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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4화 (4/83)

4화

이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하가 가리킨 남자를 보았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서재하.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남자는 피식 웃으며 이경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경은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남자의 앞에 놓아 주었다.

“작성하시면 됩니다.”

이경이 펜 두 개를 꺼내며 말했다.

남자에게 먼저 펜을 건네주고, 이경은 재하에게도 펜을 내밀었다. 재하는 펜을 받지 않고 이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경은 재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눈싸움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푸흡.”

그때, 서류를 작성하던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남자는 배를 잡고 웃어 댔다.

그제야 이경의 시선이 재하에게서 벗어나 남자에게로 향했다. 이 남자도 서재하 못지않게 미친 사람인가 보다.

“아, 미안해요.”

남자는 제법 정중한 태도로 웃은 것을 사과하고는 서명을 끝냈다.

이경은 힐끔 남자가 각서에 써 놓은 이름을 보았다. ‘하준오’라는 이름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가 작성한 각서 서류를 재하에게 넘겨주었다.

“서 전무님께서도 사인하셔야 합니다.”

다시 펜을 내밀고 이경이 재하에게 말했다.

“그 머리통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처먹어서 남자랑 잔다는데도 안 놀라.”

나지막한 욕과 함께 입을 연 재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경을 보았다.

“서 전무님 사생활에 관여할 생각 없습니다. 사인하시죠.”

놀라긴 했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이제는 하다 하다 남자하고도 놀아나는구나 싶었는데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재하가 한껏 비틀린 얼굴로 웃고는 펜을 향해 손을 뻗었다. 펜을 잡는 척하더니 재하는 이경의 손가락을 펜과 함께 꽉 잡았다.

“서 전무님.”

손가락이 잡힌 이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재하를 불렀다.

“차이경.”

재하는 이경을 빤히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얽혔다. 시선이 얽혔을 뿐인데 공기가 뜨거워졌다.

가끔 이런 순간이 있었다. 그저 서재하와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아랫배가 조이고, 목이 마른 그 순간이 오면 이경은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불편해졌다.

불편해진 공기의 흐름을 흩트리기 위해 이경은 재하에게 잡힌 손가락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을 아무리 당겨도 재하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놓으십시오.”

“그래.”

재하가 이경을 자기 쪽으로 확 당겼다가 잡고 있던 손가락을 놓았다. 그 바람에 이경은 다리가 꼬여 재하의 품으로 넘어졌다.

재하는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이경의 등을 잡아 주었다. 덕분에 이경은 순식간에 재하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재하의 냄새가 이경에게 훅 끼쳐 왔다. 한순간에 서재하의 냄새를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이경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재하가 등을 꾹 누르고 있는 바람에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았다.

“셋이 하는 건 어때? 너랑 나랑 쟤랑.”

그 상태로 재하가 이경의 귀에 속삭였다.

미친 양아치. 이경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재하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움직이던 이경은 어쩌다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짚었다.

이질적인 느낌에 허벅지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경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했다.

“어때? 먹음직해?”

재하가 귀에 속삭였다.

은밀한 재하의 목소리에 이경의 귀가 붉어졌다. 이경은 재하에게서 빠져나와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소파에 앉아 있는 재하를 내려다보며 이경이 입을 열었다.

“성희롱입니다.”

“네가 한 건 성추행이고.”

“…….”

이경은 다시 재하와 눈싸움을 했다.

만진 건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를 고민하다가 이경은 가방에서 재하의 도장을 꺼냈다. 이경이 재하의 손에 도장을 쥐여 주었다.

“뭐? 찍으라고?”

“네.”

“싫어.”

서전또. 이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도장을 쥔 재하의 손을 잡아 그대로 각서에 도장을 찍게 했다.

“차이경.”

재하가 이경의 행동을 가만히 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바쁘신 것 같아서 제가 대신 찍어 드렸습니다.”

“사문서 위조야. 변호사라는 게.”

비난하는 재하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이경이 서류를 챙겨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이만 가겠다는 뜻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밖에서 기다려.”

“네.”

이경은 재하의 말에 순순히 대답하고 스위트룸을 나갔다. 여느 때처럼 김 실장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이경은 멈칫했다.

남자라고 써도 되나. 의뢰인의 성 정체성은 지켜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이경은 성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통화 가능하시냐고 보낸 메시지에 곧바로 성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경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차이경입니다.”

이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상의드릴 일이 있어 메시지 드렸습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말해.

“서 전무님께서 오늘은 남자와…….”

이경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 남자와 잔다는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폭행이야?

핸드폰 너머 성현의 목소리에 긴장이 묻어났다.

“폭행은 아니고, 함께 호텔에 들어가셨습니다. 밤 상대가 남자라는 걸 김 실장님께 알려야 할지 고민돼서 연락드렸습니다.”

성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차 변호사 지금 어디야?

“서 전무님이 대기하라고 하셔서 객실 앞입니다.”

—WR 호텔?

“네.”

—기다려. 갈 테니까.

성현의 전화가 끊어졌다.

이경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객실 문을 노려보며 남자, 여자 안 가리는 서재하의 문란함을 욕하다 가방에서 확인해야 할 서류를 꺼냈다.

서류를 꺼내 든 이경이 복도에 털썩 앉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서류를 살폈다.

20여 분 후, 스위트룸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든 이경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은 꽤 길다고 생각하며 스위트룸을 나온 하준오를 바라보았다.

“차이경 변호사.”

준오가 이경의 앞에 섰다. 준오는 탐색하는 시선으로 이경을 살폈다. 그러다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생해요.”

준오는 소리 내어 웃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이경을 돌아보았다.

“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아요.”

“네.”

무슨 오해를 하지 말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경은 대답을 했다.

준오는 작게 웃으며 사라졌다.

준오가 떠나고 이경은 닫힌 스위트룸 문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는 여자들이 나가며 들어가란 소리를 전해 주었는데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갔다.

들어가야 돼, 말아야 돼, 고민을 하며 3분여를 흘려보냈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야! 왜 안 들어와?”

재하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늘 샤워 가운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옷을 멀쩡하게 다 입고 있었다.

“들어오라는 말씀이 없으셔서 고민 중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바로 들어와.”

“네.”

이경은 대답을 하고 재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재하는 스위트룸 가운데에 서 있는 이경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팔짱을 낀 삐딱한 자세로 이경의 주변을 돌던 그가 그녀의 앞에 딱 멈추었다.

“보고했어?”

“윤성현 변호사님께 연락드렸습니다.”

“뭐라고 보고했는데?”

재하가 한쪽 입가를 올리며 물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요.”

“있는 사실 그대로 뭐?”

“서 전무님 밤 상대가 남자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경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재하의 고급스러운 가죽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커다란 발도.

“밤 상대.”

재하는 픽 웃으며 이경이 사용한 단어를 따라 했다. 그러더니 이경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섹스 상대겠지.”

“네.”

“고상하셔서 그런 단어는 안 쓰시나? 그럼 떡 치는 상대는 어때?”

“앞으로는 섹스 상대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이경이 재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재하는 웃으며 이경에게서 떨어져 소파에 몸을 기대고 섰다. 기대선 채로 재하는 이경을 훑어 내렸다.

“매일 같은 옷이네, 차이경은.”

“…….”

“가난해?”

“네.”

재하의 물음에 이경이 바로 대답했다.

한때는 넉넉한 집이었다. 부모님은 냉면집을 하셨는데, 여름이면 번호표까지 나눠 줘야 할 정도로 아주 잘됐다.

인생의 대부분을 돈 걱정 없이 살다 한순간 가난해졌다. 가난했던 시간보다 부유하게 살았던 시간이 훨씬 길었지만 지금은 가난함에 더 익숙하다.

“돈 필요해?”

“네.”

이번에도 빠르게 대답했다. 돈이 필요하니까 너 같은 양아치 뒤치다꺼리하고 있지. 그 말은 꾹 삼키며.

“얼마나?”

“많이요.”

“열심히 벌어.”

재하가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네.”

이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는 말없이 이경을 보다 미나 바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며, 이경을 돌아보았다.

“너도 줘?”

“괜찮습니다.”

“물 줄까?”

“괜찮습니다.”

“주스는?”

“괜찮습니다.”

“옷 사 줘?”

“괜찮…… 습니다.”

툭 던져진 재하의 말에 습관적으로 대답하다 그의 말을 제대로 인지한 이경의 대답이 느려졌다.

“거슬리잖아. 매일 똑같은 옷이라.”

“깨끗이 세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벌은 아닙니다. 똑같은 옷을 두 벌 샀을 뿐입니다.”

“차이경.”

“네.”

이경이 잠시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르게 고치며 대답했다.

“너도 엿 같지? 나 같은 새끼랑 이러고 있는 거.”

재하가 맥주를 물처럼 마시며 이경을 보았다.

“돈 받고 하는 일, 이런 새끼면 어떻고 저런 새끼면 어떻습니까.”

이경의 말에 재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또 소년처럼 싱그러운 웃음이다. 이렇게 웃을 때면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다.

저 얼굴에는 양아치 같은 행동보다 저 싱그러운 웃음이 더 잘 어울릴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이경은 재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왕이면 착한 새끼가 낫지.”

맥주 캔을 찌부러트리고 재하가 이경에게 다가왔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경과 재하의 고개가 문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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