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마주치게 된, 사람
“명함을 돌려줄 것까지야 있어?”
“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인걸요.”
“만에 하나 중요한 연락일 수도 있잖아? 예전에 알던 사람이라거나…….”
“아닐 거예요. 제가 아는 사람은 정말 적거든요. 까먹을 만큼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애초에 그러니 1년이나…….”
1년이나 기억이 날아갔는데도 지내는 데 별문제가 없지.
해인은 새삼스레 자신이 참 쓸쓸한 타입이구나 싶어졌다. 얼마나 사람들과 안 친한 인생을 살았는지 1년의 공백을 주변 사람 대부분이 모르고 있었다.
제가 뭘 했는지 알까 싶어서 연락해보니, 몇 없는 친구들은 너 살아 있었냐는 농담이나 해댔고, 하나 있는 가족인 엄마조차 해인이 1년간 뭘 하고 다녔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다 커서 독립시킨 딸이니 별로 신경을 안 썼다는 편이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무심한 사람들은 단순히 박해인의 방랑벽이 또 도졌다고만 생각한 걸까.
‘난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지……? 산속에 숨어서 수행이라도 한 거야?’
최근 한동안 해인은 자신의 1년간의 행방을 추적해봤는데, 집에 두어 번 들린 것과 작업실에 한 번쯤 나온 걸 제외하면 그 외에는 모든 행방이 묘연했다.
누굴 만나지도 않았고 원래 가려던 여행지에 간 것도 아니고. 혼자 무슨 별세계라도 다녀온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놀랄 만큼.
해인은 멍하니 턱을 괴며 빨대를 물었다.
기억나지 않는 1년 사이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건 같은데, 그게 뭔지 알 길은 없으니 자꾸 뿌연 기억 사이를 헤매느라 멍하게 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제가 말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해인이 커피만 쭈욱, 쭉 들이켜고 있자니 이영이 되물었다.
“1년이나?”
“아, 그냥…… 거의 1년이나 안 보인 것 같은데…… 그걸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제가 주변에 사람이 없긴 없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친구도 거의 없고…….”
“어머, 왜? 우리 있잖아!”
“……고마워요.”
수문과 이영은 어쩐지 해인을 귀여워했고 동생처럼 챙겨줬다. 해인이 벽을 치거나 말거나 거리낌 없이 다가와 살갑게 놀아주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해인은 불편함과 부끄러운 감정이 공존해서 어찌할 바 모르고는 했다.
혼자가 더 편하다고 생각한 지는 오래인 해인이지만 이 둘에게만은 조금 약했다. 이 둘 아니면 이렇게 지치지도 않고 계속 먼저 다가와주는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친구는 평생에 셋이면 충분하더다라.”
“……셋도 안 되면 어떻게 해요?”
“나랑 수문이 있잖아! 그래도 잠수는 좀 그만 타라. 해인 씨는 얼굴 보기 너무 힘들어. 오죽하면 별명이 희귀동물이야?”
그 별명 누가 지은 건지 알 것 같았다.
“그거 강수문 씨가 붙인 거죠?”
“뻔하지, 뭐. 후후. 앗, 자기 얘기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아서 저기 오네.”
해인과 이영은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 카페에 앉아 강수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외주 미팅을 다녀왔다는 수문은 드물게 작업복이 아니라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다.
“미안, 미안! 늦었지.”
“20분이나 지각했어. 희귀동물 아가씨가 모처럼 나타났는데 이러기야?”
“그러게 말이야. 사과의 뜻으로 오늘은 내가 밥 살게.”
급하게 왔는지 수문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영이 마시던 에이드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이영은 그걸 웃으며 지켜보다가 품에서 손수건을 한 장 꺼내줬다.
이영의 특기대로 섬세한 자수가 들어간 하얀 손수건은, 땀 같은 걸 닦아도 될까 싶을 만큼 예술적 가치가 높아 보였다. 하지만 수문은 거리낌 없이 받아 썼고 이영도 아까운 눈치는 아니었다.
왠지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본 해인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전에도 이 둘이 이런 느낌이었나?
1년 전에는 몰랐는데 오늘 보니 어쩐지 이영과 수문이 단순한 친구가 아닌 것도 같았다. 갑자기 둘을 보고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해인은 조금 망설이다가 둘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저기…… 역시 두 분 사귀시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아니면 예전에 사귀었거나…….”
“어머? 해인 씨가 그런 걸 다 묻고 웬일이야.”
“그러게, 희한하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사귄다 아니다로 내기해도 해인 씨는 전혀 관심 없었잖아.”
“그랬나…… 그랬어요? 그냥 오늘 보니 그래 보여서…….”
둘 사이에 분위기라거나, 묘한 시선의 섞임 같은 게 문득 눈에 띄었다면 왜 그런 걸까. 전에는 이런 걸 느끼지 못했는데.
하지만 오늘따라 이영과 수문이 나란히 숨을 쉬고 있는 것만 봐도, 어쩐지 내밀한 연인 사이를 보듯 속이 간지러워졌다.
그걸 뭐라고 표현한단 말인가. 새삼스럽지만 두 분이 잘 어울려요? 연인 같은 그런 분위기가 느껴져요? 연인 간의 미묘한 기류가 이런 건가요?
해인은 제가 생각해도 바보 같아서 얼른 손사래 쳤다.
“아우, 죄송해요. 제가 뭐라고 한 거지……? 미쳤나 봐.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연애도 한번 제대로 안 해본 제가 그런 걸 감지한다고 말하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무슨 재주로 그걸 알아본다는 걸까.
“난 역시 해인 씨가 귀엽더라.”
“그러게, 드디어 해인 씨도 남녀 보는 눈이……. 아, 잠깐 전화 좀 받을게.”
수문과 이영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말해주려는 눈치였는데, 그보다 빨리 수문의 품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네, 여보세요? 누구요? 아아…… 형이구나. 오랜만이네?”
“이거 먹어 해인 씨.”
이영은 점점 얼굴이 붉어지고 있는 해인의 손에 커피와 함께 나온 조각 초콜릿을 들려줬다. 해인은 민망함을 감추려고 허겁지겁 이영이 들려주는 대로 입안에 넣고 있었다.
“아직 미술 하냐고? 나 조각하잖아. 그래. 잘 지내지……. 어디? 아뜰리에 아리아?”
먹을 걸 욱여넣다 말고 힐끔, 통화 중인 수문을 바라본 건 익숙한 이름이 들려서였다. 이영도 수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게 자기들 사는 곳이 대화에 나오니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수문은 대체 누구랑 통화하는 걸까. 해인과 이영은 그런 공통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잘 알지. 거기, 작가들 모여 사는 데. 거기가 왜? 음, 아는 사람 있냐고? 내가 거기 사는데?”
“누굴까요?
“글쎄. 수문이는 아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그새 얼굴에 뭘 묻히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영이 상냥하게 웃으며 해인에게 냅킨을 한 장 내밀었다.
해인은 급하게 입가를 문댔고, 수문은 통화가 길어지자 다소 난감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엑? 구경이라니, 별로 상관은 없지만……. 일단 나 어딜 좀 가야 해서. 나중에 얘기하자, 형. 안 되는 건 아닌데…… 나중에. 어어, 알았어, 형.”
“뭔데 그래? 천천히 통화해도 되는데.”
“아니, 왠지 얘기가 길어질 분위기라.”
잠자코 쳐다만 보는 해인과 달리 이영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다.
“누군데?”
“친척 형인데, 오랜만에 연락 와서는 대뜸 아직도 미술 하냐고. 그러더니 아리아에 아는 사람 있냐고 묻네.”
“흐음, 아리아는 왜?”
“모르겠어. 내가 거기 산다고 했더니 와보고 싶다고, 초대해줄 수 있냐고 심각해지는데? 이런 부탁 하는 사람이 아닌데 희한하네? 별일이야.”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모양이, 수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으음…… 뭐, 취재 같은 건가? 그 사람 혹시 기자야?”
“그건 아닐 텐데. 별로 친하진 않았지만 머리가 좋아서 의대 간 걸로 알거든. 아마 지금 의사일걸? 어렸을 때 친가 친척들 모이면 제일 예뻐하던 형이야. 항상 수석이었거든.”
“어머, 너희 친가 한가락 하지 않나.”
“그래, 그래서 별로 안 친해. 왕래 안 한 지도 꽤 됐고…… 친가 어른들이 잘난 척이 좀 세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 형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연락 안 한 지 7년도 넘은 것 같은데……. 아무튼 미안. 이제 밥 먹으러 가자. 메뉴는?”
수문은 저 때문에 배를 곯고 있는 두 여자한테 미안한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영은 고민할 것도 없이 외쳤다. 얻어먹는 해인은 얌전히 대세를 따랐다.
“고기!”
“……고기요.”
카페를 빠져나가며 수문은 뭔가 아닌 거 같은지 혼자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해인은 그 얘기가 영 신경 쓰였다.
“음? 의대가 아니었나……? 뭐, 아무렴 어때.”
***
강수문과 문이영은 자타공인 애주가였고, 밥을 먹자더니 결국엔 고기와 함께 술을 시키고 있었다.
해인은 못 먹는 술은 아니었지만 눈앞의 둘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의 주량이었다.
“엇? 정말? 우리 같이 술 먹었던 거 기억 안 나?”
“안 난대, 전혀. 그날 너무 마신다 하긴 했지.”
“엄청 마셨지! 그러다 갑자기 사라져서 우리가 얼마나 놀랐어? 해인 씨 그날 술값에 보태라면서 나한테 6530원인가 주고 간 건 기억나? 그것도 전부 동전으로.”
이렇게 민망할 때가 또 있을까. 해인은 테이블 위로 점점 고개를 숙이다가 더 이상 숙일 곳도 없을 즘에야 고개를 들며 호기롭게 외쳤다.
“왜 그랬지……. 하여간 죄송해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그런 뜻은 아니지만 말이야.”
“카드도 가져왔고, 정말 제가 쏠게요. 맨날 얻어먹었잖아요?”
“뭐, 어때. 맨날 우리가 끌고 왔잖아.”
“그치만…… 저 이번에 작업실도 빼고요…… 그 전에 밥 정도는 사게 해주세요.”
마침 해인은 신분증과 함께 카드를 재발급받은 직후였다. 지난 1년간의 기억과 함께 통장잔액도 날아갔으려니 했는데, 잔액은 놀랄 만큼 그대로였다.
1년간 저는 한 푼도 안 쓴 모양이었다. 지난 행적이 더 미스터리해지게도 말이다. 카드 내역만 있어도 어디서 뭘 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왜? 작업실을 뺀다고?”
“개인적으로 사정이 좀 생겨서요. 일할 상황이 아니라서…….”
“무슨 사정?”
“……그냥 좀.”
“뭔데? 도와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그래, 말해봐. 아까는 별로 말하기 싫은 것 같아서 안 물어보긴 했는데 나도 궁금해.”
수문이 끈질기게 이유를 물었고, 이영도 수문에게 편승해서 점점 해인을 압박하고 있었다. 해인은 어째 조금씩 가까워지는 이영의 얼굴이 부담스러워서 망설이다가 겨우 말문을 뗐다.
소문낼 사람들도 아니니, 이 둘에게 정도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사실, 기억이 좀 없어요.”
“술 먹은 기억?”
“……아뇨. 전체적으로 한 1년 정도가…… 하나도 기억 안 나요.”
“……어머?”
“이런. 어쩌다?”
그건 해인이야말로 궁금한 이야기였다. 그러게요, 어쩌다 그랬을까요. 해인은 답답하던 차에 마침 눈앞에 놓인 생맥주를 집어 들었다.
벌컥벌컥 들이켜 봤지만 그런다고 답답한 게 가시지는 않았다.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거니까…….”
“그럼…… 기억이 안 난다 안 난다 했던 게, 정말 그거였어?”
“네……. 저기, 어디 소문내지는 말아 주세요. 괜히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거의 말 안 하고 있거든요. 사실 눈치채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요. 소문 나봐야 긁어 부스럼 같아서…….”
“비밀로 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그거 괜찮은 거야?”
“으음, 사실 딱히 크게 불편하진 않은데…… 기억이 좀 없으니까 가끔 참을 수 없이 불안해요. 기억을 찾으려고 멍하니 있게 되고…… 길에서도 자꾸 그러니까 사고 날 뻔하고요. 아, 전 괜찮아요. 쉬고 나면 1년 잊어버린 것도 잊어버릴 거예요.”
순간 심각해졌던 이영과 수문은 해인 본인이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자 그리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럼 남자 친구는?”
“그래, 맞아. 그때 얘기했지.”
“네? 누구요?”
“해인 씨 남자 친구. 그 친구는 그거 알아? 헤어졌나 그 뒤에?”
이 사람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해인은 이영의 알 수 없는 물음에 남은 맥주를 비우며 눈만 멀뚱거렸다. 이들이 하는 말이 저와는 너무 상관이 없어서 뇌에 입력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까맣게 모르겠다는 얼굴이야?”
“완전 처음 듣는다는 얼굴인데?”
“기억 안 난댔지, 참.”
“아 참. 그러네.”
그런 해인을 보며 수문과 이영은 작게 수군거렸지만 어차피 맞은편에 있다 보니 결국엔 귀에 다 들리고 있었다.
이영이 수문의 옆구리를 찌르는 듯했고, 수문은 등 떠밀려 말문을 열었다. 그러곤 뭔가 어려운 얘기를 할 것처럼 뜸을 들였다.
“흠흠, 왜 우리 셋이 술 먹었다는 날.”
“그날도 기억 안 나요.”
“그날 해인 씨…… 남자 친구랑 싸운 것 같았어.”
“헤에…… 누구랑 누가요?”
“해인 씨랑, 남자 친구.”
“푸웁.”
아,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구나. 아니었어. 이런 망할 세상에. 해인은 마시던 맥주를 뿜어내기에 이르렀고, 수문과 이영은 그럴 것 같았는지 요령 좋게 튀는 것을 피한 뒤였다.
몇 번이나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제 귀는 정상인 모양이었다.
해인은 코까지 역류한 맥주로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급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한테, 남자 친구가 있어요?”
“……우리야 모르지.”
“해인 씨 본인이 알겠지……?”
폭탄을 던져놓고는 모르겠다는 수문과 이영이었다.
“방금 그렇게 물어보셨잖아요?”
“하지만 우리도 정말 잘 몰라. 그날 술김에 해인 씨가 남자 친구인지 누구 욕을 엄청 하는 거야. 그런데도 좋다고. 그 사람 너무 좋아한다고…… 그냥 그런 얘기 했었어.”
“그리고 그거 나중에 꼭 전해달랬지.”
“맞아, 맞아! 그런 술주정도 했지.”
뒤통수를 한 대 제대로 얻어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자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걸까. 그리고, 대체 누굴 잊어버린 걸까.
해인은 술은 거의 마시지도 않았는데 진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
방랑벽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이렇게 심각하게 들기는 처음이었다. 기억뿐 아니라 누군가까지 잊어버렸다고 생각하자 씁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졌다.
‘정말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건가…… 나한테? 혹시 두 사람의 오해는 아닐까.’
해인은 이불에 누워 있다 말고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는 엄마의 등 뒤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익숙한 냄새가 나는 등에 매달리자 조금은 안정이 됐다.
여전히 속은 서걱거리는 불안으로 꽉 차 있었지만. 그걸 잠재우기 위해 엄마의 등에 더 꼬옥, 매달렸다.
그러자니 어느 순간 문득 전에도 이렇게 누군가의 등에 자주 매달렸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단단한 어깨였던 것 같은데…… 아빠일까?
아니면 전혀 기억나지는 않지만 있었을지도 모르는…….
“엄마.”
“으응?”
딸이 부르거나 말거나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않는 엄마가 야속하긴 했지만, 그래도 상담할 곳이 달리 없었다.
“있잖아. 나, 남자 친구가 있었나 본데…… 혹시 아는 거 있어?”
“……아, 있다고 했었다. 했었어.”
“……그런 건 좀 일찍 말해주면 안 돼?!”
나만 몰랐던 거야?! 해인은 엄마의 귓가에 버럭 성질을 내버렸고, 그제야 돌아보는 엄마의 얼굴은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해인은 남 일에 관심 없는 제 고질병이 엄마를 닮았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 중요한 거였어?”
“중요한 거지!”
“네가 그냥 통화하다가 스치듯 말한 걸 내가 중요한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아니?”
“……뭐라고 했는데?”
“음, 네가 뭐랬더라…….”
그리고 곧잘 귀찮아하는 이 성격도 말이다. 딸이 심각하게 굴거나 말거나 다시 드라마에 눈길을 주고 있는 엄마였고, 해인은 그 등에 매달려 버둥거려야 했다.
“생각해봐, 빨리! 아휴, 드라마 좀 그만 보고!”
“늙으면 기억이 잘 안 나는 거야. 그때 너 사귀는 사람이…….”
“……응!”
“……아, 자세히 말 안 하던데. 안 물어봐서 모르겠다, 얘.”
“으아아! 너무하네, 거, 정말!”
“뭐 하는 사람이냐고는 물어봤었어. 그런데 네가 얼버무리다 끊었잖니. 그러니 나도 기억이 안 나지. 그렇게 중요하면 한번 데려와서 보여주든가 했어야지! 어딜 되도 않는 투정이야?”
어째 주변 사람들이 하나같이 도움이 안 됐다. 다들 뭔가 알긴 알지만 결국 까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반복이었다.
해인은 답답함에 이불 위를 데굴데굴 굴렀고, 그러다가 먼지 날린다고 등짝만 얻어맞기에 이르렀다.
“아파!”
“어휴, 이게 또 나잇값도 못 하고!”
이렇게 서러울 수가. 해인은 제 엄마지만 이 사람 참 모질구나 싶었다. 하긴 이 씨 아줌마 하면 근방에서 성격이 독하기로 파다했다.
그러니 남편도 없이 딸을 미대에 보냈다며,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말이다.
하여튼 이런 사람 밑에서 스파르타로 자랐으니 해인이 경계심 많고 날 선 야생동물처럼 자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왜 몰라, 왜! 딸이 남자 친구가 있다는데 엄마라는 아줌마가 말이야!”
“이 다 큰 걸 때릴 수도 없고…….”
“엄마아, 더 생각해봐? 응? 중요한 거란 말이야.”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미주알고주알 알려줬다고 내놓으라고 조르니 조르길? 어휴, 왜 갑자기 이렇게 떼쓰는 게 늘어서는…… 어디서 안 하던 어리광을 배워 왔어!”
“……으으.”
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버둥대면 누군가가 오냐오냐 얼러주며 모든 소원을 들어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단 그게 제 엄마는 절대 아니었다.
해인은 투정이 통하지 않자 엎드린 채로 꿍얼꿍얼대며 이불 속으로 온갖 불만을 토해냈다.
“다른 집 엄마는 딸이 아프면 옆에서 24시간 간병해주고 먹고 싶은 거 다 해준다는데, 우리 엄마는 왜 잔소리밖에 안 한담. 아무래도 친엄마가 아닌 것…… 아악!”
“매를 벌어요, 꼭! 드라마 좀 보자, 드라마! 그리고 너 옥탑방 쓸 거야 말 거야? 너 안 쓸 거면 세준다?”
“……쓸 거야…… 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꾸했다. 도통 정 없는 제 엄마에게 삐졌지만 챙길 건 챙겨야 했다. 작업실도 빼기로 한 마당에 옥탑방은 꼭 필요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럼 세 안 준다?”
“내가 청소해서 작업실로 쓸 거야.”
“달에 두 장이다.”
“……엄마!”
“얘, 거저야, 거저. 많이 깎아준 거야. 나도 손해는 안 봐야지.”
“나 돈 없는 거 알면서!”
“그러니까 일을 하세요. 더 놀면 네가 인간이니? 길 가는 고양이도 너보단 쓸모 있겠다, 얘.”
역시 이 아줌마는 친엄마가 아닌 게 틀림없었다.
해인은 입술을 꽤나 내밀었다가, 엄마가 홱 하니 노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 얼굴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엄마랑 있는 건 좋았다. 엄마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고. 해인은 그 구박을 받고도 다시 엄마의 등에 매달렸다.
***
작업실 이사 견적을 내기 위해 이사업체 사람과 만나기로 한 해인은 아침부터 작업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저기압 상태였다.
눈을 떴을 때부터 뭔가 불쾌하더니, 작업실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그게 심해졌다.
‘으음, 그 꿈을 꿔서 그런가?’
해인은 허여멀건 꿈을 가끔 꿨다. 정말 허여멀겠다. 그게 다였다. 안개 바다 같은 속을 한참 헤매다가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면 꿈에서 깨어났다.
빛을 쫓아가도 꿈에서 깨어나 제 방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과 마주할 뿐이었다.
겨우 누군가의 손을 잡은 것 같아서 깨어보면 그건 엄마의 손이었다.
그 희뿌연 세상에서는 가끔 새의 날갯짓 소리 같은 게 들렸고, 어디선가 맹수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리고? 아,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이 그 공간에 더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그저 혼자였다.
그렇게 해매다 보면 찝찝한 채로 아침을 맞이하고는 했다.
“……역시 개꿈인가?”
아니면 이사하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라도 되는 걸까? 이사와 관련된 뭐만 하려고 들면 꼭 꿈을 꾸고 기분이 바닥을 치니 그것 말고는 짚이는 게 없었다.
단 게 들어가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었다.
해인은 골목 아래 편의점에 들러 아쉬운 대로 막대사탕을 하나 사서 입에 물었다.
그러곤 방금 만든 쿠키 같은 걸 먹고 싶다는 되지 않는 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작업실로 향하는 오르막을 올랐다.
“흐흠, 흠.”
슬슬 여름이다 보니 해가 강렬했고, 해인은 캡 모자를 깊이 눌러쓰며 귀에 이어폰을 꼽았다. 이렇게 휘적휘적 길을 걷는 순간이 좋아진 건 언제부터일까.
전에는 산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멍하니 혼자 방 안에 앉아 있는 편이 더 취향이었다.
그런데 근래는 어딘가 걷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계속 밖으로 나오게 됐다. 누가 보면 뭘 찾는 줄 알겠다 싶을 만큼 자꾸만 밖을 쏘다녔다.
정처 없이 걷고 싶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멍해져서 이런 게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날씨 너무 좋은 거 아냐?”
해인은 하늘을 보며 괜히 거꾸로 걸어봤다.
1년 전과 지금의 자신이 무엇이 달라졌는지, 근래에야 몇 가지 확실하게 깨달았는데 그건 바로 스스로가 좋아졌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기분 좋아지는 방법을 알게 됐다.
땅굴을 파다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게 된 정도 지만 말이다.
이전에는 매사 자신에 대한 불만과 질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에게 모질었고, 그러다 보니 잘나지 못한 자신이 싫었다.
그런데 요즘은, 기억이 없어졌다는 혼란이 조금 가시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손이 움직이지 않지만 나쁘지 않았고,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잡생각이 늘어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자신이 원망스럽지 않았고. 그래도 사랑스럽고, 그래도 기특했다. 자신도 누군가에겐 소중할 것 같았다.
자신이 좋아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그랬다.
해인은 다시 똑바로 앞을 보고 걸으며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아뜰리에 앞에 누군가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누구지?’
이사업체 사람이랑 만나기로 한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고, 저 남자는 아무리 봐도 업체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손님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지나가던 사람.
해인은 사탕을 꺼내 물며 그 사람 옆을 지나쳤다.
키가 큰 낯선 남자에게 힐끔 시선이 간 건 그 남자가 마치 서럽게 울고 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도 아니었고, 듣기 힘든 한숨 소리를 흘려서도 아니었다.
남자는 왼손에 반지를 두 개 끼고 있었는데, 약지에 하나 새끼손가락에 하나. 그렇게 두 개였다.
그게 조금 특이했다.
본래는 남이 무슨 액세서리를 하고 있던 관심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데, 어째서 그게 눈에 들어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마 햇빛에 반짝거리며 시선을 끌어서일까.
“저기, 실례합니다.”
“네?”
“여기서 지내세요?”
“그런…… 데요.”
갑작스레 남자에게 불러 세워진 해인은 대답을 하면서 뒷걸음질도 했다. 모자를 더 깊이 눌러쓰며 슬금슬금 도망칠 준비하는 건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게 어려워서였다.
남자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고개를 더 숙였다.
“혹시 여기에…….”
“아?”
난데없이 강한 바람이 휙 불어와 해인의 모자를 날린 건 그때였다.
해인은 한참 공중에 뜨는 제 모자를 바보같이 올려다보다가 손을 뻗었지만 오른손 하나로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좋은 날씨에 뜬금없이 무슨 바람일까.
순간 그런 의문을 떠올리면서도 해인은 쪼르르 달려가 남자 앞에 떨어진 제 모자를 주워 들었다. 떨어져도 하필 정확히 거기였다.
주춤주춤, 나뒹굴어 먼지가 묻은 모자를 주워서 털고는 다시 머리에 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림자가 다가왔다.
“…….”
“……?”
고개를 드니, 낯선 남자가 너무 가까이 서 있었다. 평소라면 놀라서 주저앉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남자의 표정이 너무나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울고 싶은 걸까, 웃고 싶은 걸까? 어려운 표정이었다.
해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고, 남자가 제게로 손을 뻗는데도 도망치지 않았다.
낯가림 하면 둘째로 서러운 제가 멍하니 있다가 붙잡혔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으악?”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어 소리쳤을 때는 이미 남자의 두 손에 얼굴을 붙들려 있었다. 해인은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꼴사납게 바닥에 떨어트려 버렸다.
맹세하는데, 남자에게 이렇게 만져지기는 처음이었다.
뒤늦게 당황해서는 남자는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밀어내는 손 족족 남자는 익숙한 것처럼 전부 잡아챘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담!
“뭐, 뭐야?!”
처음 보는 남자가 이렇게 접근하면 낯가림 없는 여자라도 기겁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언제 봤다고 남의 얼굴을 주물거린다 말인가.
애초에 이 정도 도망가려고 굴면 손을 놔줘야 하는데, 몇 번 때리려는 해인의 손을 붙잡고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온 신경을 쏟는가 싶던 남자는…… 해인을 덥석 끌어안기에 이르렀다.
뭐야, 이 미친놈은!
남자는 오히려 아주 힘껏 해인을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만큼 강하게 말이다. 해인은 또 한 번 당황해서는 한동안 멍청하게 안겨 있었다. 곧장 밀쳐내지 못했다.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건 이런 걸 처음 겪어 봐서다.
그래,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몸에서 힘이 풀린 거야. 절대 안겨 있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는 아니야!
“이…… 이! 야! 이 변태 새끼야!”
겨우 밀쳐내며 소리쳤는데, 그제야 맥없이 뒤로 떠밀린 남자는 욕을 듣고도 좋다고 웃고 있었다.
뭘 저리 기뻐 보이는 얼굴일까?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와서, 한 걸음 물러서려고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서워서는 아니었고 어쩐지 제게로 뻗어지는 남자의 손길이 익숙해서였다.
“나, 모르겠어?”
“……모르는데……?”
홀연히 서글퍼지는 그의 얼굴에 저까지 눈물이 나려고 해서 해인은 당황해야 했다.
처음 보는 남자의 손길을 피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인데 그게 자신이 잔인한 것처럼 느껴져서…… 이 남자의 손을 피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느껴져서.
어느샌가, 피하는 것보다 가만히 허락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는 걸 깨달아 버려서.
남자가 다가올수록 저는 답지 않게 굴고 있었다.
“그래, 네가 말한 게 이런 거였구나.”
살며시 닿은 남자의 손끝이 울먹이고 있었다.
“매일 찾았어. 울고 있을까 봐.”
“…….”
울고 있는 건 그쪽 같은데? 해인은 남자가 저를 그런 눈으로 보는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울지 않고 있어서 다행이야.”
어째서일까. 원망하며 물어도 좋다고 말하는 손끝은 오히려 물 수 없었다. 저를 쓰다듬는 남자의 손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해인은 제가 이 남자의 손길을 기다렸다는 걸 깨달아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버겁도록 기쁜 마음이 이유 없이 마음속에 태어나지는 않을 테니까.
“나…… 알아요?”
그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대답은 울음 섞인 한마디였다.
“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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