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기억이 안 나는 사람
때는 완벽한 봄날이었다.
거리는 해가 졌음에도 사람들로 가득했고 밤이 와도 더 이상 춥지 않았다.
거리의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이질적인 존재 둘이 홀연히 나타난 건, 달이 구름에 가린 틈바구니였다.
하나는 검은 갓은 눌러쓰고 검은 도포를 입은 새까만 차림의 소년이었고, 하나는 낡았지만 하얀빛의 도포를 입은 건장한 덩치의 사내였다.
둘은 바쁜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부딪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은 기묘함도 알아채지 못했다.
“너는 도대체 왜 따라오는 거냐?”
“같이 좀 가면 어때서 그러냐. 내가 보살핀 아이니 마지막 모습 정도는 봐두고 싶어서 그러지.”
둘의 목소리 역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호랑이 주제에 잔정이 그렇게 많아서 어쩌려고 그러냐.”
“어쩌긴, 여지껏 그래왔듯 그렇게 살겠지.”
“희한한 녀석.”
“그나저나 모달 네 그 모습은 오랜만에 본다. 한 이백 년 만인가?”
“요즘은 인간들에게 친근함을 줘야 한다며 업무 중 사신탈 착용이 필수니까. 뭐, 인간들이 날 보자마자 비명부터 안 지르는 건 확실히 좋다만.”
모달은 푸른빛 도는 피부나 생기 없는 눈만 아니라면 15살쯤 되는 평범한 소년으로 보였다.
그는 물이 뚝뚝 흐르는 무언가를 천으로 감싸 대충 옆구리에 끼고 있었는데, 하얀 발이 밖으로 나와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해인의 발이었다.
그 모양을 힐끔대나 싶던 야호가 불안한지 손을 뻗었다.
“뭐냐?”
“내가 안고 가는 게 낫겠다. 돌아가는 길을 사신이 안고 있는 것부터가 불길하니까.”
“말 거참 막 하는구나.”
“사실이잖냐.”
따지자면 해인은 죽었다 살아나는 길이었고, 야호는 이왕이면 제 손으로 배웅해주고 싶었다.
야호는 기어코 모달의 손에서 해인을 빼앗아 제 품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천을 조금 들춰 숨 쉴 틈을 만들어줬다.
방금 막 연못에서 꺼내 온 해인은 얕은 숨을 몰아쉬며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급할 필요가 있냐. 오자마자 밖으로 데려나올 필요는…….”
“뭔 흰소리냐. 그럼 이게 느긋하게 할 일이냐? 난 서둘러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다. 그건 박해인도 마찬가지일 거다.”
“…….”
“빠를수록 서로에게 좋은 것 아니냐.”
약속했던 날보다 이틀이나 빨리 나타난 모달이었고, 모달은 해인을 인간세계로 되돌려놓는 걸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건 야호가 당황스러워할 만큼 곧장이었다.
“으음, 그래도 깨워서 인사 정도는…….”
“깨워봐야 울기밖에 더 하겠냐. 보니까 지내던 인간들이랑 정이 들었는지 귀찮게 하더라.”
“그래도 이대로 기억을 지워버리는 건 너무 가엾지 않냐.”
“넌 인간에게만 어찌 그리 무르냐. 대화를 한들 뭐가 달라질까.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어차피 지울 기억, 전부 쓸데없는 일이다.”
모달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야호는 해인이 제 기억이 지워지는 순간에도 잠들어 있기를 바라진 않았다.
물론 깨어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기억이 지워지는 걸 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 어쩌면 모달의 말대로 이대로 조용히 돌려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잠자코 해인의 젖은 머리카락을 보다가, 몸에서 물기를 날려 보송보송하게 만들어주는 것 말고는 야호도 더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여기가 좋겠군.”
마땅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모달이 파란 간판을 가리켰다.
야호는 저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파출소? 뭐 하는 데냐, 저기는.”
“관청이라고 하면 네가 알려나. 아무튼 저 앞에 두면 안전할 거다. 집이니 뭐니 하는 것도 찾아줄 테고.”
“그렇군.”
“근처에 내려놔라.”
문으로 보이는 투명한 유리 옆에 해인을 기대 앉히며, 야호는 바닥의 냉기를 적당히 날려버렸다.
해인은 천을 한 장 두른 것 말고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야호는 해인 근처로 주변의 더운 공기를 잔뜩 끌어모았다.
“옷은 어쩔 거냐.”
“아, 입혀야지. 어디 보자…… 옷은, 저것들처럼 하면 되려나.”
야호와 달리 모달에게 이 일은 어서 해치우고 싶은 골칫거리일 뿐이었다. 모달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휙휙, 검은 도포의 소매 자락을 휘둘러 해인에게 지나가는 누군가 입고 있을 것 같은 청바지와 후드티를 입히고, 이어 열 명 중 네댓이 신은 것 같은 운동화도 신겨졌다.
야호는 그걸 구경하다가 해인이 투덜거렸던 한 가지 문제를 떠올렸다.
“이 녀석이 그러던데, 너 때문에 자기 차가 할부가 남았는데…… 그래서…… 뭐랬더라? 아무튼 어려운 말이었는데 그건 어쩔 거냐. 물어내라던데.”
“자동차 말이군.”
“널 만나면 따지고 싶어 하던데. 네가 깨우지도 않고 있으니까.”
“으음…… 그건 못 만드는데. 너 할 줄 아냐?”
“나도 못 만드는데.”
모달과 야호는 멀뚱히 서로를 보며 턱을 긁적였다. 생명체가 아닌 이상 뭔가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기본적으로 구조를 알아야 만드는데 그런 기계의 구조를 우리가 어찌 알겠냐.”
“금이라도 주든가.”
“아, 그러면 되겠다. 보석 같은 건 쉽지.”
“이왕이면 금괴로 해라, 금괴!”
“안 돼. 그랬다간 이 녀석 경찰 조사를 받게 될걸?”
“음? 왜냐? 그럼 금두꺼비로 해라.”
야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모달은 귀찮은지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이어 모달이 또 한 번 소매 자락을 펄럭였을 때, 해인의 주머니 부근은 묵직하게 변해 있었다.
완벽한 보상은 못 되었지만 사신의 힘으로 되돌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얼추 된 것 같군.”
모달이 다가서자 야호는 해인의 곁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남은 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야호는 시선을 돌렸고, 모달은 검은 도포 자락 사이에서 핏기 없는 허연 손을 꺼내 해인의 이마를 짚었다.
사신의 손은 차갑고 섬뜩한 것이라, 해인은 순간 깨어날 듯 눈가를 움찔거렸다.
하지만 깨어나지는 못했다.
인간이 아닌 자들이 그렇게 종용하고 있었으니까.
“박해인아, 다른 세계의 일은 전부 잊어라. 그래야 너도 본래의 생활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인간은 인간의 일만을 기억하는 게 좋다.”
모달의 손끝에서 미세하게 퍼져 나오는 그건 빛이라기보다는 연기였다. 푸르고 보랏빛인, 마치 수증기 같은 것.
다름 아닌 저승의 힘.
“……눈물을 흘리는데, 의식이 있는 건가?”
“아니. 인간들은 대부분 기억을 지울 때 어째서인지 눈물을 흘려. 모두 그래.”
제 기억이 지워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반사작용일까. 어느 쪽이든 눈물이 가로지른 뺨은 보기 힘든 것이었다.
긴 시간을 살며 많은 것을 봐온 야호였지만 인간의 기억이 지워지는 순간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건 대체 어떤 상실감일까. 평범한 존재가 아니게 된 이후로 기억이란 영원한 것이 된 야호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해인이 저를 잊는다는 게 아주 조금 쓸쓸하게 느껴지긴 했다.
“됐다. 가자.”
마침내 모달이 손을 떼어냈을 때도 해인은 여전히 가늘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된 건가?”
“그래. 달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 해.”
모달은 누가 볼까 무서운지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야호는 한 번 뒤를 돌아봤지만, 그뿐이었다.
둘이 떠나자 그제야 사람들 눈에 해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인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촐한 뒤풀이였다. 야호와 대작을 할 만한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모달은 드물게도 야호에게 지지 않는 애주가였다.
겉모습은 10대 소년이었지만 말이다.
“기억을 나중에 지우거나 할 수는 없는 거였나.”
허전한 연못 안을 한참 들여다보던 야호가 문득 물었다. 모달은 술잔을 기울이다 말고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하? 너희 세계 법도에서는 그게 가능하던가?”
“물론 아니지만.”
“인간은 인간의 일이 아닌 걸 알아서는 안 돼. 그래서 좋았던 예는 없으니까. 자멸하거나, 혼란을 불러일으킬 뿐이야. 지우고 말고는 내 선택 사항이 아니라고. 애초에 우리 존재를 아는 채로 일상생활은 불가능해.”
모달은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야호가 그새 해인과 정이 많이 든 모양이라고만 여겼다. 처음 해인의 몸을 맡겼을 때도 꽤나 정성을 들이는 듯하더니 말이다.
다소 괴짜라는 점에서 일을 부탁할 때는 좋았는데, 지금은 뭔가 줬다 빼앗은 기분이 들게하고 있었다.
예뻐하던 고양이가 가출이라도 하면 저런 얼굴일까.
“이봐, 그렇게 쓸쓸하면 인간을 하나 골라서 짝으로 삼든가.”
“풉.”
“그 수밖에 없잖아? 기억을 지우지 않으려면 반려로 삼아서 네 쪽 세계의 일원으로 만들거나, 도를 닦게 해서 선인이라도 되게 하는 수밖에 없으니 말이야.”
“뭐, 그런 뜻은 아니었다만.”
야호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모달은 잔을 채우며 되물었다.
“아냐?”
“전혀.”
인간이 측은지심에 길 잃은 짐승을 주워 기르듯, 간혹 산신 중에도 측은지심에 길 잃은 인간을 주워 보살피는 경우가 있었다.
대개는 치료해서 본래 세계로 내려 보내지만, 간혹 정을 통해 연을 맺는 경우도 있었다.
야호라고 못 할 건 없었다. 다만 함께 등천하지는 못할 테니, 짝이 죽거든 등천해야 할 터.
무수한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모달이 선계가 아닌 저승의 존재다 보니 쉽게 말하는 거긴 했지만 말이다.
“무리야. 인간 중에, 월 말고 짝을 고를 생각도 없지만 내 짝이 죽는 걸 보고 혼자 등천할 만큼 대단치 못하다, 나는.”
“거참, 남들은 잘만 하더만.”
“같이 죽고 싶을 것 같다.”
“……죽음도 통달해야 하는 게 등천 아니었냐.”
“그렇다만, 죽음도 두렵지 않게 하는 게 사랑 아니냐.”
야호는 빈 연못을 보며 해인을 떠올렸다. 해인을 이성으로 사랑해서 떠올리는 게 아니라, 해인이 시율을 그렇게 사랑한 게 생각나서였다.
만약 해인은 그대로 악귀에게 잡아먹혔어도 만족했을까? 사랑하니까?
잘 모르겠으니 역시 저는 짐승인 모양이었다.
“난 이래서 도 닦는 것들이랑 대화하는 게 싫다. 무슨 세상 이치랍시고 읊는 게 전부 결국 돌고 도는 눈치니 통 어려워서…….”
“돌고 도는 것 맞다. 그러니 결국 중립이 답인 거고……. 이런, 그보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나한테? 도를 닦는 호랑이님께서 모르는 것도 있나.”
야호는 여전히 해인이 걱정됐지만, 만만치 않게 모달의 안위도 걱정됐다.
분명 이번 일에 잘못이 큰 건 명백하게 모달이었다. 그렇지만 딴에는 수습한다고 동분서주하는 걸 빤히 봐왔고. 할 수 있는 한 원상복귀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늘에야 겨우 일단락됐다고 저렇게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시율의 존재가 남아 있었다. 시율을 내버려둬도 될지가 내심 마음에 걸렸다.
“……모달, 그 아이 기억을 지운 이유 중 하나가…… 염라 때문도 있었지? 만에 하나라도 기억을 읽히면 안 되니까.”
“맞다. 인간들은 죽어서 염제님 앞에 서는데 그때 생전의 모든 기억을 읽히지. 염제님뿐이다. 인간의 기억을 그렇게 상세하게 전부 읽을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거, 생전의 기억을 읽어서 다음에 무엇으로 환생하게 할지 결정하는 거잖냐.”
“너무 악질인 것은 지옥으로 보내기도 하지만…… 거의 그렇지. 설마 이런 기본적인 것을 묻는 거냐?”
염라대왕, 즉 염제는 저승의 왕이자 죽은 것들의 죄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간단하게 보면 규칙을 어기고 ‘신’을 속인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해인의 관심사가 아닐 테지만 말이다.
하여튼 만약 이 일을 들킨다면 소멸되는 건 모달이었고, 모달이 해인의 기억을 지우는 데 급급한 이유는 다른 것보다는 염라 때문이 가장 컸다.
만에 하나 해인이 기억을 가지고 있다가, 명보다 빨리 죽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모달이 손쓸 새도 없이 다른 사신의 손에 염라의 앞에 세워진다면.
그래서 기억을 읽힌다면…… 그건 쉽게 말하면 모달이 제 목을 조를 증거물을 폐기하지 못한 것과 같았다.
“……저기, 너 환생이 언제랬지?”
“이제 37년 남았다. 저승사자 생활은 정말 지긋지긋해.”
그리고 지금의 문제는 모달이 모르는 그 증거물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모달은 해인의 기억을 지웠으니 됐다고 여기고 있는 눈치지만…….
“너희도 일단 사신의 업을 벗으면, 모든 죄는 다 씻어지는 거냐?”
“무슨 소리냐?”
“우리들은 일단 등천하면 지상에서의 모든 죄를 다시 묻지 않거든. 그런 식인가 묻는 거다.”
“아, 그렇지. 일단 윤회의 길로 들어가면 사신일 때의 죄나 추가적인 업무는 다시 묻지 않아. 또 스스로 목숨을 끓어서 사신의 업을 받지 않는 이상은 말이야.”
“흐음…….”
해인의 기억을 지웠으니 됐다고 여기고 마음껏 술을 마시고 있는 자신의 친구를 보며, 야호는 부디 시율이 앞으로 37년 이상은 살아주길 바랐다.
적어도 모달이 사신의 업을 벗은 뒤에 들키면 염라도 어쩌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이 가끔 시율을 보러 가야겠다 싶었다. 그 녀석 오래 살게 하려면 지켜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야호는 이 값을 뭐로 받아야 될까 궁리했다.
“모달 너 말이다.”
“응?”
“그렇게 죽어라 모든 걸 잊고 환생하고 싶은 이유가 대체 뭐냐. 항상 노래를 부르잖나.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기 싫다니까. 부끄럽다고.”
“그걸 말해주면, 너한테 도움이 되는 걸 해주지.”
“……끄응. 또 혼자 뭔가 꿍꿍이를 꾸미는구먼. 이래서 도 닦는 짐승들이란…….”
별것 아니지만 야호에게 그건 몇백 년 된 의문거리였는데, 그간은 전혀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던 모달이 오늘은 술이 거하게 들어가서 그런지, 아니면 신경 쓰이던 일이 해결돼서 그런지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정말 별거 아닌데.”
“으흠.”
“다시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날 거다.”
“어머니?”
“그래. 그래서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릴 거야. 이번에야말로 부모보다 먼저 죽는 자식이 되지 않을 거다. 어머니보다 오래 살아서, 가시는 길 봐드리고 손자를 안겨드리고, 그런 삶을 얻고 말 거다.”
뭐랄까, 너무 심심한 것이라 야호는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이런 심심한 이유라서야 수지가 안 맞았다.
얼마나 마셨는지 슬슬 동이 난 술병을 거꾸로 들어 흔들며 야호는 툴툴댔다.
“그게 다냐?”
“아, 또 돌림병에 걸려오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 팔다리가 문드러져 떨어져서, 산 것이 산 것이 아니어도…… 스스로 죽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결론? 일단 사람은 건강해야 해.”
“뭐, 다 좋다만. 자식으로 태어나는 게 네 마음대로 되겠냐.”
“후후, 비밀인데…… 사신으로 일하면서 깨달은 게 몇 가지 있지. 죽어라 그리워하면, 닿게 되어 있어.”
아, 그렇군. 그런 것 같더라. 야호는 마지막 한 잔을 들이켜며 조금 수긍했다. 왜냐하면 본래의 몸으로 돌아온 해인에게서는 전생을 엿볼 수 있었으니까.
“그렇군. 알 것 같다. 어떤 건지.”
다음에 시율을 찾아가면, 그 곁에 해인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때는 아직 봄이었다.
“이상하군요.”
“…….”
“관절 반응도 정상인데.”
해인은, 멍한 눈으로 담당의의 가운 자락만 바라봤다. 어쩐지 그 하얀 가운 자락이 신경 쓰여서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많이 낯이 익었다. 의사가 아니라 가운이. 물론 의사 가운이 눈에 익은 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예전이랑은 다른 느낌으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박해인 씨?”
“……아, 네.”
“뼈에도 이상 없고, 근육에도 이상은 없어요. 오히려 너무 건강해서 신기한 상탭니다. 이렇게 종합검진 결과가 좋은 사람, 저는 정말 처음 봅니다.”
30대 중반의 젊은 남자 의사는 해인이 다른 병원에서 가져온 소견서나, 이 대학병원에서 한 종합검진 결과를 뒤적이면서 마치 너무 건강한 게 문제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해인은 이제 이 반응이라면 질려버린 상태였다.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간 의사들은 하나같이 해인의 신체건강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마, 제가 술도 담배도 안 해서…….”
“아니, 그래도 이렇게 뭐랄까, 아름답다 싶을 정도로 피 상태가 깨끗하고 뼈가 곧기가 참 힘들거든요? 관리만 잘하시면 평생 무병장수할 몸인데. 교본에 실고 싶을 정도로 완벽한 건강쳅니다. 의사로서 설렐 정도로 신체가 참……!”
“……에.”
“건강관리 비법이 뭡니까? 혹시 뭐, 특별한…….”
해인은 앉은 의자째로 뒤로 조금 물러섰다.
대놓고 질색하고는 굳은 얼굴로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한 손으로는 재킷을 챙겨 입는 것도 오래 걸렸다.
여기도 결국 마찬가지였다. 움직이지 않는 왼손 좀 봐달라고 왔는데 듣는 건 ‘너무 건강하시네요!’ ‘놀랄 만큼 건강하시네요!’ ‘어쩌면 이런 축복받은 신체를!’ 모조리 이런 광적인 반응이었다.
“이런. 너무 감탄한 나머지 제가 그만 실례를…….”
“됐어요.”
“환자분, 계속 같은 답을 들어서 화가 나신 건 알겠지만, 검사결과는 정말 놀랄 만큼 깨끗합니다. 나쁜 곳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는 상탭니다. 이런 식이면…… 남은 건 한 가지뿐입니다.”
“……그게 뭐죠?”
못마땅한 채로 진료실을 빠져나가려던 해인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지금까지 들렀던 병원에서는 죄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답만 들은 채였으니까.
이 의사라고 그리 미더워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답만 알려준다면 뭐라도 좋았다.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혹시 정신적인 문제가 아닐까…….”
“나더러…… 지금 정신과에 가보라는 건가요?”
“환자분,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정신적인 트라우마일 가능성도 염두에 봐야 합니다. 혹시 짚이는 거라거나…….”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있으면 내가 이러고 다니겠어요?!”
해인은 저도 모르게 빽, 하니 소리 질러버리고는 스스로도 당황하는 중이었다.
손이 움직이지 않는 답답함 때문일까. 본래도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 더 나빠진 기분이었다.
온갖 것에 짜증이 나고 초조하고 마음이 급했다. 뭔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자꾸만 엄습해서 숨을 쉬는 게 불편할 만큼 힘들 때가 있었다.
이유도 없이 한 손이 안 움직이는데 여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 싶으면서도, 이러곤 싶지 않았다.
“……죄송해요.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니, 환자분. 그렇게 나쁘게만 받아들이시면 이유를 찾아서 치료할 수가 없잖습니까. 간단한 상담이라도 한번 받아보시면…….”
“아뇨. 감사합니다! 이만 가볼게요.”
해인은 거의 도망치듯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빠르게 걸으면서는 덜렁거리는 왼손이 싫어서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울컥울컥 화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멋대로 쏟아지려고 했다.
***
병원에 오는 것도 상당이 기가 빨리는 일이었다.
병원이 집과 멀어서는 둘째치고 병원 자체의 분위기라거나 이런 식으로 아무 답도 듣지 못하는 반복이 심신을 지치게 했다.
한숨 돌리고 갈까 싶어서 카페에 들린 해인은 커피를 시키고는 곧장 후회했다. 등 뒤로 점점 줄이 길어지고 있었다.
카운터 여직원은 다소 당황하는 눈치였다.
“아…… 손님, 도와드릴까요?”
오른손밖에 쓸 수 없다는 건, 지갑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는 데도 시간이 배로 든다는 뜻이었다.
두 배도 아니었다. 거의 세 배쯤.
아침에 혼자 옷을 입고 씻는 건 다섯 배쯤 더 걸렸다. 설거지를 해도 깨끗이 안 되고, 책을 읽을 때도 못 견디게 불편했다. 타자를 치는 것도 한 손 독수리 타법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요. 오래 걸려서 미안해요.”
“네, 카드 받았습니다.”
“…….”
“포인트 카드 있으세요?”
“……아뇨.”
사실은 있지만. 그걸 지갑에서 찾아서 꺼내는 데 1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해인은 그냥 고개를 내저었다.
카드를 찾는 게 이 지경이니, 계산이라도 하려고 지폐나 동전을 꺼내는 건 더 오래 걸렸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편하게 했던 걸 어렵게 하려니 이건 상당한 고역이었다.
주저앉아 그냥 울고 싶어질 만큼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처음엔 제가 기억에도 없는 교통사고라도 당했나 싶었다.
그저 모든 게 당황스러웠고. 사실 아직도 이게 적응된 건 아니었다.
“주문하신 따듯한 바닐라라테 나왔습니다.”
커피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구석진 자리를 하나 차지한 해인은 소파 위에 늘어질 대로 늘어져버렸다.
정말 지쳤다.
이전까지는 왼손을 고치고 싶어서 병원에 다녔다면, 이제는 그냥 왜 안 움직이는지만 알아도 감지덕지할 것 같았다.
“……하하.”
이제는 맥이 빠질 대로 빠져서 헛웃음만 나왔다. 다른 병원에 가도 똑같은 답을 듣게 될 게 분명했고, 더는 다닐 기운도 없었다.
힘없는 왼손 대신 오른손에 이마를 괴며 해인은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문제인 거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내둘렀다. 감도 잡을 수 없었으니까.
정확히 이 주 전이었다. 해인이 파출소에서 눈을 뜬 건 말이다. 왠진 모르지만 제가 그 앞에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곳은 전혀 모르는 동네였다.
‘아가씨? 정신 차려요!’
수중에는 휴대폰도 없고 신분증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차 키도 없었고, 대신 처음 보는 금목걸이가 주머니에서 무슨 미역처럼 줄줄이 엮여 나왔다.
금 좀 모아본 아줌마의 말에 의하면 그 정도 금이면 딱, 소형차 한 대 값이라고 했다.
해인은 틈만 나면 하는 생각에 또다시 빠져들었다.
분명 저는 자료조사와 작업을 겸한 여행을 떠난 길이었다. 차를 끌고 작업실을 나선 것도 기억이 났다.
톨게이트를 지나고, 고속도를 탄 것도. 굽이굽이 한 산길을 천천히 타고 올라갔더니 꼭 지금처럼 귀가 먹먹해졌던 것도 똑똑히 기억났다.
거의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안개가 자욱해서 더 조심히 운전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 거기가 해인이 가진 기억의 끝이었다.
“……눈을 뜨니, 파출소.”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도 소용없었다. 그 뒤는 바로 파출소였다. 해인은 소리도 못 내고 허탈하게 웃느라 어깨만 조금 들썩였다.
처음에 파출소에서 눈을 뜨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는 사람들이 단체로 저를 놀리는 줄 알았다. 무슨 몰래카메라, 그런 건 줄 알았다.
왜냐면 전자시계에 떠 있는 날짜가 자신이 여행을 떠났던 날보다 1년이나 뒤였으니까. 난데없이, 1년.
‘아가씨 괜찮아요?’
‘이럴 리가 없는데……. 이거, 이거 무슨 장난이죠? 티비 프로 같은 거죠? 그쵸?’
‘참나? 우리가 이런 장난을 왜 칩니까? 경찰이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한데…….’
장난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1년이 지났다면 그건 더 어이없는 일이었으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해인이 취했다고 생각했는지, 경찰은 보호자를 부르라고 했다. 그래, 그때도 뭔가 이상했다.
‘됐으니까. 보호자 불러줄게요. 연락처 아는 사람 불러봐요.’
‘……보호자요?’
‘와줄 사람 있을 거 아니에요.’
‘아, 엄마랑…… 또…….’
‘또?’
‘어? 또 누가…… 분명.’
부를 보호자라고는 엄마밖에 없으면서 왜 자꾸 누군가 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을까. 아빠가 돌아가신 지 오래라는 걸 새삼 까먹은 건 아니었는데.
해인은 아직도 가끔 그때 그 이상한 기분이 떠올랐다.
엄마 말고 다른 보호자가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몇 번이나 바보처럼 같은 말을 되뇌다가…… 갑자기 왈칵 울어버렸으니까.
뭔가 떠올리고 싶은데 생각이 나지 않으니까 대신 눈물이 나버렸다.
창피하게도 한참을 그렇게 뭔가 알 수 없어서 울었더란다. 엄마가 파출소로 데리러 와서 등짝을 때릴 때까지 쭈욱.
‘세상에! 얼마나 술을 먹으면 이러고 있어!’
‘……엄마. 뭔가 이상해.’
‘그 나이에 그러는 네가 더 이상해!’
그날에는 정말 과음을 해서 그런 줄 알았다. 몸에 술기운은 전혀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납득할 길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열병 같은 허무함에 시달려야 했다.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꾸역꾸역 흘렀다.
며칠이 지나도,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해인은 정말 1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뒤였다.
“아으!”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해인은 오늘도 답답함에 몸을 꼬다가, 커피가 다 식어버린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식은 커피를 홀짝이면서는 멍하니 생각했다.
‘……정말 정신과에 가봐야 되나…….’
솔직히 말하자면 1년이나 기억이 날아가 버린 것도 큰 문제였다. 난데없이 왼손이 움직이지 않는 게 너무 큰 충격이라 그건 살짝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말이다.
“사실은 총체적 난국이지…… 그렇지…….”
해인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내일은 작업실에 가볼 궁리를 했다. 사실 그 생각은 어제도 했고 그제도 했지만…… 오늘도 일상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집 앞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집에서 눈을 뜨면 그때부터 그랬다.
***
“내 차는 대체 어딜 간 거야……!”
거의 한 달이 흐른 뒤에야 작업실에 가보는 해인이었다.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차는 여전히 찾지 못했고 의문의 금붙이는 써도 되는 건지 자신이 없어서 뚜벅이 신세였다.
오르막을 오르다가 괜히 투덜투덜 성질을 부려봤지만 그런다고 오늘도 기억이 돌아오진 않았다.
왼손 역시 여전히 남의 것인 양 말을 듣지 않았다.
이래저래 불안정한 느낌이라 본래 독립해서 살던 작업실로 바로 돌아오는 대신 엄마랑 지내는 중이었는데, 왜인지 전에는 듣기 싫던 엄마의 잔소리 같은 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아마도 왼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혼자서는 불편한 게 많아서일까? 아, 좋은 건 또 있었다. 밥을 차려준다는 거였다.
설거지는 시키지만.
‘네 왼손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밥 차렸으니 설거지는 네가 해라.’
‘……너무한다! 딸 손이 안 움직인다는데?!’
‘오른손은 멀쩡하잖아? 의사들도 일단 자꾸 움직여 보라고 했고.’
엄마의 성격이 매사에 시큰둥하다는 건 이럴 때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심각해지려야 심각해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오른손 하나로 설거지하는 요령만 늘어 있었다.
이쯤 되니 오른손이라도 움직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해인이었고, 어쩐지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내 왼손이 움직이지 않아서 짜증만 났었는데, 대체 언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데자뷔 같은 게 심해졌단 말이지.’
지금만 해도 그랬다. 작업실 앞에 도착하자 어째서인지 바로 얼마 전에도 이렇게 언덕을 걸어올라 작업실에 왔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주 근래에 말이다.
기억을 잃은 중간에 작업실에 들렀던 걸까? 아니면 예전의 기억이 새삼 나는 걸까? 자신은 대체 1년간 뭘 하고 다녔던 걸까.
후련히 답을 알 수가 없으니 생각만 많아져서 해인은 곧잘 이렇게 멍하니 서 있게 됐다. 이렇게 있으면 꼭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라…….
빠앙!
또 저도 모르게 도로 한가운데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해인은 흠칫하며 차 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얼른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쩐지 예전과 달리 자동차 경적 소리가 많이 무서워졌다.
쓸데없이 위축되고, 긴장이 돼서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스스로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역시 기억을 잃은 와중에 차에 치인 적이 있는 걸까?’
그렇든 아니든, 때때로 이상하게 구는 자신이 불안했다. 해인은 역시 지금 상태로는 저 혼자 사는 건 무리라고 여겨졌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대신 여길 정리하고 엄마의 집으로 들어갈까 하는 고민 중이었는데, 지금에야 마음에 굳어졌다.
분명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1년 반 넘게 남아 있던 작업실의 계약 기간이 이제는 반년도 채 남지 않아서 차라리 결정하기는 편했다.
‘그래. 좀 아깝지만, 지금 난 혼자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닌걸. 누가 찾아올 것도 아니고…… 그러는 편이 좋겠어.’
해인은 여기에 온 김에 작업실 뺄 준비를 하자고 생각했다.
***
역시 작업실에 들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청소도 되어 있었는데, 꽤나 근래에 한 느낌이었다. 끽해야 몇 달 상간에 말이다.
“왜…… 캔버스를 꺼내놨지?”
해인은 방 한가운데 꺼내놓은 이젤과 캔버스를 보며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 방 청소를 해놓고는 캔버스를 꺼내둔 게 이상했다. 남이 청소했나 싶기에는 모든 물건이 해인이 원하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건 분명 제가 한 청소였다.
자신은 뭘 그리려고 했을까? 어렴풋이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나중에 그리라는 신호였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주는. 그게 뭐였는지는 당최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문제였지만. 요즘은 모든 게 문제였다. 이런 걸 마주해 봐야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어…….”
캔버스를 더듬다가 혹시 싶어서 붓을 꺼내봤지만, 어쩐지 손이 그림을 기억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림을 그린 적 없는 손인…… 그런 기분. 그럴 리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평생의 반 이상을 쥐고 있던 붓조차 지금은 낯설었다.
분명 머리가 기술을 기억하고 있으니 그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몇 번 붓을 만지작거린 것만으로 지금은 무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보조가 되어주지 못하는 왼손도 문제였지만 이런 정신 상태로 뭔가 그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컨디션이 좋아도 제대로 그릴 수 있을까 말까였으니까.
걸리는 것투성이였다.
결국 해인은 붓을 놓고 도구 상자를 뒤적였다. 그러다가 연필을 집어 들었는데, 어째서인지 이걸론 뭔가 그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연필은 전혀 좋아하는 도구가 아닌데 왜 손에 잡혔을까. 간단한 거라 그런가. 연필로 뭘 그릴 수 있지? ……사람? 난 사람 그리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런데…… 어쩐지 초상화 같은 걸 그리고 싶어. 으음, 뭐, 손 풀기에는 그 정도가 좋을지도…….’
재료를 찾았기 때문일까. 그리고 싶은 이미지 같은 게 머리 한구석에 떠오르려고 했다. 여자는 아니고, 남자가 그리고 싶었다. 섬세한 근육질 같은.
‘머리 색이 좀 밝은 남자, 입술은 섹시할 것 같고. 코가 매력적일 거야. 눈매는……? 그런데 이 남자 누굴까.’
얼굴도 알 수 없는 흐린 누군가의 이미지를 홀연히 되새기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똑똑?”
“……민 선생님.”
“역시 해인 씨구나? 지나가다 들러봤어. 왜 문을 이렇게 활짝 열어놓고 있어?”
멍하게 구느라고 그랬다는 대답은 할 필요 없어 보였다. 정신 놓고 다닌다는 소리라면 엄마에게 질리도록 들었으니까.
해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연필을 내려놨다.
“잠깐 들른 거라서요.”
“으음? 자기 또 뭔가 달라 보인다?”
“네?”
“좀 어려진 것 같네……?”
민이영은 툭하면 해인에게 귀엽다느니, 어려졌다느니, 오늘따라 피부가 좋다느니, 해인이 낯간지러워하는 그런 칭찬을 쏟아내고는 했다.
단순히 연하라 귀여워서 그런다고 넘기긴 했지만 역시 들으면 부끄러웠다.
“으음, 그럴 리가요…….”
“아냐. 겨울에 봤을 때보다 전체적으로 어려 보여. 피부도 더 좋아져서는.”
“……겨울이요?”
“그래, 우리 같이 술 먹은 날.”
이렇게 엉뚱한 곳에 목격자가 있을 줄이야. 해인은 제가 1년 치 기억이 날아갔다는 걸 주변에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건 어떻게 설명해도 괴이한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해인은 제 힘든 얘기를 주변에 사서 하고 다니는 타입도 못 되었다.
“죄송한데, 제가 잘 기억이…… 안 나서요. 그게 언제예요?”
“어우! 그날 엄청 마시긴 하더라. 필름 끊길 만했어!”
“그랬어요?”
“한 세 달 전인가? 아니다! 작년이니까…… 벌써 넉 달 전인가……? 으음. 가물가물한데. 정확하게는 수문이가 알지 않을까? 같이 마셨잖아.”
그것도 역시 해인의 기억에는 없는 일이었다. 해인이 표정을 구겨서일까. 민이영이 손사래를 쳤다.
“미안, 미안. 알잖아? 난 원래 날짜 감각이 꽝인 거.”
“강 선생님은…… 어디…… 에.”
“수문이? 오늘은 외주 미팅 갔는데?”
해인은 제가 내뱉을 말을 조금 곱씹고 있었다.
뭐였을까? 방금 강 선생님이라고 말하니까 굉장히 싫은 느낌이었는데. 원래 그렇게 불렀는데 새삼스레 왜 이렇게 거북한 걸까. 강수문을 강 선생님이라고 안 부르면 뭐라고 부르지?
“강…… 선생님.”
“응?”
“강 선생님…….”
해인은 제가 그걸 소리 내 곱씹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몇 번이나 그랬다는 것 역시.
***
“세상에?! 왼손이 왜 그래! 뭐? 안 움직인다고?”
매사 덤덤하기 짝이 없는 제 엄마를 보다가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반응해주는 이영을 보니 해인은 오히려 민망해졌다. 사실은 이게 정상일 텐데 말이다.
“그게, 병원에서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해서요.”
“그럼 어떻게?”
“일단 몸 상태도 안 좋고 해서 작업실도 빼고 좀 쉬려고 해요.”
“세상에, 아까워라. 남들은 못 들어와서 안달인 곳인데…….”
“어차피 6개월밖에 안 남았고요. 그 안에…… 나을 것 같지도 않아서…….”
“어머, 그럼 그것도 못 하겠네?”
이영은 뒤늦게 뭔가 생각났는지 아주 낭패라는 얼굴이었다.
“왜, 우리 전에 같이했던 전시회 있잖아. 제주도에서!”
“기억나죠.”
“그때 내가 소개시켜준 사람 기억해? 나한테 외주 맡겼던 사람인데 다음에 꼭 해인 씨랑 일하고 싶어 했다던…… 요기 점 있는 부티 나는 아줌마 있잖아. 화장품 회사 마케팅 부장이라고 했던.”
“으음, 황…… 부장님이었나요?”
“그래그래! 해인 씨 기억력 좋네?”
이런 건 다 기억나는 걸 보면, 해인은 엄마의 말대로 뭐든 호들갑 떨 필요는 없는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해인의 엄마가 매사 무덤덤한 건 뭐든 호들갑을 떨면 작아질 일도 커지고, 될 것도 안 된다는 본인의 지론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하여간 강한 사람이라…….
해인은 그 영향을 묘하게 받아서 강한 척 뻗대다가 부러지는 스타일이었다. 아무래도 제가 약해빠진 건 아빠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나한테 전화가 왔더라고. 그때 해인 씨 연락처를 받기는 했는데, 그 연락처로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이 안 된다고. 실례지만 혹시 해인 씨 연락처 아느냐고 말이야.”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새로 개통하긴 했는데…….”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이긴 했지만 역시나 거의 무음 모드인 해인의 휴대폰 이었다. 벨소리 노이로제는 작가들의 고질병이었다.
“그래, 그래서 내가 예전 번호는 아마 고장 났을 거라고 알려줬지.”
“감사해요. 저기, 제가 연락드려 볼게요. 아마 사정상 거절해야겠지만…….”
“그거야 해인 씨 알아서 할 일이지만. 자기 연락처 좀 뿌리고 다녀라. 응? 사람들이 일을 맡기고 싶어도 자기 연락처를 모르잖아. 낯가리는 것도 가리는 거지만, 일은 하고 밥은 먹고 살아야지. 자긴 너무 숨어 지내! 오죽하면 클라이언트가 나한테 연락처를 물어봐?”
“그럴게요. 몸…… 회복만 조금 되면요.”
“정말이지? 좀 나으면 협회에 말해서 상업적인 일을 받아봐. 해인 씨 정도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해인은 원체 낯가림도 심하고, 컨디션 난조가 심한 걸로 이 바닥에 제법 파다했다. 작품 기복이 심한 건 그런 문제였다.
그 외에도 외국에서 먼저 작품 활동을 시작한 탓에 상을 받은 것도, 출품이 주로 되는 것도 대부분 외국이었고. 그 덕에 한국에서는 오히려 인지도가 낮은 감이 있었다.
한국에서 박해인이라는 작가나, 작품의 흔적을 찾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본인이 워낙 땅굴을 파는 게 특기인 성격이었으니까.
“아, 밥 먹으러 가기 전에 관리실에 좀 들러도 될까요?”
“그래. 뭐 하려고?”
“작업실 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물어보려고요.”
그리고 지금, 일신상의 불안정을 이유로 더 숨으려 하고 있었다.
***
관리실에 들른 해인은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계속 저를 찾는 사람이 있다고요?”
“예에, 작가님이 여기서 작업하시는 건 어디서 알았는지, 꼭 묻고 싶은 게 있다며 계속 관리실로 연락이 오나 싶더니, 며칠 전에는 직접 왔다 가기까지 했습니다.”
해인은 워낙 나다니질 않아 희귀동물 같은 구석이 있었다. 이렇게 제 발로 관리실에 온 것도 처음이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걸까? 관리실 직원은 마침 잘됐다 싶었는지 얼른 명함을 한 장 건네줬다.
“연락처라도 전해 달라더군요. 하도 끈질겨서 번호를 맡아두긴 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이걸 어떻게 전해드리나 고민하던 찹니다.”
“……특이한 이름…….”
“아는 분입니까?”
“전혀요.”
강시율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봐도 낯설었다. 그런데 인상적이었다. 왠지 얼굴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이상한 걸까? 역시 이상하겠지?
“……다른 얘기는 없던가요?”
“으음, 바로 그저께 제가 있을 때 다녀갔는데. 작가님이 혹시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지 않았냐고, 그런 이상한 걸 묻더군요. 저야 모른다고 했죠.”
“고양이요? 뜬금없이……. 이상한 남자네요.”
불쾌할 이유는 많았다. 우선 명함을 받아 든 순간부터 서서히 심장이 반응했다. 낯설게 두근거렸다. 뭘까, 이 기분 나쁜 감정은? 전혀 모르는 느낌이었다.
해인은 결국 고개를 내젓고는 명함을 돌려줬다.
“죄송해요. 모르는 분이네요. 못 준 걸로 해주세요.”
해인이 이 업계 작가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실은 또 있었다. 귀여운 외모를 하고는 철벽이 끝내준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근원은 극심한 낯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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