 고개를 숙여 이경의 귀에 소곤거렸다.

재하의 몸이 자꾸만 선명하게 느껴져 이경은 당황했다. 탄탄한 가슴과 두꺼운 허벅지가 이경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귓가를 간질이는 재하의 숨결 역시 이경은 불편했다.

“죄송합니다.”

마음과는 달리 덤덤한 얼굴로 이경이 입을 열었다.

재하의 팔을 잡은 이경의 손이 툭 떨어졌다. 재하는 시선을 내리깔아 이경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

“네가 목석인지, 내가 매력이 없는 건지.”

재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이경에게서 떨어져 복도를 걸어갔다.

“서 전무님.”

이경은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 재하를 따라갔다.

재하가 옆으로 따라붙은 이경을 힐끔 보며 입을 열었다.

“화장실까지 따라올 생각이야? 내가 좋아 죽겠어?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올 정도로?”

그 말을 툭 던지고 재하는 남자 화장실로 쓱 들어갔다.

이경은 남자 화장실 앞에서 재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재하가 힐끔 이경을 쳐다보았다.

“스토커야?”

재하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하고는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여론이 더 악화되기 전에 하셔야 합니다.”

“나 욕먹는 거 좋아해. 흥분되거든.”

“네에.”

변태 또라이. 이경은 정말 답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재하를 따라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 좀 빌리겠습니다.”

“왜?”

책상 의자에 앉은 재하가 삐딱한 표정으로 이경을 보았다.

“일할 곳이 필요해서요.”

“차이경은 내가 좋아 미치겠나 봐? 화장실도 쫓아오려고 하고, 내 곁을 떠날 생각을 안 하네.”

“…….”

너 같으면 좋겠니. 이경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재하를 빤히 보았다.

“그렇게 내가 좋아 죽겠으면 한 번 줘?”

“뭘…… 말입니까?”

“내 몸.”

재하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말을 툭 내뱉었다.

변태 양아치 또라이. 소파에 앉은 이경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사양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일을 시작했다.

서류를 확인하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재하가 턱을 괴고 이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헛고생하지 말고 그냥 가.”

눈이 마주치자 재하가 입을 열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싫어.”

재하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애도 아니고. 이경은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다시 일을 했다.

종종 재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경은 일부러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 오기가 났다.

점심 무렵, 황 비서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황 비서는 부산 출장 가실 시간이 다 됐다는 얘기를 재하에게 꺼냈다.

이경은 그 소리에 빠르게 짐을 챙겼다.

“왜? 너도 가게?”

재킷을 입으며 재하가 말했다.

“아니요.”

이경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대답했다.

“왜 안 가? 화장실도 따라올 기세더니.”

“부산은 너무 멉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이경이 꾸벅 인사를 했다.

“내일 주말인데.”

“알고 있습니다.”

“난 주말에 출근 안 해.”

“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이경의 말에 재하는 피식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이경은 재하가 떠나고 조금은 우울한 마음으로 로펌으로 돌아왔다.

성현에게 재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는 말을 전할 때는 더 많이 우울했다. 제대로 처리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못 했다.

“서 전무 고집 아무도 못 꺾어. 바로 오케이 할 거란 생각 안 했어. 수고했어, 차이경 변호사.”

이경은 성현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의 방을 나왔다.

***

담장이 높은 집은 목을 꺾어야지만 눈에 다 들어왔다. 이경은 재하의 집 앞에 서서 숨을 작게 내쉬었다.

전화를 했더니 집이라고 했다. 찾아뵙겠다고 하자 그러든지, 하는 심드렁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집까지 찾아가는 건 이경으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꼭 재하의 확답을 받아 성현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이경은 핸드폰을 꺼내 재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음이 들리더니 재하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

—말해.

퉁명스러운 재하의 목소리가 이경의 인사말을 끊었다.

“집 앞입니다. 찾아뵙겠습니다.”

—오란다고 진짜 왔냐. 너도 참 너다. 들어와.

전화가 뚝 끊어졌다.

핸드폰을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고, 대문으로 다가서는데 바로 문이 열렸다.

이경은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긴 돌계단을 올라간 이경은 넓게 펼쳐진 정원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WR 그룹 총수 일가가 사는 집이니 당연히 좋겠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이경은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정면으로 3층짜리 건물이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2층짜리 건물이 하나가 더 있었다.

“차이경!”

정원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린 이경은 뻣뻣하게 굳었다. 재하가 대형견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은 털 달린 건 다 무서웠다. 옆집에서 도망친 진돗개가 학교에 가던 이경의 다리를 물어 꿰맨 이후로 동물은 모두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주 작은 강아지도 이경에게는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다. 그러니 재하가 데리고 있는 대형견은 이경에게는 그냥 맹수였다.

재하는 티 테이블이 놓인 곳에 개와 함께 섰다. 그가 데리고 있는 개는 세인트버나드 성견으로 그 덩치가 몹시 컸다.

커다란 덩치에 비해 한없이 온순한 성격을 가진 개였지만 동물은 다 무서워하는 이경에게는 사자와 다를 바 없었다.

“왜 거기 서 있어? 이리 와.”

재하가 이경에게 고갯짓했다.

“……개, 개 좀…….”

이경이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얘?”

재하가 목줄을 잡고 있는 세인트버나드를 내려다보았다.

“다, 다른 곳에…….”

“인사하고 싶다고?”

재하가 뿌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키운 내 강아지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견주의 얼굴이었다.

“아니요.”

이경이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롭, 변호사 누나한테 인사드리고 와.”

이경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 재하가 세인트버나드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목줄을 놓았다. 그가 목줄을 놓자마자 롭은 기다렸다는 듯이 육중한 몸을 흔들며 이경에게 달려갔다.

기다란 혓바닥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하얀 침을 튀겼다. “왕!”하고 짖는 소리는 우렁찼다.

이경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달려오는 롭이 너무 무서워 이경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몸이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경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감는 것뿐이었다.

질끈, 눈을 감은 이경이 가방을 움켜쥐었다. 공포가 몸을 잠식하고, 사고 회로가 정지되었다.

어렸을 때도 이랬다. 도망도 치지 못하고 진돗개에게 그대로 다리를 물렸다.

그때의 공포와 아픔이 떠올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차이경.”

눈을 감은 채로 영원 같은 시간 속에 갇혀 있던 이경이 재하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발아래에 배를 드러내고 뒹굴뒹굴하는 개의 모습이 보였다. 제 커다란 덩치는 생각 안 하고 몸을 이리저리 꼬며 애교를 부리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귀여울 모습이었지만 동물을 무서워하는 이경에게는 결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애교를 부리던 개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본채 쪽으로 달려갔다.

개가 사라졌는데도 이경은 굳은 채로 서 있었다. 그러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릎이 꺾였다. 풀썩, 잔디에 주저앉은 이경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어느새 다가온 재하가 이경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우리 롭이랑 인사 잘했어?”

다정하게 묻는 말투가 이경은 악마처럼 느껴졌다.

“미친 새끼.”

파랗게 질린 이경이 재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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