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그리운 사람
의식은 거의 없었다. 오로지 허공을 부유하는 그런 혼몽함만 남아 있었다.
무생물이 되면 이런 감각일까. 들리는 소리도 없고,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다만 얼마 안 가 해인은 뭔가가 자신을 깨물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아프다기보다는 자신이 점점 허무해지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물린 곳이 연기처럼 흐트러져 사라졌다.
아무래도 야호가 경고했던 악귀 같았다.
그것이 저를 꽉 깨물고 뱀이 똬리 틀 듯 점점 감싸는 게 느껴졌다. 주변이 온통 새까매졌고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소름 돋는 웃음을 터트렸다.
도망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스스로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 실낱같은 의식도 사라질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강은, 괜찮을까.’
달리 드는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잡아먹히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저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점점 무기력하게 잠이 오는 기분이었다.
악귀의 이에는 영혼을 약하게 하는 독이라도 있는 모양…….
[이 사악한!]
정신이 번쩍 든 것은 커다란 맹수의 울음소리를 들은 직후였다. 그게 저와 악귀의 사이를 찢어내듯 가르고 지나갔다.
[천하고 간악한 악귀야! 당장 사라지지 않으면 만 조각을 내버릴 테다. 내 손에 조각날 테냐!]
해인은 물려 있던 것에서 풀려났다. 덩그러니 어디론가 떨어지는 느낌에 눈이 떠질락 말락 했다.
아까보다는 정신이 들었지만, 여전히 있으나 마나 한 정도였다. 왜 이렇게 의식이 늘어지는 걸까.
“아이고, 이를 어째.”
[…….]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미치겠어.”
호들갑스러운 야호의 목소리에 해인은 눈을 뜨고 앞을 보려고 노력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겨우 뜬 눈에 보이는 건,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구름 위의 세계였다.
자신은 그 위를 빠르게 날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야호의 손에 들려서 말이다.
‘아무래도,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지.’
겨우 시선을 움직이자 야호의 반대쪽 옆구리에 들린 제 고양이 몸이 보였다. 저 몸을 이렇게 밖에서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건 흘깃 봐도 망가져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는데, 망가지면서 본래의 형태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도 아니면 자신이 그 안에서 튕겨 나와 버려서 사람 형태를 잃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시율이 흉한 모습을 보지 않았기만 바랄 뿐이었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해인은 더 이상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너무 가까이 보여서 신기한 태양을 보다가, 스르륵 눈을 감고 의식을 까무러트렸다.
***
“해인아. 박해인아.”
야호가 저를 들고 너무 탈탈 흔들어서 눈이 떠졌다. 그리고 어딘가에 계속 꾸깃꾸깃 밀어 넣으려고 해서, 불쾌한 기분이 됐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싫어.
“여기 들어가야 해!”
싫다니까.
“어서 기억해내라. 이건 네 몸이잖냐.”
“야호 님? 언제 돌아오셨…….”
“어허, 이놈아! 아직 잠들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영혼은 잠을 자지 않아! 잠들면 형체를 잃어버려서 사라진다! 정신 차려!”
하지만 자꾸 졸린걸. 해인은 자신이 지금 영혼상태라는 건 알았지만 매우 졸린 걸 버틸 수가 없었다.
자꾸만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는데, 그러면 야호가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이거 원, 너무 약해졌구나.”
“야호 님, 그건 또 어디서 난 영혼이에요?”
“백로야.”
“한동안 안 돌아오신다더니 왜 벌써 돌아오셨고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하냐. 자기 몸에 안 들어가려고 들어.”
홀연히 나타나 백로라고 불린 건 은색에 가까운 하얀 머리를 바닥에 끌릴 만큼 길게 기른 미인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는 신비한 미모의 소유자였는데,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었지만 장담컨대 사람이 아닐 게 분명했다.
“아, 보살펴 주시던 그 몸의 주인인가요?”
“그래.”
“자기 몸인데 안 들어가려고 들다니…… 그거 이상하네요. 수명이 다 된 건 아닌가요?”
“아니다. 그럴 리는 없는데.”
“그것도 아니면, 다른 몸에 미련이 있는 거겠죠. 자기 몸을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건 망가졌는데. 봐라.”
“맙소사, 왜 고양이 시체를 들고 다니세요?”
“인간 세상에 사신탈을 두고 올 수는 없잖냐. 나라도 챙겨야지.”
둘이 뭔가 수군거리는 동안 해인은 마음 놓고 다시 졸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가 야호에게 탈탈 털렸지만 말이다. 해인은 좀 쉬고 싶었다.
“얘야, 봐라. 이건 완전히 고장 나서 다시는 못 들어간다.”
야호는 대뜸 해인의 눈앞에 문제의 사신탈을 들이밀었다. 사신탈이라는 게 튼튼하긴 한지 그 커다란 트럭과 부딪쳐놓고도 사지는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이다 보니 상처도 그리 심해 보이지 않았다.
손발이 꺾여 있고,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지만 않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이쪽이 네 몸이다. 여기에 들어가서 자렴. 어떠냐?”
검은 고양이의 몸을 치우고, 야호가 다시 내밀어 보인 건 작디작은 아기의 몸이었다. 그 몸은 마치 갓 태어난 것처럼 옅은 분홍빛이었다.
야호의 손이 워낙 크다 보니 아기는 더 작고 연약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해인은 선뜻 그게 제 몸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몇 번인가 해인을 꾹꾹, 아기의 몸에 밀어 넣으려던 야호는 결국 포기했는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다. 영혼 다루는 건 내 전문이 아니란 말이지. 이렇게 억지로 밀어 넣는다고 들어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야 당연하죠. 영혼이 그렇게 쉽게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사신님이라면 어떻게든 다시 영혼을 육체에 집어넣는 방법을 아실 텐데요. 사신님을 부르면 되지 않겠어요?”
“안 돼. 그럼 이 사태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야 한단 말이야.”
“……또 사고 치신 거군요?”
백로는 아무래도 야호가 사고 치는 데 익숙한 듯했다.
“흠흠, 정확히는 이 녀석이 사고를 친 거라고. 그리고 그 충격 때문인지, 악귀한테 물려갈 뻔해서 그런지 좀 멍한 상태야. 말도 못 하는 걸 보면 약해질 대로 약해진 것 같다.”
“아, 그럼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약한 영혼은 몸을 차지할 수 없잖아요? 같은 거죠. 영혼이 약해서 몸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내가 봐도 그런 것 같긴 한데.”
“그리고 보니까 이 영혼…… 상태가 심각한데요? 보세요. 여기도 뜯겨 나가서…….”
“쉿쉿.”
해인은 모든 걸 듣고는 있었다. 생각도 했다. 의식도 조금 있었고. 하지만 뭔가 말하는 건 되지 않았다.
예전에 사신과는 영혼 상태로도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야호가 사신만큼 영혼을 다루지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해인의 영혼이 너무 약해져서 생각을 전달하는 것도 못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일단 결계부터 쳐야겠어.”
“도와드릴게요. 무슨 결계를 치실 건데요?”
“근방의 기를 끌어모으는 결계와, 이 아이의 영혼이 이 공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보호 결계.”
“기는 모아서 뭐 하시려고요?”
“이 녀석이 조금은 회복되지 않으려나 싶어서.”
“음, 될지도 모르겠네요.”
한마디라도 해보려고 애썼지만, 영혼 상태의 몸은 둥둥 허공을 떠다니는 이상의 능력은 없는 것 같았다.
마치 무슨 아메바 따위처럼 일차원적인 본능에만 충실했으니까.
***
그 안은 갑갑했다.
영혼 상태일 때가 몸도 훨씬 가볍고, 아무 생각도 안 들어서 기분도 좋았는데. 이건 뭔가 거추장스러웠다.
무거운 거죽을 뒤집어쓴 이상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해인은 야호의 노력 덕에 제 몸에 들어오긴 했지만 완전히 자리 잡은 건 아니었다. 다시 나가고 싶어서 꿈틀거렸다.
“시율! 강시율을 만나야지, 해인아.”
“…….”
“거기서 나오면 못 만나게 되잖냐. 불편해도 좀 참자. 그래야 만나든 말든 할 거 아니냐.”
그러게. 강은 만나야 하는데.
해인은 답답함을 참아보기로 했다. 비좁은 그 안에서 편하게 누워보려고 노력했다.
얼마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딱 맞게 누울 수 있는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손발을 찾아 꼼지락거리자 감각이 잡혔고, 입술을 찾아 옹알이도 해봤다.
숨이 쉬어진 건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후아…….”
해인이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 길게 내쉬자, 야호가 기특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호의 손안에 아담하게 안겨 있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보니 아빠 같기도 하고.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야호가 가느다란 속눈썹 끝을 톡, 건드렸다.
“이제 겨우 한숨 돌렸구나.”
“된 건가요, 야호 님?”
“연못 안에 넣어두면 좀 더 안정을 찾겠지. 자, 박해인아. 이제 푹 자려무나.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말을 할 수 있게 될 거다.”
확실히, 지금의 몸은 웅얼웅얼하는 옹알이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자꾸 졸리기는 영혼일 때와 마찬가지였다.
하루의 반 이상은 자야 하는 아기의 몸이라서 그런 걸까?
여하튼 자도 된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해인은 방해 없이 마음 놓고 깊숙이 잠들었다. 아주 깊숙이.
“……결국 점괘대론가.”
“무슨 일인데요?”
“둘 다 안전해졌거든. 사내 녀석은 죽을 고비와 멀어졌고, 이 녀석은…… 조금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무사하고.”
“무슨 말씀인지…… 이제 말씀 좀 해보세요. 이번엔 인간세상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신 겁니까?”
백로의 못마땅한 물음에 야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해인을 시간이 빨리 흐르는 연못 속에 살며시 집어넣었다.
그 연못은 선계와 연결되어 있어서 선계의 시간으로 흘렀는데,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물이지만 물이 아니었다.
순수한 기의 원액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 안에서 잠들면 먹지 않아도 되고, 아프지도 않았다. 자칫 방심하면 그 안에서 평생을 잠들겠지만 말이다.
“처음엔 그냥 나들이였는데…… 어쩌다 보니 사신이랑 악귀를 따돌리고 냅다 튀었지 뭐냐.”
“……어쩌다 보니라는 걸로 너무 많은 걸 얼버무리시는 거 같은데요.”
“하하.”
“도대체가. 등천이 코앞인 분이 왜 그러고 다니시는…….”
“아, 그거 미뤄졌다, 백로야. 한 몇십 년 더 수행해야 할 것 같아.”
“네에?”
“참지 못하고 이 녀석을 구해버려서, 중립을 지키지 못했거든. 더 수행해야겠다.”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백로를 보며, 야호는 남의 일인 양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 그냥 내버려 두셨어야죠! 죽는 건 순리 아닙니까! 명보다 이르든, 늦든…….”
“내버려 뒀다면 더 오래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을걸.”
“……야호 님.”
“그나마 구했으니, 몇십 년 수련하는 걸로 끝나는 거지. 잡아먹히는 걸 봤다면 백 년은 더 지체했을 거야. 내가 안다.”
백두산에서 가장 존경받는 호랑이면서, 선계에서도 언제든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물이면서, 야호는 항상 손해를 보고는 했다.
이런 성격만 아니었다면 500년쯤 수련했을 때 등천했을 텐데 말이다.
백로는 다음에 또 야호가 나들이를 나간다고 하면 죽어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인간을 좋아하는 건 그러니 손해라는 겁니다.”
“넌 인간이 왜 그리 싫으냐.”
“끝이 없다고요, 인간들의 욕심은. 양보해줘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우리 먹을 걸 다 가져가고. 남의 고향을 오염시키고. 그런 녀석들을 도와주기 시작하면 우리만 거덜 납니다.”
“그야 그렇지만. 좋은 녀석들도 있는걸.”
“가뭄에 콩 나듯 있죠. 인간에게 정체를 들키면 그 기억을 지우라는 규율이 괜히 생긴 게 아니잖습니까.”
먼 옛날에는 인간과 산신들이 함께 이웃처럼 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들이 산신의 힘을 원하기 시작하고,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비를 내려주거나, 가뭄을 알려줬던 산신들도 그 욕심에 지치기 시작했다.
착한 인간에게 금도끼를 하나 줬더니 온갖 인간들이 몰려와서 너도나도 도끼를 달라고 타령한 건 유명한 일화였다.
인간들이 발전하는 만큼 산신들은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이제 인간들은 대부분 산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아까 말하신 사내 녀석 기억은…… 지우신 거죠?”
“아니.”
“야호 님!”
“하지만 그 녀석은 내가 백두산 산신인 걸 모르는걸. 그냥 사람이 되는 호랑이 정도.”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호랑이가 몇이나 된답니까!”
“뭐, 어떠냐. 서양엔 많지 않냐.”
“그런 서양요괴들이랑 대야호 님을 어찌 비교합니까!”
해인이야 곧잘 야호를 지나가는 멍멍이 취급했지만, 야호는 사실 천제(天帝)의 호위장군으로 러브콜도 받은 몸이었다.
문제는, 도를 닦고 있다 보니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거였다.
“괜찮다, 괜찮아. 등천하면 인간 세상에서 지은 죄는 다 없던 일로 해주니까.”
“……그런 것까지 계산하신 겁니까? 하여간 대단하십니다.”
백로가 감탄인지 질색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내저었고, 야호는 연못 안에 잠든 해인을 빤히 들여다봤다.
“외면하는 게 나도 편하지만, 도와주고 싶은 욕심이라는 것도 있지 뭐냐.”
“그게 뭔 욕심이래요. 저는 그런 거 모릅니다.”
“그러냐.”
“야호 님은 아무튼 또 손해 보신 거예요! 남 좋은 일만 하신다고요! 이제부터라도 인간을 좀 멀리하세요! 뭐, 이 아이가 월의 환생이라도 된답니까?”
큰소리 내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어 보이는 야호는 정말 새끼 기르는 짐승 같았다.
“그건 아니지만. 월의 딸이랄까.”
“……네에?”
“월은 항상 단명하는 지아비를 만나서 나를 슬프게 하더니,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야. 그뿐이냐? 이 녀석도 제 어미랑 똑같지 뭐냐.”
“어, 언제 아셨데요? 그런 건?”
“영혼을 마주하면 알지. 월의 잔재를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지 않냐.”
영혼에는 친한 다른 영혼의 기척이 남기 마련이었다.
인간들의 표현으로 하면 냄새 비슷한 것으로, 해인에게서 가장 강하게 풍기는 다른 영혼의 잔재는 시율이었고, 그 뒤가 어미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무리 봐도 월의 것이었다. 잊을 수 없는 냄새를 몰라볼 리 없었다.
심심풀이 삼아 기르게 된 갓난아이가, 하필이면 월의 자식이었다니. 야호는 이것도 인연의 하나라는 걸 알고는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야호에게 해인은 제 자식 같은 구석이 있었다.
해인은 알 리 없겠지만.
***
저를 부르는 소리에 해인은 가늘게 눈을 떴다. 야호가 수면 위에서 저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 보였다.
물 안에서 끌려 나가자 그곳은 낯설고 커다란 동굴이었는데, 동굴의 천장은 뻥 뚫려 있어서 달이 보였고, 연못은 그 달빛을 직격으로 쬐고 있었다.
아름다워서 세상 일부가 아닌 것 같은 곳이었다.
해인은 멍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기억이 아주 드문드문했다. 사고 이후의 기억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기분이 어떠냐.”
벗은 몸으로 동굴 한가운데 서 있으니 추울 만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곳은 공기 자체가 따듯한 것 같았다.
조금 둔하게 제 손을 내려다보는 해인에게 야호가 깨끗한 천을 한 장 둘러줬다.
해인은 제 손바닥이 왜 이렇게 작을까, 하는 생각을 해야 했다.
“지금은 대충 서너 살이려나? 그래도 말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다.”
“……강은요?”
“너 이 녀석, 눈 뜨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몸이 작은 것도 작은 거지만, 목소리가 어눌했다. 갓 말을 배운 아이처럼 말이다.
“강은, 괜찮아요?”
일어서서 가만히 있는 건 무리가 없었지만, 걷는 건 조금 힘들었다. 이 몸은 모든 게 처음이었다. 해인은 넘어질 뻔했다가 야호의 옷깃을 붙들고 거듭 되물었다.
“강은요?”
“……그 녀석은 무사해. 그보다 네 손이나 움직여봐라.”
“손은 왜요?”
“해봐라.”
겨우 눈을 떴는데 웬 손 타령일까. 해인이 가만있자 야호가 먼저 해인의 두 손을 가져가 주무르듯 만졌다.
“움직이냐?”
“어?”
“역시. 이 손이군.”
어째서일까. 왼손이 이상했다. 서툴긴 해도 다른 신체는 전부 생각대로 움직여 줬는데, 왼손만은 요지부동이었다.
꼬집어보자 아픈 감각은 살아 있는데, 전혀 움직이진 않았다.
왼손 팔꿈치 아래로는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제 손이 왜 이런 거예요?”
“……음.”
“몸이 잘못 만들어진 건가요?”
“아니.”
“그럼요?”
오른손만큼은 아니겠지만 왼손도 중요했다. 왼손이 안 움직이자 스스로 천을 어깨 위로 여미는 것조차 버거웠다.
해인은 계속해서 왼손을 움직이려고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네 왼손은, 영혼일 때 악귀에게 뜯어 먹혔다.”
야호가 답지 않게 눈을 피하며 말했다.
듣고 나니 어렴풋이 그런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해인은 흐린 기억 사이에서 뭔가에 물려갈 뻔했던 걸 떠올렸다.
그런 거구나. 그때, 무언가를 잃어버린 거구나.
해인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선뜻 제 왼손이 움직이지 않게 됐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었다. 그나마 오른손이 아닌 데 감사해야 하는 걸까.
“……그럼, 평생 못 쓰나요?”
왼손을 못 쓰면 그림 그릴 때도 좀 불편하겠다. 그리고 또 뭐가 힘들려나. 당장은 상상 가는 게 없었다. 왼손이 안 움직인 적이 없으니까.
“아니, 영혼은 재생한다. 다시 왼손이 자라나긴 하겠지만…… 문제는, 적어도 몇십 년이 걸릴 거다.”
“……겉보기엔 멀쩡한데. 이상한 느낌이네요.”
“영혼의 문제니까.”
해인은 영혼이 없다는 제 왼손을 만져봤다. 만져지고 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그건 신체의 문제라서일까.
“영혼이 회복되는 만큼 조금씩 움직이기야 하겠지만, 본래대로 쓰려면 얼마나 시간이 들지는 모르겠구나.”
“……오른손이 아니라 다행이에요. 그래서 강은, 괜찮아요? 정말 무사한 거죠?”
“……그놈의 강시율 타령은. 보여주마. 이리로 와라.”
자신의 일부가 움직이지 않는데도 해인이 생각보다 충격받지 않은 건, 이 정도면 그가 무사한 값으로는 싸다고 생각되어서였다.
‘손 하나면, 아깝지 않아.’
시율 타령을 하는 해인을 야호는 마지못해 연못 밖으로 이끌었는데, 해인은 지금 한 걸음을 떼는 데 몇 분씩 걸렸고, 보다 못해 야호가 제 손으로 안고 갔다.
그러고는 아주 오래된 은색의 수경 앞에 해인을 내려줬다.
시율을 보여준다더니. 이건 뭘까. 언뜻 봐서는 고급스러운 물그릇일 뿐이었다.
“인간 세상을 훔쳐볼 수 있는 수경이다. 특정한 인간을 찾아서 볼 수도 있고.”
“와…….”
“찾고 싶은 인간의 머리카락이 있다면 말이야.”
“저한텐…… 그런 거 없는걸요?”
“나한테 있다. 두세 번 훔쳐보면 거덜 날 양이지만.”
야호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던 걸까. 그도 아니면 머리카락을 수집하는 취미라도 있는 걸까.
품에서 책을 꺼내 든 야호는 그 사이에 끼워 둔 머리카락 한 가닥을 수경에 떨어트렸다.
그러곤 동그란 수경의 가를 손끝으로 빙, 둘러 만졌다. 그러자 수경의 물이 혼자 파장을 일으키며 얕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들여다봐라. 녀석이 뭘 하고 있는지.”
신기하게도 정말 수면의 아래로 시율의 모습이 보였다. 물과 함께 넘실대느라 그리 선명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조금 말라 있었다. 난데없이 해인은 가슴이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가요?”
“일주일.”
겨우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다니. 그런데 그는 저렇게 힘들어 보였다. 당장 그를 만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해인은 작은 아이의 손으로 수경 위를 만져봤다.
하지만 물에 손이 닿자 그의 모습이 사라져서, 손을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긴 어디냐.”
“여긴, 저랑 강이 처음 데이트했던 곳이에요.”
“흐음…… 대체 저기서 뭐 하는 거지?”
“……내 그림을 팔던 화랑이에요. 지금은 문을 닫은 것 같지만.”
그는 낯익은 곳에 가 있었다. 아무래도 해인의 흔적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화랑은 몇 달 사이 망해버린 듯했다.
“이런, 이런.”
“저를 찾고 있나 봐요.”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텐데……. 뭐, 시체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졌으니, 미련을 못 버리는 건 당연하겠지만.”
시율은 힘들 때면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고, 스스로 어지러운 마음이 수습될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않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오래, 얼굴을 덮고 벽에 기대 있었다.
“……이거, 만져봐도 되나요?”
“상관없다.”
“강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죠?”
“잠시 안 보기야 하겠지.”
그럼 안심이었다. 해인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다시 수경의 수면을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이 조금 크게 보여서, 그 위에 살며시 입술을 눌렀다.
두 뺨이 젖은 건 수경의 물 때문이리라.
벌써 그가 그리웠다. 이렇게 빨리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강…….”
그에게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그를 불렀다. 스스로도 이렇게 애가 타는 것이 가엽고 슬펐다.
“강, 보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