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윤성현 변호사님일 겁니다.”
이경이 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곧바로 문을 연 이경은 앞에 서 있는 성현의 모습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저 지랄 맞은 서재하 혼자 상대 안 해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안으로 들어온 성현은 이경의 어깨를 살짝 잡고,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뭐, 내가 차이경 잡아먹기라도 했을까 봐?”
재하가 못마땅한 얼굴로 성현을 보았다.
성현이 재하에게 묵례하고는 객실 안을 둘러보았다. 남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차이경 변호사 호텔 방 안으로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다른 변호사한테는 이러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변호사들은 이러기 전에 다 떨어져 나갔으니까. 걔들은 술집으로만 불러도 도망을 갔는데 차이경은 좀 질기네? 마음에 들게.”
재하가 껄렁한 말투로 말했다.
“문제 만들지 마시란 얘깁니다. 전무님께 왜 사생활 전담 변호사가 따로 붙었는지 제가 다시 상기시켜 드려야 합니까?”
성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차이경, 너 왜 나한테 딸려 있냐? 네가 말해 봐.”
성현의 말에 재하가 피식 웃고는 턱짓으로 이경을 가리켰다.
“식당에서 옆자리 손님과 싸우고 경찰서로 끌려가셨습니다. 합의하셔서 처벌은 받지 않으셨지만 매스컴 보도가 나오는 바람에 욕을 아주 많이 얻어 드셨습니다.”
6개월 전, 서재하가 일으킨 폭행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합의가 된 덕분에 처벌은 면했지만 대중들의 시선은 따가웠다.
그 일 이후로, 서재하 사생활이 문제 되지 않도록 로펌에서 사전에 처리하라는 권명섭 회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욕을 아주 많이 처먹었지.”
재하가 입가를 부드럽게 올렸다.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전무님의 사생활을 관리하는 게 제 일입니다.”
“주로 내 아랫도리 관리를 하지.”
재하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말대로 사생활 전담 변호사들은 주로 서재하의 아랫도리 관리를 해 왔다.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대신 전담 변호사를 조롱이라도 하듯 재하는 하룻밤을 함께할 여자에게 각서 받는 일을 시켰다.
“차이경 변호사는 나가 있어.”
성현이 이경을 보며 말했다.
“네, 팀장님.”
이경이 성현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재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대로 나가려는데, 재하가 불렀다.
“차이경.”
이경이 다시 몸을 돌려 재하를 보았다. 재하는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내 이경에게 던졌다. 그가 던진 카드를 받은 이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재하에게 시선을 주었다.
“옷 사 입어.”
“괜찮…….”
재하에게 카드를 돌려주려고 발을 뗐는데, 재하가 이경의 말을 끊었다.
“사 입어. 구질구질해 보이니까.”
자존심을 짓뭉개는 재하의 말에 카드를 쥔 이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 전무님.”
성현이 항의하듯 입을 열었다.
재하는 성현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이경을 가만히 보았다. 이경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째 만나기만 하면 눈싸움을 하는 것 같다.
“한도가 얼맙니까?”
이경이 재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건방지게 내 카드에 한도 운운이야.”
“아주 비싼 옷을 사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차이경 재주껏.”
재하가 얼마든지 해 보라는 표정으로 손동작을 했다.
“감사합니다.”
이경이 재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스위트룸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이경은 벽에 등을 기대서서 재하가 준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받아서 나오기는 했는데 진짜 이걸로 옷을 사 입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서재하가 괴롭히고 있다는 건 분명하고, 그걸 어떻게 받아야 서재하 옆에서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친 척하고 진짜 비싼 옷을 살까, 아니면 다음에 그대로 돌려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성현이 나왔다.
“김 실장님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차 변호사는 따로 보고할 필요 없어.”
“네, 알겠습니다.”
성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이경은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집까지 태워 주겠다는 성현의 말에 몇 번 거절했지만, 성현은 기어이 이경을 차에 태웠다.
이경은 성현을 집 앞까지 데려가는 게 좀 창피했다. 다 쓰러져 가는 빌라에 사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카드 처리하기 불편하면 나 줘. 내가 처리해 줄게.”
운전을 하며 성현이 말했다.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성현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
성현은 짧게 대답하고 액셀을 밟았다. 차가 빠르게 깊은 밤을 달려갔다.
차에서 내린 이경의 얼굴이 붉었다. 빌라를 눈으로 훑는 성현은 무표정했지만 이경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경은 얼른 성현을 보내고 싶어 인사를 했다.
“다니기 괜찮아? 길 어둡던데.”
“괜찮습니다.”
“내일 봐, 차 변호사.”
성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다시 차에 탔다.
“들어가십시오.”
이경은 깍듯하게 그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한동안 서서 지켜보았다.
성현의 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이경은 집으로 들어갔다. 작은 미소를 입가에 달고.
***
[차이경 옷 안 사?]
이경은 재하에게서 온 메시지에 한숨을 내쉬었다.
카드를 받은 지, 딱 5일째. 5일 내내 이경은 재하에게 시달렸다. 그는 하루에 몇 번씩 메시지를 보내며 왜 옷을 사지 않냐고 닦달했다.
[바쁩니다.]
이경은 짧게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서류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번에는 전화가 왔다. 짜증 나는 걸 꾹 참고, 이경은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네, 차이경입니다.”
—네가 차이경인 건 알고.
“무슨 일 있으십니까?”
—도난당해서 신고하려고.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에 이경은 콧잔등을 찌푸렸다. 카드 얘기인가 보다.
“저는 경찰이 아니구요, 신고는 경찰에 먼저 하세요. 그 후, 법률적인 문제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내가 준 카드는 국을 끓여 드셨나.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리로 와. 처리해 줄 일 있어.
“평일 오전 11시입니다. 제가 처리해 드릴 일 없을 것 같은데요.”
—건방지고 싸가지 없어서 마음에 들어, 차이경.
피식 웃는 재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겠습니다. 호텔로 가면 됩니까?”
—회사로 와.
전화가 뚝 끊어졌다.
재수 없고, 싸가지 없고, 개념 없는 양아치 새끼. 이경은 화를 꾹꾹 눌러 담고는 사무실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 로펌을 나왔다.
WR 산업에 도착한 이경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하 전무의 방으로 올라가자, 비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차이경 변호사님, 오셨어요?”
재하에게 인사를 하러 왔던 날, 짧게 인사를 나눴던 비서가 이경을 알아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전무님 안에 계시죠?”
“네.”
비서는 재하의 집무실을 똑똑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고, 비서가 문을 열었다.
“들어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이경이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재하의 집무실 안에는 또 다른 비서인 황정식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이경은 황 비서와 눈인사를 하고는 재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가 입을 열었다.
“나 황 비서랑 자려고.”
“네에?”
재하의 말에 황 비서가 펄쩍 뛰었다. 그리고 재하를 미친놈 보듯 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재하는 황 비서를 쓱 한 번 보고는 이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이경은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설마 대낮부터 섹스 상대와 함께 계시리라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각서를 챙겨 오지 못했습니다.”
“아헉.”
황 비서는 입을 크게 벌리고 아연실색한 얼굴로 옆에 선 이경을 바라보았다. 보통 놀란 게 아니었는지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재하는 이경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쉽네, 황 비서. 다음 기회에, 응?”
재하가 황 비서에게 윙크하고는 나가 보라고 말했다.
황 비서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재하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일을 제대로 해야지, 차이경. 왜 안 챙겨 와서 황 비서랑 잠도 못 자게 해?”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밤낮 가리지 않고 꼭 챙겨 오겠습니다.”
이경의 말에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고 재하가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댔다.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책상 앞에 서 있는 이경을 관찰하는 시선으로 보았다.
“또 같은 옷.”
“시간이 없었습니다.”
“주말에는 뭐 했는데? 남자 친구랑 뒹구느라 바빴나?”
“…….”
이경은 대답 없이 재하를 가만히 보았다.
주말에도 로펌에 출근해서 일했다. 남자 친구 같은 건 없다. 서재하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말 내내 로펌에서 일과 뒹굴었다.
이경이 대답이 없자, 재하의 표정이 비틀렸다.
“차이경.”
“네, 전무님.”
“묻잖아. 남자 친구랑 뒹구느라 바빴냐고.”
묻는 재하의 얼굴이 사납다.
“일했습니다.”
“주말 내내?”
“네.”
“왜?”
짜증스럽던 재하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사납던 얼굴에 미소마저 떠올랐다.
“돈 벌려고요.”
“많이 벌려고?”
“네.”
“좋네, 직업 소명도 없고. 돈만 좋아하는 거 마음에 들어.”
재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처리해야 할 일이 뭔지 말씀해 주십시오.”
너랑 여기서 농담 따먹기 할 시간 없다는 말투로 이경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허투루 흘려보내는 시간이 이경은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얼굴에 티는 안 났지만.
“여기선 아니고. 따라와.”
재하가 걸어 놓은 재킷을 들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짜증을 억누르고 이경은 재하를 따라갔다. 재하는 그대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세단 앞에 멈춰 선 재하가 고갯짓으로 이경에게 조수석을 가리켰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경이 조수석에 탔다. 안전벨트를 매며 이경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운전석에 앉은 재하는 이경을 힐끔 보며 안전벨트를 맸다. 일은 혼자 다 하나, 중얼거리고 재하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회사를 빠져나온 차가 도착한 곳은 어느 명품 브랜드 매장이었다.
이경은 가방에 서류를 집어넣고, 재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드를 쓰라고 여기로 데려왔나 보다. 저 또라이가.
차를 세운 재하가 안전벨트를 풀며 이경을 보았다.
“내려.”
이경은 안전벨트를 풀지 않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 고이 모셔 둔 재하의 카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차이경, 이렇게 시시해? 옷 한 벌 안 사고 그냥 돌려줘?”
카드를 받아 든 재하가 재미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서 전무님 원하시는 스타일로 사 오세요.”
이경은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