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고양이의 이별하기
따듯한 샤워기의 물을 맞으며 해인은 밖에서 들리는 두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소리 때문에 잘 들리진 않았지만, 여하튼 옥신각신하는 건 분명했다.
‘어째 저 둘은 갈수록 사이가 나빠지는 것 같네.’
같이 지낸 지 일주일쯤 됐으니 서로 잘 지내봐도 좋으련만 한 남자와 한 짐승은 서로를 삐딱하게 보고 견제할 뿐이었다.
사이좋기를 바라는 게 저만의 욕심이라는 건 해인도 알았다.
하지만 저 둘이 싸우면 매번 손해를 보는 건 시율이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지금만 해도 야호가 또 뭐라고 자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소리를 뚫을 만큼 성난 시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인은 곧장 물을 껐다.
끼릭-
샤워부스에서 빠져나와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넘기고는 대충 몸에 물기를 닦고 옷을 주워 입었다.
야호가 온 이래로, 시율은 해인이 지난 몇 달간 봐온 걸 전부 합친 것보다 많은 화를 내고 있었다.
물론 그것들은 전부 해인이 아닌 야호를 향한 것이었지만 전에는 상대가 누구든 이렇게 자주 화를 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시니컬하게 웃는 쪽이었다.
그랬던 그가 변한 건 최근이었다.
화를 잘 낸다는 건 그만큼 야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도 되겠지만, 달리 말하면 그만큼 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는 뜻이기도 해서…… 해인은 못내 속이 쓰렸다.
요즘 들어 제가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 둘은 알 리 없겠지만 두 남자가 싸우면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만 같았다.
해인이 옷깃을 여미며 급하게 욕실 밖으로 뛰어나오자, 역시나 둘은 싸우다 말고 안 그런 척하고 있었다.
“이 호랑이 자식, 적당히 안 하면……!”
“으흐흠.”
어색하게 서로 돌아섰지만, 그래봐야 이미 공기가 참을 수 없이 어색했다.
둘은 아무래도 한공간에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둘이 왜 또 싸우고 있는 거야?”
한쪽은 700살이 넘고 한쪽은 30살이 넘었으니 각자의 종족과 사회적 지위를 고려할 때 충분히 어른이었다.
그러니 나잇값 좀 하면 좋겠는데.
해인은 야호부터 노려봤다. 670살쯤 연상이면서 말이야…… 어른이 말이야…….
“안 싸우기로 했잖아요.”
“……난 바빠서 이만.”
“야호 님이 뭐가 바빠요!”
제가 표적이 되자 야호는 슬금슬금 게처럼 옆걸음질을 했다. 그렇게 도망쳐 봐야 자신이 지내는 해인의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해인은 불만스레 볼을 부풀렸다.
“어떻게 그새를 못 참고 싸워요? 잠깐 씻고 있었는데!”
시율만이 해인에게로 다가왔다.
“우리 안 싸웠어.”
“거짓말!”
“너야말로 또 머리도 안 말리고.”
말을 돌리려고 하는 건 알았지만, 시율이 코앞으로 다가와 물이 묻어나는 제 뺨을 톡, 하니 건드리자 해인은 입술을 집어넣는 수밖에 없었다.
화내는 얼굴은 그리 예쁜 얼굴이 아니었으니까.
“머리는 그냥 두면 말라. 그치만 강이랑 야호 님은 싸우면 끝이 안 나잖아. 내가 안 말리면…….”
“네네, 잘못했어요.”
“대충 말 돌리려고 그러지?”
“난 우리 아가씨가 머리도 안 말리고 돌아다니는 게 더 걱정되더라.”
시율이 이렇게 갑자기 달짝지근하게 굴 때는 분명 찔리는 게 있을 때였다. 해인은 부드럽게 제 어깨를 붙잡아 욕실로 돌려세우는 그를 팩 돌아봤다.
“역시 뭔가 있는 거지? 그렇지? 이번엔 뭐였는데? 야호 님이 또 뭐라고 놀려?”
“……그냥, 저 자식이 또 술 내기를 걸어서.”
“뭐야?! 또 그거야?”
“안 해, 안 해. 더 당하면 내가 사람도 아니지.”
아무리 좋은 미끼가 있다고 해도, 다섯 번이나 패배하는 건 사양인지 시율이 고개를 내저었다.
밤이 되면 야호는 질리지도 않고 시율에게 내기를 걸었고, 시율은 매번 관심 없는 척하다가 결국엔 야호가 내미는 미끼를 덥석 물고는 했다.
매번 얼마나 그럴싸한 걸 내거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해인의 이름은 기본이었고, 고향이나 나이 등 별거 아닌데 시율이 모르는 것들을 눈앞에 흔들어댔다.
그러면 자신이 패배할 걸 알면서도 미끼를 물어야 하는 그의 심보가 점점 틀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야호는 아무래도 시율을 가지고 노는 게 재밌는 모양이었다.
“야호 님은 정말……!”
“됐으니까, 다시 들어가서 머리나 말리자.”
“아냐! 따져야겠어!”
“이렇게 하자. 내가 머리 말려줄 테니까, 우리 방으로 가자.”
뭔가 수상한데. 해인은 시율이 자꾸만 말을 돌리는 것 같았지만 그가 귓가에 다정한 소리를 속살거리면 별수 없이 당해야 했다.
심지어 머리를 말려준다니까…… 그건 너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극상의 편안함이랄까. 여자한테 머리 말리기란 정말 귀찮은 일 중 하나였으니까. 물론 그의 손끝이 섬세한 것도 한몫했다. 절로 골골거리고 싶게 했다.
머리를 말려달라면 언제든지 도와줄 시율이지만 그건 먼저 말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일이라서,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았다.
해인은 잠시 우물쭈물했다.
“……머리 말려줄 거야?”
“그래, 감기 걸리겠다. 응?”
못 이기는 척 등 떠밀리며 해인은 야호가 있는 자신의 방문을 한 번 힐끔 돌아봤지만, 이내 신경 껐다.
시율이 괜찮다는데 뭐, 별거겠어 싶어졌다.
***
부끄럽기는 참기 힘들 만큼이지만, 공주님 대접을 받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해야 하나.
그의 입장에서는 개나 고양이 따위의 털을 말려주는 것과 동급일지 몰라도 말이다.
해인은 시율의 커다란 손이 제 머리카락 속 이곳저곳을 만져주면 그 자체로 졸린 느낌이 들면서 몸 안이 간지러워졌다.
보글보글, 몸 안에 보드라운 거품이 차오르는 것도 같았다.
그 느낌은 아주 간지럽고, 따듯하고, 또 치미도록 달콤했다.
“좋아?”
“으응, 기분 좋아…….”
그의 가슴과 배 사이쯤에 머리를 기대고 거의 녹아내려 있는 해인이었다. 마침 침대 위이기도 했다.
무방비하게 기분 좋은 얼굴로 풀어져서는, 그의 손길과 드라이어의 미풍을 만끽했다.
방금 씻고 나온 얼굴은 뽀송뽀송했고 두 뺨은 발그레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여린 분홍빛이었지만, 조금만 자극하면 붉어진다는 걸 그는 알았다.
시율은 머리를 말려주다 말고 해인의 말랑한 뺨을 꼬집어 봤다. 아주 살짝. 그러자 어느새 그의 무릎까지 흘러내려가 있던 해인이 동그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왜?”
“그냥. 부드러워 보여서.”
그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몇 번 눈을 깜빡이던 해인은 배시시 웃고 말았다.
저를 보는 그의 얼굴이 야호를 대할 때와는 너무도 달라서, 몇십 겹의 차갑고 사나운 가면을 벗겨낸 얼굴이라, 그도 이 시간은 저와 같이 행복한 것 같아서.
웃음에 화답하듯 그는 허리를 숙여 해인의 뺨과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해인은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그의 손등을 붙잡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와 깍지를 끼고 있었다.
누구의 손이 먼저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시율이 가볍게 키스하고 떨어지며 입술 위로 속삭였다.
“너 말이야. 귀찮다고 머리 대충 말리면 피부병 생긴다.”
“……우 씨, 무드 없게.”
“중요한 거거든.”
“직업병이래요.”
누가 수의사 선생님 아니랄까 봐. 보통의 고양이나 개는, 물론 사람도 그럴 테지만 씻고 나서 바짝 말리는 게 중요했다.
키스하는 와중에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애초에 해인은 아프고 싶어도 아프기 힘든 체질이었다. 이 몸은 아마 발가벗겨서 남극에 가져다 놔도 감기 따위 안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무식하게 튼튼해서…… 물론, 한 가지 경우는 빼야겠지만. 주술.
“다 됐습니다, 손님.”
그사이 시율은 해인의 머리카락을 공들여 말리고는 만족스러운지 손으로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방금 말린 머리는 결 좋게 찰랑거렸다.
“머리 말려준 값은, 주는 건가?”
“음, 키스 한 번이면?”
“부족한데.”
“그럼 두 번 하지, 뭐.”
유치한 장난이지만 즐거웠다. 해인은 누워 있던 몸을 부스스 일으켜 그의 뺨을 만짐과 동시에 그의 입술에 느긋한 키스를 했다.
갓 말린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손끝이 파고들었다.
그의 무릎 위로 안기며 그의 목을 끌어안고 깊숙이 파고드는 입맞춤을 이어갔다.
어루만지는 데 취해서 숨을 참았고, 따듯한 손끝에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피부가 닿은 열기에 목을 몇 번이나 움찔거렸다.
야호만 없었다면, 이대로 눕기 좋았을 텐데. 느긋하게 뒹굴 수 있었을 텐데. 해인은 살짝 그런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있잖아.”
“응?”
“모레, 내가 쉬는 날에 말이야…….”
답지 않게 시율은 말하는 데 뜸을 들이고 있었다.
키스 직후라 바로 눈앞에 그의 입술이 달싹이는 게 보여서, 해인은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입맞춤은 항상 아쉬웠다. 좀 더 길어도 좋을 텐데.
“요즘 우리 통 단둘이 못 있었잖아. 저 녀석 때문에.”
“그랬지.”
“밖에 나가서 데이트하지 않을래?”
“……응, 좋아!”
해인은 얼른 몸을 일으켜 그와 똑바로 마주 앉았다. 간만의 데이트! 생각만 해도 호들갑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저 녀석은 물론 안 데려가.”
“그것도 좋아! 그치만 멀리는 안 돼!”
“뭐, 가까이 가도 괜찮고.”
“난 무조건 좋아! 우리 어디로 가는데?”
“……영화 같은 거? 어때.”
“좋아!”
어쩌면 이렇게 기뻐하지. 제가 말하고 있으면서도 시율은 고작 영화관 데이트에 해인이 이렇게 눈을 반짝일 줄 몰랐던 터라 문득 미안해졌다.
성당이라고 말하지 말래서 대충 둘러댄 것뿐인데.
매일 집에서 보기도 하고, 항상 옆에 붙어 있다 보니. 도리어 데이트는 보통의 연인들만큼 하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무리해서 일본에 다녀온 거랑, 몇 번 번화가에 나간 것,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한 걸 빼면 왜 이제 알았나 싶게 데이트 횟수가 적었다.
거의 열 달을 함께 지냈는데 말이다.
그리고 변명하자면 상대가 평범하지 않아서, 그런 뻔한 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덧붙이자면 가출할까 봐 집 안에 두는 게 중점이어서.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자주 데이트할 걸 그랬다. 영화 같은 거 주말마다 보러 갈 걸 그랬다.
몇 번인가 같이 영화를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영화를 그렇게 좋아했었나?”
“아니, 별로?”
“그럼?”
“그냥 둘이 나가는 게 좋아.”
시율은 방긋대는 해인의 뺨을 매만졌다. 그는 적어도 이제 해인이 자의로 사라질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둘 중 누가 먼저 손을 놓지는 않을 거라는 것도 말이다.
“내가 무심했네. 미안해. 다른 가고 싶은 곳은 없어?”
“있지만…… 먼 곳은 안 돼. 당분간 조심해야 돼! 난 영화면 좋아.”
“그래그래, 당분가 몸 사리랬지. 그 이야기라면 귀에 딱지가 앉겠어.”
“……그건 그래?”
“그보다 말해봐. 네가 가고 싶었던 데. 전부.”
시율은 그렇게 물으며 해인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그러곤 아까처럼 해인이 제 가슴에 등을 기대게 했다.
뒤에서부터 꼭 안고는 해인의 어깨에 턱을 괴며, 뭐랄까. 커다란 짐승처럼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뭐든 조르라고 속삭였다.
지금의 시율은 말하면 뭐든 들어줄 것만 같았다. 부끄러운 느낌이 들 만큼 진한 애정표현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해인이 아는 데이트 코스라고 해봐야…….
“……저기, 놀이동산에 가고 싶긴 한데…… 수목원 같은 데랑…… 강이 안 좋아할 것 같아.”
“왜?”
“음, 어린애 같잖아?”
“아니. 좋은데? 둘이 같이 가면 나쁜 곳은 없을걸.”
이 남자는 가끔 이렇게 상냥함을 폭발시킨달까. 난데없이 흘러넘치게 마음을 보여준달까. 키스할 때도 이렇게 뺨이 뜨겁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응.”
“더 가고 싶은 곳은?”
“이번엔 좀 그렇고…… 나중에.”
문득 깨닫기로, 평범한 연인 사이가 아니다 보니 위태로운 와중에 계단을 몇 개 빼먹고 오른 느낌이었다.
시율은 그것들을 전부 빼곡히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손으로 해인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 품 안으로 당겼다. 끌려오는 몸의 귓가가 붉어지는 게 보였다. 그는 귀 뒤쪽에 입술을 대고 조금 더 다정한 말을 속삭였다.
“그래. 저 녀석이 가면 그때. 어디든, 약속할게.”
나긋한 그의 목소리에 해인은 어째선지 목 안이 메어왔다.
제 허리를 끌어안는 그의 손에 안기며 간지럽기도 하고, 내심 행복하기도 하고. 대단한 약속도 아닌데 너무 기뻐서…… 울 것 같아서 웃어버렸다.
“너무 기뻐.”
“겨우 이런 거에? 조금 더 대단한 걸 졸라도 되는데.”
“……강, 나 이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아.”
해인은 지금 말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를 돌아보진 못했다. 대신 그의 가슴에 좀 더 몸을 기댔다.
“난 강을 만나서 아주 행복했어. 누군갈 사랑하는 일은 기분 좋은 거야. 그걸 배웠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해주는 건…… 정말 대단한 거야.”
“……당연한 소릴.”
“전에는 몰랐어. 고마워, 강. 당신을 만나서 기뻐.”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시율과 마주 키스하려던 해인은 조금 흠칫거리며 문 쪽을 쳐다봤다.
시율도 마찬가지였다.
“…….”
“……안 오네.”
항상 이렇게 좋은 때를 보내고 있다 싶으면 나타나는 야호 때문이었다. 몇 번쯤 방해받은 반사작용이랄까. 오늘은 어쩐 일로 안 보였다.
“웬일이지?”
“조금은 눈치가 생겼나 봐.”
잠시 그렇게 속닥거리던 해인과 시율은, 이내 거리낌 없이 입술을 겹쳤다. 그건 야호가 나타나도 멈출 것 같지 않았다.
***
데이트하는 날의 아침은 오랜만에 해가 따듯했다. 간밤에 눈이 조금 오긴 했지만, 마지막 꽃샘추위답게 살짝 쌓인 정도였다.
비보다는 아무렴 눈이 좋았다.
해인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옷을 입었다.
“…….”
“……나가니?”
시율이 걱정하지 않도록 단단히 삼중으로 껴입고 있는데, 야호가 문간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빼꼼히 방 안을 기웃거렸다.
“……야호 님.”
“오냐?”
“이거 줄게요. 이따가 나가서 붕어빵 사먹고, 계란빵도 사먹고…… 과자도 사먹어요. 돈은 알죠?”
해인은 계속 신경 쓰이게 구는 야호에게 꼬깃꼬짓 숨겨뒀던 비장의 만 원을 건네줬다.
돈 모으기 힘든 해인에게 만 원이란 몇십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었는데, 지금 수중에 있는 전 재산이기도 했다.
부디 오늘은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는 뇌물이기도 했고, 명색이 손님인 야호를 혼자 두고 데이트 나가는 게 찔려서이기도 있었다.
“뭐, 이런 걸 다. 사양은 안 하마.”
“……남으면 돌려줘요.”
“남을진 모르겠지만.”
“바라지도 않았지만…….”
데리고 갈까도 0.1초 정도 생각해봤지만, 역시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야 전혀 데이트가 아니었으니까.
야호가 부디 오늘 하루 정도는 혼자 잘 놀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실 이런 걸 바라고 온 건 아니고, 우연히 뭘 좀 찾아서 말이지. 너한테 주마.”
그건 뭔지 알 수 없는 헝겊 뭉치였다. 낡아서 그런지 살짝 갈색빛을 띠었고, 한약 따위를 포장하는 데 썼던 건지 약제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하지만 약제는 아니었고, 약제를 감쌌던 천 조각으로 또 무언가를 포장했을 뿐이었다.
나름 끈으로 매어놓은 걸 봐서는 선물처럼 포장한 것 같았다.
“이게 뭔데요?”
“나한텐 필요 없거든.”
잠시 냄새를 맡아봤지만 약제 냄새가 강해서 내용물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야호는 가끔 제 옆구리 속에서 쓸데없어 보이는 물건을 꺼내서 해인에게 쥐여 주고는 했다.
그러곤 먹을 거랑 바꾸려고 들었는데, 대부분 해인에게는 조금도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것 같았다. 심지어 대가 없이 준다는 점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자기한테는 정말정말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걸 말이다.
“가서 열어봐라.”
“데이트 가서요?”
“그래. 나도 예전에 주운 건데, 너한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뭔지는 몰라도 주운 거란 말이지. 해인은 조금 찝찝했지만 일단 성의를 봐서 헝겊 뭉치를 코트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일단 고마워요. 참, 그보다 오늘 점괘는 어때요? 나가도 될 것 같아요?”
시율이 들을세라, 은밀하게 물었다. 요 며칠 아침 일과는 야호의 점괘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좋다고 나오던데. 점이란 게 워낙 풀이하기 나름이긴 하지만.”
“정말요? 뭐라고 나오는데요?”
“바라던 걸 이룰 거라는구나.”
“……엥? 겨우 영화 보는데요.”
“흠흠, 그냥 뭐든 좋게 나오는 날이 있기 마련이지. 의외로 흔하거든. 뭘 해도 안 되는 날 보다는 소소하게 잘되는 날이 많지 않니? 생각해보라고.”
“그야…… 뭐.”
“아무튼 오늘 너희 둘은 안전하다고 나와.”
그렇다니 안심이었다. 사실 외출하기 조금 불안했는데 말이다. 해인은 방긋 웃으며 야호의 손을 붙잡았다. 크게 흔들며 신 나 했다.
“고마워요! 얼른 다녀올게요. 그리고 오늘은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요.”
“괜찮다. 좋은 일이 있을 거라니까, 연인끼리 나가는 것도 좋겠지.”
“데이트니까 이미 그 자체로 좋은 일인걸요.”
야호에겐 미안했지만, 나가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웃음이 자꾸 나올 만큼.
“그래, 나는 그게 너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마.”
***
시율은 아주 조심히 운전했다. 오늘은 어중간하게 녹았다 얼은 눈길이었고, 타이어에 체인을 감기는 했지만 그래도 천천히 가서 나쁠 건 없었다.
근래는 날씨가 아주 오락가락했다. 비가 왔다, 눈이 왔다. 따듯해졌다가 살이 에이게 추웠다가. 종잡을 수가 없어서 운전하기 다소 불편한 날씨였다.
그가 집중력을 조금 흐트러트린 건 정지 신호에 잠시 차가 멈춰 선 사이였다.
해인이 기껏 차려입고는 어울리지 않게 주머니에서 더러워 보이는 천 조각을 꺼내서 펼치기 시작했을 때.
“뭐야?”
“야호 님이 준 거.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던데…… 앗, 강은 앞에 봐, 앞에.”
“안전 운전 하고 있거든요.”
“음…… 이게 뭐지?”
아주 대충 된 포장은 그냥 내용물을 감추기 위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해인은 헝겊 사이에 들어 있는 하얀 천 조각을 꺼내 들었다.
뭐 때문에 천으로 천을 또 감싼 걸까. 그보다는 왜 레이스 손수건 같은 걸 준 거고? 이게 무슨 도움이 되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손수건이야?”
시율이 보기에도 그런 걸까.
해인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투명한 레이스를 들어 올렸다. 막상 허공에 들어 보니, 그건 네모보다는 세모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세모난 걸 보아 아무래도 손수건은 아닌 것 같았다. 펼쳐 보니 꽤 크기도 해서 더욱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런 걸 왜 준 거지……?”
“나, 그거 뭔지 알아.”
“응? 뭔데?”
“……여자들이 기도할 때 머리에 쓰는 베일 있잖아. 미사보였나.”
딱히 종교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시율의 말을 듣고 보니 알 것도 같았다. 해인은 긴가민가하며 미사보라는 물건을 제 머리에 한번 얹어봤다.
예스러운 레이스 무늬가 테두리를 곱게 장식하고 있었고, 가볍고 부드러웠다. 오래전 물건이라 조금 표면이 거칠었지만 질 좋은 것임은 분명했다.
몇 번 앞으로 뒤로 얹어보다 보니 쓰는 법도 알 것 같았다.
그건 언뜻 보면 신부들이 결혼식 때 머리에 쓰는 면사포 같기도 했다.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한 무늬라는 점에서 기도할 때 쓰는 미사보에 가까워 보였지만 말이다.
여튼 그건 하얀 레이스로 된 여성용 베일이었다.
“맞네! 미사보!”
“……역시.”
“그래도 왜 준 건지는 모르겠는걸?”
야호가 엉뚱한 건 어제오늘이 아니었지만 이런 걸 대체 왜 준 걸까. 그냥 예뻐서? 여자 물건이니까? 하지만 현대인들은 데이트할 때 이런 거 안 쓰는걸.
해인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야호 님 말이야. 조선시대 여자들은 외출할 때 머리에 이런 걸 쓰잖아? 혹시 그런 거 생각한 걸까?”
“……글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하여간 야호 님은…….”
“그건, 아닌 것 같아.”
웬일로 시율이 야호를 두둔하는 걸까. 해인은 그게 의외라서 베일을 쓴 채로 시율을 멀뚱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차가 서면서 보이는 어떤 상징을 발견했다. 조금 뒤늦게.
“아마 우리가 여기 올 걸 알아서 준 것 같은데.”
“……왜, 여기에 서?”
“평일 방문차량은 여기 주차하라고 표지판에 쓰여 있으니까.”
“엥? 그치만…….”
여기는 영화관이 아닌데. 몇 번 간 적 있는 영화관이랑은 전혀 다른 곳인데. 주변에는 흔한 빌라촌과, 성당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시율은 길만 건너면 바로 성당인 자리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상가는 몇 개 보였지만 데이트할 만한 곳이 전혀 아닌데 말이다. 아니, 그보다…… 방금 시율이 뭐라고 했더라.
여기에 올 걸 알았다고?
해인은 멍하니 제가 쓰고 있는 베일을 내려다봤다.
“혹시…….”
“맞아. 성당에 온 거야.”
“……야호 님이랑 얘기한 거야?”
“그래. 너 모르게 오라며.”
그랬지. 그 말은 하는 동안에도 속이 찔린 듯 아팠는걸. 한동안 얼얼했어. 하지만 절대 안 데려오겠다고 해서, 틀린 줄 알았는데.
‘정말 생각도 못 했어.’
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차창 밖으로 보이는 무성한 수풀로 감싸인 오래된 성당과, 그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십자가.
그리고 기도하는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상을 바라봤다.
상앗빛 마리아상의 머리에도 자신의 것과 비슷한 베일이 씌어져 있었다.
이제야 야호가 이 베일을 준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어렴풋이나마.
‘잘 부탁한다는 의미일까. 도와달라는 의미나? 신이 정말 있다면…… 몇 번이고 빌겠지만.’
해인은 다시 한 번 제 베일을 빤히 바라봤다. 그렇게 성당이랑 두어 번쯤 더 번갈아 보고 있자니, 시율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거 쓰면 더 아파지는 거 아냐?”
“……그치만, 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
“전혀 모르겠어. 사실 난 무교인 데다가…….”
“들어가자.”
“……아파지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돼.”
“아니야! 고마워!”
아직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지척에서 성당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건 막연한 기대였다. 정말로 뭔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내내 거치적거리다 못해 싫어 못 견디겠던 주술을 잠시라도 따돌릴 수 있다니, 이런 순간이 올 줄 몰랐다.
그에게 뭘 말할지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너무나 갑작스러운 기회였다. 말할 수 있게 되면 뭐부터 하려고 했더라?
이름? 이름이 좋을까. 하지만 야호가 그건 어려울 거라고 했으니까, 사는 곳이 어떨까. 아리아로 오라고 알려줄 수만 있어도 좋겠는데.
하지만 엄마 집에 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휴대폰 번호가 좋을까? 아! 휴대폰은 그때 사라졌잖아. 차랑 같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버렸지.
그럼 뭘 알려줘야 하지? 그가 저를 찾게 하려면? 주술은 얼마나 약해지는 거지? 얼마나 그에게 사실에 근접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
해인은 어지럽게 생각을 곱씹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벌써 제 몸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주술은 제 기능에 항상 충실했다.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인은 이번만은 절망하지 않았다.
“……너, 식은땀 나.”
“이 정돈 괜찮아.”
“동공도 흔들려.”
“아마, 너무 기뻐서 그럴 거야.”
정말이었다. 너무 설레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막상 코앞에 기회가 오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선뜻 결정을 못 하겠다.
안에 들어가서 또 기절할지도 모르니까. 미리 말할 걸 생각해둬야 했다.
“……네 손, 떨리고 있어.”
시율은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한 해인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그러는 동안 해인은 그에게 말해줄 만한 한 가지 사실을 겨우 떠올렸다. 제가 고등학생 때 그린 수채화의 제목이었다.
큰 상을 받은 작품이라 인터넷에 제목만 쳐도 제 이름이 함께 나왔으니까. 다른 많은 연관 검색어가 있겠지만, 그러니까 내뱉어볼 만할 것 같았다.
너무 직접적인 건 말하기 불가능할 테니까. 주술이 약해진 틈을 타 해볼 만한 건 그런 거 였다. 해인은 겨우 흥분되는 마음을 다잡았다.
“강, 이제 들어가 보자. 나 뭘 말할지 결정…….”
“조금만 더 마음의 준비를 하자.”
“아니야. 지금도 괜찮아!”
서서히 심박수가 상승하는 건 가슴을 꽉 채운 기대 때문일까. 아니면 주술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성당 자체가 제 접근을 거부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전부든 상관없었다. 만에 하나 너무 고통스러워서 기절해도 그가 챙겨줄 테니까. 난데없이 쓰러져도 그가…….
“……그게 아니라.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강?”
“미안, 바보 같은 건 아는데. 네가 또, 쓰러지면…… 그걸 볼 준비가 안 됐어.”
또 나만 성급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시율은 여기 오는 걸 죽어도 싫다고 했었지. 그렇게 말할 정도였어.
해인은 안전벨트를 풀고 당장 내리려고 서두르던 것을 그만뒀다.
“잠깐이면 돼.”
그는 정말 심각한 얼굴이었다. 전쟁에라도 나가야 하는 사람처럼.
이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떨고 식은땀을 흘리는 건 저인데, 그로 인해 더 힘들어하는 건 그라는 사실이 말이다.
해인은 저만 각오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손을 뻗어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의 무릎을 조심스레 쥐었다.
“강, 정말 고마워. 여기 오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졸라서 와준 거 알아.”
“……아니야. 전부, 내 욕심일지도 몰라. 내가 널 힘들게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아. 넌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스스로 힘들 필요 없는데…… 나 때문에 이러는 거니까. 내가 너한테 이런 걸 강요한 건 아닌가 싶어서…….”
“……강! 우린 같은 걸 생각하나 봐. 나는 내가 쓸데없이 강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어.”
마침 안전벨트를 풀고 있어서,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해인은 가까운 그의 한쪽 어깨에 손을 기대고 이마를 얹었다.
무슨 말을 해야 그가 제 마음을 알아줄까.
잠시 침묵하다가, 나지막이 뱉어내는 건 그다지 자신 없는 지금의 속내였다.
“있잖아. 사실 나 별로 대단한 건 못 할지도 몰라. 들어가자마자 나오겠다고 꼴사납게 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해볼게. 그건 하게 해줘.”
“…….”
“봐, 내가 더 욕심내는 거 맞지? 강은 내 욕심에 휘둘리는 것뿐이야.”
“……그건 아니야.”
“확실한 건 어떻게 되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내가 바란 거야. 강은 그것만 알아줘.”
해인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눈을 마주쳐오며, 알 수 없는 칭찬을 했다.
“넌, 항상 대단해.”
“설마. 사실 내가 가장 바라는 건 그냥 강이랑 하루라도 더 같이 있는 거야. 정말 소박한걸.”
그마저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야.
살짝 웃는 동안 시율의 손이 거꾸로 해인의 손을 움켜쥐었다. 자의와는 별로 상관없는 제 손의 떨림을 느끼며 해인은 피식 웃는 걸로 그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있잖아. 베일을 쓰고 있으면 우리 결혼식 하는 거 같겠다.”
“넌…… 이 와중에.”
“내가, 강이 아닌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상상이 안 가게 되어버렸는걸.”
처음이었다. 그가 저를 진정시키거나, 놀리는 걸로 위로해준 적은 숱하게 많았지만, 제가 그를 다독이는 건 말이다.
이런 순간이 언제 또 오려나.
해인은 제게 가까운 그의 어깨 사이로 뺨을 묻었다. 그는 잠자코 받아줬는데, 어쩐지 몸이 바짝 굳은 것 같았다.
“……난, 이미 우리가…….”
“응?”
“결혼한 거랑 같다고 생각했는데.”
“…….”
“프러포즈도 했고. 또, 넌 거절하지 않았고. 우린 같이 살고 있고…… 또…… 또…….”
갑자기 왜 긴장하나 했더니 진지하게 그런 말을 했다. 이 남자도 이렇게 부끄러워할 때가 있구나. 오래 살고 볼 일이네.
해인은 붉어진 그의 얼굴을 마음껏 구경했다.
“또?”
“내가 너 말고 누굴 또, 사랑하겠어.”
“……기뻐. 나도 그래.”
“그때 그거, 프러포즈였던 말이야. 혹시 모르는 건 아니겠지?”
모를 리가 있을까. 해인은 일본에서의 일을 하나같이 행복하게 기억했다. 그가 반지를 주기위해 서프라이즈로 준비했던 동백꽃 일은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다.
때로는 이것들을 잊느니,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내가 꽃 냄새를 맡아버려서 망쳤지?”
“……그래, 조금 망쳤지만.”
“그건 내가 미안해. 다음엔 못 맡았으면 좋겠는데.”
가까운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대며, 해인은 조금 눈을 감았다.
***
“강은 나한테 뭐가 제일 궁금해?”
“궁금한 거라. 그거야 많지만.”
“내가 말하지 못한 것 중에!”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은 아주 사이좋은 연인처럼 보이고 싶어서 해인은 굳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글쎄, 난 네가 뭘 말 못 했는지도 모르는걸.”
“어…… 그러네.”
“네가 알려주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고.”
“강이 내가 나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거랄까.”
“그게 뭐야. 너는 너지.”
얼굴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기억이 없는 자신도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를 떠올리지 못한 자신을,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해인은 전에는 그를 잊었어도 자신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같을까. 강시율을 알기 전의 ‘박해인’은 지금과 너무도 다른데.
그를 잊은 자신이 그에게 지금의 자신과 같은 여자일지도 의문이었다.
그가 만에 하나 자신을 찾는다고 쳐도, 그냥 얼굴만 본 딴 인간 여자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면 어쩌지 싶었다.
그를 사랑하는 지금의 자신과, 그를 사랑하지 않는 과거의 자신은 모든 게 다를 텐데. 성격도, 생각도, 하물며 그를 향한 목소리까지.
지금의 저는 그에게 항상 애정 어린 음성이지만, 본래의 자신이라면…… 이런 목소리조차 모를 텐데.
더군다나 그가 찾는 건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로 변하는 여자일 텐데.
“……안 되겠다. 너 또 긴장했어.”
“아닌데?!”
“바짝 굳어서는, 성당은 역시 관둬야겠…….”
“아냐. 아냐, 잠깐 다른 생각해서 그래!”
바로 길 건너에 보이는 성당은, 주술을 약하게 하기 위해 찾아온 곳이었다. 주술을 약하게 한다는 건 사람으로 돌아간 후의 자신을 염려하는 거고.
어쩔 수 없이 그런 걱정들이 밀려왔다.
야호가 시율의 위기를 점쳐준 뒤로는 잠시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아앗!”
“뭔데 또?”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는 순간에야 떠올랐다. 제 손이 허전하다는 걸.
“베일이, 없어.”
“뭐야?”
“……아무래도 차에 놓고 내린 것 같아.”
“지금 베일 하나 못 챙기는 컨디션으로…….”
“잠깐만, 얼른 가져올게!”
평소에도 워낙 잘 잊어버렸지만 긴장해서 그런지 하필이면 베일을 차에 놓고 내린 모양이었다.
평상시에 빈손으로 잘 돌아다니는 게 나쁜 습관인 걸까.
다행히도 신호등과 차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고, 해인은 시율이 역시 성당은 그만두자고 하기 전에 서둘러 움직였다.
눈이 남은 바닥이 조금 미끄러웠지만, 고양이의 감각을 자랑하는 해인이 미끄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총총 뛰어서는 차 앞에 도착하자 차 문이 열렸다.
그는 신호등 근처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해인 쪽을 보고 있었다. 아마 주머니 안에는 차 리모컨이 들어 있으리라.
“있다. 있어.”
베일은 해인이 앉아 있던 조수석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조금 흙이 묻어 있어서 탈탈 털고는 시율 쪽으로 걸어가며 가볍게 하얀 베일을 흔들어 보였다. 찾았다는 뜻이었다.
시율은 보고 있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얼른 가서 그와 팔짱을 끼고 길을 건너야겠다. 다음 신호는 놓치지 말아야지. 해인은 베일을 꼭 쥐고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섬뜩함을 느낀 건 그때였다.
부우웅.
아직 시야에 잡히진 않지만, 그가 서 있는 코너 바로 저편에서 망가진 엔진 소리 같은 게 들렸다. 헛바퀴가 돌 때의 쇳소리도. 매캐한 타이어 타는 냄새도.
단순히 듣기 불쾌한 소리라 이상한 기분이 드는 줄만 알았다.
언젠가 들어봤던 날갯짓 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푸드덕, 새가 바로 머리 위를 가로질러 날아가는 소리가 났다. 예전에 이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추락하는 차 안에서였다.
하얀 새를 봤지.
고개를 들어 새를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그새 코너 뒤에서 나타난 차는 기괴하게 회전하며 가드레일을 치받았고, 그대로 쳐부수고 넘어섰다.
시율도 소리를 듣고 돌아볼 만큼 엉망으로 도로를 점령하고, 미끄러지고, 타는 냄새를 흘리며…… 커다란 트럭이 무자비하게 그를 노리고 있었다.
해인은 그가 제게서 눈을 떼고 차 쪽을 돌아본 순간 손에서 베일을 놔버렸다.
‘……야호 님. 틀린 것 같아요. 오늘의 점괘는.’
많이 빗나갔어요.
‘바라던 걸 이룰 거라는구나.’
아니다.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바라는 건 그가 사는 것이었으니까.
해인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강!”
그를 부르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그 시간마저 길었다.
발을 움직여야 할지 손을 뻗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눈을 한 번 크게 깜빡였을 때는, 코앞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만큼 가까운 회색빛 덤프트럭도.
그리고 그를 힘껏 밀어낼 수 있어서, 다행인 순간이 있었다. 다신 겪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아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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