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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1화 (1/83)

1화

“윤 변, 이젠 나한테 햇병아리까지 붙이려고?”

픽, 웃는 입꼬리가 상당히 불량하다. 책상에 두 발을 얹은 자세는 그 불량한 표정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윤성현의 옆에 선 차이경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경은 지금 이 순간, 안지혜 변호사의 말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서전또. 서 전무가 또. 혹은 서 전무 또라이. 후자로 쓰일 때가 많지.’

가볍게 고개를 휘저으며 지혜는 이경을 불쌍한 눈으로 보았다.

이경은 윤성현 변호사를 따라 WR 산업 전무실에 들어온 지 1분 만에 지혜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서재하 전무는 정말 또라이였다.

“차 변호사, 다시 제대로 인사드려.”

성현이 딱딱한 목소리로 옆에 선 이경에게 말했다.

이경이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서 전무 또라이를 쳐다보았다.

다시 봐도 참 잘난 얼굴이다 싶었다. 교육 잘 받고 자란 어느 댁 도련님 같은 얼굴이면서 표정과 말투는 길바닥 양아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차이경입니다. 서재하 전무님 사생활 케어 전담 변호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경은 차분한 얼굴로 재하에게 두 번째 인사를 했다.

가만히 쳐다보는 재하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경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변호사는 의뢰인과의 기 싸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여기서 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재하의 시선이 이경을 샅샅이 살피는 동안, 이경도 재하를 샅샅이 살폈다.

눈매가 깊은 남자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심연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다. 귀티 나는 이목구비만 보면 거친 구석 하나 없을 것 같은 남자인데 목 아래로는 심각하게 불량하다.

느슨하다 못해 풀리기 직전인 넥타이와 풀린 셔츠 단추.

내내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길게 뻗은 두 다리.

의자에 한껏 흐트러져 있던 남자는 걸려 있다시피 한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 허여멀건 놈은 어디 가고? 술 좀 먹였다고 도망이라도 갔나?”

재하의 시선이 이경에게서 성현에게로 옮겨졌다.

“술 좀 먹이신 거 아니지 않습니까.”

“잘 놀아 줬는데 배은망덕하게 도망은.”

재하가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넓은 전무실이 꽉 채워진 느낌이다.

성현의 키도 꽤 큰 편이었는데, 재하에 비하면 엄청 크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큰 키에 좋은 체격이 상당히 위압적이다.

“차이경 변호사는 여잡니다. 이 점 분명하게 인지하시고 행동해 주시길 바랍니다.”

성현이 재하를 보며 말했다.

“윤 변은 우리 영감님 마음에 들었다고 내가 우습지?”

재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성현을 무표정한 얼굴로 보았다.

“전무님 사생활 전담 변호사만 벌써 여덟 번째 교체입니다. 그중 다섯 명이 로펌을 그만두었습니다.”

“쟤는 며칠 붙어 있을 것 같아?”

재하가 피식 웃으며 이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오래 붙어 있었으면 합니다.”

성현이 뭐라 대답을 하기 전에 이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하의 눈을 똑바로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가방을 쥐고 있는 이경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길어야 일주일일 것 같은데?”

“더 쓰시죠. 일주일은 너무 짧습니다.”

이경이 단정한 말투로 재하에게 대꾸했다.

재하의 한쪽 입가가 올라갔다. 탐색하듯 살피는 눈빛이 이경의 얼굴 곳곳에 닿았다.

“명함 드려, 차 변호사.”

성현이 이경에게 말했다.

“네.”

이경은 오늘 아침에 따끈따끈하게 나온 명함을 꺼내 재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공손하게 두 손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재하는 가까이 다가온 이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입술에 머무는 게 느껴져 이경은 부러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재하는 이경이 내민 명함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명함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재하가 이경을 보았다.

“여기에 있는 번호로 연락을 하면 차이경이 언제 어디서든 나한테 달려오는 건가?”

“법적 자문이 필요하실 때만 연락하십시오.”

어느새 이경의 옆으로 성큼 다가온 성현이 재하를 보며 말했다.

“법적 자문 말고 밤의 자문이 필요할 수도 있지.”

재하가 이경의 명함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양아치, 이경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방을 좀 더 힘주어 잡았다.

“성희롱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언행 주의해 주십시오.”

성현이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소할 거야?”

재하가 이경을 삐딱하게 보았다.

“하고 싶습니다.”

이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양아치 주제에 꽤나 싱그러운 웃음이라 이경은 좀 당황스러웠다.

입 다물고 있으면 귀족 같고, 입 열면 양아치고, 웃으면 또 소년 같고. 그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고소를 당하면 변호사가 필요할 거고. 차이경 변호사, 어디 한번 잘 버텨 봐.”

웃음을 거둔 재하가 이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커다란 그 손을 이경이 잠시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이 그에게 잡아먹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경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

하얀 복도를 걷는 이경은 긴장이 풀렸는지 속이 약간 울렁거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앞서 걷고 있는 성현을 바라보았다.

재하와 달리 성현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반듯하고 단정했다. 법무 법인 송하의 파트너 변호사인 성현은 모든 것이 절제되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그 절제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오는 신뢰감이 이경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성현이 버튼을 누르고 이경을 돌아보았다.

“느꼈겠지만 서재하 전무 쉬운 사람 아니야. 차 변호사가 중심 잘 잡아야 할 거야.”

“네, 팀장님.”

이경은 각오가 되어 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힐끔 성현이 이경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느껴져 이경 역시 옆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문제 생기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네.”

이경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안으로 들어간 성현을 따라 이경도 엘리베이터에 탔다.

로펌으로 돌아온 이경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안지혜 변호사에게 잡혀 휴게실로 끌려갔다.

“자.”

커피를 내려 온 지혜가 이경에게 머그컵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이경은 지혜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커피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서 전무, 어땠어?”

“말씀하신 그대로였어요.”

“또라이?”

“네.”

지혜의 말에 이경이 작게 웃었다.

“진짜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다. 남자 변호사들도 못 버텨서 다 도망간 마당에 여자 변호사를 들이밀어? 이건 미친 짓이야.”

지혜가 고개를 다시 절레절레 흔들었다.

법무 법인 송하, 한국 최고의 로펌.

그 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해 왔을 때 이경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경은 변호사만 되면 돈을 많이 벌 줄 알았다.

돈 많이 벌려고 검사가 아닌 변호사가 되었지만 소형 로펌을 다녀서인지 수입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이경이 변호사가 된 이유는 오직 돈이었기에 송하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했다.

가겠습니다, 자존심이고 뭐고 세울 처지가 아니었다.

“제가 잘 버티면 되죠.”

전에 다니던 소형 로펌보다 급여를 딱 두 배 더 받았다. 이경은 이것만으로도 버텨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WR 그룹의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한 서재하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업무일지라도 꼭 버텨야 했다.

WR 그룹은 송하의 최대 고객이었다. WR 그룹 전담 팀이 따로 있을 정도로 아주 중요한 고객.

WR 그룹의 전담 팀은 파트너 변호사인 윤성현이 이끌고 있었고, 이번에 이경은 그 팀의 서재하 사생활 전담 변호사로 스카우트되어 들어갔다.

“서전또를 어떻게 버텨. 변호사를 지 종 부리듯 하는데. 아니, 차라리 종이 낫지. 이건 뭐 완전 장난감 취급이잖아. 여자라고 서전또가 봐줄 것 같아? 대표님 생각 잘못 하시는 거라니까.”

서재하의 전적은 화려했다. 이경 이전에 여덟 명의 사생활 전담 변호사를 갈아치웠다. 대다수가 곱게 공부만 하던 변호사들이라 재하의 거친 구석을 참아 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골머리를 앓던 송하의 대표는 차라리 여자 변호사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여자라면 그렇게까지 함부로 못 하지 않겠냐며.

“버틸 때까지 버텨 봐야죠.”

이경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난 도망가는 거 추천.”

WR 그룹 전담 팀원인 지혜는 재하에게 쌓인 것이 많은 얼굴이었다.

생각만으로도 치 떨린다는 표정이라 이경은 서재하가 어떤 또라이 짓을 할지 은근히 기대되었다.

“돈 벌어야 해서 도망 못 가요.”

“그게 제일 큰 문제라고.”

지혜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경을 송하에서 스카우트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이경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서재하가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또라이 짓을 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가난하고 빽 없는 이경이라면 재하에게 무슨 짓을 당해도 입을 막기 쉬울 테니까.

안지혜 변호사는 내부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을 때 처음부터 결사반대했다.

힘없는 여자 찍어 누르는 게 뭐 자랑이냐며 화를 굉장히 많이 냈었다고, 사무실을 같이 쓰는 1년 차 변호사 주나현이 알려 주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변호사님.”

“내 성격이 더러워서 그래.”

지혜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짧은 티 타임을 끝내고, 이경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출근한 지 이제 딱 3일째지만 일이 쏟아졌다. 파트너 변호사들이 지시한 일과 리서치를 처리하고, 회의록 작성을 하고 나니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이경은 기지개를 켰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1~2년 차 변호사들의 얼굴에도 피로가 가득 묻어 있다.

목을 주무르던 이경은 진동 소리에 책상에 올려놓은 핸드폰으로 시선을 주었다.

[서재하 전무]

핸드폰 화면에 뜬 글자에 이경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이경이 전화를 받았다.

“네, 차이경입니다.”

—여기로 좀 와. 법적 자문받을 일이 생겼거든.

잔뜩 가라앉은 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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