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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8화 (8/83)

8화

“서 전무님 무슨 일이신데요?”

“폭행.”

성현의 대답에 이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머리 못 이기고 누구를 또 때렸나 보다. 이경은 재하의 그 잘난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성현의 차가 향한 곳은 권 회장과 서석호 부회장의 집무실이 있는 WR 서초 사옥이었다.

직원을 팼나? 이경은 엘리베이터를 타며 재하가 때린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차 안에서 성현에게 물었지만 가 봐야 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서석호 부회장의 비서 김 실장이 두 사람을 데리고 바로 부회장실로 향했다.

부회장실에는 재하와 서석호 부회장 말고도, 성 회장과 세연이 함께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이경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재하를 힐끔 쳐다보았다. 재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저 양아치. 사람을 패고도 저렇게 태연하다. 이경은 정말 답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송하에서 나왔습니다. 변호사 윤성현입니다.”

“변호사 차이경입니다.”

이경은 성현을 따라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차이경, 처음으로 변호사다운 일 하네? 매일 나 쫓아다니면서 나랑 떡 친 여자들 관리나 했으면서.”

재하가 불량한 표정으로 이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서재하의 양아치스러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구나. 이경은 작게 감탄했다.

“저급해!”

재하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세연이 성질을 냈다.

세연이 성질을 부리자 재하가 그녀에게 윙크를 보냈다.

“짜증 나!”

세연은 짜증을 내며 펄펄 뛰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경은 재하를 저급한 양아치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설명 좀 해 주십시오. 서 전무님께서 대체 누구를 때려서 고소를 당하신 겁니까?”

성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때린 거 아니고! 저 성 회장님이 기운이 뻗치셔서 딸 남자 친구를 놋쇠 그릇으로 후려쳤어. 근데 그 새끼가 나까지 고소한 거야.”

재하는 짜증과 억울함이 섞인 얼굴로 말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는데 고소당하셨다는 얘깁니까?”

성현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놋쇠 그릇으로 맞기 전에 그 새끼가 나 붙잡고 늘어졌거든. 때린 건 우리 성 회장님인데 재수 없게 내가 엮여 든 거지.”

재하가 다리를 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흠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성 회장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방금 엿 같은 소리를 들었어. 때리기는 저 양반이 때렸는데 내가 때린 거로 하자네? 윤 변호사, 차이경, 어떻게 생각해?”

재하가 짜증 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성현과 이경을 번갈아 보았다.

이경은 슬쩍 성 회장을 쳐다보았다. 점잖게 생긴 성 회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다.

“재하 씨는 세상 사람들이 깡패인 거 다 알잖아. 어차피 고소당한 거 그냥 뒤집어써 줘.”

성 회장의 옆에 앉아 있는 세연이 말했다.

“말 참 생긴 대로 하네.”

재하가 껄렁한 말투로 빈정거렸다.

“약혼자로서 이 정도도 못 해 줘? 재하 씨랑 약혼하고 내가 손해 본 게 얼만데!”

세연이 언성을 높였다.

이경은 세연에게 시선을 주었다. 서재하 약혼녀?

언젠가 읽었던 신문 기사가 생각났다. WR 그룹 서재하와 청해 그룹 딸 성세연이 약혼을 했다는 기사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세연에게 주었던 시선을 재하에게 돌리자, 바로 눈이 마주쳤다. 탐색하는 재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불편해 이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내가 뒤집어쓰면 청해에서는 뭘 해 주실 건데?”

이경에게서 시선을 뗀 재하가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대며 성 회장에게 물었다.

“서재하.”

석호가 근엄한 표정으로 재하를 불렀다.

“들어나 보자고요. 내가 몸빵 맞아 주는 대신 뭘 줄지.”

재하가 성 회장에게 고갯짓을 했다.

“원하는 게 뭔가? 양재동 건물 하나 넘겨줘?”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고작 건물?”

성 회장의 말에 재하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그림 하나 줄까?”

성 회장이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림에 취미 없는데.”

“그럼 원하는 걸 말해 봐. 설마 나를 원해?”

세연이 인상을 쓰며 재하를 보았다.

“자의식 과잉은 약도 없어, 성세연.”

재하가 같잖다는 얼굴로 세연을 보았다.

“원하는 걸 말해 보게.”

“방글라데시 공항 수주 포기하시죠?”

재하가 씩 웃으며 성 회장에게 말했다.

이경은 재하의 제안이 좀 의외였다. 양아치지만 그래도 일은 열심히 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이경의 눈동자가 성 회장에게로 빠르게 돌아갔다. 성 회장은 아까보다 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얼마짜리인데!”

“16억 달러가 넘죠. 싫으시면 우리 밑으로 들어오는 건 어떠세요? 좀 나눠는 드릴게.”

“16억 달러? 이 날강도!”

세연은 재하를 비난했다.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내가 또 온갖 욕이란 욕은 다 처먹게 생겼는데 일이라도 잘해야 우리 영감님한테 면이 서지. 공동 수주 좋잖아요. 사이좋게.”

능글능글한 말투로 재하가 성 회장을 보며 말했다.

“아빠, 내가 경호 설득해 볼게. 경호 내 말이면 들을 거야. 나랑 결혼시켜 주는 대가로 고소 취하하라고 해.”

“됐어! 어딜 그런 잡놈이랑 결혼하겠다고!”

세연의 말에 성 회장이 발끈 화를 냈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듯 성 회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잡놈이랑 따님을 결혼시키시든, 공항 수주 포기하시든, 이제 결정권은 성 회장님한테 넘어갔습니다.”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경은 성 회장의 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성 회장은 아주 괴로워 보였다.

여기서 잘못한 사람은 성 회장인데 어쩐지 재하가 제일 악당처럼 보인다. 누명을 쓰고도 나쁜 놈으로 보이는 재주를 지닌 신기한 사람이다.

“윤 변호사랑 차이경은 나 따라와.”

소파에서 벗어나 문으로 향하며 재하가 성현과 이경을 불렀다.

“부회장님과 잠시 얘기 나누고 따라가겠습니다.”

성현이 재하에게 말했다.

“김 실장, 부회장실 옆 회의실 비었지?”

재하가 김 실장에게 물었다.

“네.”

“거기로 와, 윤 변호사.”

재하는 성현에게 말하고는 이경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부회장실을 빠져나갔다.

이경은 재하에게 끌려가면서도 부회장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부회장실에서 이경을 데리고 나온 재하는 그녀를 회의실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이경을 회의실에 세워 두고,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가 사 준 바지, 블라우스, 외투, 가방. 좋네.”

재하는 입가를 부드럽게 올렸다. 만족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부 서 전무님이 사 주신 건지.”

그때 뭘 샀는지 보지도 않았으면서 알아본 재하가 이경은 신기했다.

“가난한 차이경은 이런 거 못 사 입지. 안 본 사이 부자 남자 친구가 생긴 게 아니라면.”

“…….”

“왜? 그새 생기기라도 했어?”

이경이 답이 없자 재하는 인상을 쓰며 까칠하게 물어 왔다.

“진짜 안 때리셨습니까?”

이경은 재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아까 전부터 정말로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분위기를 보니 때린 게 아닌 것 같기는 하다만 약혼자의 남자 친구를 때렸다는 게 너무 서재하스러웠다.

“너는 내 변호사라는 게 날 믿어 주지는 못할망정 의심을 해?”

재하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이경을 사납게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이경은 바로 사과를 했다.

“너는 진짜 내가…….”

재하는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이경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경은 재하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재하의 고급스러운 구두가 보였다. 저것도 엄청 비싸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불쑥 재하의 앞으로 당겨져 갔다.

재하의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이경은 고개를 들어 재하와 눈을 맞추었다. 몸으로 긴장감이 퍼졌다.

재하는 이경의 팔목을 잡은 채 이경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안 때렸어. 넥타이 붙잡고 늘어지기에 어깨 좀 밀친 것뿐이야.”

“어깨를 밀치셨습니까?”

“살짝!”

“네, 알겠습니다.”

이경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때렸다는데 뭐 없어?”

“제가 뭘 드려야 하는 겁니까?”

이경은 어리둥절했다. 사람 안 때렸다고 칭찬이라도 하라는 건가? 원래 사람은 때리면 안 되는 거다. 일곱 살짜리도 아는 사실일 텐데.

“아니.”

“네.”

“뭐가 ‘네’야.”

“…….”

뭐 어쩌라는 거야, 의 마음으로 이경이 재하를 빤히 보았다.

그때, 성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성현은 붙어 있는 이경과 재하의 모습에 얼굴을 찌푸리고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불필요한 접촉은 삼가 주십시오.”

성현이 굳은 얼굴로 재하를 보며 말했다.

이경이 얼른 재하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손목이 붙잡힌 채였다.

성현의 시선이 재하가 붙잡고 있는 이경의 손목에 닿았다.

“윤 변호사는 그렇게 딱딱해서 결혼은 어떻게 했어? 결혼한 게 신기하네.”

“네?”

재하의 말에 놀란 이경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팀장님이 결혼하셨다고? 까맣게 몰랐다. 팀장님이 유부남인 걸.

이경이 성현을 쳐다보았다. 성현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그와 시선이 얽혔는데, 답지 않게 그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싶어졌다.

그 순간, 이경이 재하의 품으로 끌어당겨졌다. 재하는 이경의 허리에 손을 감은 채로 힘을 주었다.

“서 전무님!”

성현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재하는 성현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품에 안겨 있는 이경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윤성현 결혼했다는데 차이경 얼굴이 왜 초상집이야? 누가 죽기라도 했어?”

나지막한 재하의 목소리가 이경의 귀에 서늘하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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