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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7화 (7/83)

7화

“전무님, 저는 남자 안 좋아합니다.”

“나도 안 좋아해.”

재하는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말하며 잡고 있던 황 비서의 넥타이를 놓았다.

그래, 내가 차이경에게서 보고 싶은 표정이 저건데. 재하는 여전히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는 황 비서를 보며 생각했다.

차이경, 그 여자. 섬세한 유리 공예품같이 생겨서 잘 깨질 것만 같은데 따박따박 말대답에 겁을 내지도 않는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어 황당하면서도, 신기했다.

늘 담담한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고 싶기도 하고, 엉엉 우는 게 보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가끔은 침대 위에서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빨리 쫓아내고 싶었는데 지금은 옆에 더 두고 싶다.

“다행입니다. 그럼 어서 회의실로.”

황 비서가 안심한 얼굴로 문을 가리켰다.

재하는 인상을 썼다. 지긋지긋한 회의. 노친네들 시답지도 않은 소리 언제까지 들어 줘야 하나. 차이경 말대답하는 소리는 재밌기라도 하지.

“그 노인네들은 죽지도 않는대?”

“돌아가실 나이는 아니죠.”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황 비서가 문으로 향했다.

재하는 황 비서를 따라가며 이경을 생각했다. 그 덤덤한 얼굴, 망가트리고 싶다.

회의가 끝나고 재하는 호텔로 향했다. 오늘은 회의보다 더 지겨운 약속이 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재하는 얼굴부터 구겼다. 앉아 있는 낯짝 중 마음에 드는 낯짝이 없다.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재하는 성세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도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여자가 약혼녀라는 사실에 짜증을 느끼며 재하가 물을 마셨다.

“어른들 기다리게 하는 거 예의 아니다.”

서석호 부회장이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서울 교통 체증이 저를 예의 밥 말아 먹은 놈으로 만드는 걸 어쩝니까, 부회장님.”

“재하야, 아버지가 다 너 걱정돼서 하시는 말씀인데.”

서석호 부회장의 옆에 앉은 강은혜 여사가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들 새끼 걱정하시는 분이면 밖에서 사생아 안 만들어 오죠, 강은혜 여사님.”

은혜를 보는 재하의 입술이 비틀렸다.

사생아를 만든 장본인인 은혜의 얼굴이 굳어졌다.

“서재하!”

석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재하는 석호를 무시하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세연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개 같은 집구석에 따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하가 활짝 웃었다.

“흠흠.”

세연의 아버지 성 회장이 헛기침을 하며 눈을 굴렸다.

“재하 씨, 품위를 좀 지키죠?”

세연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약혼녀께서는 그새 필러를 또 맞으셨나 콧대가 높아지셨네?”

“하!”

세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재하는 온 지 5분도 안 돼서 식사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재주라면 그것도 재주였다.

“성 회장, 날 더 추워지기 전에 골프 한번 쳐야지.”

석호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골프 얘기를 꺼냈다.

재하는 앞에 놓여 있는 말린 대추를 주워 먹으며 약혼녀의 사나운 눈빛을 감상했다.

저 여자는 저렇게 금방 표정이 변하는데 차이경은 늘 똑같은 표정이다. 늘 똑같은 옷에, 늘 똑같은 표정. 근데 지루하지가 않다. 참 신기하게도.

석호가 주도하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재하는 얌전히 밥을 먹었다.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육회 비빔밥을 한술 크게 뜬 재하는 벌컥 열리는 문에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분노에 찬 얼굴로 씩씩거렸다.

“경호야.”

남자의 등장에 세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도하던 얼굴이 한순간 애틋함으로 물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남자를 보는 약혼녀의 모습에 재하는 피식 웃었다. 늘 지루하던 자리였는데 오늘은 꽤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재하는 크게 뜬 육회 비빔밥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너 이 쌍놈의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와!”

체면을 차리고 있던 성 회장이 분노를 터트렸다.

“회장님, 저 세연이 사랑합니다.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경호라는 남자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 경호야.”

세연은 안타까운 얼굴로 경호를 일으켰다.

일어나란다고 날름 일어나는 남자가 우스워 재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경호가 재하를 홱 돌아보았다.

“저런 깡패 같은 놈한테는 세연이 못 보냅니다. 폭력 전과가 있는 놈이에요. 세연이도 때릴지 어떻게 압니까?”

경호가 재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울분을 토했다.

“전과 없다니까 그러시네.”

재하는 인상을 쓰며 수저를 또다시 입에 넣었다. 합의해서 나름 깨끗한 범죄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나가! 끌어내기 전에!”

성 회장이 성큼성큼 다가가 경호의 머리채를 잡았다.

“아빠, 이거 놓고 말해!”

세연이 소리를 질렀다.

재하는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장면을 보며 식사를 계속해 나갔다. 점심에 햄버거 하나 먹었더니 배가 출출했다.

성 회장과 경호는 서로를 붙잡고 실랑이를 벌였다. 보다 못한 석호가 일어나 성 회장을 말렸다.

은혜는 주저앉은 성 회장 부인을 부축했고, 세연은 악을 쓰며 울어 댔다.

아수라장 같은 상황에서 재하만 평온하고 여유로웠다.

“디너쇼도 아니고.”

육회 비빔밥 한 그릇을 다 비운 재하는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들 노시고. 잘 먹고 갑니다.”

재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유유히 그들 곁을 지나갔다.

“어디를 도망가!”

그때, 경호가 재하의 팔을 붙잡았다.

“아, 씹.”

재하가 사나운 얼굴로 경호를 쳐다보았다.

“세연이랑 헤어져! 너 같은 놈한테 세연이 못 줘.”

“너 가져, 새끼야.”

재하가 경호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이 미친놈이!”

성 회장이 경호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었다.

재하는 눈앞에서 이리저리 머리가 흔들리는 경호를 보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혼자 보기 아까운 꼴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걸 다 봐야 재벌에 대한 환상이 없지. 처먹는 게 조금 비쌀 뿐 지랄하는 건 다 똑같은데.

“가지 마! 여기서 확실히 하고 가!”

빠져나가려는 재하의 넥타이를 경호가 붙잡았다.

“질척거리기는.”

재하가 경호의 어깨를 밀쳤다.

그리고 동시에 성 회장이 석쇠 불고기가 담겨 있던 놋쇠 그릇으로 경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경호가 그대로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경호야!”

세연이 놀라 바닥으로 쓰러진 경호에게 달려갔다. 기절한 경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야! 서재하!”

세연이 경호의 머리를 끌어안고 재하를 노려봤다.

때린 건 네 아버지인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재하가 인상을 쓰며 내가 아니라 네 아버지라는 뜻으로 성 회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니, 이걸 어째.”

석호는 당황한 얼굴로 쓰러진 경호와 놋쇠 그릇을 들고 씩씩거리는 성 회장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다고 뭐, 죽이실 것까지야.”

재하가 픽 웃으며 성 회장을 보았다.

“안 죽었거든!”

세연이 재하를 향해 소리쳤다.

“119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은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같으면 호텔 방으로 옮겨서 의사와 변호사를 같이 부를 겁니다. 이 새끼 안 뒤진 것 같은데 119 불러서 병원 데려가면 복잡해지실 거예요. 제가 겪어 봐서 알잖아요.”

재하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성 회장을 향해 말했다.

“그게 자랑이야?”

세연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팁을 줘도 지……. 어쨌든 알아서들 잘 해결하시고, 저는 갑니다.”

재하가 껄렁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룸을 나왔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 재하는 정원을 가로질러 별채로 향했다.

“서재하.”

어둠 속에서 재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권명섭 회장이었다.

“왜 혼자 와? 부회장이랑 주환 애미는?”

“영감님, 왜 아직 안 주무셔?”

재하가 다가오는 명섭을 보며 씩 웃었다.

“이제 겨우 9시다, 이놈아. 벌써 자?”

“늙은이는 일찍 자야 건강하게 오래 살지.”

“버르장머리 없는 놈.”

명섭이 재하를 보며 눈을 흘겼다.

“영감님, 장수해. 오래 살라고.”

“내가 죽어도 너 사람 되는 꼴은 보고 죽을 거다, 이놈아.”

“그럼 평생 사람 되지 말아야겠네. 영감님 오래 살려면.”

“네 엄마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난 우리 수연이한테 원망 듣기 싫다.”

“오래 살아서 나랑 같이 죽어. 내가 엄마한테 말 잘 해 줄게.”

재하가 명섭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재하는 그대로 명섭의 몸을 별채 쪽으로 돌렸다.

미친놈, 명섭에게 욕을 얻어먹기는 했지만 재하는 기분이 좋았다. 재하에게 명섭은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열네 살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젊은 나이에 재하를 남겨 두고 떠났다. 모두 아버지 서석호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사람이었는데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급격히 몸이 나빠졌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 재하는 아버지 서석호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재하에게 가족은 외할아버지 권명섭밖에 없었다.

“오래 살아, 권 회장님.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야.”

재하는 늙고 주름진 명섭의 손을 꽉 잡았다.

***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던 이경은 성현의 목소리에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 변호사, 나와. 서 전무, 문제 생겼어.”

“서 전무님이요?”

성현의 말에 이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리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성현은 굳은 얼굴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경은 빠르게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가방을 챙겼다.

황급히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보니 저만치 성현의 차가 보였다. 이경은 빠른 걸음으로 성현의 차로 다가갔다.

조수석 문을 똑똑 노크하자, 창문이 내려가고 성현이 입을 열었다.

“빨리 타.”

“네.”

얼른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이경이 물었다.

“서 전무님 무슨 일이신데요?”

“폭행.”

짧게 대답한 성현이 빠르게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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