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외전 - 다시 시작하기
해인은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여름에 가까워진 햇살이 유달리 강하게 눈을 찌르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역광 사이로 나타난 거슬리는 얼굴 때문이었다.
근래 들어 눈에 익은 차가 아뜰리에 주차장에 들어오나 싶었는데, 역시나 그 남자였다.
“……또 왔네. 저 남자.”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면서도 해인은 남자가 차에서 내리도록, 그리고 곧장 저를 향해 걸어오도록 눈을 떼지는 못했다.
저 남자가 나타나면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제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저 남자가 불편했다.
“안녕, 해인 씨.”
즐거운 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를 해인은 언짢은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그는 햇살에 바스러질 듯한 밝은 머리색과 유난히 짙은 눈 색을 가지고 있었다.
어딘가 얄궂은 모양의 입술은 흔히 말하는 섹시한 남자의 것이었지만, 해인이 보기에는 그냥 이상한 남자일 뿐이었다.
그의 등장을 매우 불편해하는 해인의 태도에도 그는 마냥 웃어 보였다. 꽤나 뻔뻔한 남자라는 건 이제 분명히 알겠다.
“오늘은…… 왜 또 왔어요?”
“이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도와줄까 하고.”
오늘 이사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해인은 남자를 노려보듯 올려다봤다. 한 달 전에 처음 본 이 남자는 지금처럼 해인의 주변을 시시때때로 배회하고는 했다.
신경 쓰일 즈음 되면 사라졌다가, 잊을 만하면 다시 나타났다.
왜 그러지는 알았다. 본인 말로는 자신과 잘 아는 사이라고 했으니까. 기억에는 전혀 없지만 말이다.
‘……사실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연인이었다고 했지만.’
문제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거였다. 차라리 그냥 아는 사이, 그 정도로만 했으면 순순히 납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연인이라니. 자신이 아는 한 자신에게 그런 건 절대 무리였다.
해인은 고개를 내두르며 남자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한 달 전 이 남자가 난데없이 나타나 저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던 순간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남자가 힘주어 붙잡았던 어깨에는 아직도 그의 손아귀가 느껴지는 듯했다.
아프도록 끌어안긴 기억은 오래가는 법인가 보다.
그리고 그에 놀라 길바닥에서 울음을 터트려버린 건 정말 창피하고 화나는 일이었다. 자신이 울어버린 걸 해인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때 경찰에 신고했어야 하는데. 넘어갔더니 계속 나타나지 않는가. 이런걸 뭐라고 하더라…… 그래.
“……스토커 같아.”
남자를 흘겨보며 작게 중얼거렸지만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뭐라고 불러도 좋은 모양이었으니까.
“수문이한테 우연히 들었거든. 이사하는 데 남자 손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잖아.”
해인은 힐끔, 뒤쫓아오던 수문을 노려봤다. 수문은 해인의 짐을 날라주다 말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출처야 뻔했다.
강수문과 강시율, 이 두 남자가 친척이라는 데 해인은 꽤나 불만을 느끼는 중이었다.
수문의 친척만 아니라면 이 남자가 제 주변에서 이렇게 얼쩡거릴 핑계가 줄어들 텐데.
아무리 전에 아는 사이였다고 하고, 조심조심 얼쩡거려도 기억에 없는 커다란 남자는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절로 한숨이 삐져나왔다.
“하아…….”
“귀찮게 안 할게.”
“시율 씨는 전문직이라고 들었는데, 꽤 한가하신가 봐요?”
“……요즘은 휴직 중이거든.”
남자는 해인의 어지간한 핀잔이나 박해에는 눈도 하나 깜짝 안 했지만, 이상하게 거리를 두고 자신을 부르면 그것만은 조금 슬퍼하는 눈치였다.
씁쓸하게 웃으며 저를 보면 그게 또 신경 쓰여서 큰일이었다.
하지만 강시율을 달리 뭐라고 부른단 말인가. 심지어 나이도 다섯 살이나 많은 남자를 이름만 부를 수도 없었다.
해인은 이래저래 이 남자가 불편할 따름이었다.
“아무튼 사람은 충분해요. 우리끼리 할 수 있어요. 안 도와주셔도…….”
“저기, 해인 씨?”
“앗.”
“형…… 짐 가지러 올라가 버렸는데.”
남자는 말하는 와중에 사라지고 없었다. 휙 돌아보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만 보였다.
하여간 남의 말 정말 안 듣는 남자였다.
애꿎은 수문만 이를 갈며 노려봤다. 이게 다 강수문 때문인 것 만 같았다. 수문의 친척만 아니었으면 진작 떨쳐냈을 텐데.
극구 도와주겠다는 이삿짐이라고 해봐야 작은 1톤 트럭 하나 겨우 채우는 수준의 양이었다.
용달 아저씨와 수문이 도와주고 자신과 이영이 같이 나르는 거면 충분했다. 해인은 남자가 상자 하나를 들고 내려오자마자 쪼르르 달려갔다.
“이봐요!”
“말해.”
“도움은 됐다니까요! 왜 남의 걸 맘대로 만지고 그래요?”
해인이 신경질적으로 남자의 손에 들린 짐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오른손 하나로는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손 하나로는 큰 상자를 들 수도 없으니 말이다.
“남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데.”
“댁이 뭐길래요?”
“일단, 수문이 사촌 형이지.”
그거 아주 대단한 방패였다. 둘이 하나도 안 친한 걸 뻔히 아는데. 어렸을 땐 자주 봤지만 성인이 되고는 거의 안면이 없었다고 이미 수문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해인은 제가 뻔뻔하지가 못해서 이런 뻔뻔한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 남자의 이런 억지에는 슬슬 화가 났다.
“그래도 이럴 권리는 없는 거죠! 빨리 그거 내려놔요.”
“어떻게 들려고 그래. 저기까지 옮겨만 줄게.”
“이, 그거 내놓으라고요! 주인 허락 없이 이러는 건…… 이런 건, 명백한 도둑질이에요! 알아요?!”
남의 도움 받는 건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상자를 뺏고 싶어서 잠시 버둥거렸지만 남자의 옷깃만 붙잡고 늘어지는 꼴이었다.
해인은 제가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성질이 났다. 결국엔 버럭, 하니 소리를 질렀다. 자꾸만 자신의 생활에 끼어드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 그래? 그럼 경찰을 불러야지.”
“뭐예요?”
“도둑에, 스토커라며.”
“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내가 아는 한, 넌 그런 짓은 못 하는 여자야. 안 그래?”
다 안다는 듯 씩 웃고는, 마저 상자를 나르는 남자가 왜 이렇게 얄미워 보이는 걸까.
“으이 씨.”
언제 봤다고 다 아는 것처럼 군담. 내가 경찰을 못 부를 것 같아? 까짓것…… 까짓것…….
남자의 말이 맞았다. 해인은 그런 짓은 할 수 없었다. 말처럼 쉽지도 않을뿐더러, 남자는 교묘하게 해인이 심하다고 느끼는 경계는 넘지 않았다.
엄청 신경 쓰이게 하면서도, 막상 성질을 내려고 하면 사라지고 없어서 약 오르게 할 뿐이었다.
해인은 제 분에 못 이겨 그 자리에 서서 씩씩거리며 화를 식혀야만 했다.
“해인 씨.”
그때 수문이 곁으로 다가왔다. 해인은 울상을 하고는 돌아봤다.
“수문 씨가 잘 말해준다고 했잖아요!”
“……말, 하긴 했는데.”
저 이상한 남자, 저는 역시 모르겠다고. 불편하니 안 보이게 해달라고 했더니 자기가 잘 말해주겠다던 수문은 오히려 저쪽 편이 된 느낌이었다.
역시 가재는 게 편인 걸까. 수문은 난감한 듯했다.
“형이 원래도 좀 개인주의긴 했는데…… 저런 식은 아니었거든?”
“나한테 왜 저런대요, 도대체?”
“……해인 씨가 좋은가 봐.”
“으악, 누가 그런 부담스러운 얘기 듣고 싶대요?”
해인은 대번에 질색했다. 누굴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그런 건 너무 낯설고 부끄럽고 창피하게만 느껴졌다.
연애라고는 쥐꼬리만큼도 관심 없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 해인에게 우리가 사랑했고, 같이 살았다고 주장하는 남자는 난감한 존재일 뿐이었다.
“정말이야. 그리고 형 말로는 해인 씨랑 자기가 연인이었다고…….”
“증거도 없어요. 그런 건!”
“해인 씨…….”
“그렇잖아요! 전에 우리가 알고 지냈다느니, 사귀었다느니…… 그 얘긴 나한테도 했지만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없는데 그걸 어떻게 믿어요? 정말이라면 그런 증거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요?”
겨우 1년 사이에,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평생에 비하면 짧은 그 시간에 자신이 누굴 좋아하고, 사랑하고, 심지어 같이 살았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라 더더욱 믿을 수 없다고 하면, 누군간 이해해줄까?
낯선 이에 고질적인 반항감과 불편함이 해인을 더욱 날 서게 만들었다.
“저기, 형이 성격이 좀 냉해서 그렇지 절대 이상한 장난 칠 사람은 아니거든. 형은 진지했어. 해인 씨에 대해 말할 때…….”
“애초에 기억도 안 나는데 그런 얘기 해봤자 무서울 뿐이에요. 그리고 만에 하나 사귀었다고 해도, 증거도 없고! 기억도 없고! 그럼 안 사귄 거랑 뭐가 달라요?”
경계로 똘똘 뭉친 해인의 성격을 아는 만큼 수문은 해인이 이것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았다. 원래부터 남자라면 아주 불편해하는 해인이라 저도 이영과 함께가 아니면 말도 잘 걸지 못했으니 말이다.
시율에게 경고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한 달 전 시율이 처음 아뜰리에에 방문했던 날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형! 해인 씨한테 왜 그래, 대체? 언제 봤다고 그러느냐고. 무서워하잖아.’
‘……내 여자 친구야. 분명.’
‘가, 갑자기 나타서 뭐라는 거야, 지금?’
‘우린 같이 살았어. 박해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야. 사람…… 이라고.’
그때 시율은 조금 이상하게 굴었다. 혼란스러워 보였고 어지러운 눈을 했다.
수문에게 몇 번이나 해인에 대해 물었다. 몇 년을 알고 지냈는지, 어린 시절을 봤는지, 근래 이상한 일은 없었는지. 최근 1년 정도 행방을 아는지, 여러 가지를.
‘원래도 주로 혼자 숨어 지내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한 1년가량 정말 안 보였어. 그러고 보니 기억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거 비밀이랬는데.’
‘……날 못 알아보는 걸로 짐작하긴 했는데. 일단 그거면 충분해.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 넌 이제 신경 쓰지 마.’
‘잠깐, 형은 말이야. 머리가 좋은 건 알겠는데, 그래서 그런지 뭐든 혼자 생각하고 납득해버려. 그거 사람을 무섭게 하는 거 알아? 형이 뭘 납득했는지 모르겠지만 해인 씨는 전혀 아니라고. 신경 쓰지 말라는 거 무리야. 내 친구란 말이야.’
‘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해인 씨 겁 많은 사람이야. 낯가림도 심하고. 형이 억지로 뭔가 하려고 굴면 나 정말 못 두고 봐. 이영이한테도 혼날 거라고. 막 대하거나 하지 마!’
‘……그런 건 너보다 내가 잘 알아. 겁 많은 거, 낯가림 심한 거, 의심 많은 거, 어지간히 곁을 안 주는 거, 안 친한 사람 옆에서는 항상 도망칠 궁리만 하는 거.’
몇 년 만에 마주한 사촌 형과 뜬금없이 해인에 대한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그 이상한 상황에서, 수문이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던 건 시율이 한심하다는 듯 저를 봐서였다.
그리고 저보다 잘 알고 있는 것도 같아서. 시율은 귀신같이 해인의 특징을 읊고 있었다.
‘맞아. 그렇지. 그래서 이영인 고양이 길들이는 기분이라고 하고는 했어. 그래서 형은 이제 어쩔 작정인데?’
‘우선 옆에 있을 거야. 무서워하지 않기만 바라면서. 언젠가 날 기억해준다면 좋겠지만…… 안 된다면, 다시 시작하면 돼. 몇 번이고 할 수 있어. 짝사랑하는 건 이미 해봤으니까.’
이 형이 짝사랑을 하는 타입이었던가. 절대 아니었는데.
수문은 고등학생 시절 시율에게 몇 번인가 여자들의 편지를 배달한 적이 있었는데, 전부 눈앞에서 휴지통에 밀어 넣는 게 시율이었다.
또한 시율의 친부는 사람이 칼 같은 걸로 친척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는데, 그에 지지 않는 유일한 자식이 지금 눈앞에 있는 강시율이었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장담하는데 수문에게 시율은 그리 편한 친척 형은 아니었다. 인간미가 좀 없어서 가끔 무서웠다는 편이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전에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이제 좀 알 것 같아. 자긴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지…….’
작게 뭔가를 중얼거리며 시율이 혼자만 상황에 대한 안정을 찾아갈수록 수문은 오히려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해인과 시율은 수문으로선 생각도 못 한 조합이었다.
둘 사이에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 형, 정말 믿어도 되는 거지? 해인 씨한테 이상한 짓 같은 거 안 하는 거지?’
‘함부로 하래도 못 해. 그리고 네가 친구로서 그 녀석을…… 해인이를…… 걱정하는 건 좋은데. 날 방해하면 죽여버릴지도 몰라.’
‘……무섭게스리.’
‘내가 지금 원하는 건 그냥 곁을 맴도는 거야.’
바로 그게 스토커 같은 짓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수문은 내심 걱정하면서도 시율에게 그 이상은 제재를 가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도를 지나치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가장 큰 이유는…… 강수문은 강시율이 무서웠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
이삿짐을 나르는 건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아서 끝이 났다. 짐이 적기도 했고 도와준 사람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음에 놀러 올게요.”
용달 아저씨가 박스와 짐 위로 포대를 덮고, 끈을 여미며 마무리를 하는 동안 해인은 아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중 가장 아쉬워하는 건 이영이었다.
“해인 씨, 자주 놀러 와. 그냥 볼일 없어도 들리고 그래. 알았지?”
“네, 그럴게요.”
“다음엔 우리가 그쪽으로 한번 놀러 갈게. 정리되면 초대해줘.”
“음, 그냥 집에 남는 옥탑방을 작업실로 쓰는 거라…… 초대할 정도는 아닌데.”
“그래도! 꼭이다? 응?”
성화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어느새 마무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빵빵, 트럭의 경적 소리가 들렸다.
“이제 출발하시죠!”
“아, 네. 갈게요.”
“저기.”
막 돌아서려는데, 가만히 서 있나 싶던 남자가 다가왔다. 강시율. 해인은 또 경계의 눈을 하고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다소 살갑게 웃으며 뭔가를 내밀었다. 그는 처음 그날을 빼고는 항상 해인과 자신 사이에 한 걸음은 꼭 남겨뒀다.
“전에 증거를 보여달랬잖아. 이게 혹시 도움이 싶어서 해서 가져와봤는데.”
남자가 내밀어 보인 건 흔히 볼 수 있는 스케치북이었다.
해인의 눈에는 순간 증거라는 스케치북보다는 그걸 내미는 남자의 왼손이 먼저 보였다. 거기 끼워져 있는 반지 두 개.
“네가 그렸던 그림들이야.”
잠시 한눈을 팔았다가 남자의 목소리에 스케치북에 집중했다. 전문가용 스케치북 세 개였는데 하나하나가 꽤나 두꺼웠다.
맨 위에 스케치북을 집어 들기는 했지만 오른손만으로 펼치기가 조금 버거웠다. 쪼그려 앉아서 무릎에 올려놓고 펼쳐봐야 하나?
해인이 잠시 버벅대고 있자니 남자가 두 손으로 스케치북 밑을 받쳐줬다.
“자.”
“…….”
고맙긴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말하긴 싫은걸. 목구멍에서 안 나온단 말이야. 해인은 괜스레 입술을 내밀고는 스케치북 첫 장을 붙잡았다.
조금 긴장해서 넘겨 보려는데 이사센터 아저씨의 재촉이 들려왔다.
“아가씨! 지금 출발 안 하면 퇴근시간이라 길 막힐 텐데.”
“앗, 이거. 저기 이거…….”
“빌려줄게. 나중에 줘.”
“네?”
“나한텐 소중한 거니까 꼭 돌려줘야 돼.”
어느새 해인은 스케치북 세 개를 떠맡아버렸다. 남자는 해인의 옆구리에 야무지게 스케치북을 들려줬다.
잠깐, 이걸 받아 가버리면…….
“조심히 들어가. 나도 오늘은 이만 갈게.”
“어어…….”
“다음에 봐.”
이걸 돌려주러 만나야 하잖아! 소리치고 싶었지만 주변에 사람도 너무 많았고, 남자는 빠르게 가버리고 있었다.
그의 치고 빠지는 기술은 하여간 해인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증거를 이사하는 날 쥐여 주는 이유를 아주 잘 알 것 같았다. 다음에 만날 구실을 위해서였다.
“우 씨…….”
***
짐을 싣고 가는 트럭 안에서 해인은 참지 못하고 스케치북을 들춰 봤다. 콘솔박스에 기대두고 한 장 한 장 넘기는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제가 그렸다는 그림들은 양이 꽤 방대했다.
대부분 간단한 스케치였는데, 초반에는 잡다한 그림이 주를 이뤘다. 비중이 많은 건 작은 새였다.
“……새? 이게 내가 그린 거라고?”
동물을 그리는 취미는 없는데 새와 고양이투성이라는 게 이상했다. 애초에 이런 연필로 대충 날려 그린 그림을 보고 제가 그렸다는 확신을 얻을 수도 없었다.
연필로 그린 것들이 색연필 그림으로 바뀐 건 첫 번째 스케치북의 중간 즘부터였다.
슬슬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남자였다. 강시율. 중간중간 다른 얼굴도 조금 보이기는 했지만 대부분 한 남자였다.
뒷장으로 갈수록 점점 그림의 주제는 확고해졌다. 오로지 그 남자만 그리고 있었는데…….
탁.
해인은 세 번째 스케치북에서 더 이상 그림을 보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아저씨의 눈치를 살피는 건 행여나 그림을 봤을까 싶어서였다.
‘맙소사.’
민망하게도, 뒤로 갈수록 누드의 정도가 심해졌다. 그리고 근육의 형태에 대한 집착 같은 게 적나라하게 보였다.
중요 부위까지 그리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세밀한 등근육이나, 가슴에서 아랫배로 이어지는 미묘한 굴곡, 어깨의 울퉁불퉁한 모양, 엎드려 잠든 모습, 굴곡진 허리나 발의 모양.
그의 눈을 떴다 감는 순간들, 입술을 열었다 다무는 순간들. 야하게 웃는 순간의 얼굴.
힘이 들어간 목덜미나 팔뚝, 나른한 어떤 형태들. 절로 뺨이 달아오르고 목에 힘이 들어가는 건 이 그림이 어떤 순간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였다.
단편적인 스케치들뿐인데, 빤히 짐작이 갔다.
‘이게 내가 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그린 사람이랑 이 남자가 그렇고 그런 깊은 사이였다는 건 분명히 알겠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걸 그리진 못할 테니까. 겨우 스케치에서 야한 느낌이 들다니. 예술을 논하면서 이럴 순 없는 건데.
해인은 왠지 더워져서 차창을 조금 열었다.
부지런히 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면서는 이거 얼른 택배로 보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봉인해둬야지, 라고 다짐했던 스케치북을 다시 꺼내본 건 늦은 밤이었다. 옥탑방에 이삿짐들을 들여놓고 상자를 두어 개쯤 풀다가 잠시 쉬려고 앉은 즈음.
민망함에 덮어뒀던 스케치북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혼자 있으니 천천히 그림을 살펴봤지만 여전히 제가 그렸다는 확신이 오지는 않았다.
적나라한 걸 빼면, 꽤나 정성과 애정을 가득 들인 스케치였지만 그래봐야 스케치였다. 이런 걸로는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번 그려볼까.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마침 가장 먼저 꺼낸 짐이 미술 도구였고, 해인은 연필을 집어 들었다. 대충 창가에 앉아 잠시 쉴 겸 스케치를 시작했다.
남자가 준 스케치북의 그림과 손버릇을 비교해볼 작정으로 처음엔 그림을 따라 그렸다. 비슷하게 그려놓고 비교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리다 보니, 그걸 보지 않아도 자신이 그 남자를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한 달 동안 겨우 몇 번 봤을 뿐인 남자를 그리는 데 왜 손끝에 망설임이 없을까. 그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에 선명해서 손끝을 멈추지 않아도 됐다.
저는 뭐, 이리 신나서 그려대고 있는 걸까.
마치 눈앞에 있는 사람을 그리듯 막힘이 없어서 그걸 그리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럴 순 없는 건데.
하물며 부모님 얼굴을 그려도 사진을 보고 따라 그리지 않는 이상 이렇게 이미지가 선명하진 않을 텐데.
해인은 멍하니 손을 움직였다. 한 장, 두 장 그렇게 슥슥 그 남자를 그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짐 정리도 덜 된 좁은 옥탑방 구석에 쪼그려 앉아 숨도 참아가며 손을 움직였다. 누가 보면 그를 죽도록 그리고 싶었던 건 줄 알겠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손끝이 그를 그리는 걸 기뻐한다는 것이었다.
해인은, 밤새 한 남자를 그렸다.
손은 멈춘 건 날이 새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바닥에 온통 가득한 그 남자의 초상을 발견했을 때였다.
새까매진 손끝과 짧아진 연필, 하도 뜯어내서 얇아진 스케치북.
‘……이제야 좀 숨을 쉬는 것 같아.’
일순간 짙은 포만감이 찾아왔다.
멍한 눈으로 공기를 폐부까지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알 수 없는 만족감에 피곤한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남자를 그린 뒤의 감정은 너무 낯설어서 두려운 것이었다. 해인은 바닥에 널브러진 제가 그린 수십 장의 스케치를 보며 질끈 눈을 감았다.
뭔가 호소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자신에게, 자신이.
“난, 그냥 그림이 그리고 싶었던 거야…… 그런 거라고. 그것 말곤 없잖아.”
곱씹듯 중얼거리며 연필을 바닥에 떨어트려 버렸다. 뭔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건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다.
자신이 그 낯선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도저히.
***
일상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날들이었다. 부지런히 상자를 열어 작업실 정리도 하고, 가끔은 옥탑방 앞에 있는 좁은 옥상을 쓸고 닦고 청소하고.
무더위에 그런 걸 하고 있으려니 잡생각이 줄어서 좋았다.
여전히 왼손은 움직여주지 않았고, 없어진 기억들도 딱히 돌아오지 않는 변함없는 날이기도 했다.
자신이 오른손밖에 쓸 수 없다는 것에도 익숙해져서, 이제 한 손으로 옷을 갈아입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너는 데도 속도가 붙었다.
물론 그림도 그리려고 해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 남자를 그릴 때만큼 집중되는 게 없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 남자 말고는 그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건 묘하게 열 받는 일이었다. 자기가 뭔데 이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단 말인가. 그간 해인의 인생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존재는 없었다.
그러니 떨쳐내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해인은 오늘도 기억에 없는 남자를 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기억에 없는데 잊는다는 게 말이 된다면 말이지.’
여전히 바쁜 걸 핑계로 전화는 거의 안 받고 메일만 가끔 확인하는 해인이었는데, 수문의 메일 한 통을 발견한 건 메일이 오고 삼 일이나 지난 뒤였다.
[안녕. 해인 씨, 잘 지내는지 모르겠네. 여전히 휴대폰은 꺼져 있고. 짐 정리는 많이 했으려나. 이사한 지 이 주나 지났는데 우린 언제 초대해주는 거야? 이영이가 초대 기다리고 있어. 메일 보면 전화해줄래. 더위 조심하고!]
수문은 역시 이영과 사귀는 것 같았다. 그때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해인은 메일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방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휴대폰을 발굴해냈다. 방전이 돼버려서 충전부터 시켜야 했다.
자신이 떠나는 걸 가장 섭섭해하던 이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휴대폰에는 분명 이영의 번호도 있었지만 이영도 해인만큼이나 휴대폰과는 친하지가 않아서, 수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은 거의 대부분, 같이 있었으니까.
“강 선생님? 저예요. 박해인요.”
-어? 어어, 누군가 했네. 번호 바꿨구나. 맞다, 그랬지.
“네.”
-바꾸고 우리 처음 통화하는 건가. 해인 씨도 하여간 대단해. 그래, 짐 정리는 좀 끝났어? 끝났다면 얼굴 볼 겸, 혹시 아직도 정리 중이라면 도와주러 갈까 하는데 어때?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리는 대충 끝났지만 오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오셔도 볼 것도 없고, 그냥 작은 옥탑방이라서요. 제가 조만간 그쪽으로 놀러 갈게요.”
-안 돼, 안 돼. 그게…… 이영이가 놀러 가고 싶어 하거든. 벌써 해인 씨 집들이 선물도 사둔 거 알아? 이영이가 성질이 좀 급하잖아.
해인은 뭔가 수상한 걸 느꼈다. 그리 눈치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수문도 참 거짓말을 못하는 남자라 어색하기가 속아주기 힘들 정도라서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 데려오려고 그러시죠?”
-……아, 뭐…… 음……?
힐끔 책장에 쌓아둔 스케치북을 쳐다봤다. 그 곁에는 버리지 못한 그 남자의 초상화가 제법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저건 전혀 증거가 안 돼. 내가 그린 것도…… 그냥 하도 신경 쓰이게 하니까 그려버린 것뿐이야. 증거는 아닌걸.’
그리고 그 남자, 피사체로 나쁘지도 않으니까. 인물을 그리는 게 전공은 아니지만 매력 있는 피사체인 건 인정해야 하니까.
특유의 야한 느낌이랄까. 그런 게 있어서 나도 모르게 많이 그린 거야. 누가 봐도 인상적인 피사체잖아. 그리고 스케치북에 그런 그림을 봐버려서 자극받은 것뿐이야.
해인은 애써 자신을 그렇게 납득시켰다.
“그 남자가…… 나한테 준 게 있어요. 이거 돌려주고 싶은데. 집 주소 같은 거 알려줄 수 있어요? 그게 안 되면 그쪽으로 놀러 갈 때 가져다줄게요.”
-저기 해인 씨.
“나, 그 남자 보는 거 너무 불편해요.”
심장이 뛴단 말이에요. 너무 낯선 방식으로 뛴다구요. 해인은 그 말은 목구멍 안에서 삼켜버렸다. 남이 들어봐야 어떻게 들릴지 잘 알았으니까.
-형 말이야. 해인 씨를 찾으려고 휴직까지 했대.
“……설마.”
-둘이 분명 같이 살았대. 형이 반지를 두 개를 끼고 있잖아? 그거 하나는…… 해인 씨가 깜빡 잊고 간 거래.
“버리고, 온 거면 버리고 온 거지…… 그게 뭐예요.”
깜빡 잊는 건 또 뭐야. 해인은 아무리 저라도 그런 중요한 걸 잊고 다니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만 형한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무서울지도 모른다는 건 알지만…… 형이…… 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면 나도 이런 말은 못 할 거야.
“무서운 거랑은 조금 달라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편이 맞으리라. 지금도 자신을 잃고 혼란스러운 마당에 더더욱 자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남자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형은 절박해 보였어. 항상 뭐든 쉽게 해치우는 사람인데 해인 씨한테만은 한없이 조심스러워. 형을 못 믿겠다면 나라도 한번 믿어주면 안 될까? 난 형도 형이지만, 해인 씨도 걱정돼.
“……으.”
-만에 하나 형이 도가 지나치게 굴면 친가 어른들한테 말해서라도 막아줄게. 한 번만 더 만나줘, 해인 씨. 형 말이 맞는다면 뭔가 기억이 날지도 모르잖아?
기억이…… 안 날 거라는 걸 알았다. 제 기억이 이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건 그냥 스스로가 알 수 있었다.
뭐랄까, 새까맣게 가려져 있다면 긁어내려 뒤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제 기억은 그보다는 깊은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손도 닿지 않는 막연한 곳에 잠겨 있어서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그런 느낌.
한숨이 나왔지만 수문이 너무 간절하게 굴어서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저는 왜 이렇게 모질지가 못한 걸까.
“한 번만이에요.”
-고마워!
“스토커처럼 굴거나 하면, 경찰에 신고해버릴 거라고요! 정말!”
-그래! 언제 놀러 갈까? 언제가 편해?
해인은 제가 그린 그 남자의 그림들부터 숨기자고 생각했다. 저런 걸 들켰다간, 정말 집요하게 굴 것 같았다.
***
건물 1층에는 엄마가 운영하는 부동산이 있었고, 2층은 흔한 가정집, 3층에는 옥탑방이 하나 있는 낡은 구조의 건물이었다.
참고로 2층의 가정집은 해인이 자란 집이기도 했다. 지금도 잠은 2층에서 잤다.
“해인 씨이! 보고 싶었어!”
“민 선생님.”
“초대해줘서 고마워. 자, 선물이야.”
이영은 옥상으로 올라오자마자 해인과 반가움의 포옹을 하더니, 수문이 들고 온 커다란 선물을 내밀었다.
포장은 되어 있었지만 선풍기만 한 크기였고, 해인은 그걸 받아 들지 못했다. 두 손으로 들어야 하는 물건이었으니까.
“이런, 미안미안. 방에 가져다줄게. 공기청정기거든. 그림 그릴 때 꼭 틀어. 아크릴이나 유화 물감 냄새 장난 아니잖아.”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이런 거 정말 괜찮은데…….”
“별건 아니고, 수문이랑 돈 모아서 샀어.”
“감사해요. 정말요.”
따지자면 본가로 돌아왔을 뿐인데 신경 써주는 이영이 너무 고마웠다. 해인이 조금 감격하고 있자니, 이영이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그리고 수문이 사촌이라는 남자도 보탰어. 괜히 데려왔나? 다음부터 따돌려 줄까? 응? 어떻게 해줄까?”
“……괜찮아요. 알아서 해볼게요. 제가 애도 아닌걸요.”
“안 되겠다 싶으면 꼭 말해? 알았지?”
“네.”
“그나저나 해인 씨가 여기로 돌아온 이유 알겠다. 경치 정말 좋은데?”
이영이 기분 좋은 얼굴로 난간 근처로 걸어갔고, 수문도 따라갔다. 아무래도 일부러 슬쩍 비켜준 것 같았다
“…….”
“초대해줘서 고마워.”
저와 이 남자가 대화할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말이다. 해인은 조용히 서 있는 남자를 향해 가볍게 목례만 해 보였다.
초대했다기보다는 반쯤 억지로 온 거면서 남자는 정말 거창한 초대라도 받은 것처럼 정중하게 굴었다.
“이건 내 선물인데……. 아, 어디에 놔줄까.”
남자가 내미는 선물을 받아 드는 대신 한참 바라보고 만 건, 그에게 무안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영의 선물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일 뿐이었다.
해인은 경계하던 걸 잊고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남자의 선물을 빤히 보면서는 이게 우연인지, 알고 사온 것인지 내심 궁금해졌다.
“화분…… 이네요?”
그것도 동백꽃나무 화분.
“이 정도는 괜찮잖아?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지만 부담스러워할 테니까.”
“……이 정도가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네.”
이 남자, 좋다는 단어를 너무 곱씹는 거 아닌가. 해인은 괜히 뺨을 붉혔다.
남자가 들고 있는 화분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집들이라서 화분을 사왔는데, 그게 우연히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나무인 걸까? 그럴 확률은 낮을 테니 알고 사왔다는 편이 맞으리라.
보통은 사철나무를 선물하기 마련이니까. 한철 꽃 피고 마는 동백은 선물용으로 그리 인기 있는 관상수가 못 됐다.
해인은 동백을 보자 어쩐지 움직이지 않는 제 왼손이 더 허전하게 느껴졌다.
남자가 왼손에 끼고 있는 두 개의 반지에 저절로 눈이 갔다. 저 반지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원래 제 것이었다는 수문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더욱 그랬다. 그건 진짜일까?
물론 거짓일 수도 없겠지만.
반지가 가지고 싶은 이 기분은 그걸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겨울에, 그걸 준 적이 있어.”
조금 어색한 침묵을 깬 건 그였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고 그랬거든.”
“겨울에 동백을 어디서 구해요?”
“운이 좋았지. 난 그 꽃을 주면서…….”
“……주면서?”
반질반질한 나무 이파리를 만지며 그를 올려다봤다. 말하다 말고 멈추는 건 왜일까.
“이건 나중에 말해줄게.”
“왜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거 같으니까. 천천히 하자고.”
“누, 누가 또 만난대요? 이상한 남자야.”
기껏 궁금하게 해놓고는 이야기해주지 않다니. 해인은 작게 웅얼거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 남자와 눈을 마주치면 참을 수 없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가 빨리 가버렸으면 싶은 건 평정을 찾고 싶은 것과 같았다.
해인은 자신의 조용한 일상이 남자가 만드는 파장에 침범당하는 게 너무나 불편했다.
“스케치북은 봤어?”
“봤어요. 오늘 가져가요!”
“그럴게. 그리고 오늘은 이걸 빌려줄게.”
가져가라니까 2탄이 있는 거냐! 남자는 품 안에서 네모난 무언가를 꺼내 해인에게 내밀어 보였다. 해인은 뭔지는 몰라도 얼른 보고 돌려주자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거절이 잘 먹히지 않으니 차라리 그편이 좋았다. 이번에도 분명 대단한 증거는 아닐 테니…….
“으음…… 음?”
그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액자였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게 그 안의 그림이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확실히 제가 쓰는 색채라는 것도 말이다.
이 누군가는 지저분하다고 평하고, 누군가는 다채롭다고 평해주는 어지러운 색들은 분명 제 것이었다.
달이 돋보이는 정원이었는데, 어딘가 이국적인 게 한국은 아닌 것 같았다.
“이거, 내가 그린 게…… 맞는 걸지도…….”
“네가 그린 거니까.”
하지만 전혀 그린 기억은 없었다. 혼란스러운 눈이 된 건 그래서였다. 남자가 내민 것 중 가장 그럴싸한 증거였다.
누군가 제 색채를 따라 했다고 치부하기에는 익숙한 무언가가 그림에 있었다.
특유의 못된 버릇 같은 거. 하얀색을 잘 못 써서 파란색으로 덮는 거라든지, 노란색이랑 보라색을 이상하게 섞어두는 그런 버릇.
원래 쓰던 재료가 아닌 색연필로 그린 조잡한 그림이었지만, 해인은 이 정원 그림이 제 손으로 그린 거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리 둘이 여행 갔을 때, 네가 그려서 나한테 선물해준 거야.”
“……여행도 갔어요?”
“그래.”
“흔한 커플처럼요?”
“그랬어.”
“그런데 사진 같은 거, 왜 하나도 없어요?”
해인은 그만 저도 모르게 원망스러운 어투로 되묻고 말았다.
사진만 한 장 있어도 얼마나 좋아. 사이좋게 찍은 그런 거 한 장이면 납득이 훨씬 수월할 텐데. 이렇게 알 수 없는 혼란들에 온 정신이 시달리지는 않을 텐데.
좀 더…… 좀 더 눈앞의 남자에게 없어진 기억에 대해 의지해볼 텐데.
“……넌 사진 찍는 걸 싫어했어.”
남자는 애꿎은 타박인데도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에 오히려 민망해진 건 해인이었다.
“맞네요. 내가 사진 찍히는 거 싫어하긴 해요. 그치만…… 우리가 정말, 같이 살 정도였다면…….”
“내 잘못이야.”
“뭐가요?”
“같이 있는 걸로 그냥 너무 좋아서. 사진 같은 거 찍을 생각을 못 했어. 그래서 없어. 미안해.”
해인은 때때로, 남자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그를 믿는 걸 조금 힘들게 하기도 했다.
그가 말하지 않는 무언가가 신경 쓰였다. 왜 전부 말해주지 않는 걸까.
“……당신 말이에요.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잖아요. 증거라고는 내가 그렸다는 이 그림 하나뿐이고…… 그러면서 나더러 무턱대고 당신 말을 믿어달라니, 무리예요.”
“그건 인정해. 내가 말하지 않고 있는 게 있다는 건.”
“그게 뭔데요?”
“하지만 그건 네가 도저히 믿지 못할 것 같은 이야기라…… 우리가 사귀었다는 것보다 더 너를 혼란스럽게 할 것 같아서 말할 수 없어.”
그런 게 있을 수나 있을까. 해인에게는 자신이 이 남자와 연애를 했다는 것만큼 놀랍고, 받아들이기 힘든 건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시기상조 같네. 그 얘기를 했다간 네가 나를 더 미친 사람 보듯이 볼 게 분명하거든.”
“……나중, 나중 하는데…… 그거 우리한테 미래가 있다는 것처럼 들리거든요?”
“그럼 없겠어? 당연히 있지.”
“당신 참 뻔뻔하네요.”
“고마워, 넌 내가 뻔뻔해서 좋아했어.”
난 그런 취향 없는데. 장담하는데 이 남자는 해인이 살면서 본 가장 뻔뻔한 남자였다. 단순히 뻔뻔하다고 표현하기에는 좀 더 오만하고 자신만만했지만 말이다.
해인이 할 말을 잃은 사이 그는 즐거운 듯 운을 뗐다.
“그리고 생각해봤는데 확실한 증거라면 있어. 가져올 수 없는 거지만.”
“그게 뭔데요?”
“우리가 사귀는 걸 본 사람들, 같이 걸었던 동네, 우리가 함께 살았던 집, 그런 것들.”
“아…….”
“한 번만 우리 동네에 와줘. 분명 익숙할 테니까.”
그거 꽤 설득력 있고 맞는 말이긴 했다. 낯선 남자의 집에 방문하는 취미는 없지만…… 그는 해인이 경계의 눈을 한다 싶으면 금방 알아챘다.
“집에 들어오라고는 안 할게. 내가 일했던 동물병원에 같이 가보자. 놀러 온 적이 있으니까 널 알아보는 직원들이 있을 거야.”
“……그래요?”
“그게 아니어도, 가보면 뭔가 기억날지도 모르지.”
동네에 가보는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해인은 어째 제가 남자의 계획에 말려들고 있다는 건 알았다. 자연스레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있지 않은가.
거절할까도 싶었지만 오늘 그가 가져온 액자의 그림이나, 그곳에 가면 증인들이 있다는 얘기에는 조금 솔깃한 심정이었다.
기억을 찾고 싶냐 아니냐를 물으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잘 알면서도 되찾고 싶었으니까.
기억은 없어도 감정은 어슴푸레 남아 있었다.
해인은 남자를 조심스레 올려다봤다. 기억을 되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냥 나는 그런 기분이 든다고 하면…… 이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멍하니 되묻고 만 건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사귀었던 기억이 없어도…… 우리가 사귄 게 맞을까요?”
“……뭐야. 그런 걱정 중이었어?”
“거, 걱정이라기보다는……. 정말 생각도 안 나고, 또 그게 정말이어도 다시 떠올릴 자신도 없고…… 난 잘 모르겠어서…….”
남자는 여전히 화분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말하며 웃는 입가는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그 기억이 없어졌다고, 그 시간도 없어진 건 아니니까. 우리가 없는 건 아니니까. 난 중요한 건 기억보다는 우리 둘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앞으로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는 사실 말이야.”
자꾸만 황망한 기분이 드는 건 이 남자의 저를 향한 애정이 너무 애틋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특별한 상대가 되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그가 저를 사랑한 이유를 모르겠으니 이 사랑이 제 것인지도 자신이 없었다. 해인이 가진 건 그런 혼란이었다. 끝없는 의문과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갈등들.
“저기, 휴직했다는 거. 나 때문이라고…… 수문 씨가 그러던데 정말이에요?”
“……내가 일할 정신이 못 됐어. 반쯤 패닉상태였거든.”
“왜 그랬는데요……?”
패닉상태에 빠질 남자로는 절대 안 보이는데. 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냥 널 찾는 데만 집중하고 싶었어.”
이 남자, 또 무언가 말해주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 같은데. 은근히 비밀투성이란 말이지. 해인은 남자가 말 못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남자는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서 있는 해인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예전엔 네가 비밀투성이였는데, 지금은 내가 그러고 있네.”
해인은 문득 남자의 웃음소리가 간지럽다는 생각을 했다. 발끝까지 꼼지락거리게 만들었다. 목 안이 치밀었고, 괜히 호흡이 흐트러졌다.
“내가 비밀이 많았어요?”
“그래, 아주 많았어. 그래서 항상 날 고민하게 만들었지.”
“……내가 신비주의 같은 걸 할 리가 없는데. 나 거짓말도 정말 못하고…… 또, 숨길 만큼 대단한 걸 갖고 있지도 않고……. 저기, 역시 당신이 찾는 거 내가 아닌 건 아닐까요? 그냥 닮은 사람이라거나…….”
“여전히 굉장한 의심쟁이구나.”
“으.”
“넌 자길 좋아하는 사람을 못 믿는 것 같아. 그러니까, 그 사람이 자길 왜 좋아하는지 항상 얼떨떨해하잖아? 마치 길고양이처럼.”
그거 굉장한 정곡일세. 해인은 그가 제 습성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데는 반박할 게 없었다.
“난 내가 사람을…… 잘못 찾았다고는 생각 안 해. 네가 남긴 것들을 쫓아왔는데 네가 있는 거니까.”
“…….”
“그리고 널 못 알아보거나 헷갈릴 만큼 내가 바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난 네가 너라는 걸 확신하고 있거든. 너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와 자신의 일은 의문투성이였다. 너무 많아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이었다. 정말 그와 자신이 알고 지냈는가. 그건 맞는 것 같다.
그와 자신은 사귀었나. 그것도, 맞는 것 같다.
그런 자문을 거듭하다 보면 항상 끝에는 ‘자신은 그렇다면 왜 그를 두고 사라졌는가’ 하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기억을 잃어서 그를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행여나 그를 떠나고 싶었던 걸까. 잊을 만큼 그가 싫었던 걸까. 기억이 없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동네에 한번 와줘. 증명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인 것 같으니까.”
감각은 분명 그를 그리워했지만 말이다. 그가 웃을 때면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해인이 믿을 거라고는 그런 것뿐이었다.
“……알겠어요. 가볼게요.”
“정말? 그럼 언제가 좋겠어?”
“뭐, 나야 거의 백수니까요. 조만간…….”
“편한 날을 알려주면 데리러 올게.”
가기로 했으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가 사는 동네에 가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 데이트는 오랜만인데.”
그래, 오랜만…… 은 무슨. 해인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게, 이게 왜 데이트예요?”
“그럼 뭐야?”
잠깐. 남녀 둘이 만나면 데이트가 맞나? 물론 이게 비즈니스는 아니니까……. 하지만……. 해인이 갈팡질팡하고 있자니 그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발끝이 닿았고, 물러서는 것보다 빨리 그가 속삭였다.
“날을 정해서, 데리러 올게.”
아무래도 그에게 제대로 말려든 것 같았다.
***
“해인아.”
지금 저거 내 이름 부른 건가. 원래 이런 울림이었나, 내 이름이? 아니, 그보다 저 남자는 남의 이름을 너무 기쁜 듯 부르는 거 아니야?
해인은 카페 안쪽에 앉아 제게 작게 손을 흔드는 남자를 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좀 빨리 도착해버려서 커피 마시고 있었는데. 아, 뭐 좀 마실래?”
굳이 집 앞으로 데리러 와서, 같이 차까지 마시면 더 데이트 같잖아. 해인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지만 그는 이미 자리에서 빠져나와 해인을 계산대로 이끌고 있었다.
“여기 코코아가 있더라고.”
“엇.”
“코코아 하나…….”
“잠깐, 커피 마실 건데요! 아메리카노!”
안 먹으려고 했는데 얼떨결에 시켜버린 건, 그만 당황해서였다. 코코아야 엄청 좋아하긴 하지만 그거 어린애 같아서 혼자 있을 때나 몰래 마시는 거였으니까.
설마하니 저는 이 남자 앞에서 코코아를 들이켠 걸까.
남자는 해인의 제지에 정말 의아한 듯 반문했다.
“하지만 코코아 좋아하잖아.”
“……흠흠. 커피도 먹을 줄 알거든요.”
“시럽 엄청 넣을 거잖아.”
“두, 두 번 정도?”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더니 픽 웃어버리는 남자 때문에 부끄러워졌다.
이 남자,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
날이 좋아져서 그런지 카페 안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화사한 차림이었다. 해인은 저도 조금 더 밝게 입을 걸 그랬나 싶어 제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물감이 묻을까 봐 어두운 옷을 입는 게 버릇이 되어버려서 옷장에 있는 거라고는 전부 칙칙한 것들뿐이었다.
밝은 옷은 애초에 없기도 하고……. 오늘 이게 데이트 비슷한 거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나름 신경 쓴 건데.
“다음엔 긴장 풀고 코코아를 먹어.”
“……누구 맘대로 또 다음이래요.”
“음, 말은 그렇게 해도 마지못해 만나주잖아?”
해인은 남자가 가져다준 커피를 집어 들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보통은 이렇게 파악당할 일이 없는데, 그도 그럴 게 워낙 도망치는 데 도가 튼 해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어서 방어가 소용없는 느낌이었다.
“박해인.”
“……네?”
“해인아.”
“내 이름이 뭐…… 신기해요?”
왜 자꾸 부른담. 하여간 이상한 남자. 해인의 작은 핀잔에 그는 턱을 괴며 느긋한 얼굴을 했다. 거의 웃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예쁜 이름이잖아. 그래서.”
“……저기, 난 가족이나 동성 친구 말고는 이름으로만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조금, 낯간지러우니까…….”
“그럼 수문이처럼 해인 씨라고 부를까.”
아니, 수문처럼 불러도 어감 자체가 달라서 결국 속이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그는 입술에 해인의 이름을 담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음미하듯 이름을 부르는 건, 반칙이었다.
“그냥…… 당신 마음대로 해요.”
“아, 나는 ‘강’이라고 불러주는 게 좋아.”
“……강? 내가 당신을 그렇게 불렀어요?”
“음.”
“왜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시율 씨…… 라고 부르는 게 맞지 않아요? 우리, 나이 차이도 꽤 나니까.”
다섯 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니까 그리 편하게 말을 걸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호칭은 입 밖으로 내뱉기 조금 민망한 느낌이었다.
아주 친한 사이에나 부를 것 같은 애칭이었으니까.
“네가 날 강이라고 불렀던 이유, 뭔지 알아?”
“뭔데요?”
“내 이름 부르기가 싫어서였지. 처음엔 날 안 좋아했거든.”
“……으음? 강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친한 것 같은데. 어떻게 봐도 애칭 같은걸요. 강.”
“내가 봐도 그래.”
강, 강, 가앙. 입안으로 몇 번 곱씹어보던 해인은 자신이 또 말려들었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아무래도 호칭을 정한다는 건 다음에 또 보자는 걸 예감하는 일이었으니까.
***
그가 차를 세운 곳은 흔한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이었다. 어딜 가도 있을 것 같은 모양이라 이곳이 낯이 익은지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자신이 여기에 살았다는 게 선뜻 와 닿지는 않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는데 역시 기억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이곳에 오면 그럴싸한 데자뷔라거나, 뭔가 느껴지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조금은 기대했는데 말이다.
“병원부터 가볼까. 여기서 가깝거든.”
“……좋아요.”
“공원만 지나면 되니까.”
걸으면서도 계속 주변을 살펴봤지만, 결국은 처음 오는 곳이라는 게 결론이었다.
그나마 익숙한 건 하늘일까. 하지만 하늘은 어디나 똑같기 마련이었다. 좀 익숙한 게 있으면 좋겠는데…….
두리번거리며 걷는 해인의 뒤를 시율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그가 곁으로 다가온 건 아파트 뒷문으로 나와 공원 입구에 다다라서였다.
“그런데 말이야.”
“네?”
“이쪽으로 가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저도 모르게 앞장서고 있던 해인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러게. 자신은 아파트에서 병원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가 가르쳐줬던가? 조금이라도 방향을 손짓했다든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그런 적은 없었다.
해인은 아무 생각 없이 걸었고, 그게 가는 길이었다.
“……아파트 구조야 다 비슷하니까.”
“그야 그렇지.”
“이쪽 아니면 저쪽이겠죠. 뭐…… 큰길 찾는 건 쉬우니까…… 그러니까 아마…….”
왜 이렇게 당황스러운 걸까.
“그런데, 나 꽤 길치인데.”
“알아.”
“……어떻게 알았죠? 이쪽인 걸?”
“내 말이 맞으니까. 우린 이곳에 살았어.”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던 해인은 이어 무언가를 발견했다. 홀린 듯 몇 걸음 걸어 누군가의 집 앞으로 다가섰다. 그 집은 동백나무로 된 담장이 있었다.
해인은 곧잘 저만의 집을 짓는다면 이런 담장을 갖고 싶었다.
“그거 마음에 들어 했지. 자주 여기서 날 기다렸거든.”
“……여기서.”
“퇴근하고 저쪽으로 걸어 나오면 항상 이 자리에 앉아 있었어.”
그래, 그랬을 것도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자리가 아주 익숙해서 여기에 뭘 두고 온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해인은 동백나무 담장을 살펴보다가 그 아래 쪼그려 앉아봤다. 정말 딱, 공원 입구를 보고 있기 좋은 자리였다. 누군가를 기다리기 좋은 자리.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래.”
“……알 것도 같아요. 이 자리가…… 이상하게 편해.”
일어나는 대신 무릎을 끌어안고 담장에 살며시 등을 기대봤다. 이렇게 있으면 누군가 저를 데리러 올 것만 같았다.
지켜보던 시율이 곁으로 앉아서, 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가까워서 거의 어깨가 닿았지만. 아무 말도.
***
“원래 저쪽에 자주 가던 포장마차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어. 날이 풀려서 장사를 접은 것 같아.”
“……흠?”
“어묵국물이 맛있는 곳이었거든. 그래서 네가 좋아했지.”
어묵국물 좋아하는 것까지 알고 있으면 이 남자가 저에 대해 모르는 게 있긴 한 건지를 궁금해해야 할 수준이었다.
“포장마차 아줌마가 계셨다면 너랑 날 자주 봤으니 반가워하셨을 텐데.”
해인은 고개만 조금 끄덕였다.
남자에게 다시 어색함을 느끼고 있는 건 그가 너무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분명 얼굴 보는 것도 불편하던 남자인데 어느새 이만큼 접근을 허락하고 있으니 바로 그게 어색하달까.
“…….”
“…….”
“사탕 먹을래?”
“……뭐, 줘보든가요.”
마침 어색한데 잘됐다 싶었다. 그걸 먹는 동안은 말을 안 해도 될 테니까. 해인은 손을 내밀었고, 그는 자연스레 주머니 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줬다.
이 남자 어울리지 않게 주머니 안에 단걸 상비하는 모양이었다.
“커피맛…….”
과일맛이라면 많이 먹어봤지만 이런 건 처음 같았다. 그런데 제법 맛있었다. 생각보다 달면서 도통 질릴 것 같지 않은 맛이었다.
마음에 든 사탕을 입안에 굴리며 해인은 자연스레 그가 다시 내민 손 위에 쓰레기가 된 사탕껍질을 들려줬다.
원래부터 그가 버려주는 것인 듯,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그러곤 그걸 알아채지도 못했다.
“다 왔어. 저기가 내가 일하던 동물병원이야.”
남자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해인이 본 것 중에는 가장 커다란 동물병원이 있었다. 동물병원이라는 거 보통 상가 1층에 조그맣게 있는 것 아니었던가. 저건 4층이나 되네. 번쩍번쩍하고…….
“……엄청 크네요?”
“뭐, 동물병원 중에는 그렇지. 미용센터도 있고 전문적인 진료를 많이 해서 그래.”
“예를 들면요?”
“애견 암이나 파충류 진료일까.”
동물에 대해 잘 모르는 해인으로서는 대단하다는 생각에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를 따라 병원 로비에 들어서면서는 어쩐지 긴장이 돼서 그의 뒤에 달라붙어야 했다. 완전히 낯선 곳에 오니, 그나마 그가 가장 익숙했다.
간호사들의 적극적인 환대가 이어졌을 때는 정신이 다 없어졌다.
“강 선생님!”
“어머, 강쌤. 오랜만이에요.”
“강쌤? 왜 이렇게 수척해지셨어요?”
“자주 좀 오시지. 하셔야 한다던 일은 해결됐어요? 언제부터 다시 출근하세요? 환자들이 많이 찾는데.”
그는 아무래도 인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해인은 몰려드는 직원들에 당황해 그의 옷깃을 붙잡고 그의 등 뒤로 점점 숨어들었다.
그도 강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모양이었다. 수문을 부를 때 어쩐지 불편했던 이유를 이제야 찾은 느낌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여자 친구분도 같이 오셨네요?”
“그러게? 오랜만에 뵈네요.”
그리고 확실히, 병원 직원들은 자신을 아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의 여자 친구로 통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해인은 겨우 고개를 꾸벅여 보였다.
힐끔 올려다본 시율은 어딘가 의기양양한 눈이었다. 제 말이 맞지 않냐고 묻는 듯한 치밀한 눈웃음.
“아, 전에 그 강아지 주인이요. 얼마 전에 여기서 유기견을 입양해 갔어요. 그렇지 않아도 강쌤에게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강아지요?”
“왜 일전에 죽어가는 개를…….”
“잠깐 진료실 좀 둘러봐도 될까?”
그가 말을 끊어줘서 다행이었다.
“그럼요. 지금 아무도 안 계실 거예요.”
해인은 또 기억나지 않는 걸 물을까 싶어 얼른 그를 따라 진료실로 향했다.
***
“여기가 내 진찰실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쓰네.”
“휴직했으면, 복귀는 언제 하는 거예요?”
“글쎄. 사실은 슬슬 돌아와도 되긴 하지만……. 그보다, 뭐 기억나는 건 좀 있어?”
“정신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진료실 안을 살펴봤지만 꽤나 낯설었다. 사람들 병원이랑은 어딘가 달랐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다. 동물병원 자체가 해인에게는 낯선 곳이었다.
“그래도 증인들은 만났잖아.”
“……내가 당신 여자 친구였다는 건 알겠어요. 저 사람들이 단체로 날 가지고 노는 건 아닐 테니까.”
“알아주니 다행이네.”
그의 직장 사람들이 알 정도면 진지하게 사귀었다는 것도 알겠다. 해인은 진료실을 둘러보던 걸 그만두고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내 그의 눈길을 피하다가 제대로 마주 볼 마음이 든 건 그가 알려준 답에 대한 자신의 답을 찾고 싶어져서였다.
“그런데 말이에요. 우리가 사귀었다면…… 우린 어떻게 만났어요?”
“……처음 만난 건, 여기였지.”
“동물병원이요? 내가 여길 왜 왔어요?”
자신은 동물을 기르지도 않고, 이 지역 자체가 전혀 인연이 없는 곳인데. 아는 사람이 사는 곳도 아니고. 자신이 여행 다닐 만한 곳도 아닌 그냥 도시인데.
“너랑 내 사이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거든.”
“……관리실을 통해서 물어봤던 그거죠? 내가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냐고…….”
“맞아. 사진 볼래?”
사귀었다면서 제 사진은 없고 고양이 사진은 있는 걸까. 그거 좀 불공평한 느낌인걸. 해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휴대폰으로 보여준 건 새까만 털에 황금색 눈을 가진 예쁘장한 고양이였는데, 어쩐지 그 커다란 눈동자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개냥이야.”
왜 울컥하는 기분이 든 걸까. 해인은 미간을 좁히고 투덜댔다.
“……그 이름 엄청 별로네요. 이렇게 예쁜 고양인데.”
“풉, 자기도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지금은 어디 있어요? 내가 길렀던 거예요? 아니면 당신이…….”
“네가 사라지던 날 같이 사라졌어.”
“어, 음…… 잃어버린 거예요?”
“널 찾으면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난 고양이라도 데리고 사라진 건가. 의문이 치솟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못했다. 그는 비밀이라고 말할 때면 꼭 저런 표정이었으니까.
***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해인은 상당히 기진맥진해져 있었다. 은근히 많이 돌아다닌 데다가 너무 많은 사실을 접했더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으니까.
자신은 분명 이 근방에 살았고, 그와 사귀었으며, 그는 자신을 찾아 일까지 그만두고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기억은 안 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해인은 이제 그에게 잊어버려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입이 쉽게 떨어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여긴 어디예요?”
차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가 해인을 데려간 곳은 작은 공터였다.
“이쪽에 앉아 있어봐.”
“음?”
“그리고 이걸 흔들어.”
그가 쥐여준 건 아까 병원에서 얻어 온 사료 샘플들이었다. 작은 봉지과자만 했고, 고양이 얼굴이 프린팅되어 있으니 고양이 사료일 터였다.
난데없이 공원에 앉아 이건 왜 흔들라는 걸까.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그의 말은 대부분 맞았음으로, 해인은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자각자각.
“이렇게요?”
사료 봉지를 흔들기 무섭게 근처의 수풀들이 우수수 흔들리기 시작했다.
“냐옹?”
“미야옹!”
“냐아아?”
고양이 몇 마리가 수풀에서 불쑥 튀어 나오더니, 눈을 빛내며 해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곤 마치 아는 사이인 양 곧장 반갑게 달려들었다.
“뭐, 뭐야? 뭐야?”
고양이란 사람이랑 마주치면 하악, 대고 도망가는 동물 아니었나?
깜짝 놀란 해인은 엉거주춤 몰려드는 고양이들을 피하려고 했지만, 고양이란 못 올라가는 데가 없는 동물이었다. 해인은 금세 어깨 위까지 점령당해야 했다.
일어나다 말고 그대로 조심스레 다시 벤치에 앉으면서는, 고양이들에게 익숙하지 않는 부비적거림을 당해야만 했다.
“알겠네요. 여긴, 고양이 주거 지역이었군요.”
“그렇지.”
저 멀리서도 한 마리 두 마리, 뛰어오나 싶더니 어느새 열댓 마리 정도가 해인의 주변에 쪼그려 앉아 귀를 쫑긋거리며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사료봉지 흔들기는 고양이를 소환하는 주문이었던 걸까.
“고양이가 원래 이런 동물이었나요……?”
해인은 꾸역꾸역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와 제 얼굴에 온갖 털을 뿜어대며 비비적거리고 있는 회색 고양이 때문에 겨우 고개를 돌려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웃지 말고 이 고양이 좀 내려줬으면. 자꾸 발톱을 세워서 은근히 아팠다.
“설마. 네가 인기 있는 거지. 이 녀석들이랑 너랑 아는 사이라서 그래.”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이런 환대를…….”
“너 엄청 오랜만에 나타난 거거든. 이 녀석들 입장에서는 네가 안 보이니까 죽었다고 생각했다가, 살아 있어서 더 반가워하는 걸지도 모르지.”
“고양이도…… 그런 게 있군요. 근데 자꾸 발톱을 꺼냈다 넣었다 하면서 내 머리를 누르는데…….”
“꾹꾹이야. 고양이들이 기분 좋을 때 하는 거지.”
이어 여기저기서 몇 마리가 더 나타났는데, 녀석들은 해인에게 하나같이 굉장히 친밀하게 굴었다.
다리나 신발에 얼굴이나 몸통을 비비적거리며 오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골골대며 반가워하는 것이다.
경계 심한 고양이들이 보여주는 이런 극진한 환대라니. 그는 이런 게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고양이들은 길들이기 힘들어. 밥을 준다고 아무나 따라다니지도 않고.”
“……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예요?”
“내가 하지 말라는 건 다 했어.”
“……흠흠.”
“넌 말썽쟁이였거든.”
“그거 무슨 실례의 말씀을.”
잠시 흘겨봤지만, 그가 웃는 얼굴로 응수하자 별수 없이 그걸 인정해야 했다. 제가 은근히 말썽쟁이라는 건 부모님만 아는 사실이었는데…….
“냐아아!”
“빨리 달라는데?”
“앗, 어어어. 먹어. 자, 여기”
고양이들의 재촉에 부랴부랴 사료를 뜯어주면서는 제가 이런 짓을 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기억해줬으면 했던 것 같았다. 저를.
하지만 왜? 말도 안 되지만 혹시 자신은 기억을 잃어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다들 네가 반가운가 봐. 오랜만이니까.”
“……신기하네요. 날 안 잊어버리고 있다는 게.”
“고양이들은 기억력이 좋으니까. 1년 만에 만난 친구도 기억하거든. 한번 사람에게 차인 녀석은 평생 사람을 피하기도 하니까.”
허겁지겁 사료를 먹는 녀석들 사이로 먹지도 않으면서 웅크리고 자리만 차지하고는 있는 한 마리가 보였다. 마르고 사나워 보이는 녀석이었다.
“쟤는 왜 안 먹는 걸까…….”
“아, 얼룩이. 나도 오랜만에 봐. 저 녀석 사람은 다 싫어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래도 네가 왔다고 저기까지 나왔네.”
“……그래요?”
“한겨울에 버려져서 삐쩍 말라 죽을 뻔한 걸 네가 먹여 키웠거든. 너 말곤 아무도 못 만질걸? 가서 아는 척이라도 해봐.”
고양이랑 아는 척이라니.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래? 해인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시율이 툭 하니, 등을 떠밀었다.
해인은 오리걸음으로 얼룩이에게 다가갔고,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가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조심스레 손끝을 내밀어 봤다.
만지게 해주려나.
“…….”
“아, 안녕?”
어색한 인사에 화답이라도 하는지, 얼룩이는 해인의 손끝에 코끝을 톡 대고는 지그시 눈을 감아 보였다.
그러고는 아주 느리게 해인을 향해 몇 번인가 눈을 깜빡여 보였는데, 무슨 뜻이 있는 것 같았다.
“아.”
녀석은 이내 미련 없이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쩐지 그게 섭섭했다.
“……친하더다니. 그냥 코 한 번 대더니 가버렸어요.”
“그래도 키스해줬잖아.”
“키…… 키 뭐요?”
“고양이 키스. 고양이들의 인사법이야. 눈을 마주쳤을 때 천천히 깜빡여 주면 그건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이지.”
방금 그게 그럼 키스였구나. 나를 신뢰한다는 신호였어. 해인은 다시 벤치에 돌아와서는 다른 고양이들과 눈을 마주쳐봤다.
“신기하네요. 난 사람인데 나랑도 해주는 게.”
“그만큼 널 믿는다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그가 제 눈을 보고 살며시 눈을 깜빡이는 순간에는…… 마치 진짜 키스라도 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사람끼리는 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치밀어 오르듯 부끄러워졌다.
“으…… 뭐 하는 거예요!”
“그냥 눈을 마주 깜빡인 건데?”
“거짓말!”
“널 신뢰하고, 좋아한다는 뜻이야.”
하여간 만만치 않은 남자였다. 저는 어쩌다가 이런 남자와 사귀게 된 걸까. 해인은 순식간에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끄러운 것도 있었지만, 결국 그가 자신에게 특별하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와서도 있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됐다. 어느 날 나타난 남자가 이미 마음속에 있다든가 하는 건…….
아무리 부정해도 부정해도 그게 현실이라는 건.
“음, 내가 그렇게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이상해서 그래요. 그냥 다 이상해요. 요즘은 나한텐 이상한 일투성이라…….”
“……난 이상한 일에 좀 적응이 돼서 괜찮지만, 넌 안 그렇겠네. 기억도 안 나니까.”
그는 뭔가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해인은 무릎 사이에서 눈을 들어 그를 봤다. 그에게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던 걸까?
일단 그가 자신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말을 해주지 않는 건 자신을 더 혼란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겠지만…….
해인은 주변에 고양이 말고는 아무도 없건만, 괜히 인적을 살피고는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나 말이에요. 전에는 그런 거 없다고 했지만 사실 비밀이 하나 있어요.”
“어떤 건데?”
“좀 무서운 거라…… 엄마한테도 의사한테도 말하지 못 했는데…… 저기, 이거 정말 비밀이에요?”
그는 대답 대신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걸 택했다.
“……내 몸에요.”
“음.”
“상처가 전부 없어졌어요.”
어느 날 샤워를 하다가 문득 깨달아야 했다. 처음엔 작은 상처가 없어진 걸 보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짚어 보니 몸에 모든 상처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건 정말 기묘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생각할수록 무섭기까지 했다.
“꽤 큰 상처도 있었는데, 내가 12살 때 자전거 타다가 넘어진 거라든가…… 못을 밟았던 상처 같은 거…… 그게 전부 없어졌어요.”
“……그게 왜?”
“이상하잖아요? 무섭다고요. 안 그래요?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잖아요. 이게 괜찮아요?”
해인은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그의 손등을 붙잡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끝내 그에게 제가 지금 얼마나 위태로운지 드러내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분명한데. 뭔가 좋은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그래서 외면하려고 하는데 이 남자가 자꾸만 기억을 들췄다. 뭔가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일이 있었다는 걸 상기시켰다.
이 남자는 그리운 것도 같은데, 자신에게 있던 어떤 일에 대해서만은 외면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짓눌려서는 숨이 막혔다.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하면, 한계까지 숨을 멈추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또 숨을 참고 있는 해인의 뺨을 그가 매만졌다.
“내가 인정할게.”
“……난요.”
“넌 너야. 네가 아니면 누구겠어.”
남자는, 시율은 움직이지 않는 해인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해인은 참았던 숨을 가늘게 내뱉으면서는 제 왼손을 살피는 그의 속눈썹 끝을 주시했다.
“정말…… 상처가 하나도 없네.”
“거긴 원래 아무 상처도 없었어요.”
“다행이야. 상처는 이왕이면 없는 게 좋아.”
“……우 씨, 내 말 뭘로 들었어요? 그거 꽤 무섭다니까요.”
해인은 심각했지만 시율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반응이라 해인을 힘 빠지게 만들었다.
그는 해인의 왼손을 손가락 끝부터, 깍지 하나하나, 손등부터 손목, 올라가 팔꿈치까지를 느리게 쓸어 올리고 세밀하게 살펴봤다.
“왼손이 안 움직인다는 건 들었어. 그리고 상처가 전부 없어진 거, 그 외 달리 이상한 곳은?”
“……없는데. 굳이 말하자면, 이상할 만큼 건강체가 된 거?”
의사들이 하나같이 했던 말. 시율이 제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가만히 그걸 두고 보고 있는 건 그도 의사라는 걸 상기해내서였다. 수의사지만.
“감각은 있는데 움직일 수 없는 건 묘하네. 움직이려고 하면 아프진 않고?”
“그렇진 않은데…… 이렇게 만져지는 것도 알겠고. 뭔가에 찍히면 아픈데 움직일 수 없을 뿐이에요. 만나본 의사들도 전부 이유를 모르겠다고…….”
“무서워하지 마. 넌 네 자리를 찾은 것뿐이야. 내가 생각하기론 그래.”
해인은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는, 그가 자신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보다 자신을 잘 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를 이렇게 안심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
“아무튼 다행이야. 이제 네가 울지 않아도 되고, 나중을 걱정할 일도 없을 테니까.”
“……저기, 내가 많이 울었나요?”
“자주 울었지.”
“이상하네요. 난…… 우는 건 싫어하는데.”
그가 이제 손이 아니라 자신의 뺨을 만지는데도, 눈을 감고 그걸 음미하고 싶어질 뿐이었다.
그와 너무 가까운 순간에는 자신이 그의 어떤 면을 좋아했는지, 그것마저 깨달아버렸다.
“울면서 매번, 원랜 이렇지 않다고 변명하듯 투정했지. 내가 안 믿으면 화냈고. 그리고 지금 보니 확실히 너는 눈물이 많은 타입은 아니야. 남들 앞에선. 내 앞에서 울어준 건 고마운 일일지도.”
“거…… 내가 왜 울었을까. 이, 이상하네요, 참.”
“비밀이 많았다고 했잖아. 너는 말 못 하는 것투성이였고, 그걸 답답해했어. 내가 지금 해보니 어떤 건지 알 것 같다.”
이제 저 대신 비밀을 끌어안고 있다는 남자는 그게 별로 힘들어 보이는 눈치는 아니었다. 확실히 그와 달리 저는 비밀을 지키는 걸 고역스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비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비밀이라는 게…… 뭐였는데요?”
“비밀이었으니까 나야 모르지. 아, 하나 아는 게 있긴 하다. 꽤 큰 거였을 거야.”
“……그게 뭔데요? 내 비밀이?”
해인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눈을 반짝였다. 자기 비밀은 자기가 모른다니 그건 이상했다.
“넌 가끔…….”
“가끔……?”
“고양이가 됐어.”
진지한 걸 말해줄 것처럼 분위기를 잡더니, 고작 한다는 게 말도 안 되는 농담이었다. 해인은 당장에 뿌루퉁한 얼굴이 됐다.
“쳇, 뭐예요, 그게.”
“아아. 고양이 같은 여자 친구였어.”
그거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다. 물론 자신이 개냐 고양이냐 하면 고양이와 비슷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경질적인 데다가, 잘 툴툴대고, 예민하고 그러면서 게으르고. 또…….’
한참 자신의 단점들을 생각하던 해인은 제 옆에 있는 남자가 굉장히 신기하게 느껴졌다. 저와 사귀면서 온갖 고생을 했을 건 당연해 보였으니까.
장담하는데 순한 여자 친구는 아니었으리라. 말하는 걸 보니 말썽도 많이 피웠던 것 같고…….
“……미안하네요.”
“갑자기 뭐가 미안해?”
“그게…… 잊어버려서…… 당신을.”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사실 기억이 안 나는 잘못에 대해 사과하기란 꽤나 힘든 일이었지만, 범인은 제가 분명하니 어쩌겠는가.
해인은 조금 시무룩해졌고, 그는 사과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해인아.”
“……응?”
“미안하면 말이야. 이제 가져가라, 네 반지.”
“왜, 왜 얘기가 그렇게…….”
시율은 어느새 제 새끼손가락에 있던 반지를 빼내서 해인에게 억지로 들려주고 있었다. 이 남자는 자꾸 틈만 나면 해인의 손에 뭔가 들려주려고 했다.
“반지는 주인에게 돌아가야지. 안 그래? 우리가 사귀었었다는 것도 인정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대체 뭐가 문제야?”
“난 아직 적응이 안 됐다고요! 마음의 준비라거나…….”
“자, 손 내밀어봐. 끼워줄게.”
해인의 파닥거림에 반지를 들려주는 게 잘되지 않자, 그는 아예 해인의 왼손을 잡아 들고 반지를 끼워주려고 했다. 움직이지 않는 왼손으로 반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거 너무 부끄러워! 창피해! 남자가 왼손에 반지를 끼워주는 건, 마치, 프러포즈 같잖아!
“으악! 내가, 내가 낄게요!”
“잘 생각했어.”
당했다. 당했어.
해인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얌전히 올려진 은색 반지를 보면서는 저는 결코 이 남자에게 당해낼 수 없다는 것만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뭔가 이게 아닌데…….”
울상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다.
“있잖아. 해인아.”
“네?”
반지를 약지에 한번 끼워봤는데, 너무 정확한 사이즈에는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제 반지는 제 반지인 모양…….
“우린 아직 헤어진 적 없어. 그거 알아?”
“……그게, 무슨 뜻……?”
“우리가 여전히 사귀는 중이라는 거지.”
돌연 목이 말라오는 건 이 남자의 이런 쉴 틈 없는 공세가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걸 알 것 같아서였다. 해인은 조금 떨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마, 마음의 준비가 아직.”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으아.”
“두 번째라 더 잘할 수 있거든. 나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 알고 있어.”
그는 아무래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게 자신이라는 건 말이다.
해인은 다시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를 부르는 연습을 하자고 생각했다.
‘강.’
‘강. 정말 좋아해.’
아직 말할 수 없을 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난 날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