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고양이와 메모지
“인간들이 우릴 사냥한 이유가 뭐였는 줄 알아?”
“아뇨. 음, 위험해서……?”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단순히 대륙의 황제에게 모피를 진상하기 위해서였어. 그래서 상처를 덜 내고 죽이려 들더라고. 사방에서 소리쳤지. 조심해. 눈을 찔러, 눈을 쏴.”
비슷한 걸 역사 시간에 배운 것도 같았다. 중국의 황제가 호랑이 모피를 공물로 요구해서, 토종 호랑이들이 씨가 말랐었다는 그런 이야기.
상처가 적은 모피를 얻기 위해서 눈이나, 입안, 배를 찔러 죽인다고 했다.
그건 아주 잔인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사실은, 사람들은 지금도 오로지 멋을 위해서 모피를 찾는다는 거였다.
여우 목도리 하나를 위해서 몇 마리의 여우가 죽는지는 대부분 관심 없는 것처럼.
“이상하지? 인간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해 호랑이가 죽어야 하다니. 먹기 위해서도,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모피가 필요한 것도 아니야. 그냥 장식하기 위해서야.”
해인은 자신도 사람인지라, 숙연하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귀를 알아들으니까 말이야, 생각이 트이니까 그런 게 화가 나더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운명이지만, 그때만은 죽어주고 싶지 않았어.”
“……용케 인간을 좋아하네요.”
“그 싸움에서 아주 많이 죽이기도 했지. 날 사냥하려는 인간을 많이 물어뜯었어. 그러다가…… 겨우 도망쳤지. 사냥꾼들에게 쫓기면서, 온몸에 화살을 주렁주렁 달고는 정신없이 달렸어. 많이 뛴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지. 몸이 엉망이었거든.”
해인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과연 인간을 다시 좋아하게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딱 한 번 가출을 했을 때, 저에게 돌은 던졌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이 증오스러웠었다. 작은 고양이의 몸으로 보면 아이들은 거대했고, 위험한 적이었다.
그 뒤로도 꽤나 오래 아이라면 이부터 드러냈었다.
“더는 움직일 수가 없어서 숨을 곳을 찾아 들어갔는데, 곰이 쓰다 버린 동굴 같았어. 지독한 곰 냄새 때문인지, 피를 너무 흘려서 후각이 마비됐는지, 모르고 들어갔는데…… 인간이 있더군.”
“또 사냥꾼이었어요?”
“아니, 인간 여자였어. 뭔가 보따리를 품에 안고는 내가 나타날 줄 몰랐는지 덜덜 떠는 거야. 날 두려워하는데 죽일 필요 없었지. 도망가려니 하고 그 옆에서 기절했어.”
그때부터 태평했구만, 이 양반. 죽을 뻔한 주제에 다시 인간 옆에서 잠들다니. 해인은 야호가 지금 살아 있는 게 대단해 보였다.
장수할 만큼 조심스러운 성미는 절대 아닌 거 같은데 말이다.
“눈을 떴는데, 그 인간 여자가 아직 옆에 있더라고. 내가 눈을 뜨니까 생쥐처럼 웅크리고 졸고 있더군.”
“……똑같네요, 당신이랑.”
“내가 자기를 해칠 거 같지는 않았나 봐. 이미 죽어가고 있기도 했고. 이미 내 눈에 사신의 그림자가 보였거든.”
“설마…… 모달?”
“그래, 그 친구 녀석. 근데 그때는 아직 친구 하기 싫더라고. 그래서 눈앞에 인간이 있기에…… 말을 걸었지. 엄청 놀라는 얼굴이 재미있었는데.”
호랑이가 말하는 걸 본 여자는 어떤 기분이었으려나. 해인이 짐작하기로 아마 아직 꿈인 줄 알았을 것 같았다.
“첫말이 그거였어! 인간, 화살 좀 뽑아다오.”
“……여, 여자한테 그런 걸 시키다니…….”
“나 혼자 뽑을 순 없잖아. 인간으로 변하기에는 체력도 없고, 박혀 있으면 아프단 말이지. 그런데 뽑는 게 더 아프더라.”
“흐히익.”
“그런데 그 여자 정말 뽑아줬다고! 대단하지 않아?”
어디가 웃긴 대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야호는 신나서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해인은 저도 모르게 조금 따라 웃다가…… 슬쩍 안 웃은 척했다.
“그 여자도 도망치는 중이라고 했어. 나랑 같았지. 날 사냥한 사냥꾼들 있잖아? 그 속에 잘은 모르지만 무가 쪽 양반들이 많이 끼어 있었나 봐. 그중 하나의 딸이라더군.”
“어? 양반가 여식이면 그 시기쯤에는 거의 집에서 못 나오지 않아요? 무가라 괜찮나……? 아닌가? 으음, 내가 역사에 정통한 건 아니라…….”
“맞을 거야. 혼기가 차자마자 얼굴도 모르는 남자랑 혼례를 올리게 됐대. 그래서 그 전에 마지막 소원이라며 아버지를 졸라서 사냥터에 따라왔다는 거야. 시집가면 바깥 구경하기가 더 힘들다나. 그래서 밖에 데려가 달라고 단식해가며 졸랐대. 작정하고 도망치려고.”
“……대범하네요.”
무가의 여인이라 그런 건가, 그 여자 제법 강심장 같았다. 가출하는 길에 말하는 호랑이와 만난 게 가장 큰일 같았지만 말이다.
해인은 화살을 뽑아줬다는 그 여자가 바로 야호가 사랑했다는 여자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냥, 말하는 저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알 듯했다.
“그 여자 이름은 청월이었어. 그리고 내 이름을 지어준 여자기도 해.”
“……사랑했다는 게 그 여자죠?”
“맞아. 이때는 아직…… 그냥 은인일 뿐이었지. 나를 도와준 답례로 산 너머 마을에 데려다 주기로 했어.”
“의외로 은혜를 아는군요.”
“의외라니! 얼마나 책임감 넘치는 호랑인데, 내가. 산 너머 마을에 갔더니 그 여자를 찾는 관군들이 쫙 깔린 거야. 알고 보니 그 여자 아버지가 군에서 한가락 하나 보더라고. 결국 또 하나 산을 넘었지. 그런데 거기에서도 여자를 찾고 있었어. 그래도 또 산을 넘고…….”
“그러는 동안 정들었구나……?”
슬쩍 찔러 묻자 부끄러운 얼굴을 하는 험하게 생긴 남자라니.
야호의 인간버전 모습은 절대 순한 인상은 아니었다. 위압감 넘치는 사나운 생김새로, 여지없이 강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래, 그 여자를 등에 태우고 여자가 살 수 있을 만한 마을을 찾는 동안 그 인간여자에게 감정을 배웠지. 웃는 것, 노는 것, 재미난 것, 소중한 것, 미안하다고 말하는 법.”
“좋은 여자네요.”
“그리고 당찼어. 마침내 안전한 마을을 찾았을 때는 어째서인지 헤어지기가 싫은 거야. 산 아래에 여자를 내려주고, 마을로 걸어가는 걸 지켜보는데 기분이…… 너무 슬픈 거야. 형제가 죽었을 때처럼 공허하고, 쓸쓸했지. 이상한 기분이었어.”
“사랑이죠.”
“당시에는 그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몰랐어. 다만 막연히 헤어지기 싫어서…… 함께 있고 싶어서 인간으로 변했지. 처음으로 사람 앞에서.”
“또 놀랐겠네요.”
“뒤집어지던데? 그리고 구박하더니 옷부터 입혀주더라.”
그때부터 노출증이었군!
해인은 집중해서 듣기 위해 부엌에서 비장의 과자를 꺼내 왔다. 커피 맛이 나는 과자였는데, 야호에게도 비닐을 까서 먹는 법을 가르쳐 줬다.
“맛있잖아?”
“강이 해주는 건 더 맛있지만요.”
“직접 만든단 말이야?”
해인은 시율의 왜 저를 먹는 걸로 길들였는지 알 것 같았다. 야호의 저 당장이라도 침 흘릴 것 같은 얼굴을 보니 말이다.
“말 잘 들으면 간단한 과자 정도는 만들어 줄지도 몰라요. 방금 만든 과자는 진짜 맛있는데, 어떻게 설명해줄 수가 없네요.”
“……그, 그래?”
“강은 세상에나! 직접 케이크도 만든다구요. 대단하죠?”
“케크가 뭐냐?”
“……케이크! 우리가 어제부터 먹은 코코아, 초콜릿, 이 과자 다 합친 것보다 맛있는 거죠.”
해인이 일부러 과장되게 자랑했다.
야호가 시율에게 조금은 상냥해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자신이 왜 두 남자 사이에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어야 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런데, 혹시 이 집에 술은 없냐. 술. 옛날이야기를 했더니 술이 그립네.”
“절대 아무 데도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와인 정도는 있지만. 호랑이와 술이라니, 함께 발음하는 것만으로 사고가 나는 느낌이었다. 해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지만 야호는 믿지 않았다.
“거짓말.”
“……먹으면 혼나요! 취해서 진상이라도 부렸다간 우리 둘 다 쫓겨난다고요!”
“나만 먹으마. 난 거의 안 취하거든.”
“놉!”
“이러면 어때? 술을 먹게 해주면 오늘 밤에는 너희를 방해 안 하…….”
“당장 가져오죠.”
***
“앗 바보다! 그때는 남자답게 굴었어야죠! 그 인간 남자랑 꽃구경 가지 마! 하고!”
“푸핫! 그때는 내 마음을 몰랐다니까. 그게 내가 질투하는 건지도 몰랐어.”
“어우! 아까워라.”
“나중에야 알았지. 그게 사랑이라는 걸. 다른 인간 남자가 월을 보고 행동하는 게 나랑 똑같은 거야. 하루 종일 쳐다보고, 나를 향해 손이라도 흔들어 주면 세상에 그것밖에 안 보여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지.”
술과 과자, 호랑이와 고양이는 제법 괜찮은 조합이었다. 잠시간은 절친한 친구라도 된 것 같았다.
“나중에, 월이 인간 남자와 혼례를 치르게 됐을 때는, 이 마을에 데려오지 말걸 하고 후회를 했지.”
“……으음…….”
“바보 같은 일이야. 월이 내게 마음을 표현했을 때는 선을 그어놓고, 스스로 내쳐놓고, 나는 모르는 감정이다, 말하고 도망쳐 놓고는…… 평생에 걸쳐 그걸 후회하다니.”
“몰랐잖아요. 그 감정이 어떤 이름인지.”
“그래, 알았어도 어차피 잘되지 못했을 거다. 무엇보다 난 사람이 아니니까.”
인간을 사랑하게 된 호랑이는, 인간이 인간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사는 걸 멀리서 지켜보는 편을 택했다고 한다.
야호가 줄 수 없는 것들을 주는 건 평범한 인간 남자였으니까.
해인은 그리 동화 같은 결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 현실적이니까.
“나와 마음을 통했다면, 월은 평범한 인생이 아니었겠지. 산속에 숨어 살며, 외롭게 혼자 늙었을 거야. 손자들에게 둘러싸여 죽는 날은 없었을 거야. 월이 인간으로서 평범한 여생을 보내고, 생을 마감한 건 좋은 일이야.”
“……그렇긴 하지만요. 야호가…….”
“나는 괜찮아. 다만 내가 인간이 아니었다는 게 후회스러울 뿐이지. 왜 나는 호랑이로 태어났을까. 처음부터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을…… 월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을 것을.”
“…….”
“왜 월이 그렇게 붉은 뺨을 하고 나를 봤는지,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때의 흔들림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지. 그게 내가 아직도 등천하지 못하고 있는 걸림돌이란다.”
저렇게 인자하게 웃으니까 도를 닦는 신성한 생물이 맞는 것도 같았다. 해인은 자신의 나쁜 습관을 다시 느끼는 중이었다.
속 얘기를 조금 해주면, 도저히 미워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끙…… 야호…… 님은, 이제는 괜찮아요? 자기가 호랑이인 게?”
“호랑이면 어떻고, 인간이면 어떤가. 그렇게 여기는 게 도의 기본이다. 흔들리지 않는 것.”
“……으음. 어렵네요.”
“쉽게 말하자면, 너와 모달을 똑같이 두고 보는 거랄까.”
“여전히 모르겠는데……?”
“돌과 황제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게 도지.”
해인은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득도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술기운에 흥겨운 야호의 설명을 듣자면, 대충 도라는 건 중립을 항상 지키는 것 같았으니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저는 시율만 엮이면 이성을 잃으니 무리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가 내 얘기를 들어줬으니 나도 들어주지. 뭐냐?”
“그, 야호 님은, 나를 도와줄 수 없는 거죠……? 강에게 내 이야기를 해준다든가…… 그런 건.”
“그런 직접적인 건 불가능해. 균형에 맞지 않으니까. 반칙이거든.”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야호는 누구도 도울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균형?”
“도란 그런 거니까. 인과율에 끼어들지 않는 것. 공평할 것. 누구도 편들지 않는 것. 내가 만약 너를 돕는다면, 나는 모달도 도와야 해.”
“그, 사신에게 말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바로 나 자신이 알잖냐. 나는 내가 그릇된 걸 알아버리면 등천할 수 없어지거든. 내가 균형을 잃은 걸 나는 알지. 도란 자신과의 싸움이야. 자신이 자신의 감시자. 나를 매정하게 채점하는 건 바로 나 자신이지. 주술이 걸린 너라면 그게 어떤 건지 알 텐데.”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이 우리 균형의 최선이야.”
“…….”
사신을 도와 해인의 몸을 만들고, 해인을 위해 해인의 비밀은 지켜주는 것. 야호는 그 이상은 해줄 수 없는 듯했다.
그게 도이기에. 그걸 깨트리면 자신이 등천할 수 없단다.
해인은 알아들을 듯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에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야호는 도와줄 수 없는 게 미안한지 조금 작아진 목소리였다.
“음, 쉽게 말하자면…… 네 이야기를 네 연인에게 전해달라는 건, 너의 욕심이잖냐. 내가 그걸 채워주면 사욕을 거드는 게 되는 거지. 그래서 난 널 도울 수 없단다.”
“……저기, 그럼! 그냥 내가 궁금한 걸 대답해주는 건요?”
“어떤 거냐에 따라 다르겠지.”
“사신이, 내가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면 고양이로 살았던 기억을 지운다고 했어요.”
“그럴 테지?”
“……그럼요. 지워지면…… 다신 되살아나지 않아요? 만약 강을 길에서 봐도, 못 알아봐요? 강이 나를 알아보고 나를 불러도, 나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해요? 본 것 같은 느낌이라도…… 받을 수 없어요?”
이것도 답을 얻을 수 없는 걸까? 내내 궁금했는데 어디에서도 알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지워진다는 건 어떤 걸까?
두려움이 가득 섞인 물음에 야호는 말이 없었다. 해인으로서는 두려워질 만큼 오래. 실제로는 고작 몇 초였겠지만 말이다.
야호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는 펜과 메모지를 가져왔다.
“이 정돈 알려주지. 넌 이것 역시 잊을 테지만.”
“메모지?”
“봐라.”
검정색 흔한 펜이었는데, 야호는 그것으로 메모지 위를 쭉 내리그었다. 그러고는 선을 그은 맨 위 메모지를 떼어냈다.
팔랑, 흔들어 보이는 메모지는 볼수록 얇은 종잇장이었다.
“영혼은, 뇌와 같아.”
“……?”
“사실은 모든 걸 기억하지. 글씨를 지워도 펜에 파인 흔적은 남는 것처럼. 한 장을 걷어내도 그 아래 지나간 기억이 남는 것처럼.”
야호는 해인이 손을 가져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메모장 위를 만지게 했다. 바로 위에 있던 종이에 야호가 선을 그었던 흔적이 거기 그대로 남아 있었다.
미약한 자국으로.
“네가 기뻐할 만한 걸 이야기해주마.”
“뭔데요?”
“인간들의 펜은 잉크가 가득해. 자신이 쓴 것을 아래에 아래까지 배어 나오게 새기지. 그래서 그럴까, 간혹 전생을 기억할 정도야.”
그래, 그런 이야기를 분명 어디선가 들어봤다.
해인은 희망을 품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라면 자신도 무언가를 떠올 수 있지 않을까?
기쁜 느낌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위에 뭔가 그어졌던 파임만 겨우 남은 종이를 몇 번이나 더듬어 만졌다.
“이걸 떼어내 버려도, 분명 파인 자국이 남아 있지.”
떼어낸 맨 위 장을 휴지통에 버리며 야호는 해인에게 가까이 속삭였다. 언뜻 상냥하게 느껴졌다.
“그 자리에 다시 색을 채우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정말이죠?”
“그럼, 색도 없는 그 흔적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런 상태에서 말이지.”
“앗.”
야호는 메모장을 다시 가져가더니, 하나하나 떼어내 해인의 눈앞으로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눈앞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메모지 조각은 순식간에 수십 장이 됐다.
해인은 잠시간 허망함에 굳어 있다가, 허겁지겁 파임이 남은 종이를 찾으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찾기에는 그건 아무런 색도 없어서…….
“이런 거다.”
“…….”
“사신이 기억을 지운다는 건 말이지. 녀석들은 지우는 데 있어서 전문가야. 허술한 최면 같은 것과는 달라.”
찾을 수 없을 리 없다. 찾을 수 있을 거다. 해인은 멍하게 있다가 제 앞에 잔뜩 떨어진 메모지를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 있잖아요. 있는데…… 그냥, 빨리 못 찾는 거잖아요. 그쵸?”
“……요는 잉크지.”
“잉크?”
“어떤 잉크냐. 그리고 잉크는 감정이지. 네가 아래에까지 배어 나올 만큼 제대로 쓴다면, 떠올릴 수도 있을 거다.”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야호의 표정도 그랬다.
메모지를 전부 주워 든 해인도 그랬다.
남은 시간은 너무나 적었고, 아직 아무런 방법도 찾지 못했다. 그에게 기대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유일한 희망이라면, 나는 강시율 말고는 이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를 더 사랑해서. 그가 제 안에 더 깊게 파이길 바라야겠다. 누군가를 이보다 더 사랑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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