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서 전무님 원하시는 스타일로 사 오세요. 사다 주시는 거로 입을게요.”
“뭐?”
이경의 말에 재하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지더니 이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재하가 이경을 응시했다.
“저는 차에서 일 좀 마저 하겠습니다.”
“어디서 시건방을 떨어? 좋은 말로 할 때, 나와.”
재하가 이경에게 카드를 돌려주고 차에서 내렸다.
열 좀 받았을까. 이경은 발렛 요원에게 차 키를 던져주는 재하를 보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재하에게 끌려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재하는 이경을 매장으로 밀어 넣고는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경은 무심한 눈길로 매장을 둘러보았다.
30분 만에 이경은 쇼핑을 끝냈다. 원피스 두 벌, 팬츠 세 벌, 블라우스 네 벌, 스커트 두 벌, 외투 한 벌, 가방 하나.
망설임 없이 이경은 점원에게 재하의 카드를 내밀었다. 그렇게 몇천만 원을 순식간에 써 버렸다.
계산을 끝내고 이경은 의자에 앉아 있는 재하에게 다가가 카드를 내밀었다.
“더 쓰지. 겨우 이거야?”
이경에게 카드를 돌려받은 재하는 한쪽 입가를 올렸다.
“야근 수당 미리 받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재하의 표정에 이경은 진 기분이 들었다. 서재하 당황하는 모습 좀 보고 싶었는데 재벌인 그에게 이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다.
근데 이거 진짜 받아도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좀 편해?”
의자에서 일어난 재하가 이경을 내려다보았다.
“…….”
“차이경 예뻐서 사 준 건데.”
재하가 허리를 숙여 이경의 귀에 속삭였다.
“예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경은 덤덤한 얼굴로 재하를 쳐다보았다. 진짜 예뻐서 사 준 게 아니라는 걸 이경은 잘 알았다.
“침대에서도 예뻐해 줄 용의가 있어.”
재하는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툭 이경의 뺨을 건드렸다.
양아치, 속으로 욕을 한 번 내뱉고 이경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힘이 들어간 아랫배가 신경에 거슬렸다.
이경의 뺨에서 재하의 손이 떨어졌다.
“제 업무는 침대 위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서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감사하긴 해?”
재하가 허리를 숙여 이경과 눈을 맞추었다.
“아니요.”
이경이 바로 대답했다.
“근데 뭘 감사하대.”
“인사치렙니다.”
거지 같은 사회생활 중이니까 너 같은 양아치도 참는 거야. 이경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담담한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자꾸 그러지 마, 차이경. 진짜 자빠트리고 싶어지니까.”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경은 잠시 재하를 쳐다보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한쪽에 가득 놓인 쇼핑백을 챙겨 들려는데, 재하가 먼저 낚아챘다.
“배고파. 밥 먹고 가.”
그러더니 이경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매장을 빠져나갔다.
이경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이었다. 어차피 밥 먹어야 하는 거 그냥 군말 없이 재하를 따라갔다.
“뭐 먹고 싶어?”
조수석에 탄 이경을 보며 재하가 물었다.
“서 전무님 좋아하시는 거요.”
“한식, 양식, 중식. 골라.”
“양식이요.”
“양식 어떤 거?”
“간단하게 먹고 들어갈 수 있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뭐.”
“햄버거요.”
“…….”
이경의 대답에 재하는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햄버거도 엄연히 양식인데. 비난하는 재하의 눈빛에 이경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싫으시면 다른 거 드셔도 됩니다.”
“가.”
재하는 못마땅한 얼굴로 운전을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햄버거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수제 버거 두 개와 치즈 프라이즈가 테이블 위에 곱게 놓여 있다.
패스트푸드점이나 가자는 말이었는데. 이경은 아보카도 버거를 들었다.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이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얼른 음식을 씹어 삼키고 이경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한 사람은 성현이었다.
“네, 팀장님.”
이경은 티슈로 입가를 닦았다.
맞은편 재하의 눈썹이 하나로 모아졌다. 그러더니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이경을 쳐다본다.
나가서 받았어야 했나, 생각하며 이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재하가 바로 이경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디야, 차 변호사.
“지금…….”
이경이 뭐라 대답을 하려던 찰나였다. 재하가 이경의 핸드폰을 순식간에 빼앗아 갔다.
“차이경 지금 나랑 있어. 내가 시킬 일이 좀 있어서.”
재하는 이경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이경은 재하에게 잡혀 있는 손목을 빼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차이경, 내 개인 비서 아니지.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시킬 일 있으면 불러들이는 거지.”
재하는 짜증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재하가 성현과 통화하는 사이 이경은 다시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빨리 먹고 빨리 들어가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허겁지겁 버거를 먹고 있는데, 재하가 이경의 앞으로 콜라를 쓱 밀었다. 마시라는 뜻인 것 같아 이경은 바로 콜라를 마셨다.
“알았으니까 끊어.”
재하는 전화를 끊어 버리고, 이경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혼자 드실 수 있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재하에게 핸드폰을 돌려받자마자 이경은 떠날 준비를 했다. 성현에게 전화가 와 마음이 급했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나 보다.
“야!”
재하가 버럭 성질을 냈다.
저 성질머리. 엉거주춤 일어섰던 이경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만 입이고, 나는 주둥이야? 나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성질을 낸 재하는 이경이 남긴 버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마저 먹으라고 말을 덧붙였다.
어쩔 수 없이 이경은 성현에게 금방 들어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남긴 버거를 먹었다.
재하는 속이 터질 정도로 느리게 먹었다. 일부러 저러는구나, 확신이 들 때쯤 재하가 입을 열었다.
“하나 더 먹어.”
“괜찮습니다. 배부릅니다.”
“못 해 먹겠네, 씨.”
뒤의 ‘발’은 음소거로 삼킨 재하가 남은 버거를 두 입 만에 먹어 치우고 콜라를 맥주처럼 시원하게 들이켰다. 티슈로 입가를 닦고 일어난 재하는 성큼성큼 가게를 빠져나갔다.
이경은 얼른 재하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저는 여기서 가 보겠습니다.”
이경이 운전석 문을 연 재하를 보며 말했다.
“타.”
“네.”
또 성질을 부리기 직전의 얼굴이라 이경은 군말 없이 조수석에 탔다.
“저, 로펌으로 데려다주실 생각이면 집에 먼저 가 주세요.”
이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는 내가 운전기사로 보이지?”
재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경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타라고 하셔서 데려다주신다는 건 줄 알았습니다.”
“데려다주는 거 맞아. 집 어디야.”
재하의 물음에 이경이 집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었다.
재하가 이경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얼마 후, 이경의 집 앞에 재하의 차가 멈춰 섰다. 재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다 쓰러져 가는 빌라 건물을 바라보았다.
“귀신의 집이야?”
“사람의 집입니다.”
이경은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차이경 진짜 가난한가 보네.”
“말씀드렸잖아요. 가난하다고. 금방 나오겠습니다.”
이경은 조수석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고 쇼핑백들을 꺼냈다. 이걸 잔뜩 들고 가면 하경이 놀라겠다고 생각하며 이경은 얼른 집으로 올라갔다.
예상대로 하경은 깜짝 놀랐고, 이경은 갔다 와서 얘기해 준다고 말하며 재빨리 집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온 이경은 재하의 차에 탔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이경, 나 여기 일부러 데려왔지.”
재하가 안전벨트를 매는 이경을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보았다.
“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이경이 시큰둥한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동정심 사려고 너 사는 꼴 보여 준 거 아니야?”
“동정심이 들기는 하세요?”
또라이 양아치한테도 동정심 같은 게 있나, 의아해하며 이경이 물었다.
“마음이 좀 약해져. 차이경, 나한테 건방 한번 떨어 봐.”
“건방을 떨라고요?”
이경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평소처럼 재수 없게 굴어 보라고.”
“제가 재수 없었습니까?”
“여자 윤성현이잖아, 차이경.”
재하의 말에 이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윤 변호사님이랑 내가 비슷한가? 괜히 기분이 좋아져 입가가 자꾸만 올라간다.
“표정 봐라.”
재하가 입술을 비틀었다.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은 그는 거칠게 운전을 시작했다.
어느새 재하의 차가 로펌 앞에 멈추었다. 성격만큼이나 난폭한 운전이었다고 생각하며 이경은 안전벨트를 풀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퉁명스럽게 대답한 재하는 이경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왜 또 저래.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이경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이경이 내리자마자 재하의 차가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성질머리 나쁜 차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경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로펌으로 들어갔다.
***
붉게 상기된 얼굴, 웃을 듯 말 듯 올라가는 입꼬리.
“젠장.”
여자 윤성현이라는 말에 얼굴을 붉히던 이경이 떠오르자, 재하는 욕이 튀어나왔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마음에 안 들게.
집무실을 쓸데없이 돌아다니던 재하는 발에 걸리는 쓰레기통을 걷어차 버렸다.
그와 동시에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짜증을 담아 대답을 하니 황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 비서는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재하를 보았다.
“회의 들어가셔야 하는데요?”
황 비서가 재하와 눈을 맞추지 않고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황 비서.”
재하가 문 옆에 서 있는 황 비서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황 비서가 쭈뼛쭈뼛 재하에게 다가왔다.
“표정 마음에 안 들어, 황 비서.”
재하가 인상을 쓰며 황 비서를 보았다.
황 비서가 경계하는 표정을 바로 고치고 빙긋 미소 지었다.
여전히 험악한 인상으로, 재하가 황 비서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가까이 끌어왔다. 식겁한 표정의 황 비서가 고개를 최대한 뒤로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