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고양이는 할 수 없는 것
“강! 과자 구워줘, 과자!”
“……뭐? 난데없이 그게 무슨…….”
“아니다, 케이크가 좋겠어!”
약속대로 평소보다 빨리 귀가한 시율은, 해인의 갑작스러운 조름에 이기지 못하고 곧장 부엌으로 떠밀려야 했다.
방금 퇴근한 사람에게 이 무슨 맹렬한 케이크 타령인지.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빨리, 응? 강! 맛있는 거!”
해인은 호들갑스럽게 그를 오븐 앞으로 밀었는데, 그 뒤를 야호가 어슬렁어슬렁 따라붙고 있었다.
시율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주섬주섬 천장에서 핸드 믹서기와 과자 틀을 꺼냈다. 일단 해인이 하라니까 하긴 하겠지만…….
“다 좋은데, 갑자기 케이크는 무리야. 재료도 부족하고.”
“그럼 과자도 좋아. 맛있게 구워줘야 해.”
“뭔데 갑자기?”
“야호 님한테 먹여주려고!”
“…….”
싫다는 말이 당장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해인이 눈을 너무 반짝이고 있었다.
눈빛 반짝반짝 공격은 항상 효과가 좋았다. 그 눈은 고양이 모습일 때나, 사람 모습일 때나 그에게 직격탄으로 작용했다.
“강, 응?”
지금처럼 팔에라도 매달려서 조르면, 더할 나위 없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고 말이다.
해인이 먹고 싶어서 만들어달라고 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만들리라. 아무리 피곤해도 컵케이크 백 개라도 구울 수 있었다.
“난 초코가 좋아.”
“윽, 시끄러워요! 그건 야호 님이 다 먹어서 없어요!”
“에이이.”
하지만 저 눈에 거슬리는 호랑이를 먹이기 위해 퇴근하자마자 케이크를 구울 애정 같은 건 없었다.
쥐어짜내려고 해도,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안 해. 내가 왜 저 녀석 먹이자고…….”
“앗! 그러지 말고, 응?”
“싫다니까.”
“강…… 나도 먹고 싶어서 그래. 강이 해주는 과자 정말 좋아한단 말이야. 으응? 가앙…….”
대신 해인을 향한 애정이 넘쳐서 탈이었다. 해인은 그와 지내면서 조르는 기술이 상당히 늘어 있었다.
촉촉이 젖어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눈으로 거듭 저를 부르면, 그는 무력해졌다.
그래, 눈이 반짝이는 이유는 눈물 때문이었다.
“정말 좋은데…….”
결국 시율은 과자를 굽기 시작했다.
내가 왜……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이다.
본래 그는 확실한 이유 없이는 타인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이기적인 남자였지만, 해인을 만난 뒤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뭔가 하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자신이 조련당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
“세상이 좋아졌구나. 수컷이 부엌에 서다니.”
“강은 요리를 진짜 잘하니까, 기대해도 좋아요!”
“아, 그러면 저 녀석은 직업이 요리사냐?”
야호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바쁜 시율의 등을 가리켰다.
“아뇨. 수의사예요.”
“그게 뭔데?”
“아, 모르시는구나. 하긴…… 생각해보니까 예전엔 수의사가 없었겠네요.”
“나오면서 공부하긴 했는데, 워낙 속성으로 해서 말이지.”
선인들 사이에는 ‘인간세계 열흘로 완전 정복!_현대판’ 그런 책이라도 있는 걸까? 확실히 야호의 현대에 대한 지식은 기묘했다.
세이프는 알고, 케이크는 모르고 대체 뭘로 공부하면 그런…….
“이걸로 공부했는데.”
“……엑?!”
해인이 상상한 것과 비슷한 제목의 책도 책이었지만, 그걸 옆구리에서 꺼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야호는 시율에게 빌린 후드티를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의 어디에도 옆구리에 주머니는 없었다. 해인이 아는 한은 말이다.
“이게 나름 최신판이긴 한데 말이지. 한 20년 전에 유랑 다녀온 녀석이 쓴 거라 그런지 뒤처지는 것도…….”
“바, 방금 어떻게 거기서……?”
“이거? 아공간이다만.”
“……그게 뭔데요?”
“독립된 하나의 작은 차원이라고 해야 할까. 개인 사물함이지. 물건을 넣어둘 수 있어서 편리해. 연결구를 입안에 만드는 녀석도 있고, 머리카락 사이에 만들기도 하는데, 난 여기가 편해.”
야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옆구리에서 책을 한 권 더 꺼내 보였다. 마술쇼도 아닌데 눈앞에서 책이 사라졌다 나왔다 하는 건 선뜻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짜잔.”
해인이 점점 입을 벌리자 야호는 재미를 붙였는지 제 옆구리에서 온갖 물건을 꺼내 보이고 있었다.
육포, 오래된 서책, 약재 뭉치, 처음 보는 짐승의 꼬리 뭉치, 낡은 버선, 무늬가 예쁜 비단 댕기, 뭔가의 뼈…….
“그만! 다시 집어넣어요! 얼른!”
“아이쿠, 간지러워라.”
“이런 걸 왜 가지고 다녀!”
알 수 없는 뼛조각이 나왔을 때는 시율이 그걸 보기 전에 다시 집어넣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공간을 열 수 있는 건 야호뿐이었고, 해인의 손으로는 애꿎게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이거 제법 귀한 거다? 순종 늑대인간의 어금니…….”
“됐으니까! 집어넣어요!”
“쳇, 가지고 있으면 흡혈귀 녀석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부적이란 말이야.”
“……뭐라는 거예요? 흡혈귀 같은 거 막 씹어 먹을 양반이.”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사신도 사신이지만, 야호가 더 기묘한 존재였다.
눈앞에서 아공간 같은 걸 보여주지 않나, 흡혈귀가 어쩌고 하질 않나, 늑대인간의 어금니를 주사위 굴리듯 굴리질 않나.
물론 해인 본인도 그리 일반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필요한 녀석이 있으면 주려고 가지고 있던 건데, 어떠냐. 네가 마음에 들면 여기 묵는 값으로 이걸 줄까?”
“전혀, 마음에 안 들어요.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거 필요 없거든요.”
“그래? 그럼 저 녀석은? 몸에서 짐승 냄새가 엄청 나는데.”
생각해보니 필요 없는 물건인지 야호는 은근슬쩍 그 어금니를 해인에게 주고 싶은 눈치였다. 해인은 대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걸로 숙박비를 퉁 칠 마음은 없었으니까. 보답을 하고 싶다면, 좀 더 도움이 되는 걸로 해주길 바랐다.
일부러 과자를 먹이려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아까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됐는데, 야호는 도를 닦는 생물이기 때문에,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그만큼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했다.
‘도라는 것은, 모든 것의 균형에 서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지. 그건 곧 받으면 그만큼 갚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알아듣겠느냐?’
‘으음, 내가 머리가 나쁜 건 아니지만…… 쉽게 좀 말해주면 안 돼요?’
‘누군가를 도우려면 그에 합당하는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는 말이지.’
언뜻 야호도 저를 돕고 싶다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하다는.
‘……예전에 청월을 도와줬던 것처럼요?’
‘맞아. 월은 나를 살려줬지. 난 그래서 월을 도왔고. 그런 은혜가 필요해. 내가 모달을 도와 네 몸을 만든 것도 그만한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야.’
‘사신한테 입은 은혜는 뭐였는데요?’
‘녀석은 나를 저승에 데려가지 않았지. 내가 생과 사의 경계에 있을 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내가 살아나기를 몇 번이나 기다려 줬어.’
해인은 그 얘기를 듣고 한 가지를 꾀를 냈다. 사신이 야호에게 준 은혜만큼은 무리겠지만, 티클 모아 태산이라고 야호에게 이것저것 해줘야겠다고 말이다.
양심에 찔려서라도 조금쯤은 도와줄 수밖에 없을 만큼 신세를 지게 할 작정이었다.
우선은 그 시작으로 맛있는 걸 먹이기로 했다. 뇌물로 먹일 요리는 강이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야호 님은 역시 개코네요. 보통 사람이라면 강한테서 비누 냄새밖에 못 맡을 텐데.”
“정확히는 호랑이 코지. 그것도 칠백 년 묵은.”
“……칠백 살이었어요?”
“사실 칠백 살 뒤로는 안 세어서 정확히는 몰라.”
그래도 자기 나이 정도는 알아둬야 하는 거 아닌가. 보아 하니 늙지 않는 것 같으니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다 싶기는 했다.
“강은…… 아까 말했잖아요? 수의사예요.”
“냄새로 보아 사냥꾼 같은 거냐? 직접 사냥해서 요리한다든가 하는 직업. 피 냄새도 장난 아니게 나는데, 저 녀석.”
“에, 수의사가 뭐냐면…… 음, 동물들의 의사 선생님이죠. 그래서 여러 동물의 냄새가 나는 거예요. 수술을 하고 오는 거라 피 냄새도 조금 날 거고.”
“오오? 세상도 좋아졌네. 언제 그런 게 생겼냐? 저 인간 그렇게 안 봤는데 기특한 인간이지 않냐.”
야호 자신도 동물이라 그런지, 급 시율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해인은 제가 수의사도 아닌데 뿌듯해져서는 콧대를 세웠다.
“에헴! 어때요? 좀 도울 마음이 생겼…….”
“아니, 그건 별개의 문제지.”
“쳇.”
먹이고 입히는 거 말고, 무엇으로 더 은혜를 입게 할 수 있을지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였다.
살아생전 이런 궁리를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
“저기, 야호 님은 한동안 여기에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럼 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따로 없으면 놀이공원 같은 데 데려가 줄까요? 그런 데 못 가봤죠?”
“아, 그거 안다.”
“알아요? 어떻게?”
“여기 책에 나왔는데…… 인간들이 돈을 내고 줄을 서서, 비명을 지르다가 나오는 데라며? 그리고 동물들을 가둬놓고 구경시킨다던데. 난 패스할련다.”
거, 도움이 안 되는 책일세. 맞는 말이긴 하지만…… 한참을 궁리한 회심의 아이디어가 거절당한 해인은 다시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이 호랑이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게 대체 뭐가 있을지 말이다.
“그럼, 아! 같이 월의 무덤 같은 거 찾아볼까요?”
“어디 있는지 아는데.”
“……그, 그럼 후손을 찾아볼래요? 원한다면 어떻게든 찾아볼 테니까…….”
“3대손까지 봤는데? 보릿고개에 굶어 죽을 뻔한 3대째 아이에게 멧돼지를 잡아다 줬었지. 그게 벌써 엊그제 같구나.”
미칠 노릇이었다. 칠백 살 먹은 호랑이는 대체 뭐에 혹하는 걸까. 청월에 대한 이야기랑, 단것에 환장한다는 거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해인이 그렇게 끙끙거리고 있는데, 시율이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그사이에 둘이 꽤 친해진 것 같네.”
반죽을 오븐에 넣고 왔는지 그의 손에는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저에게는 요리를 시켜놓고 둘이 수다만 떨고 있으니 저런 표정인 것도 당연했다.
“우리야 원래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저기, 야호 님? 그거 표현 잘못 쓰셨거든요?”
“앗, 그래? 그럼 뭐라고 해야 하냐.”
“우린…….”
“알겠다! 양아버지는 어때? 내가 널 길러줬잖냐.”
네, 전혀 기억에는 없지만 말이죠.
영혼도 안 들어 있는 텅 빈 몸을 보살펴 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인이 야호를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달리 야호와의 사이를 정의할 단어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말이다.
해인이 고민에 빠진 사이 시율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거…… 헛소리하는 거지? 그렇지?”
“앗, 그럼! 귀담아듣지 마!”
“설마 이 녀석을 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든가…….”
“절대 아냐.”
해인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이런 해괴한 호랑이랑 같이 있기는 해도 자신은 순수한 인간이었다. 고양이랑 사람을 왔다 갔다 하며 변신하기는 해도, 정말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건 시율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사실 중 한 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제 주민등록번호를 불러주고 싶었다.
“왜에? 난 아버지라고 불러줘도 좋은데.”
“……시끄러워요! 헷갈리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너무하네. 낳아준 정만 정인가. 기른 정도 무시하지 말라고.”
“강! 절대 야호 님 말은 신경 쓰지 마. 알겠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하지만, 해인의 그런 바람과 달리, 해인을 구미호 사촌쯤으로 여기는 시율이었다.
그에게 더 이상의 혼란을 가중시켜주고 싶지 않았는데 야호가 지금 그걸 방해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게 자신이 도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라니. 해인은 울고 싶을 뿐이었다.
***
오븐에서 갓 꺼내 온 유자 마들렌과 참깨 쿠키를 야호는 뜨겁지도 않은지 잘도 집어 먹었다. 해인이 하나 집어 먹을 동안 네다섯 개를 먹었으니, 마음에 들긴 한 것 같았다.
당연하겠지만 쿠키는 금세 거덜 났다.
시율이 과자를 주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사이에, 이미 바닥나 있었다.
“만족스럽구먼.”
“그거…… 다행이네요.”
야호에게 밀려 몇 개 못 먹은 해인은 텅 비어버린 그릇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어야 했다.
“굉장하잖아? 방금 만든 과자라는 건.”
“…….”
“따듯하고 행복한 맛이로다.”
그야 혼자 다 먹었으니 어련히 그러시겠지만…….
해인의 불쌍한 모습에 시율은 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기껏 만든 과자가 전부 야호의 입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과자는 마음에 든 거죠?”
“아주 좋아. 양이 조금 부족하지만.”
해인은 그의 무릎을 토닥거리는 걸로 달래고는, 두 손을 싹싹 비볐다. 비굴할지는 몰라도 얻을 건 얻어야겠다.
“야호 님! 그럼 이제……!”
“어디 보자, 보답은 무엇으로 할까나.”
“저기! 저기 난…….”
“점을 봐주지.”
“……네?”
“내가 꽤 신통하거든.”
집어치워, 이 호랑이야! 이번엔 해인도 울컥하고 말았다. 누가 점 같은 걸 봐달라고 잘 보였겠는가.
자신과 시율의 미래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걸 원했다.
“무슨 점을 봐줄까? 금전운? 자녀운?”
“……됐어요, 그런 건.”
“왜? 사양하지 말라고.”
차마 입 밖으로 불만의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시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먹을 걸 해주면, 보답을 해주는 거였어?”
“……응, 야호 님은 받은 만큼만 돌려준다 말이야. 그런데 먹는 거 말고는 통 관심이 없어서…….”
“……그렇군.”
시율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옷을 갈아입었는데, 다시 자신의 방에서 코트를 꺼내 왔다.
“강?”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갑자기 어딜 가는데?”
“아까 케이크랬나. 잔뜩 만들어서 저 녀석한테 배 터지게 먹여주면 되는 거지? 마트에 가서 재료를 사올게.”
그렇지 않아도 내일은 그렇게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오늘 밤에 천천히 설명해서, 어떻게든 그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그는 그런 부가적인 설명이 별로 필요 없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당장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오, 내 배를 터지게 하려면 좀 힘들 텐데.”
“……다녀올게.”
시율이 집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는, 야호도 해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저 인간 머리가 상당히 좋아 보이네.”
“아마도, 우리 둘을 합친 것보다 좋지 않을까요?”
“그건 인정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영특하고 재주 많은 인간인 건 맞아. 뭐, 저런 타입들이 대부분 그렇긴 하지.”
“저런 타입이란 게 뭐예요?”
“단명하는 타입들.”
다 먹은 빈 그릇을 치우며 대충 듣고 있던 해인은, 제 귀를 의심해야 했다. 야호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았다.
해인은 천천히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단명.”
“내가 아는, 단명의 뜻은 하난데. 야호 님이 말하는 건 뭔가 다른 거겠죠? 응? 그런 거죠?”
그럴 거야.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어? 이런 건 말도 안 되잖아. 해인은 돌연 떨려오는 손끝을 주체하지 못했다.
손에 자꾸만 힘이 빠져서, 그릇을 떨어트릴 것만 같았다. 얼른 손에서 그릇을 내려놨지만 불안은 진해졌다.
“네가 아는 건 무슨 뜻인데?”
“빨리…… 죽는 거요.”
“맞아. 나도 그걸 말한 거야.”
순식간이었다. 제가 내뱉은 말에 제가 소름이 돋아서 손발이 저려왔다. 그러고는 곧장 식은땀이 났다.
열이 급격히 오른 것처럼 어지러워지더니, 미친 듯 이번에는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몸은 추웠다가 더웠다가를 삽시간에 반복했다. 이건 제가 죽기 직전과 같은 감각이었다.
그날, 그 뒤흔들리는 차 안에서, 죽음을 예감하며 꼭 이런 감각에 휩싸였었다. 해인은 울 것 같은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런 농담…… 하지 말아요.”
“난 거짓말을 못 하니까 농담도 못 해. 사실만 말할 뿐이야. 저 녀석, 조만간 죽을 위기가 올 거다.”
“……아니야! 말도 안 돼!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왜 나한테 화를 내냐. 인생의 고비란 본래 갑자기 오는 법인걸. 보아 하니 저 인간, 전생에 폭군이거나 장군이어서 많은 살생을 했다. 그래서 단명을 거듭하며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거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거듭 반복해서 귓가에 울리고 있기도 했다. 해인은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무의미하게 생명을 빼앗은 죄는 무겁거든. 생명의 귀함을 모르고 오만했던 인간이기에 죽을 위기를 유난히 자주 겪게 되지. 나약한 동물로 태어나거나, 인간이라면 아주 어려서 죽기를 반복해.”
“……!”
“그러다 보면 저절로 목숨의 귀함을 깨닫게 되는 거지. 이유 있는 단명이란다.”
“아무리 그래도, 싫어요. 그런 건.”
“본래 그런 게 운명이야. 보렴, 그걸 반복한 덕에 이제는 금수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 됐지 않아? 수의사라. 좋은 직업이야.”
인간이 아닌 자와 대화하고 있다는 실감이, 이제야 찾아왔다.
야호는 그냥 점을 한 가지 봐준 것처럼 굴었지만, 해인은 잔인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가 저를 찾기 전에 죽는 경우는, 상상해보지 못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