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이경은 재하를 밀쳐 내고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몰랐던 얘기라 좀 놀랐을 뿐입니다.”
이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하에게 말했다.
정말로 몰랐다. 생각도 못 했다. 하긴 아는 것도 이상하지. 사적인 얘기는 서로 나눠 본 적이 없으니. 근데 기분이 왜 이렇게 이상한지. 이경은 가방을 다른 손으로 고쳐잡았다.
“유부남이 총각 행세하고 다녀도 되나? 차 변호사, 고소해.”
재하가 턱짓으로 성현을 가리키며 이경에게 말했다.
“정말 성 회장님이 하신 일 뒤집어쓰실 생각입니까?”
성현은 재하의 말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16억 달러야. 욕 몇 번 얻어먹으면 1조가 넘는 사업이 떨어지는데 안 할 이유가 있나? 안 하는 게 등신이지.”
“회장님께서 허락 안 하실 겁니다.”
“우리 영감님은 돈 좋아해서 허락할걸?”
“WR 그룹 이미지가 입을 타격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 새끼 또 지랄하는구나, 하겠지.”
재하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또라이는 생각하는 게 역시 다르구나,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이경이 재하를 바라보았다.
“불매 운동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고…….”
“윤 변호사, WR 전자에서 나온 핸드폰 점유율이 얼만지는 알아? 반도체는? WR에서 만드는 배가 얼마를 벌어다 주는지는? 불매?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불가능하다는 거 제일 잘 아는 것도 대중들이야. WR 망하면 나라 망하는 줄 아는 사람들 천지야.”
재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기는 하지, WR 그룹. 이경은 묘하게 설득력 있는 재하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깡패 재벌이라고 욕먹고 있는 거 한 번 더 욕먹는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 싶기는 했다.
“돈으로 좋은 일 한 번 하고 나면 ‘그래도 우리 집 개새끼가 낫지’ 할걸?”
“WR 그룹은 별 타격 없어도 서 전무님은 타격이 크실 겁니다. 총수 일가가 연달아 두 번이나 폭행 사건 일으키면 사람들 아무리 우리 집 개새끼라도 곱게 보지 않습니다. 훗날 경영권 승계에도 문제 될 수 있습니다.”
“차 변호사, 네 생각은 어때?”
성현과 입씨름을 하던 재하가 이경에게 의견을 물었다.
“위험 부담이 크긴 합니다. 피해자가 고소 취하를 하지 않을 경우 수감…… 이 되실 수도 있는 문젭니다.”
“감빵 가면 면회 올 거야, 차이경?
재하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안 갑니다.”
“차갑네. 고소 취하하고 합의받아 내는 건 윤 변호사랑 차 변호사가 할 일이고. 청해 쪽은 아마 내 제안 받아들일 거야. 딸이면 끔찍하고, 평판은 더 끔찍하게 생각하는 양반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지.”
책상에 기대고 서 있던 몸을 재하가 바로 세웠다.
재벌들의 세계는 이렇게 냉정하구나. 약혼자고 뭐고 서로의 이익이 우선이네. 이경은 살짝 질리는 느낌이었다.
“회장님께 보고 먼저 드리겠습니다.”
“윤 변호사는 우리 영감님 사람이라 이거지?”
재하가 픽 웃었다.
“일단은 네. 저 권 회장님 사람입니다.”
“윤성현 변호사는 우리 영감님 사람이고, 차이경 변호사는 누구 사람이야?”
재하가 이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누구의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경은 힐끔 재하와 성현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두 사람은 이경의 얼굴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김오범 대표님 사람이지 않을까요.”
월급쟁이 변호사, 월급 주는 사람이 갑이고 신이지.
이경의 대답에 재하는 얼굴을 구겼고, 성현은 묘하게 언짢은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심기를 동시에 거스른 엄청난 일을 했구나, 사태를 바로 파악한 이경이 말을 덧붙였다.
“월급 주시는 분이잖아요.”
“그래, 그렇게 철저하게 돈만 좋아하는 거 마음에 들어.”
재하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일단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현이 재하에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이경 역시 꾸벅 인사를 하고는 성현을 황급히 쫓아갔다.
차 안에서 성현은 김오범 대표에게 전화로 짧게 상황을 보고했다. 전화를 끊고 난 후에는 이경에게 회의 준비를 해 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이경은 대답을 하고 바로 팀원들에게 메시지로 회의 고지를 했다.
어느새 성현의 차가 로펌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부랴부랴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이경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길고양이가 꼬리를 세우고 이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릴 때 옆집 진돗개한테 물린 이후로 동물을 무서워하는 이경은 몸이 잔뜩 굳은 채로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차 변호사.”
앞서 걷던 성현은 이경이 따라오지 않자 뒤를 돌아보았다.
대답을 하고 싶었는데, 목소리를 내면 고양이를 자극할까 봐 이경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성현이 성큼성큼 이경에게 걸어왔다. 성현이 다가오자 낌새를 느낀 고양이가 도망쳐 사라졌다. 그제야 이경은 숨을 토해 냈다.
“왜 그래?”
성현이 이경의 얼굴을 살폈다.
“죄송합니다. 고양이가 갑자기 나타나서.”
“고양이?”
“제가 털 달린 짐승은 다 무서워해서…… 죄송합니다.”
이경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 아들이랑 똑같네.”
성현이 미소를 짓고는 다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아들도 있구나. 이경은 씁쓸함을 느끼며 성현을 쫓아갔다.
“결혼하신 줄 몰랐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이경이 성현에게 말했다.
“결혼했었지. ……지금은 이혼했고.”
“……그것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경은 난감했다. 결혼 얘기를 꺼냈는데 이혼으로 답이 돌아오니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었다.
“죄송할 일인가, 그게.”
성현이 엘리베이터에 타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로를 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이경은 그 이후로 입을 다물었다.
***
결국은 서재하의 말이 맞았다. 딸 끔찍하게 생각하고, 평판은 더 끔찍하게 생각하는 성 회장은 수주를 포기했다. 성 회장의 결정으로 WR 그룹 전담 팀은 바빠졌다.
“안지혜 변호사는 계약서 초안 작성해서 오늘 중으로 나한테 넘기고, 차이경 변호사는 내일부터 WR 쪽으로 출근해서 그쪽이랑 언론 최대한 방어하고.”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조용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합시다.”
성현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회의가 끝이 났다.
“와, 서전또는 사업을 하는 것도 또라이 같아.”
이경이 회의실 정리하는 걸 도와주며 지혜가 말했다.
“저는 사업을 하는 것 자체가 신기하더라고요.”
“하는 짓은 그래도 생각보다 일 잘한다더라.”
이경의 말에 지혜가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할수록 서재하는 신기한 인간이었다. 또라이 양아치인데 또 일은 잘한다니, 이게 무슨 청국장 파스타 같은 소리인지.
회의실 정리를 마치고 이경은 사무실로 돌아와 일을 했다. 그날 이후로 재하에게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유흥할 정신이 없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머쓱하게 그날 저녁에 재하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경은 서류를 챙겨 재하가 오라고 한 곳으로 향했다. 그가 알려 준 곳은 호텔 한식 레스토랑이었다.
누가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혼자였다. 이경은 멀찍이 서서 말린 대추를 씹고 있는 재하를 보았다.
“뭐 해. 앉아.”
재하가 테이블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혼자 계십니까?”
“응.”
재하가 고개를 끄떡였다.
이경이 차분한 얼굴로 재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 변호사, 다 잘 먹지?”
“네, 가리는 거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시켰어.”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각서 쓰라고 부른 건 아닌 것 같고. 이경은 재하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이 시간에 여기로 부른 거 보면 답 나오지 않나? 왜 불렀겠어. 밥 먹자고 불렀지.”
“……제 업무가 아닌 것 같습니다.”
너랑 밥 먹을 시간 없는데, 라는 말을 이경이 돌려 했다.
오늘 하루 종일 네 뒤치다꺼리하느라 아주 바빴다고, 여기서 이렇게 너랑 태평하게 밥 먹을 시간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경의 말에 재하의 얼굴이 구겨졌다. 화를 참는 듯 미간에 주름을 만든 재하가 입을 열었다.
“여기 사건 현장이야. 그러니까 네 업무야.”
“저는 형사도 아니고, 이번 일이 무죄를 밝히는 일도 아니니 굳이 사건 현장에 올 필요는 없습니다.”
“한마디를 안 지지.”
재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경은 가만히 물을 마셨다. 그냥 일어나고 싶었는데 또 성질을 부릴 것 같아 참았다.
음식들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빨리 먹고 일어날 수 있는 음식이 좋은데.
테이블을 채운 음식들을 먹으며 이경은 오늘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오늘도 야근 확정이다.
“윤 변호사 부인 예뻐.”
등심구이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재하가 툭 말을 던졌다.
갑자기 튀어나온 윤 변호사의 얘기에 이경은 의아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네.”
그저 알았다는 뜻으로 짧게 대답만 했다.
“부자야. 김오범 대표 조카.”
“네.”
“화가야. 그쪽에서는 꽤 유명한.”
“네.”
왜 자꾸 성현의 전 부인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경은 묵묵히 재하의 말을 들어 주었다.
“윤성현 눈 더럽게 높다고.”
“그러실 것 같습니다.”
짜증스럽게 이어진 재하의 말에 이경이 동의한다는 듯 대답했다.
“꿈도 꾸지 말라고.”
“…….”
역시 또라이의 사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갑자기 뭘 꿈꾸지 말라는 건지. 이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등심을 리염 소금에 찍어 입에 넣었다.
이건 진짜 맛있네. 이경은 여기로 불러낸 재하에 대한 반감이 좀 사그라졌다.
“유부남한테 침 흘리는 거 보기 안 좋아.”
이어진 재하의 말에 묘하게 기분이 상한 이경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가 팀장님께 침 흘린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럼 아니야?”
“그런 적 없습니다.”
또라이. 이경은 왈칵 짜증이 났다. 고기가 힘을 내면 뭐 하나, 서재하 주둥이가 다 까먹는데.
“그래 보여.”
재하가 빈정거렸다.
“그럼 좀 어떻습니까?”
이경이 재하를 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