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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101화 (101/114)

101화. 고양이의 친구 호랑이

늦은 아침, 현관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시율이었다.

“……잘 다녀와! 강!”

해인이 애써 밝게 출근 인사를 건넸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여전히 저기압이었다.

우선 그 이유는 첫째로, 어젯밤에 해인을 끌어안고 잠들지 못해서 욕구불만이 극에 달했고.

둘째로는…….

“여어, 돈 벌러 가나 봐? 보기 좋네.”

“…….”

“그럼 수고해.”

새끼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는 남의 집 거실을 편하게 어슬렁거리는 저 정체불명의 불청객 때문이었다.

집안의 웃어른이라도 되는 양 말하며 지나가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가 울컥한 걸 알았는지 해인이 다급하게 중재에 나섰다.

“나쁜 뜻은 없을 거야! 참아, 응?”

“……아오!”

“저 양반 아무 생각 없어. 정말이야!”

솔직한 시율의 심경으로야 저 뻔뻔한 털북숭이를 당장 집 밖에 내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해인이 이렇게 어려워하는 걸로 보아 막 대할 상대는 아닌 것 같아 참아주고 있을 뿐이었다.

모종의 친분이 있긴 한 것 같으니, 해인의 체면을 생각해서 참는 거였다.

이 순간에도 참을 인 자를 백 번쯤 곱씹으며 말이다.

‘참자…… 참아.’

문제는 하루 만에 그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점이었다.

시율은 자신이 이렇게 참을성 없는 인간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보란 듯 방과 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집 구경이 한창인 야호가 극도로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만 해도 해인의 방 구경을 끝마쳤는지 거실을 가로질러 느긋하게 베란다로 향하고 있었다.

시율은 그 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이를 갈며 말했다.

“……이따가 퇴근하면서 병원에서 애견방석을 하나 가져올 테니까.”

“으응?”

“거기서 자게 해. 오늘 밤에는 어림없어. 침대는, 안 돼.”

“우리 말을 들을까?”

“그게 아니면 화장실에 가둬 버릴 거야.”

시율의 말에서는 격렬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해인이 제 가슴팍에 안겨 있는 만족감 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게 아주 끔찍하게 여겨졌다.

만약 내일도 그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인내심에 가치를 두지 않으리라.

매사 시니컬한 그를 사나워지게 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그가 해인과 함께 있는 걸 방해하면 됐다.

“서, 설득해볼게!”

이 순간 해인의 어깨를 말아 쥔 시율의 손힘이 전에 없이 강력했다. 해인은 사태의 심각함을 느끼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신은 없었지만.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말이지. 남의 집에 얹혀 지내려면 최소한의 염치는 있어야 될 거 아냐! 염치가.”

“그래, 맞아! 염치가!”

시율이 으르렁댔고, 해인도 한술 거들었다.

일부러 야호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지만 정작 야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번엔 거실을 가로질러 옷방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총총거리는 가벼운 발걸음조차 얄미웠다.

저런 뻔뻔한 생물을 맹해 빠진 해인이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는 시율도 기대하지 않았다.

둘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옷방으로 사라지는 야호의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다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일단 다녀올게.”

이미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호랑이와 해인 단둘을 두고 출근하려니 오만 생각이 다 들어서 시율은 좀처럼 집을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저 호랑이를 믿어도 되는 건지. 혹시 위험한 건 아닌지.

해인의 정체도 모르는 와중에 저 호랑이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동족이라고 치부하자니 한쪽은 호랑이고 한쪽은 고양이였다.

야호의 등장으로 해인의 정체는 더 미궁에 빠진 상태였다. 시율의 고뇌는 더욱 깊어진 것이다.

“잘 다녀와! 그런데 인간, 나 네 옷 좀 입어도 될까?”

“……허.”

시율이 겨우 마음을 다잡고 현관을 빠져나려던 순간이었다. 옷방에서 웬 건장한 덩치의 남자가 얼굴을 쏙 하니 내민 것은 말이다.

무슨 마술공연도 아닌데, 호랑이가 들어가고 사람이 나왔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해인이 기겁하며 야호를 다시 옷방으로 밀어 넣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게 그거라는 것쯤은 말이다.

***

차라리 침착한 건 시율 쪽이었다.

“으악! 왜 변신을 하고 그래요! 미쳤나 봐?!”

“응? 아아, 걱정 마. 여기까지는 괜찮으니까.”

“……그놈의 비밀은 기준이 뭐예요, 대체!”

“어차피 저 남자, 네가 변신하는 것도 알잖아? 세이프야, 세이프. 그러니까, 옷 좀 빌려주라.”

일단 저 뻔뻔한 남자의 하얀 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군데군데 어두운 갈색 브릿지가 들어간 화려한 머리였으니까.

분명 동양인의 것은 아닌 금색과 은색이 오묘하게 뒤섞인 눈동자도 만만치 않게 특이했다.

맹수의 눈매를 닮은, 유난히 또렷한 아이라인은 인정하기 싫지만 강인해 보였다.

“그냥 지금 그거 입어요! 왜 강 옷을 달라고 하고 그래요?”

“모처럼 휴가니까 현대인 옷을 입고 싶단 말이야.”

“캭! 대충 입어요!”

“빌려줘. 뭐, 어때.”

예의 그 새끼 호랑이 모습과는 상반되게도, 사람일 때의 야호는 시율보다도 훨씬 건장한 체격이었다.

뭔가 낡은 도포 위에 거적때기 같은 걸 걸치고 나왔지만, 헐렁한 옷차림인데도 알 수 있었다. 남자치고도 매우 커다란 덩치라는 걸 말이다.

해인에 비하면 두 배는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야호는 서슴없이 해인을 만지고 있었다. 어깨나, 손, 머리 정도였지만, 시율은 그것도 용납하기가 힘들었다.

그래, 수컷이라고 하긴 했었다. 저렇게 젊은 얼굴일 줄은 몰랐지만. 그는 나가려던 걸 그만두고 삐딱한 자세로 서서 빈정거렸다.

“……보아하니 굉장한 손님 대접을 바라는 모양인데.”

투닥대던 야호와 해인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시율이 언제 터지려나 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인 모양이다.

어젠 그래도 초면이라고 존댓말을 써주는가 싶었는데 이제는 흔적도 없었다.

해인은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내저었지만 남자 둘이 싸우면 말릴 재간은 없었다. 호랑이 싸움에 고양이가 끼어들 순 없지 않은가.

“왜? 그럼 안 되나?”

“그러려면 좀 더 예의가 있어야 되거든.”

“그런 건 너희들이 나를 얼마나 성의껏 모시는가를 봐서 결정할 거다만.”

“하!”

손님 대접 정도가 아니라 지극정성으로 모셔야 되는 건가. 시율이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고, 야호도 만만치 않게 싱글거리며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이 여자라면 알걸. 너희가 내게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

“난 그 비밀을 지켜주고 있거든.”

시율이 울컥하든 말든, 해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든, 결국 승자는 야호일 수밖에 없었다.

시율은 신발을 신은 채로 거실로 올라섰다.

그대로 성큼성큼 이를 갈며 야호에게 걸어갔다.

해인은 설마하니 그가 무턱대고 주먹질 같은 걸 하지는 않기만을 바랐다. 야호와 싸워서 시율이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야호는 지금, 배부른 맹수처럼 놀고 있을 뿐이었다. 먹지도 않을 사냥감을 잡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았다.

애꿎게 화나게 해서는 안 됐다.

동물의 본능 같은 걸까. 그게 해인을 너무도 불안하게 했다. 야호를 두려워하게 했다. 싸워서는 안 되고, 굴복하는 것만 생각하게 했다.

“……옷 같은 건 마음대로 입어도 되는데.”

“그거 고마운 이야기네.”

으르렁대며 다가온 시율이 한 일은, 언제부턴가 해인의 어깨에 있던 야호의 손을 떼어내는 일이었다.

그게 다였다.

“남의 여자라는 걸 알면, 만지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아, 그러지, 뭐.”

“다시는 말이야.”

“봐서.”

해인은 순간, 두 남자가 알 만큼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싸움이 날까 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율은 여전히 야호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고 있었지만, 때릴 것 같지는 않았다.

“……초콜릿이든 뭐든 박스로 사줄 테니까, 만지지 말라고.”

“그래! 안 만질게.”

그리고 너무 흔쾌히 조련되는 야호였다.

이 순간 시율이 야호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맹수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같은 걸 느껴서는 아니었다.

중간에 낀 해인이 너무나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지금만 해도 슬쩍 두 남자의 눈치를 보더니 곧장 시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곤 야호의 눈치를 보며 시율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문 쪽으로 슬금슬금 떠밀고 있었다. 둘 사이를 떨어트리려고 하는 게 너무 뻔히 보였다.

설마 제 남자를 때리기라도 할까 봐 노려보는 눈이 겁에 질린 것치고 제법 매서웠다.

“하하, 우리 안 싸울 거야. 뭐, 그리 겁을 내.”

야호의 눈에 그건 그냥 재롱 수준으로 보였지만 말이다. 털을 세운 고양이 정도일까.

“……옷 같은 거 때문에 싸우면 당연히 안 되죠!”

“왜? 중요하지, 옷은.”

“호랑이면서 무슨 옷을 챙겨요? 그리고 보니까 변신하면서 만들 수 있는 거 같더만!”

“아, 이거? 이건 환술이야. 나 사실 발가벗고 있어.”

그 순간에는, 시율도 해인의 어깨를 붙잡고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설마 변태였을 줄이야.

둘은 얼른 야호에게서 멀어졌다.

해인은 못 볼 건 본 것처럼 끔찍하다는 얼굴이었다.

“얼른 아무거나 입어버려요!”

***

야호가 끔찍한 패션을 선보이며 방에서 나왔지만 둘은 그쪽은 쳐다도 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시율은 이미 지각 확정이었다.

차마 저 변태 같은 호랑이와 해인 단둘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같이 출근하자.”

“그치만, 야호…… 님이.”

“님은 무슨. 버려.”

해인은 야호를 혼자 두는 게 너무나 불안했다.

저도 한 사고뭉치 했지만, 저 호랑이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코코아를 먹겠다고 부엌을 건드리다가 집에 불이라도 내면 어쩌지 싶었다.

뭘 하지 말라고 해도 전혀 귀담아듣질 않으니 혼자 둘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 시율이 너무 간절한 얼굴이라, 고민이 되기는 했다.

“그럼…….”

“안 돼. 나랑 놀아줘야 되거든.”

역시 연인 사이에 도움이 될 리 없는 야호였지만 말이다.

해인과 시율은 마치 비련의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헤어짐을 슬퍼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오후에 수술 잡힌 것만 끝마치고 바로 돌아올게.”

“응!”

“조금만 참고 있어.”

봐주기 힘든 닭살 커플이었다. 야호는 제가 악역이라도 된 느낌에 투덜대며 덧붙였다.

“어휴, 눈꼴시어.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떼어놓는 줄 알겠네.”

맞거든요!

해인은 속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

“아까 네 애인, 날 보는데 살기가 느껴지더라. 제법이야, 제법.”

남의 거실을 점거하고 앉아서는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는 야호였다. 해인은 뚱한 볼을 하고는 야호를 못마땅하게 노려봤다.

하루 만에 이렇게 싫어지기도 힘들 텐데…….

“……그럼 예뻐하길 바랐어요?”

“내가 어때서? 얼마나 귀여운데, 이 몸이.”

“세상에,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맞잖아? 내 유아기는 엄청 사랑스럽다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커플 사이에 끼어서 자려고 들었잖아요! 아니! 잤잖아, 기어코!”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해인은 참지 못하고 빽! 하니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씩씩대며 연달아 소리쳤다.

“그리고! 무슨 신선이 인간 품을 그리워해요! 말도 안 돼, 정말! 오늘 밤은 절대 같이 안 잘 거예요!”

“에이, 치사하구만.”

“절대! 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하다못해 혼자 자요!”

“하지만 난 인간들 살 냄새가 좋은걸.”

“……힉?”

누가 육식 동물 아니랄까 봐. 설마 강의 몸을 노리고……! 해인이 소름 돋는다는 얼굴을 하자 야호가 얼른 부정했다.

“아니아니. 이봐, 오해하지 말라고. 식욕이 돋는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좋아해. 난 인간이랑 살았었거든.”

“……호랑이가요?”

“그렇다니까. 고마워하라고. 인간에게 호의적인 신선은 별로 없으니까.”

“으음……?”

“내가 네 육체의 성장을 도와준 것도 그래서고. 나 아니면 그런 거 해줄 신선은 없을걸?”

그러고 보니 이 호랑이, 만들고 있다던 몸은 어떻게 하고 여기에 와 있는 걸까. 심지어 휴가라고 했는데.

해인은 이제야 슬슬 제 몸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야호가 나타난 뒤로 너무 정신이 없었던 나머지 정작 제 몸은 뒷전이었던 것이다.

“그거야 고마운데…… 내 몸은 그럼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예요? 누가 돌봐요?”

“아, 내 은신처에 있지. 산의 수호신들이 대대로 차지하는 동굴인데, 지금은 백로가 지키고 있어. 내 후임이거든.”

“백두산…… 이랬죠?”

“맞아. 동굴 안에는 산의 정기가 고이는 연못이 있거든. 그 너머는 선계와 이어지기도 하지. 네 몸은 그 안에서 안전하게 어른이 될 거야. 그리고 완성되면 이전의 네 몸보다 말끔할걸? 노폐물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방금 환골탈태한 것처럼 뽀송뽀송한 몸이니까.”

그간의 고생을 생각하면 그리 이득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야호는 꽤나 뿌듯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는 안정기라 연못 안에 걸쳐만 두면 되는 거니까 난 놀러 나왔지.”

“……놀러…….”

“인간들 구경이 하고 싶어져서 말이지.”

“정말 인간들이랑 살았어요? 호랑인데?”

눈치가 엄청 없어서 그렇지, 야호는 정말 인간을 좋아하는 거 같았다. 저 들뜬 얼굴을 보면 말이다. 해인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랑이가 인간이랑 함께 살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서커스? 동물원?

“정말이야. 난 예전에 몇십 년 정도 인간들 틈에서 산 적이 있어.”

“지금 나처럼요?”

“오, 그래, 조금 비슷할지도. 나도 인간을 사랑했거든.”

“에…….”

“내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그 손을 붙잡고 그 마음을 알 수 있으면, 사랑할 수 있지. 너라면 이해하지?”

물론, 이해했다.

분명 우리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세상에 당당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어쩔 수 없이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말이다.

그와 자신의 마음이 같다면,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결국 잘 안됐지만.”

그래서 커플을 방해하나! 해인은 여전히 야호가 조금 얄미웠지만, 야호가 했다는 사랑 이야기는 궁금해졌다. 저런 얼굴을 하니까 말이다.

“그…… 어쩌다가요?”

“너는 그래도 본래 인간이지만, 나는 본래 호랑이니까 그런 거지.”

“좀 들려주면 안 돼요?”

“음? 그런 얘기가 듣고 싶어?”

“……이야기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그냥,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잘 안됐다니까…… 무슨 이유였는지…… 궁금해서요.”

“의외네. 백로랑 다른 녀석들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그만 듣고 싶어 하던데. 뭐, 내가 몇백 년을 떠들긴 했으니까.”

그렇다는 건 무려 몇백 년 전 이야기라는 걸까. 그럼 서커스는 아니겠다 싶었다.

“나, 이 이야기를 인간에게 하는 건 처음이야.”

“나도 노출증 호랑이의 연애담을 듣기는 처음이에요.”

“노출증이라니. 태초의 모습이라고.”

“네네.”

“이런, 오랜만에 이야기하려니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네. 난 본래 평범한 호랑이였어.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됐고, 하늘을 알게 됐지. 배가 고프지 않은 이상, 사냥하지 않았어. 생명을 알게 됐지.”

야호가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고, 해인은 이야기가 좀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시율이 올 때까지 무사히 버틸 테니까.

둘이 앉아서 이야기만 했다고 하면 시율도 안심할 테고 말이다.

“인간으로 변할 수 있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지. 나라에 대대적으로 호랑이 사냥이 시작됐어. 그리고 난, 그때 죽을 뻔했지. 모달 녀석을 만난 것도 그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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