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고양이와 환생
그가 저를 사랑한다는 건 자신 있어 할 일이라기보다는, 그가 확신시켜준 그의 마음이었다. 그에게서 비롯된 그를 향한 믿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만한 자신감보다는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다. 항상 넘치듯 사랑받는 느낌은 과분하기만 했으니까.
부지런히 이 마음을 갚아보려고 해도, 결국 그에게는 견줄 수 없어서 한참 밀리고는 했다.
누가 더 사랑하네, 하는 일로 싸우는 건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지고 싶지 않은 게 하필이면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강……?”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닫으며, 해인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시율의 기척을 따라 그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 뭔가를 읽고 있다가, 해인이 문간에 서서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책을 놓고 제 옆을 터주었다.
해인이 냉큼 그의 곁으로 파고들었다.
꾸물꾸물 그의 옆으로 자리 잡자, 그는 두 겹으로 된 이불을 하나씩 당겨 해인의 어깨 위까지 야무지게 덮어줬다.
“그 호랑이는?”
“옥상에, 이불 깔아주고 왔어.”
“거기서 쭉 살라고 해.”
그는 야호가 없자 다시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여유롭고, 무뚝뚝하지만 제게는 한없이 다정한 남자로.
입은 꽤 험하지만 사실은 좋은 남자.
남을 타박하는 퉁명한 목소리와, 제 뺨을 만지는 느긋한 손길은 같은 사람의 것이 아닌 것처럼 온기가 달랐다.
그는 타인에게 정말이지 인색한 남자였다. 그래서 그게 제게만 특별한 얼굴을 보여줄 때면, 더 부끄럽고, 더 벅찼다.
물론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였다.
“……으음, 강은…… 야호 님이 왜 그렇게 싫어?”
“널 데리고 갈 것 같아. 그래서 싫어.”
“에? 야호 님은 그런 거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내가 싫어하는 무언가랑 한패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서 그냥 싫어.”
그 외에도 싫어할 이유야 많겠지만 그건 좀 정곡이었다. 그는 하여간 촉이 좋았다. 사신과 야호가 관련이 있는 건 맞았으니까.
해인은 딱히 고를 말을 찾지 못해서, 대신 이불 속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애정 표현은 역시 부비대는 걸로 하는 게 최고였고, 그의 가슴 근처에 얼굴을 문지르자 그는 오냐오냐, 하듯 머리를 만져줬다.
“……아무튼, 때린 건 내일 사과할게.”
“……어? 정말?”
“널 울린 건 아닌 것 같으니까……. 하지만 커플 사이를 방해한 건 너무했어.”
“맞아! 그래도 때린 건 너무했어!”
“얌마. 지금 그 자식 편드는 거야?”
질투로군, 질투야. 해인은 더 힘주어 그에게 매달렸다. 말보다는 몸으로 표현하는 게 편할 때가 있어서,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니야. 내가 울어서 헷갈리게 한 것 같아. 그래서 미안해.”
“너 요즘 너무 자주 울어.”
핀잔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드는 그의 손길도 느껴졌다. 느리게 목덜미까지를 만지는 손의 온기를 느끼며, 해인은 슬그머니 웃었다.
“그건 그래. 인정.”
“인정만 하지 말고…….”
“응! 안 울게!”
“……그거야 믿지도 않아. 그냥, 말을 좀 해줬으면 하는 거야.”
다른 건 아무래도 좋으니, 왜 우는지 정도는 알려주면 좋을 텐데.
이상한 바람이지만 그는 해인이 울 거라면 제 앞에서 울었으면 좋겠고, 제가 그 눈물을 만져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혼자 숨어서 우는 것보다는 아무렴 그게 나으니까.
하지만 해인의 눈물은 대부분 비밀스러웠다. 그는 해인이 저로선 이유도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면 무엇도 해줄 수 없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눈을 잠시만 떼도 뚝뚝, 울고 있을 때가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고는 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랬지만 그 얼굴은 항상 그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를 향해 무언가 호소하는 얼굴로 그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맞닥트릴 때면 그는 평정을 잃고 추하게 흐트러져야 했다.
“내가, 요즘 날카로웠어. 바보같이 굴고 있다는 거 알아.”
“……응.”
“불안해서 그래.”
그가 그러는 이유를 알았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 해인은 제 뺨을 만지는 그의 손을 붙잡아 손등에 더듬듯 키스하며 그의 맥박을 느꼈다.
힘줄이 울긋한 남자의 손등 위에 입술을 맞추며, 그가 제 뺨을 만지는 이유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했다.
서로를 토닥거리는 순간은 더없이 따듯했으니까.
그래서였다. 그의 손에서 이 온기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면, 또 두려움에 참을 새도 없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야호가 알려준 사실은, 언제든지 저를 고장 나게 했으니까. 또 덜컥 슬퍼지려는 걸 참으며 해인을 그의 손등 위에 속삭였다.
“야호 님은 말이야.”
“……님은 무슨.”
“그래 보여도 날 도와주고 싶어 해. 적이 아니야.”
“참나, 대체 어딜 봐서?”
“정말이야.”
겨우 어제 하루, 이렇게 편하게 달라붙어 있지 못했을 뿐인데 그사이 그의 온기가 그리웠다고 하면 이상한 일일까.
해인은 몸을 일으켜 무릎으로 서며 그의 목을 두 팔로 다정하게 안았다. 힘을 주어 단단한 가슴팍에 기대자, 그의 손이 허리를 받쳐줬다.
해인은 시선이 닿는 그의 턱 끝에 키스했다.
“그보다, 강.”
“음?”
“오늘은…… 안아주지 않을 거야? 우리 어제 떨어져 있었잖아.”
이렇게나 조르고 싶은 기분인 것은, 그가 항상 넘치게 주는 애정들 때문이다.
이제는 그걸 느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기분이어서. 아이러니하게도 중독이란 게 어떤 건지 이 남자 때문에 알 것 같았다.
시율은 아주 잠시 침묵하더니, 부드럽게 온몸을 겹쳐왔다.
“……사양할 리 있나.”
녹아내리는 무언가와 닮은 달콤한 목소리였다. 얇은 옷깃이 거슬릴 만큼 그와 가까워졌고, 깊은 끌어 안김은 키스하는 행위와 같았다.
하지만, 이만큼 가까운데도 불안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더 많이 피부를 겹쳐야겠다.
그의 숨소리나 맥박, 온기, 냄새에 흠뻑 취하면 조금은 이 기분이 나아질까. 해인은 제가 먼저 그의 상의 속으로 손끝을 밀어 넣었다.
그를 느끼고 싶어서 조급해졌다. 그가 살아 있음을 실감하고 싶었다.
***
날이 밝았다. 겨울 아침은 쌀쌀했고, 해인은 어제 야호를 옥상에서 자게 한 게 미안해서 공원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최고의 맛집으로 데려와서, 없는 돈을 박박 긁어 맛있는 걸 사줬다.
해인 나름의 사과였다.
“오? 이거 좋구나.”
“그쵸? 야호 님 마음에 들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 붕어빵이라는 것도 과자냐?”
“음, 과자랑은 조금 다르지 않나. 이름도 빵이잖아요.”
“둘이 뭐가 다른데?”
“그것도 몰라요? 그야 과자는, 딱딱하고. 빵은…… 으음……?”
“붕어빵인데 붕어가 안 들어 있는 이유는 또 뭐고?”
야호의 질문은 대체로 5살짜리 미취학 아동의 것과 비슷했다. 해인은 대답하기 귀찮아져서 미리 시켜둔 계란빵을 종이봉투에서 꺼내 야호의 입에 물려줬다.
“계란빵에는 계란이 들었으니까, 먹어봐요. 이것도 맛있어요.”
덩치가 산만 한 야호는 꼭 입에 뭘 물려줘야 조용했다.
우물우물 받아먹는 모양이 계란빵도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야호가 싫어하는 음식 찾기가 더 힘들 것 같았다.
해인은 5살짜리 사내아이를 챙겨주는 기분으로 종이컵에 뜨거운 어묵 국물을 따라서 내밀었다.
“국물도 같이 먹어요.”
“뜨거워서 싫다.”
“엇? 그래요? 그래야 맛있는데…… 야호 님도 싫어하는 게 있긴 있군요.”
“나야 뜨거운 걸 먹을 일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러네. 호랑이라면 보통 생식……. 히익. 해인은 순간 무서운 상상을 해버렸다. 얼른 고개를 털어내는 걸로 잊으려고 애썼다.
“저기, 뭐 더 먹을래요? 내가 쏠게요! 돈 없으니까 2천 원어치 이상은 무리지만…….”
“그럼 두 번째 먹었던 걸로.”
“아줌마, 크림 붕어빵 두 개 주세요.”
“크림 붕어빵으로요? 알겠어요.”
매일 이 근처를 산책하면서 안면을 튼 포장마차 아줌마는 아주 상냥했다. 엄마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해인은 여기 들리는 걸 꽤나 좋아했다.
돈이 없어서 자주 사 먹진 못하지만 말이다.
물론 배가 금방 차는 것도 문제였다. 오늘은 그러니 나름의 사치를 부리는 셈이었다. 야호에 대한 손님 대접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 맛있죠? 이 근방에서 여기 붕어빵이랑 계란빵이 제일 맛있어요.”
“이런 건 처음 먹어보지만 그런 것 같다.”
“여기 붕어빵 꼬리에는 앙금도 들어 있다고요.”
“다른 덴 없냐?”
“아무래도 없는 데가 많아요. 아주 중요한 포인트죠.”
“참고하지. 나 이 앙금이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나란히 서서 붕어빵을 먹으며 심오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포장마차에 손님이 하나 더 들어왔다.
겨울이라 비닐 천막이 주변에 쳐져 있었는데 그걸 열고 사람이 들어오자 찬바람이 함께 훅,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붕어빵 14개 주세요.”
“팥으로 드려요, 크림으로 드려요?”
“으음, 적당히 반반 섞어주세요.”
“네, 지금 구워야 해서 조금 시간이 걸려요. 5분 정도요.”
해인은 먹던 국물을 하마터면 입 밖으로 뿜을 뻔했다.
누가 14개나 시키는 걸까 하고 힐끔 봤더니, 아주 낯익은 병원 여직원이 바로 옆에 서 있었으니 말이다.
중간에 야호를 끼고 있기는 했지만, 여기서 마주칠 줄 몰랐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동물병원 직원들끼리 먹을 심부름인지 그녀는 유니폼 위에 까만 파카만 걸친 채였다.
‘하긴, 병원이랑 여기랑 제법 가까우니까…… 음. 이왕이면 방유나랑 마주쳤으면 좋았을걸.’
그녀는 해인을 바로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낯이 익은 정도인지 몇 번 힐끔댔다.
해인이야 고양이로 병원 안을 활개 치고 다니며 매일같이 봤으니 한눈에 그녀를 알아봤지만, 그녀는 해인의 이 모습은 딱 한 번 봤을 뿐이었다.
나날이 금기사항이 업데이트 되는 이 몸이, 그나마 조금은 자유로웠을 때.
아마도 죽은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갔을 때였나, 그때 병원에 저 여자가 있었던 것 같았다. 해인이 그렇게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야호가 끼어들었다.
“너 뭘 보냐.”
“……네?”
“왜 쳐다봐.”
이 트러블 메이커. 동물의 세계에서 눈을 마주치는 건 전투 신청인 걸까. 야호가 더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해인은 얼른 야호와 그녀 사이로 끼어들었다.
“날 본 거예요! 나!”
“엉? 그래?”
“……죄송해요. 그냥 낯이 익은 것 같아서……. 혹시 우리 동물 병원에 오시는 손님인가요?”
당황했는지 그녀가 말을 걸었는데, 해인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게 어색하게 뺨을 씰룩거렸다.
도망칠까. ‘내가 개냥이에요.’라고 말할 순 없으니까.
이 금기가 주렁주렁 달린 몸은 지금 같은 상황이면 벙어리가 되어버려서…….
“그 아가씨 시율 선생님 애인이잖아요.”
“네에?”
“어휴, 눈만 오면 둘이 와서 하나씩 먹고 가는데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몰라요. 강 선생님이 가끔 혼자 와서 어묵도 사가고. 붕어빵이랑. 저 아가씨가 좋아한다고. 아주 신혼부부야.”
여자의 눈이 해인의 약지로 향했다.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와 같은 반지. 이내 그녀의 눈이 야호에게로 향했다.
붕어빵을 한입에 집어넣고 있는 이상한 남자에게로.
“그러시구나……. 그럼 이쪽은……?”
“친척이에요, 친척!”
고양이랑 호랑이는 같은 과니까, 그렇게 큰 거짓말도 아니었다. 해인은 그녀가 행여나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기를 바랐다.
시율은 질투가 꽤 심한 남자라, 이상하게 말이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
“이게 뭐예요!”
“어…… 미안.”
아까 포장마차의 일도 포함해서, 해인은 야호에게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며칠 봤다고 조금 편해졌는지 처음 야호를 만나고 도망쳤던 바로 자리에서 말이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 곳이었다. 오늘은 텅 비어 있었지만.
“한 마리도 안 나오네!”
“냄새가 그렇게 나나?”
야호는 제 팔에 코를 묻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호랑이 냄새를 맡았는지 고양이들은 꼬리 끝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밥을 얻어먹겠다고 너도나도 나와서 애교를 부릴 녀석들인데, 목숨 귀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내일은 따라오지 마요.”
“에, 할 거 없는데.”
“티비 보는 법 가르쳐 줄게요.”
“티비! 나 그거 뭔지 안다. 안에서 사랑과 전쟁이 나온다며.”
“뭐, 비슷하죠?”
“그런데 네 애인 화는 풀린 거냐?”
이렇게 물어보니 야호가 꼭 친구 같았다. 그간은 애인이랑 싸우고 그 얘기를 할 곳이 없었으니까.
“풀었어요. 그리고 강은 화는 내도, 사람 힘들게는 안 해요. 화내고 끝이니까.”
“장점이로구나, 그건.”
“저녁에 강이 퇴근할 때쯤 공원 앞으로 같이 마중 나가요. 그리고 은근슬쩍 함께 집에 들어가면 될 거예요.”
강도 사과하겠다고 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둘이 섞어두면 될 것 같았다.
“좋다. 그럼 오늘은 케이크 먹을 수 있는 거냐?”
야호의 관심사는 하나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놈의 배는 아무래도 끝이 없는 것 같았다.
“뭐, 내일 강이 쉬니까 해줄지도요.”
“케이크라, 환상의 맛이라던데. 두근두근하는구먼.”
“……남의 남자한테 두근두근하지 말아요.”
“큽.”
야호가 대뜸 웃음을 터트린 건 해인이 말도 안 되는 질투를 해서일지도 모른다. 해인은 껄껄대고 웃는 야호 때문에 민망해졌다. 그렇게 웃을 것까지야…….
“그, 그만 웃어요!”
“크하하! 누가 커플 아니랄까 봐, 둘 다 소유욕 하고는.”
“……우씨…….”
“아아, 그러고 보니 어제 가르쳐 준다 걸 깜빡했네. 조심할 걸 가르쳐 주마. 오늘 먹는 붕어빵의 답례로.”
실컷 웃어놓고는, 해인이 삐질 것 같자 미끼를 내미는 야호였다. 그리고 해인은 그것엔 생선 앞의 고양이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조심할 거? 강…… 얘기예요?”
“그래. 이 정돈 그 녀석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줘도 될 거다.”
“뭔데요?”
“불이나, 물은 아니야. 화재나 익사는 아니라는 거지. 병마도 아닐 테고, 건강한 젊은 남자가 그럴 확률은 적지 않냐. 그럼 녀석이 조심해야 될 후보는…….”
“교통사고?”
불현듯 생각나는 게 그것이었다.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것. 가장 흔하게 일어나는 두려운 일 중 하나.
“장담은 못하지만 가장 확률이 높을 테지. 그게 요즘 사신들이 애용하는 방법 같더라고.”
“……그치만, 그런 건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사고 낸 사람은 무슨 죄예요?”
“뭐, 너야 어차피 기억을 잃을 거니까 알려주는 거다만…… 죽고 죽이는 것도 다 운명이 얽힌 결과야.”
“죽이는 것도…… 운명이라고요?”
“그래. 전생에 강시율이 죽였던 인간이, 이번 생에 강시율을 죽일 거다.”
감당 못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어지러워졌다.
이 몸으로 생활하게 된 뒤로 인간들의 영역이 아닌 이야기를 너무 많은 얘기를 들었더니 더 이상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인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슬퍼만 하기에는 그의 목숨이 달려 있었으니까.
“그럼 너무 많잖아요……! 강은…… 전생에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했잖아요?”
“그래. 그러니 불리하지. 그래서 단명할 운명이라고 했잖냐. 녀석을 죽이고 싶어 하는 영혼이 아직도 이 세상에 있어. 원한을 풀고 싶어 하지.”
“…….”
“자신을 죽인 걸 운명으로 납득 하고 받아들이는 영혼도 있겠지만, 억울함에 그걸 한으로 삼은 영혼도 있다. 죽이기 위해 태어날 수도 있지. 그게 악연이야. 죗값을 치른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 길이 없으니, 이것 또한 공포였다. 죗값을 치른다는 말은 그저 잔인하게 들렸다.
그가 얼마나 많은 단명을 거듭했는지도 상상이 가지 않으니, 두렵고, 끔찍했다.
이제 와서 그에게 말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당신에게 곧 죽을 위기가 찾아올 텐데, 그건 전생의 죗값이라고. 기억도 나지 않을 테지만, 아주 오래전에 당신이 아주 많은 사람을 죽여서…… 당신도 죽어야 한다고.
“……누군데요, 그게? 누가 강을 죽여요?”
“나도 모르지, 그거야. 어느 생에 어느 영혼이, 어디에서 만나 어떻게 복수할지는. 그리고 영혼이 품은 원한이다 보니, 자의라기보다는 우연히 일어나는 경우가 많을 거다. 개입하되, 직접 죽이는 게 아닐 수도 있어. 예상과 달리 교통사고가 아닐 수도 있고.”
“알려줘요, 야호 님! 내가 어떻게 해야 해요?”
“일단 지켜봐야겠지.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그런 답을 바라는 게 아닌데…….
사색을 하고 있던 해인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떠올랐다.
제가 그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맞아, 나 순간이동을 할 수 있어요! 그걸 연습하면 만약의 때에 도움이…….”
“뭐? 너 미쳤냐.”
“왜요? 그러라고 알려준 거 아니에요?”
“순간 이동은 쓰면 안 돼. 너무 위험해. 내가 알려준 건 그런 뜻이 아니었다. 널 희생해서 구하라는 게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럼……?”
“너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녀석을 위기로 인도하는 건 죽음의 운명과 그것들을 이행하는 사신이야. 모달과 같은 녀석들! 너와 같은 사신탈을 쓴 자들.”
노상 태평하고 한량 같던 야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깡그리 사라졌다. 야호가 심각하게 구는 이유를 해인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요?”
“하이고…… 이래서 인간들은…… 답답해라. 잘 들어라. 네가 만약 사신탈의 힘을 써서 녀석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면, 너는 되살아날 수 없어질 거야.”
“……네?”
“……녀석을 죽이려던 사신이 널 발견할 거다. 힘을 쓰면 들키고 말아!”
사신. 그를 죽이려는 사신. 물론 죽음의 곁에는 당연히 사신이 있을 테지만…….
“명심해라. 그랬다간 모든 게 끝난다. 모달 녀석이 그간 해온 노력도, 네가 되살아날 수 있는 기회도…… 모든 게 물거품이 돼. 감히 사신탈을 쓰고 있는 인간을 발견하면 어느 사신이 눈감아줄 것 같으냐? 그건 중죄야. 너도 모달도, 염라의 앞으로 붙잡혀 갈 거다.”
텅텅, 귓가가 울리고 세상이 무겁게 느껴졌다. 서 있는 것도 벅차졌다.
확실히 모달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다른 사신을 조심하라고 했다. 누누이 강조했다. 얌전히 지내라고. 걱정되는지 일부러 시간을 내 잘 있나 보러 오고는 했고. 그래도 불안 한지 주술을 덧대 걸었고. 야호를 보내서, 저를 감시했다.
“이미 한번 실수를 덮으려고 했던 모달은 소멸될 것이고, 너는…….”
되살아날 수 없겠지.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겠지. 그날에, 죽은 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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