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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3화 (3/83)

3화

“어딜.”

재하는 이경이 사이를 벌린 만큼 이경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다시 재하의 냄새가 이경을 억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피하는 대신 이경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이경은 긴장한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재하의 시선에 자꾸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김 실장한테 보고는 잘했나?”

재하는 이경을 내려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

삐뚜름한 재하의 미소를 보며 이경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서석호 부회장의 비서에게 따로 보고를 올리는 건 비밀로 하라고 했었다. 들키면 안 되니까 특별히 조심하라고.

근데 알고 있었어? 이경의 입술이 움찔거렸다.

“뭐라고 보냈어? 서재하 저 새끼 여자 만납니다. 아주 지랄 맞은 새낍니다. 변호사 하나 떼어 내려고 온갖 지랄이란 지랄은 다 합니다.”

재하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하며 흘러내린 이경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말투는 껄렁한데, 손끝은 조심스러워 참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재하의 손가락이 살짝 귀를 스쳤다. 이경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김 실장이 누굽니까? 제가 보고를 올릴 사람은 윤성현 변호사님밖에 없습니다.”

이경이 일단은 시치미를 뗐다. 알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찔러 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 태만이야, 차이경. 왜 할 일을 안 해.”

재하가 이경의 턱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재하의 손길에 이경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모멸감이 느껴지는 재하의 행동을 꾹 참으며 이경은 눈을 내리깔았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재하가 이경의 턱을 거칠게 놓았다.

“김 실장이라는 분께 연락드리는 걸 원하시면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경이 재하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연기가 특기신가.”

재하는 이경의 말에 픽 웃으며 상스러운 욕을 내뱉었다. 상스러운 욕을 내뱉은 주제에 퍽 싱그러운 웃음을 지은 재하가 말을 이었다.

“차 변, 연기 잘하네.”

“감사합니다.”

“감사해?”

싱그럽던 재하의 웃음이 순식간에 비틀렸다.

재하는 이경의 팔을 잡고 바짝 끌어당겼다. 입을 맞춰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였다.

“너도 내가 우스워? 범죄자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는 주제에 어디서 건방을 떨어?”

재하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퍼졌다.

“지금 전 서 전무님 뒤치다꺼리하고 있습니다.”

이경이 재하의 사나운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이걸 이렇게 받나. 흥분되게.”

재하가 이경의 팔을 쥔 손을 놓고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대로 더 바짝 이경을 끌어당기며 미소를 지었다.

재하의 몸과 밀착된 이경은 몹시 당황했다. 샤워 가운 속 재하의 하체가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경의 머리가 하얘졌다. 하지만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경이라 얼굴만 보았을 때는 아주 평온해 보였다.

평온한 이경의 표정에 재하의 미소가 빠르게 사라졌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재하는 이경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재하에게서 풀려난 이경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흐트러진 옷을 정리했다. 다시 단정하게 돌아온 이경이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더 시키실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이경이 재하에게서 돌아서서 문으로 향했다.

“차이경.”

등 뒤에서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이 천천히 재하를 돌아보았다.

“내 눈에 한 번만 걸려. 재밌게 놀아 줄 테니까.”

나지막하게 퍼지는 재하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조심하겠습니다.”

협박에 가까운 재하의 말에 대답하고 이경은 스위트룸을 빠져나왔다.

서전또, 작게 중얼거리고 이경은 쭉 뻗은 복도를 흔들림 없이 걸어갔다.

***

“별일 없었고?”

이경의 보고를 듣고 난 성현이 물었다.

“호텔로 따라오라고 하셔서 따라갔고, 김 실장님께 보고했냐고 물으셔서 김 실장님을 아예 모른다고 했습니다.”

“호텔에서 아무 일 없었냐고, 차 변호사.”

“네,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묻는 성현에게 이경이 대답했다.

허리가 끌어당겨지고, 눈에 걸려 보라는 협박을 받긴 했지만 서 전무는 또라이니까 그 정도는 일도 아니라고 이경은 판단했다.

또라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경은 너그럽게 생각했다. 또라이가 괜히 또라이겠는가.

“서 전무가 술 권해도 마시지 말고, 업무 외적인 일 시키면 그게 뭐든 거절하고 그 자리에서 나와. 내가 책임져.”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이경은 성현의 말에 작게 웃었다. 그의 책임하에 놓여 있다는 게 괜히 든든하게 느껴졌다.

“나가 봐.”

성현이 서류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네.”

이경은 인사를 하고 성현의 방에서 나왔다. 이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이경의 얼굴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이경은 정신없이 일했다. 회의 준비를 하느라 오전 시간을 거의 다 썼고, 오후에는 안지혜 변호사를 따라 법원에 다녀오느라 바빴다.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일을 하던 이경은 11시가 되어서야 로펌을 나왔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경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이경은 작게 하품을 했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이경이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정류장 옆에서는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붕어빵이 벌써 나왔나, 좀 이르지 않나, 생각하며 이경은 붕어빵을 샀다.

“정리하고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아가씨가 딱 왔어. 이거 다 줄게요.”

붕어빵 아저씨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남은 붕어빵을 모두 싸 주었다.

“감사합니다.”

2천 원을 냈는데 붕어빵만 열두 개다. 떨이로 받은 붕어빵에 작은 행복을 느끼며 이경이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이경과 하경이 사는 집은 낡은 3층짜리 빌라다. 벽 군데군데에 금이 간 것이 보일 정도로 오래된 건물이었다.

냄새가 나는 더러운 계단은 센서 등이 나간 지 오래다. 이제는 익숙해져 어둠 속에서도 이경은 넘어지지 않고 계단을 잘 올라갔다.

2층에 있는 집 앞에 도착한 이경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동생 하경이 거실에 앉아 이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먹어. 붕어빵 사 왔어.”

이경이 안으로 들어가 하경에게 붕어빵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붕어빵이 벌써 나왔어?”

하경이 웃으며 붕어빵을 받아 들었다.

이경은 하경의 옆에 앉았다. 접이식 상 위에는 하경이 그린 그림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 그림들을 보며 이경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 컨디션은 어땠어?”

이경이 붕어빵을 먹는 하경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괜찮았어.”

“약은 잘 먹었지?”

“응.”

하경은 붕어빵을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홉 살 어린 동생은 이제 스무 살이 되었지만 이경의 눈에는 아직도 아기처럼 보였다.

하경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선천성 심장 기형으로 학교보다는 병원을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수시로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었다.

“맛있어?”

“언니도 먹어.”

하경이 얼른 이경에게 붕어빵을 꺼내 주었다.

이경은 하경이 꺼내 준 붕어빵을 받아먹으며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동생과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이경은 참 행복했다.

“매일 늦게까지 힘들지? 미안해, 나 때문에.”

붕어빵 하나를 다 먹고 나자, 하경이 미안한 표정으로 이경을 보았다.

“네가 왜 미안해? 언니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이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경은 하경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하경은 이경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고,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니 반드시 지켜 줄 것이다.

“항상 고마워, 언니.”

“너는 언니 옆에서 오래도록 건강하게 있어 주기만 하면 돼.”

이경은 하경의 뺨을 쓰다듬었다.

소중한 동생 하경을 위해서라면 이경은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또라이 서재하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정도로.

***

“하.”

이경의 한숨이 깊었다.

12시, 퇴근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경은 재하의 메시지를 받았다.

[지금 당장 와.]

호텔 스위트룸으로 오라는 메시지에 이경은 서랍을 열어 서재하 전용 서류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서전또.”

이번 주만 해도 벌써 세 번째 호출이다.

서재하 사생활 전담 변호사가 된 지 이제 2주째.

이경은 서전또라는 별명이 너무 약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치광이 정도는 되어야 서재하의 이상한 행동이 설명될 것 같다.

재하와 룸 안으로 들어간 여자들은 늘 5분을 넘기지 않고 나왔다. 화를 내는 여자, 어리둥절해하는 여자, 심란해 보이는 여자, 표정들은 모두 가지각색이었는데 다들 입을 모아 말했다.

‘나한테 안 꼴린대요.’

언젠가 재하는 자기가 조루인 줄 아냐고 했지만 조루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경은 서재하가 고자가 아닐까 의심하는 중이었다.

왜 기껏 발설 금지 각서까지 쓰게 만들고는 여자를 그냥 돌려보내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치광이 고자가 아니고서야. 쯧쯧 혀를 차며 이경이 로펌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한 이경은 재하가 주었던 스위트룸 카드 키를 가방에서 꺼냈다. 들어간다는 노크를 한 번 하고, 카드 키로 객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간 이경은 소파에 앉아 있는 재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또라이 서재하는 여자가 아닌 남자와 함께 있었다. 이경은 의아했지만 감정을 얼굴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이경이 재하를 보며 단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얘랑 자려고.”

단정한 이경의 얼굴과는 정반대의 얼굴인 재하가 고갯짓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서전또, 진짜 가지가지 한다. 이경이 서재하의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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