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고양이와 고해
야호의 술병은 참으로 이상한 술병이었다. 끊임없이 술이 흘러나왔다.
안쪽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는 몰라도, 몇십 잔을 따르도록 술은 동나지 않았다.
결국 시율이 쓰러질 때까지도 말이다.
“강…….”
처음엔 둘 다 무슨 물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휙휙 잘도 넘기더니 어느 순간부턴가 시율의 낌새가 심상치 않아졌다.
스무 잔을 넘겼을 즈음부터였을까. 균형을 잃거나, 얼굴이 붉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해인은 그가 취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수가 거의 없어지나 싶더니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고,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기만 하는 걸로 제가 취했다는 걸 감추고 싶어 했다.
술기운을 소리 없이, 그러나 악착같이 버티는 게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인간인 이상에야 한계는 찾아왔다.
시율은 다른 잔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건배를 하고, 입으로 술을 가져가 들이켜자마자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전조도 없이 푹, 하고. 해인의 어깨 위로 말이다.
“내가 이겼군.”
힘없이 자신에게로 무거운 몸을 기울이는 시율을 붙잡으며, 해인은 속상함을 참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희망에 그를 말리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름 같은 거 몰라도 되니까, 무리하지 말라고 한마디라도 할걸.
그깟 이름이 뭐라고 그를 말리지 못한 걸까.
이렇게나 가망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
‘하다못해 기권해도 괜찮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그렇게라도 이야기해줄걸.’
얼마든지 더 마실 수 있을 것처럼 건배하고, 결국 기절하듯 쓰러진 그의 모습에는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해인은 그의 머리를 제 무릎에 기대게 하며 뜨거워진 이마 근처를 쓰다듬다, 살그머니 이마 위에 입술을 맞췄다.
피부 아래가 더없이 뜨거웠다.
그는 지금 과한 술기운에 휘말려 거의 의식이 없어 보였다. 열이 오르기 시작한 몸은 독감이라도 걸린 것처럼 뜨겁고 묵진했다.
그의 이마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해인은 적어도 이 열기를 제가 나눠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지경이 되도록 참다니, 그가 무식하게 구는 날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술맛 좋고, 바람 좋고. 좋구나,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경치도. 나름 풍취 있어.”
해인은 거의 울 것 같은 낯인데, 야호는 여전히 혼자만 유유자적했다.
건배할 상대가 없어지자 아예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 병째로 들이켜며 기지개까지 펴는 모습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엔, 시율도 당할 수 없는 상대가 있었다.
“……너무해요, 야호 님.”
“난 기회를 준 것뿐이야.”
“대체 주량이 어느 정돈데요? 인간이랑 비할 바가 되기는 해요?”
“글쎄다. 몇 그릇이 아니라 몇 동이로 세기는 하지만…… 나도 한계는 있어.”
‘동이’면, 항아리를 말하는 거였다. 해인은 시율의 이마를 쓰다듬다 말고 뾰족한 눈으로 야호를 노려봤다.
“그건 결국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는 이야기잖아요. 대체 왜 그런 장난을…….”
“장난이라니. 난 너희를 돕고 싶어. 그래서 진심으로 내기를 건 거야. 녀석도 진심으로 응했고.”
“……이해할 수 없어요.”
“쉽게 말해줄까? 이 정도 난이도다, 네 이름을 알려준다는 건.”
시율을 이렇게 만든 야호를 원망스레 노려보는 것도, 더는 할 수 없었다. 해인은 힘없이 시율을 내려다봤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숙취가 괴로운 걸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해인은 결국 탓할 곳은 제 자신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야호 님이 말했던 불가능은 이런 거였군요.”
“그래, 나와의 불가능에 가까운 내기에서 이기거나, 내게 어떤 은혜라도 입히지 않는 이상, 내가 너희를 돕기란 불가능해.”
“…….”
“그냥은 끼어들 수 없는 내 사정도 있단 말이지. 내기라도 거는 게 최선이라고.”
어려운 이야기였다. 신선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건 말이다.
그만하니 사신도 야호를 보낸 거겠지만. 아마 야호가 쉽게 도움의 손을 뻗을 수 있는 존재였다면, 저를 보고 오라고 보내지도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호는 이런 까다로운 면에서 사신에게 믿을 만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야호를 이용하려면 큰 은혜를 입혀서 답례로 도움을 받든가, 그도 아니면 내기에서 이겨야 했는데…… 그 난이도가 정말이지 인정사정없었다.
“정말 돕고 싶으면…… 조금은 쉬운 내기를 걸라고요.”
“그래서야 반칙이잖냐.”
“그놈의 반칙 때문에 사람 죽겠어요!”
숙취로 죽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과음으로 기절한 시율의 모습에는 어쩔 수 없이 화가 났다.
해인이 소리친다고 움찔이라도 할 야호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야호는 다만 자신의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그 녀석 죽어라 마시던데.”
“……이름 같은 걸, 알려준다고 하니까.”
“불가능한 내기라는 건 애초에 그 녀석도 알았을 텐데. 그런데도 덤빌지가 솔직히 조금 궁금했거든.”
해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시율도 이 내기에 거의 승산이 없다는 것쯤은 시작하기도 전에 알았으리라.
승률도 모르고 덤빌 만큼 어수룩한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얼마나 희박한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으리라.
그런데도 손에 잔을 든 건…….
“적어도, 그 녀석도 네게 간절하다는 건 알겠다.”
왜일까. 요즘 들어 해인은 그를 볼수록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자꾸만 그의 뺨을 쓰다듬게 됐다.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시간마저 안타까워졌다.
***
방까지 시율을 옮겨다 준 건 야호였다.
해인이 시율을 업어 나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덩치 큰 남자가 하나 더 있다는 건 이럴 땐 도움이 됐다.
침대 위에 시율을 눕힌 뒤에야 해인도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휴, 고마워요. 혼자서는 못 옮겼을 텐데.”
“그래. 옮겨준 대가는 붕어빵 하나면 된다.”
“……누구 때문에 취한 건데요.”
“난 속이 하얀 게 좋더라.”
원하는 게 확실한 유료서비스 전문 호랑이었다. 클레임을 걸 수 있다면 그리하고 싶을 정도였다. 너무 대놓고 대가를 운운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끄응…… 알았어요. 내일 사주면 되죠?”
“좋다.”
“일단 오늘 야호 님은 내 방에 가서 자면 돼요. 저기 건너편 방이에요. 이불이라면 깔아줄 테니까…….”
“방에 책 같은 게 있던데 읽어도 되는 거냐.”
“그거야 상관없지만 거의 강 거라서 볼만한 게 없을 텐데요. 영어가 반이라 야호 님이 읽을 만한 건 없을 거예요.”
해인의 방은 가구를 빼면 거의 휑해서, 시율이 제 책을 조금 옮겨뒀는데 제목도 읽을 수 없는 의학 서적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야호는 의외로 뭔가를 읽는 데 상당한 열정을 보였다. 실제로 옆구리에서 가끔 책을 꺼내기도 했다.
한 호기심 하는 고양이의 사촌이라서일까. 야호도 호기심이라면 끝내줬다.
“이왕이면 네 일기 같은 게 읽고 싶은데.”
“……이 호랑이가, 염치없게 지금 대놓고 남의 일기 타령을…….”
“궁금하잖냐. 인간이 고양이로 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지.”
“모든 신선이 야호 님처럼 호기심의 화신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나, 일기 못 써요. 일기는커녕 그림일기도 안 돼요. 주술 때문에.”
일기라는 걸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주술의 힘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런 걸 쓸 수 있다면 진작 시율에게 보여줬을 텐데 말이다. 쓸 수가 없으니 보여주고 싶어도 보여줄 수 없었다.
해인이 뚱해서 대꾸하자 야호는 턱을 긁적이더니 되물었다.
“맞다. 모달 녀석이 너에게 주술을 걸었지. 뭐에 걸린 거냐? 네가 걸린 주술의 이름. 주문을 외웠을 테니 들었을 텐데.”
“금…… 동술이었던가?”
“하필 그거냐? 너 아주 까다로운 녀석에 걸렸구나. 거의 저주로 치부되는 주술인데…….”
역시 저주였군. 해인은 한층 더 뚱한 얼굴이 됐다. 야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잇기 전까지는 말이다.
“뭐, 잠시 약해지게 만들 수야 있겠지만.”
“……예? 정말? 어, 어떻게요? 야호 님도 조금은 도움이 되긴 하려나 보내요!”
“이 녀석 무례하긴.”
어째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걸까? 주술을 풀어볼 생각을! 주술만 약하게 해도 뭔가 희망이 보일 것 같았다.
“뭔데요, 그래서?!”
“당연하겠지만, 알려주는 데는 대가가 필요해.”
역시 공짜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주술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이었으니까.
해인은 금세 심각해졌다.
“뭐…… 뭐가 필요한데요……?! 참고로 나 돈은 별로 없는데…….”
“음, 붕어빵 열 개.”
어떤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할지 몰라 한껏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야호는 해인의 눈앞에 손가락 열 개를 펼쳐 보였다.
혹시 손가락 하나당 열 개인 걸까? 해인은 조심스레 물었다.
“……백 개?”
“아니, 열 개.”
시율을 한 번 업어다 주는 것도 붕어빵 한 개면서, 열 번 업어다 주는 가격밖에 되지 않다니. 대체 이 호랑이의 서비스 단가표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싸네요. 좋긴 좋지만.”
“뭐, 주술을 풀어주는 것도 아니고 잠시 약해지는 방법을 알려주는 거니까. 그리고 이 정돈 다들 아는 거거든.”
인간은 보통 모른다는 걸 꼭 말해줄 필요는 없으리라. 인간이 아닌 자들은 대부분 아는 눈치니 말이다.
“무엇보다 방법을 안다고 다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비법 자체는 별것 아닌 셈이지.”
“뭔진 모르지만 좋아요. 그 비법이라는 거, 그래서 어떤 거예요? 붕어빵이라면 내일 당장 사줄 테니까…….”
“그럼 내일 말할래.”
“……나쁜 호랑이! 세속에 찌든 호랑이! 도를 닦는 다면서 너무 단호한 거 아니에요!”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뿐이야. 누누이 강조하지만 남이 당연히 도와줄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좋지 않다고. 나쁜 버릇이로다.”
이럴 때만 신선처럼 고고하게 구는 야호였다.
그러면서 요구하는 게 무려 붕어빵이라는 건 놀라운 사실이었고 말이다.
***
늦은 아침, 시율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없었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기억도 당연히 없었다.
어제 자신이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는 건 되새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기면 그게 이상한 일이라는 것쯤은 내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름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니까. 그리고 저는 모르는 이름을 그 호랑이 녀석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자 분한 마음이 들었다.
스물두 번째 잔이었나. 거기까지는 센 건 기억이 났다. 더 먹었다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의식이 날아갔다.
완벽하게. 펑, 하고 터지듯.
“강? 일어났구나!”
“……음.”
이제나저제나 그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던 해인은 그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에 냉큼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침대 위, 그의 곁으로 가까이 올라오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시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방 안을 둘러봤다.
“그 호랑인?”
“거실에서 티비 보고 있어.”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그 녀석이 나타난 것부터가.”
“그…… 저기, 어제는 야호 님이 강을 여기까지 옮겨다 줬어!”
시율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해인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이 두 남자는 왜 이렇게 상극인 걸까.
“어디서 재웠어?”
“내 방. 나는 여기 강 옆에서 잤어. 꼭 붙어서 잤어!”
“이 옷은 네가 갈아입혀준 거고?”
“응.”
“……그럼 됐어.”
자꾸 미간을 구기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그의 숙취는 두통인 모양이었다.
야호의 말에 의하면, 선인들이 애용하는 그 술병 속에는 작은 연못만큼의 술이 들어간다고 했다. 그리고 어제는 둘이서 그 반을 마셨다고 했다.
물론 야호가 한참 더 많이 마시긴 했지만…… 시율이 먹은 양도 결코 적은 건 아니었다.
오늘이 그가 쉬는 날이라 그나마 천만 다행이었다.
해인은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미리 준비해뒀던 꿀물을 타 왔다. 이전에 제가 숙취에 시달렸을 때 그가 해줬듯이 말이다.
일어나면 타주려고 계속 기다렸다는 걸 그는 알까.
“강, 이거 마셔 봐. 조금은 편해질 거야.”
시율은 순순히 해인이 내미는 따듯한 머그컵을 받아 들었다. 꿀의 비율이 엄청 높아서 한 모금 마시자마자 사레가 걸릴 뻔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혹시 꿀 반 물 반으로 탄 건가 싶을 정도였지만, 정성은 기특했다.
“고마워.”
“어때? 괜찮아? 나 처음 타봤는데…… 괜찮지?”
“맛있어. 괜찮아.”
해인은 슬쩍슬쩍 시율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평소 해인이 뭔가 마실 걸 타는 데 기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커피든 차든, 해인은 비율을 아주 못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그나마 코코아같이 많이 타면 맛있는 걸 제외하고는 말이다.
“음, 있잖아, 강? 야호 님이…… 점을 보는 게 특기인데 말이야.”
“……점?”
그가 조금 미간을 폈을 때를 노려 해인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어제부터 알려줘야 알려줘야지 하던 이야기였다.
“강의 점을 봐줬거든?”
“너 그런 거 믿지 말라니까.”
“그냥 참고삼아. 재, 재미지, 재미! 별건 아니고…… 저기, 당분간 강은 차를 조심해야 된대!”
“누가 그런 사이비 말을 들을까 보냐.”
정말 심각한 충고인데, 시율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였다. 꿀물을 비우는 데 전념하는 걸로 보아서 지금 들은 이야기를 금방 잊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아니야. 야호 님은 용하니까…… 조금 맞을지도 모르는걸? 그, 아, 맞아! 강이 어렸을 때 큰 위기가 있었을 거라고. 그런 것도 얘기했어.”
“내가 어렸을 때?”
“응, 짚이는 거 혹시 없어? 제법 용할 거야. 정말이야!”
용해야 해! 그래야 충고를 들을 테니까! 해인이 애탄 얼굴로 저를 바라봐서 시율은 마지못해 기억을 더듬어 봤다.
다디단 꿀물을 마시고 있자니 속이 달래지고 있었다.
“……위기라. 있긴 있었지만.”
“그치? 있었지? 야호 님이 맞혔다니까.”
“나 어릴 때 납치된 적이 있거든.”
그런 건 줄은 몰랐는데. 해인은 바짝 굳어 놀란 얼굴이 됐다.
야호에게 시율이 이번 생에도 이미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곧 세 번째가 닥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세 번째 고비가 마지막이라. 이걸 넘기면 남들만큼 순탄한 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만 들었다.
“부모님이 재력도 있고, 원한도 있다 보니…… 내가 운 나쁘게 표적이 됐던 것 같아. 그 당시 난 초등학생이었거든. 하굣길에 끌려갔지. 흔한 이야기였어.”
“하나도 안 흔한데……? 그리고 대체 무슨 원한으로?”
“아버지가 차린 종합 병원 때문에 인근에 다른 병원이 싹 다 망했거든.”
해인은 시율이 이야기에 점점 동그란 눈을 했다.
“그때 길거리에 나앉은 개업의 중 하나가 범인이었는데…… 졸지에 빚쟁이가 됐으니, 반쯤 미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 이혼당하고, 사채업자들에게 매일 협박당하고. 그랬다나 봐.”
“그래도 강한테 그러면 안 되지!”
“웃긴 건 차라리 납치범은 이해할 수 있겠다는 거야. 난 내 아버지를 이해 못 하겠더라고. 범인은 아버지한테 병원 문을 닫을 걸 요구했지. 자신이 당한 대로 말이야.”
“……그랬는데?”
“우리 아버진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거든. 날 구하려고 하지 않았어. 병원 문을 닫지 않으면 나를 죽인다고 했는데도, 그러면 환자들이 죽는다고 무시했지.”
환자들은 다른 병원에 옮길 수도 있었을 텐데. 해인은 자신이 의사가 아니니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제 자식이 인질로 잡혀 있다면 그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맞는 말이긴 해. 자기 아들이 인질로 잡혀있는데도 흔들림 없는 대단한 분이지. 아주 이성적인 판단이야. 다만 그 판단력으로 납치범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는 게 나를 놀랍게 할 뿐이지.”
“……무서웠지?”
“무서웠지. 그땐 어렸으니까. 그 미친놈 정말로 나를 죽이려고 들었거든. 아버지 병원을 망하게 할 수 없다면 나라도 죽이려고 드는 게 보였어. 그래서 자력으로 도망쳤지. 아버지가 날 구할 것 같지 않으니 내 발로 뛰어야지 어쩌겠어?”
문득, 해인은 시율이 제 가족과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걸 되새겼다. 특히나 부모님과 말이다.
“운이 좋았는지, 간신히 살았고…… 범인도 잡혔지.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너, 왜 네가 울 것 같은 얼굴이야? 이미 다 지난 얘긴데.”
“강이…… 안 괜찮았을 것 같아서…….”
“당연히 한동안 심각했어. 대인 공포증에 시달렸고. 밤이면 잠들지 못했지. 사람들 몰래 정신과 상담도 받아야 했고. 트라우마가 남으면 안 되니까. 하지만…… 여전히 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못해.”
그는 무서운 이야기일수록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건 아마도 두려운 마음을 숨기려는 위장일지도 모른다.
“그걸 숨기려고 더 못되게 구는 건지도 몰라.”
“강.”
몸에 가시를 두르고, 말에 칼을 심는 건 그가 살기 위한 방법이었다. 자신이 고통당하기 않기 위해서.
그의 전생이 지금의 그를 괴롭히는 것만 같았다.
해인은 무릎을 일으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잠시간 말이 없다가, 느리게 해인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 얘기, 가족 말고는 너한테 처음 하는 거야.”
“……응.”
“누구한테도 말한 적 없어.”
이 순간, 그가 저를 끌어안게 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말하고 싶었다. 그가 저에게만은 가시를 세우지 않고, 날을 보이지 않아서.
그것만으로 제가 사는 이 시간이 의미 있다고.
“나 다 들었는데.”
“…….”
“밥 안 줌?”
야호가 문가에 빼꼼,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면.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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