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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96화 (96/114)

96화. 고양이가 믿는 사람

해인은 신사의 문 앞에서 도망쳐서는 내내 울어야 했다.

차 안에서도, 숙소로 돌아와서도 참담한 기분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자신이 이런 몸으로 그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미안해졌다. 생각해보니 그와 자신이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고를 떠나서, 자신은 부정한 것이었다.

그걸 깨닫자 엉망으로 눈물이 흘렀다.

시율은 그런 해인을 보며 어쩔 몰라 했다.

울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문을 지날 수 없다고 고개를 내저으며 뒤돌아서던 해인의 얼굴이 뭐가 문제였는지를 그로 하여금 깨닫게 했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이 속상한지 알 것 같았고.

자신이 그걸 깨닫게 했다는 사실에 해인이 울수록 그도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마, 그만 울라고 입 밖으로 소리 낼 수 없었다. 자신이 아프게 한 것과 진배없었으니까.

“미안해, 강.”

“……아냐, 내가 미안해.”

울면서 품에 파고드는 게 마치 여리고 어린 짐승 같았다.

저를 힘들게 한 품에 매달리며, 원망하는 대신 사과하는 해인의 등을 그는 수없이 토닥여줬다.

다독여주고 다독여주고. 밤새 그렇게 쓰다듬어 줬다.

해인이 겨우 울음을 그친 건 새벽 무렵이었다. 울다가 지쳤는지 잠들어 버린 걸 보며 시율은 뼈저리게 자책했다.

‘괜한 짓을 했어.’

그로선 해인이 마녀든 선녀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럴 것 같았다면 자신의 양기를 가져간다는 걸 알았을 때 이런 관계는 그만뒀을 거다.

해인으로 인해 어지러워지거나, 잇따른 현기증에 숨 막힘을 느껴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오늘 네가 부정한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음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나는 평생을 너와 바라만 보고 살아도 좋다고 고백하면 될까.’

하지만 그걸 말해봐야 슬프게 할 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 현실이 떠나는 날을 재촉할 것 같았다.

잠든 이마를 쓰다듬다가 입술을 맞추면서 그는, 계획을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

해인은 간밤에 울다 잠든 적 없다는 듯, 유난히 방긋대며 료칸에서 주는 유카타를 입고는 뱅글뱅글 제자리에서 돌아 보였다.

“나 유카타 처음 입어봐.”

“……어울리네.”

“강도.”

시율은 키가 너무 커서, 아담한 일본 사람 체격에 맞춘 유카타가 작아 보였다. 복도에서 봤던 몇몇 외국인들처럼 발목이 훌쩍 많이 보였다.

해인은 오늘따라 아침부터 유난히 잘 웃었다.

작은 것에도 호들갑을 떨며 기분 좋을 척하는 이유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어제 일을 말하기 싫은 거였다.

“한번 입어보고 싶었어.”

“입고 나가려고?”

“아니, 그냥 궁금해서 입어본 거야. 해변에는 강이 사준 코트를 입고 갈래.”

오늘의 일정은 근처의 바다에 가는 것이었다.

하와이처럼 꾸며져 있는 인공 해변이 있다는데, 그곳에 들렀다가 저녁에는 커다란 쇼핑센터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바로 내일이 크리스마스였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즐거워야 맞는 날이었다.

“해변 구경하는 것도 좋고, 쇼핑센터도 좋아! 그리고 크리스마스니까, 눈이 왔으면 좋겠다. 그치?”

해인은 평소보다 더 정신 사납게 방방거렸고, 그걸 지켜보는 시율의 속은 꽤나 쓰렸다.

***

해변은 생각 보다 한적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사람이 적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실망스러울 만큼 볼거리가 없었다.

탁 트인 곳이라 바람이 엄청 강하다는 게 유일한 감상일까.

“이런 느낌이구나.”

“뭐, 예상은 했지만.”

“후후, 하지만 난 실망하지 않지! 이쪽에 온 이유는 그거라며! 나 강이 준 ‘즐거운 출국 준비’ 복습했어.”

앞쪽은 공부거리고, 뒤쪽은 여행일정인 예의 그 리포트는 두꺼웠지만 그 내용은 버릴 곳 없이 알찼다.

아무렴 천하의 강시율이 손수 만든 것이었으니까.

“오, 기특한데?”

“엄청 유명한 어묵탕집!”

“맞아. 세계 일주를 하다가 이 근방에 자리 잡은 한국인이 있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올린 포스팅에 의하면…… 세계 최고로 맛있는 어묵탕이래.”

“……나 침 흘리고 있어?”

“음, 조금 흘리는 것 같은데.”

시율은 해인의 과장된 장단에 맞춰 입가를 문질러 주는 시늉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입술을 만지다가……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덧대고는 그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닭살 커플답게 말이다.

“으아.”

해인은 그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조금 움찔댔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해변에는 둘밖에 없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잠시간 그가 주는 따듯함을 즐겼다.

키스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새 해인은 그의 코트 안으로 끌려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입맞춤 끝에는 그와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해인은 말없이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화답하듯 생글거리며 웃어 보였다.

“응?”

“……그냥.”

“강, 무슨 생각 해?”

“어떻게 해야 네가 기뻐할까, 그 생각.”

“지금도 충분히 기쁜걸. 더 기쁠 수 있을까?”

그가 저를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한다는 것만으로, 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해인은 그의 허리를 마주 끌어안으며 만족스러운 숨소리를 흘렸다.

“……어묵,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 맞지?”

그가 확인하듯 물어서, 해인은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동백꽃, 어묵, 겨우 그런 것들이지만 그가 자신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발꿈치를 들고 그의 입술을 쫓았다.

이 모든 시간들이 조금만 더 길기를.

그렇게 바랐다.

***

과연 듣던 대로, 일본의 크리스마스는 아주 호사스러웠다. 연중 가장 큰 행사로 치부한다더니 온갖 화려한 디스플레이가 다 총출동한 느낌이었다.

그 예로, 쇼핑센터 광장에 놓인 트리는 해인이 난생 본 적 없을 만큼 커다랬다.

그건 사람이 아주 작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높아서, 5층짜리 쇼핑센터 천장까지 솟아 있었다.

이곳의 트리가 외국에도 유명한 건 이 장대함 때문인가 보다.

해인은 잠시 넋을 놓고, 트리에 매달린 수백 가지의 반짝이는 오브젝트들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저걸 다 어떻게 달았을까?

“우리도 저거 해볼까.”

“응? 뭔데?”

“분위기로 봐서는, 소원을 적어서 매달라는 것 같은데.”

해인은 조금 늦게 시율이 뭘 가리키는지 깨달았다.

트리 옆에서는 산타 의상을 입은 젊은 남녀가 별 모양으로 자른 노란 종이를 수북하게 쌓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저 트리에 매달아 주는 건가 봐.”

“좋긴 한데. 우린 한구…….”

“뭐, 관광객은 하지 말라는 법 있겠어?”

본래는 우린 한국 ‘사람’인데, 해도 될까, 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놈의 몸은 차단 기능이 아주 뛰어나서 도중에 말이 끊겼지만.

“적을래.”

아무리 그래도, 소원을 적는 것까지는 막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북적대는 인파를 헤치고 나서야 겨우겨우 도톰한 별 모양 종이와 펜을 받을 수 있었다. 해인은 제 소원을 적는 데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다시 만나서, 그와 행복하기를.]

사실, ‘그를 떠올릴 수 있기를’이라고 적고 싶었지만 이 몸뚱이로는 이게 한계였다. 참 슬픈 일이었다. 이별은 말할 수 있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말할 수 없다니.

해인은 내심 한숨을 쉬었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강은 뭐라고 적었어?”

“소원 적은 건 보여주는 거 아니래.”

“에잉?”

“그래야 이뤄진대.”

하지만 이미 봐버렸는걸.

해인의 동체시력은 거의 맹금류급이었고, 그가 펜이 마르라고 종이를 팔랑거리는 찰나의 순간만으로도 그가 적은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다신 울리지 않기.]

강, 아무래도 그 소원은 이뤄지지 않을 건가 봐. 해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제 것은 소중하게 숨겼다.

“그럼, 내 건 안 보여줄래.”

“좋을 대로.”

제 눈물은 오로지 제 탓이었다. 오로지 제가 마음이 약해서 흘리는 눈물이었으니까.

사실 그를 만나기 이전의 해인은 굉장히 눈물이 없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감정표현에 인색해서 남 앞에서는 쌀쌀맞은 인간으로 보였다.

말수도 적고 새침했다. 하지만 그건 도도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인간관계를 어려워해서였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상처받지도, 즐겁지도 않은 나날이었다. 당연히 혼자서는 울 일도 없었다.

눈물을 흘린 건 외로움을 알고 나서였다.

자신만큼 소중한 누군가가 생긴 다음이었다.

사랑을 하게 된 다음이었다.

‘사랑이란 이상해.’

내가 나로 있지 않게 해. 나보다는 그의 나로 있게 해. 내가 더는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되어서, 스스로가 낯설어져.

해인이 씁쓸하게 웃으며 별 모양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그가 보지 못하게 소원을 적은 종이를 얼른 통 안에 넣었다.

“으엄마아아! 으아앙!”

“……응?”

“왜 그래?”

그는 해인이 뭔가 들은 것 같은 얼굴을 하자 불안해했다. 또 어디로 뛰어갈 것 같은지 슬쩍 팔목을 붙든 것이다.

“강은…… 안 들리지?”

“뭘 말하는 거야? 캐럴송은 들리는데.”

“저쪽에서 한국말이 들리는데…….”

“여긴 한국 사람이 많이 오는 관광지니까 당연하지.”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가 우는 소리는 좀 듣기 힘들잖아? 그것도 미아로 추정되는…….

사방에서 웅성대는 일본어 사이로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참견을 하면 시율은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알아서 해인은 망설이느라 그 자리에서 잠시 주춤거렸다.

시율이 등을 밀어준 건 얼마 가지 않아서였다.

물론 해인의 손목을 꼭 잡은 채였다.

“뭐가 또 참견하고 싶어서 그래? 가봐.”

“……가도 돼?”

“네가 하고 싶은 건 해야지.”

이 남자 이제 해탈한 건지, 해인에게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해인이 기뻐하는 건 맞았다.

울음소리가 나는 쪽을 가리키며 해인은 얼른 걸음을 옮겼다.

“저기 여자애가 우는데, 엄마를 잃어버렸나 봐. 그런데 한국 아이 같아.”

“……얌마. 그런 건 빨리 말해.”

***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울음소리를 따라가니,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어린아이가 있었다.

가족끼리 놀러 왔는지 상당히 귀엽게 차려입고는, 머리에 귀여운 토끼 머리띠를 하고는 엉엉 울고 있었다.

“흐엉흐헝.”

“母を失ってしまったの?”(엄마를 잃어버렸니?)

“ちび。 姉さんと一緒に行こうか。”(꼬마야. 언니랑 같이 갈까.)

“으아앙! 시러! 오지 마!”

분명 친절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아이는 누가 저에게 손만 대도 경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손을 잡아끌려고 해도 울고 떨었고, 달래려고 해도 울었다.

엄마를 잃어버린 것도 놀랄 일인데, 주변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자지러져서 죽어라 울며 제 힘에 겨워 딸꾹댔다.

해인은 시율이 일본에 오기 전에 저에게 읊어줬던 미아수칙을 떠올렸다. 그 자리에서 가만히 저를 기다리라고 했다. 누구도 따라가지 말고.

외국에서 잃어버리면 답이 없다며, 그런 걸 신신당부했었다.

저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는 지금쯤 어쩌고 있을까.

“역시 한국애네.”

“응.”

“……나도 미아가 된 적이 있어.”

해인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억도 안 날 만큼 어렸을 때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조만간 또 미아가 될 것 같았다.

또 기억에 안 날 것 같았고.

그땐 그의 미아 수칙이 소용없을 것 같았다.

해인은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아이에게 다가갔다. 우는 아이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조심스레 인사부터 건넸다.

“안녕.”

“……흐윽?”

“엄마…… 잃어버렸니?”

꽤나 긴장이 됐다. 해인에게도 아이는 쉬운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아이와 친해본 적도 없었고, 본래는 아이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고양이가 된 뒤로는 싫어하는 쪽에 가까워졌다.

아이가 저를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해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이는 해인이 한국말로 말을 걸자마자 도도도 달려와서는 해인의 다리에 꼭 하니 달라붙었다.

“언니, 도와주세요! 엄마가 없어졌어요. 히잉!”

“……네가 없어진 거겠지.”

아이는 미아 수칙을 알긴 아는지. 말이 통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냉큼 도움을 요청했다. 시율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해인은 작게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미아의 마음은 미아가 안다고, 저라도 아이를 달래주자 싶었다. 그가 제게 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이름을 물어봤다.

그리고 때마침 미아 방송이 흘러나왔다. 해인보다는 시율이 먼저 알아들었고 말이다.

“지금 나오는 이 방송, 일본어긴 한데 한국에서 온 아이를 찾는다고 하는 거 같은데.”

“아, 다행이다. 어디로 오래?”

“그것까진 못 알아듣겠고…… 아마 안내센터겠지.”

“그럼 가보자. 강이 얘 좀 안아줘.”

크리스마스이브의 쇼핑센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이가 걷기 힘들어 보였다. 이러니 엄마를 잃어버리고도 남았다.

해인의 요청에 시율은 떨떠름한 얼굴이 됐다.

그도 썩 어린아이와 친한 인생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내참.”

“……언니야. 이 오빠 무서워.”

아이는 여자인 해인만 조금 편한 눈치였다. 해인의 코트 자락에 매달리며 칭얼거렸던 것이다.

“괜찮아. 좋은 오빠야.”

“음…… 언니랑 사귀는 오빠야?”

“맞아.”

“……정말 괜찮아?”

“그럼.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오빠야.”

아이는 해인이 달래자 그제야 마지못해 꾸물꾸물 시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사이 해인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진 시율은 아이를 한 팔로 높이 안고는, 다른 손으로는 해인의 손을 붙잡았다.

그 모습이 얼핏 가족 같았다.

꼭 잡은 두 사람의 손이라거나, 서로를 웃으며 바라보는 눈길이라거나, 그런 모든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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