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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10화 (10/83)

10화

“그럼 좀 어떻습니까?”

“뭐?”

재하가 인상을 쓰며 버럭 화를 냈다.

“그럼 좀 어떠냐고요.”

“제정신이야? 껄떡댈 상대가 없어서 유부남한테 껄떡대? 간통죄로 처박히고 싶어?”

“간통죄 폐지된 지가 언젠데요.”

“왜 폐지가 됐어? 너 같은 애는 콩밥을 좀 먹어야 돼.”

내가 뭘 했다고 콩밥을 먹어. 이 양아치가 진짜. 이경은 차분한 얼굴로 물을 한 잔 마셨다.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감정도 함께 넘어갔다.

“이혼한 남자한테 껄떡거려도 콩밥 안 먹습니다. 간통죄 폐지되기 전에도요.”

“……어떻게 알았어? 윤 변호사 이혼한 거.”

재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윤 변호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입 더럽게 싸네.”

재하가 짜증스럽게 물을 마셨다.

“잘 먹었습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경이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음식은 맛있는데 서재하는 별로다. 차라리 편의점 삼각 김밥을 먹고 말지.

“앉아.”

재하가 일어난 이경을 보며 명령하듯 말했다.

이경은 버티고 서서 재하를 쳐다보았다.

“차이경, 착각하지 마. 너한테 돈 주는 김오범 대표도 내 돈 받아서 먹고 살아. 앉아.”

말 더하게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재하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경은 결국 자리에 앉았다. 자존심 상했는데, 차이경은 자존심 같은 거 챙길 여유 없다는 걸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다시는 음식 앞에 두고 나보다 먼저 일어나지 마.”

재하가 사나운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이경은 말없이 시선만 아래로 내리깔았다.

잠시 후, 육회 비빔밥이 나왔다. 싱싱한 육회가 큼지막하게 올라가 있는 밥은 참 맛있어 보였는데, 먹으면 왠지 체할 것 같았다.

“뭐 해. 안 먹고.”

가만히 육회 비빔밥만 바라보고 있자, 재하가 한소리 했다.

이경은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다.

밥에 디저트까지 서재하와 마주 앉아 먹었다. 서재하와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짜증 났고, 허투루 흘려보내는 시간도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이 시간이었으면 쌓인 일 중 세 가지는 처리했을 텐데.

“와인 한잔할래?”

“들어가 봐야 합니다. 업무가 많이 밀렸습니다.”

와인을 마시자는 재하의 제안에 화를 꾹 눌러 담고 이경이 입을 열었다.

“차이경은 뭐가 그렇게 바빠.”

“다 먹었으니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좋으실 대로.”

재하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느릿한 어투로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경은 다음 생에는 꼭 서재하 누나로 태어날 거라 다짐했다. 서재하 몇 대 쥐어박는 게 지금 가장 큰 소원이었으니까.

이경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

“9시에 보도된답니다.”

WR로 파견 온 지 3일 만에 일이 터졌다.

로또 수준의 돈을 받고 경호는 합의를 해 주었다. 최대한 언론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방어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언론에서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WR 그룹 홍보부는 그 소식에 바빠졌다. 이경도 황급히 성현에게 전화를 걸어 언론 보도 얘기를 전달했다.

—차 변호사는 계속 상황 보고해.

“네, 팀장님.”

이경은 전화를 끊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WR 그룹 홍보부와 송하에서 열심히 움직였지만 결국 보도를 막지는 못했다. 9시 뉴스 첫 꼭지로 재하가 뒤집어쓴 일이 보도되었다.

로펌으로 돌아온 이경은 팀원들과 함께 그 뉴스를 보았다. 하루 종일 열심히 뛰어다닌 게 허무할 정도로 뉴스 속 서재하는 악마 그 자체였다.

이경은 빠르게 태블릿으로 뉴스 반응을 살폈다. 살피나 마나 죄다 서재하 욕이었다.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겠네요.”

성현이 텔레비전을 끄고, 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조용히 넘어가면 서전또가 아니죠.”

지혜의 말에 팀원들이 힘없이 웃었다.

긴 회의가 이어졌다. 12시까지 이어진 회의에 이경은 말도 못 하게 피곤했다.

“출출하신 분, 저랑 우동 먹으러 갑시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혜가 팀원들을 보며 말했다.

“다 같이 가죠.”

성현이 팀원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 로펌을 빠져나와 근처 24시간 하는 우동 가게로 향했다. 우동을 먹으면서도 일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거 금방 사그라지겠어요?”

지혜가 입을 열었다.

뜨끈한 우동 국물을 마시고 이경은 옆자리의 지혜를 쳐다보았다.

“타이밍이 안 좋죠. 티카 식품 사장 갑질로 난리 났었는데. 또 비슷한 일 생겼으니.”

유창수 변호사가 단무지를 아삭아삭 씹으며 말했다.

“안 사그라지겠네. 기획 보도 준비 중이랍니다. 기자의 언어에서요. 재벌들 갑질 문제로.”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던 박기훈 변호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자의 언어에서요?”

유창수 변호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박기훈을 보았다.

기자의 언어는 신뢰도 높은 시사 프로였다. 거기서 기획 보도로 다룬다는 건 서재하가 가루가 되게 까인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일 더 커지기 전에 대국민 사과 한번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박 변호사님, WR 지금 회의 가능한지 물어보세요.”

“네.”

성현과 기훈이 우동을 먹다 말고 WR로 들어가고 남은 팀원들은 다시 로펌으로 돌아왔다.

이경은 2시가 넘어서 로펌을 나왔다. 말도 못 하게 졸려 집에 돌아와서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다음 날, 파견 근무를 끝내고 바로 로펌으로 출근한 이경은 난이도가 상당해 보이는 미션을 받았다.

“대국민 사과요?”

이경은 성현을 보며 되물었다. 결국 대국민 사과까지 가는구나.

“응. WR이랑 얘기 끝냈어. 대국민 사과하기로. 근데 문제는 서 전무가 거부 중이래. 내가 가겠다니까 차 변호사 보내래. 차 변호사 아니면 안 만나겠대.”

“서 전무님이요?”

“응.”

“네. 알겠습니다.”

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네.”

이경은 성현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성현의 방을 나왔다. 가방을 챙겨 부랴부랴 WR 산업으로 향했다.

재하의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곧게 뻗은 재하의 긴 다리였다. 재하는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어쩐지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다 했는데.

“흠흠.”

이경은 헛기침을 하며 사람이 들어왔음을 알렸다.

하지만 깊이 잠들었는지 재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 전무님.”

이경이 문을 똑똑 두드리며 재하를 불렀다.

재하는 여전히 같은 상태였다. 이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문 대신 책상을 두드리며 재하를 불렀다.

“서재하 전무님.”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흔들어 깨워야 하나. 이경은 잠이 든 재하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잠든 얼굴은 도련님처럼 생겨서 하는 짓이나 말은 양아치니.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 이경은 책상을 돌아 재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서 전무님.”

이경이 재하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 순간, 재하가 이경의 손목을 붙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 힘에 그대로 재하에게 안긴 꼴이 된 이경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일어나셨습니까?”

“안 잤어.”

귓가에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재하의 목소리에 이경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화를 참는 중이었다.

이경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의자에 거의 누운 듯 앉아 있는 재하를 내려다보았다.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넌 내가 끌어안아도 표정 하나 안 바뀌어. 싫은 거야, 좋은 거야.”

재하가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바르게 앉아 이경을 쳐다보았다.

“싫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차이경답네.”

재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하셔야 합니다.”

“누구한테? 너한테? 끌어안아서 미안해, 차이경. 합의금 줄까? 너 돈 좋아하잖아.”

빈정거리는 건지, 놀리는 건지. 역시 다음 생에는 꼭 서재하 누나로 태어나야겠다. 이경은 머릿속 생각을 덤덤한 표정에 숨기고 입을 열었다.

“기자들 앞에서 그냥 읽기만 하시면 됩니다.”

“내가 안 했잖아.”

“네, 안 하셨죠. 하지만 덮어쓰기로 하셨잖아요.”

“사람들 앞에서 사과하겠다는 말은 아니었어.”

재하는 피곤한지 나른한 얼굴이었다.

“16억 달러를 생각하세요.”

이경의 말에 재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이 다 밝아질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이렇게 웃을 때면 그가 좀 좋은 사람 같다는 착각이 든다.

“차이경이 돈 좋아하니까 나도 돈을 좋아해 볼까?”

재하가 의자를 살짝 돌려 이경의 무릎과 제 무릎을 맞닿게 했다.

이경은 슬쩍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사과하시는 게 좋습니다.”

“차이경 부탁이야?”

“네.”

“차이경 부탁이라서 더 들어주기 싫은데.”

재하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창밖을 내다보는 재하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들러붙어 있다. 이경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고 싶어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하는 거 엿 같아.”

이경이 다가오자 재하가 말했다. 여전히 시선은 창문 밖을 향해 있다.

“비난 잠재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난 안 때렸어.”

“압니다. 안 때리셨지만 다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재하는 말없이 피식 웃었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선택하셨으니 책임지셨으면 합니다.”

“건방져, 차이경.”

재하가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이경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재하에게서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냥 읽기만 하시면 됩니다.”

“싫어.”

“전무님.”

“싫어! 싫다고!”

재하가 언성을 높였다. 화를 내는 사나운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애처럼 굴지 마십시오.”

이경은 슬퍼 보이는 재하의 얼굴을 외면했다.

재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이경의 어깨를 붙잡아 거칠게 유리창으로 밀어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방 떨지 말랬지, 차이경. 내 눈에 걸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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