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 키스-91화 (91/114)

91화. 고양이와 여행 가는 길

“출발!”

“예이!”

집을 나설 때는 새벽이었다.

겨울이라 아직 밤이나 다름없는 어둑한 하늘을 보며 둘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신나서는 누구랄 것 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걷는 걸음걸이가 벌써부터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누가 보면 여행 처음 가는 사람들인 줄 알겠다. 물론, 둘이 가는 건 처음이었지만.

이렇게 기대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잊은 거 없겠지? 있어도 중간에 못 돌아와. 배 시간이 있으니까.”

“나 챙기면 다 챙긴 거지, 뭐!”

“……너만 가면 되는 거냐.”

“당연하지!”

설마하니 잊은 게 없기를 바라며 시율은 차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4박 5일 치의 짐이 들어 있는 큰 트렁크 하나와, 작은 보조가방 하나, 그리고 해인이 배에 탈 때 쓸 동물용 캐리어.

고양이를 캐리어 안에 넣지 않고는 배에 탈 수 없어서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또한 배 안에서도 캐리어 안에 짐승을 꺼낼 수 없도록 규정이 되어 있었다.

항공사나 여객기에 따라 법규는 다르지만, 몇 킬로 이상의 동물은 짐과 함께 짐칸으로 운반되기도 했다. 해인은 그나마 몸집이 작아서 캐리어째로 시율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하여튼 그래도 몇 시간은 갇혀 있어야 해서, 시율은 일부러 해인의 몸집에 비하면 큰 중형견 사이즈의 캐리어를 챙겼고. 그 덕에 짐이 꽤나 늘어났지만 해인의 관심은 온통 다른 데 쏠려 있었다.

“빨리 와, 빨리!”

저렇게 재촉하니 뭔가 빼먹을까 봐 불안해졌다.

시율은 짐을 다 실고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운전석에 앉았고, 그사이 해인은 이미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까지 하고 있었다.

발을 동동거리며 숨 쉴 틈도 안 주고 재촉하기까지.

“출발해!”

반쯤은 명령일지도. 시율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지만 해인이 이렇게 들떠 있는 건 오랜만이라 여행을 준비한 입장으로서 뿌듯하긴 했다.

해인은 지금 잔뜩 들떠서는 기분 좋은 걸 주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간의 분주함이 보상받는 건 이런 한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좋냐.”

“응!”

“네가 좋다니 나도 좋긴 하다만…….”

해인은 무슨 생각인지 아직 안전벨트를 매지 않는 시율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곤 훌쩍 옷깃을 당겨 제게로 끌어와 그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시율은 얼떨결에 키스를 받고는,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뭐야, 이건.”

“수고해요 키스.”

“……별걸 다 할 줄 아네.”

“응! 적어도 4시간이나 운전해야 한다며.”

언제 이렇게 애교가 늘어난 걸까. 이런 건 신혼부부들이 남편 출근할 때나 하는 거 아니었나. 뭐, 아무렴 어떠냐만.

시율도 금세 해인만큼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뭐, 이런 걸 다. 그럼 갈 준비는 된 거야?”

“언제든지! 준비됐어요! 선생님!”

소풍 가는 날 초등학생이라도 빙의했는지 해인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시율은 연신 웃음 터트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고, 모든 게 완벽한 것 같았다.

아직까진.

***

부산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장거리 이동이었기 때문에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고, 그게 여행의 묘미였다.

시율은 선곡을 해인에게 맡겼다.

휴대폰과 카오디오를 블루투스로 연결해서 휴대폰으로 음악을 고르면 그것이 차 안에 나오게 되었는데, 해인은 이상한 데 감탄하고 있었다.

“우와, 이런 게 되는 거야? 세상이 언제 이렇게 좋아졌어?”

“딱히 언제라고 하기엔…….”

“이 차가 비싸서 되는 건가?!”

“요즘 나오는 차는 다 될걸.”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취미는 해인에게도 있었다. 다만 해인은 음악 CD로 듣거나, USB를 카오디오에 꽂아서 들었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15년 된 고물 차에 이런 최신 기능이 없었던 탓이다. 블루투스를 이렇게 사용하는 건 아날로그형 인간인 해인에게는 거의 신문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구나……. 몰랐네. 그냥 휴대폰에서 노래를 고르면 된다는 거지?”

“으흠.”

해인은 처음으로 시율이 준 자신의 휴대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흐뭇하게 그 모양을 지켜봤다.

운전하느라 힐끔거리는 수준이었지만, 이러고 있자니 평범한 연인의 흔한 드라이브 데이트 같아서 기꺼운 기분이 됐다.

해인은 지금 자신이 이 노래 저 노래 검색하느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점점 내밀고 있다는 걸 알까.

사실 저런 기계치 아가씨다 보니 아는 노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시율이다. 그럼에도 해인에게 선곡권을 넘긴 건, 만약 아는 노래가 있다면 어떤 건지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 자신이 괜한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이게 다 언제 적 노래냐.”

“응? 뭐가?”

해인의 음악 취향은 전부 자신의 중, 고딩 시절에서 멈춰 있었다. 신곡이라고는 쥐뿔도 몰랐다.

잘생긴 남자 배우 이름은 알아도 새로 데뷔한 아이돌은 하나도 구별을 못 하는 딱, 그런 부류.

시율은 이 10년 전 유행하던 노래들을 제 차에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취향인 팝송을 틀어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도 이건…….

“그리고 왜 전부 이별 노래냐.”

“좋잖아?”

“……대체 어디가.”

“눈물 나는 게? 감수성 자극이 돼서 좋아해.”

“불길해. 다른 거 듣자.”

“왜! 내 마음대로 선곡하라며! 난 발라드가 좋단 말이야!”

노래는 노래지! 라고 외치는 저 뚱한 얼굴, 자신이 공들인 선곡을 양보할 마음이 없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 여행 가다 싸울 필요는 없겠지.’

고속도로에서 운전대를 붙잡고 카오디오를 건드리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마침 흘러나오는 노래가 이별로 총 맞은 것처럼 아픈 가슴을 표현하고 있었지만…… 시율은 참기로 했다.

노래가 취향에 맞지 않아 입가를 부들거렸지만 해인이 흥겨워 보이니 사랑으로 인내해보기로 한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해인은 저 노래들이 정말 좋은 모양이었으니까. 거의 다 외우고 있는지 신나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온갖 슬픈 이별 노래들을 말이다. 하필이면 즐거운 여행길에!

“앗! 이건 이별 노래 아니다.”

“오, 그래?”

“그리고 남자 가수 노래야. 강 마음에도 들걸?”

스스로 귀를 멀게 하는 방법을 반쯤 깨우치고 있던 시율은 조금 기대하며 반색했다.

그래, 하나쯤은 둘의 취향에 모두 맞는 노래가 있을 줄 알았다. 오로지 이별 노래만 듣는 고약한 취향은 없을 테니까.

“…….”

“……에,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

해인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이번 곡은 명곡이기는 했다. 남자 가수였고, 이별 노래도 아니었다. 다만 마법에 빠진 공주가 마법의 성으로 날아가고 있을 뿐.

해인을 보는 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추억의 노래들은 외우고 다니는 고양이라니. 해인의 정체는 알다가도 알 수가 없었다.

***

장장 두 시간의 이동 끝에 겨우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시율은 서둘러 차에 시동을 껐다. 제발 이 노래들을 그만 듣고 싶어서였다.

취향이 아닌 노래를 듣는 게 이런 고문일 줄이야.

그는 다시 출발할 때는 꼭 제가 노래를 고르겠다고 다짐했다. 이별 노래를 더 들었다가는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될까 봐 두려울 지경이었으니까.

“강.”

“으응……?”

“이거 차에서 되면, 집에 있는 오디오에도 연결할 수 있겠네?”

해인이 안전벨트를 풀다 말고 좋은 생각이 났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이 녀석 쓸데없이 응용력이 훌륭했다.

시율은 마른 목을 축였다.

물론 집에 있는 오디오에도 블루투스 기능은 있었다. 아주 빵빵한 사운드를 자랑하는 최신형 오디오에 말이다.

그는 이 순간 진심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집에서만은 제발. 음악의 신이시여.

“……너, 우동 먹는다며.”

“맞아. 우동!”

“얼른 가자. 사람들 몰리기 전에.”

“예이!”

먹을 걸로 말을 돌려버린 시율은, 해인에게 괜한 걸 가르쳐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음악 취향이 이렇게 안 맞기도 힘들 거라는 슬픈 깨달음도 얻어야 했다.

데이트의 순기능은 서로의 취향을 알아갈 수 있다는 점이고.

안 맞으면 맞추는 인내를 배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둘의 음악 취향에 중간은 없었다.

***

“강.”

요즘 들어 툭하면 눈을 반짝거려서 그를 못 당하게 하는 이 고양이 같은…… 아니, 고양이 과가 분명한 여자 친구는 뭐든 금방 질리는 데다가, 뭐든 제 기분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놀라울 만큼 싫은 건 죽어도 안 했다.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척’이 아니라 정말 위가 작았다.

“……너, 다 먹은 거냐.”

“노력했어.”

며칠 전부터 먹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그래, 어묵을 좋아하니까 우동도 좋아할 거 같기는 했다. 그런데 그래놓고 세 가닥은 너무했다.

신나서 우동을 받아 오더니, 한참을 호호 불어 먹더니. 우동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너 세 가닥 먹었다.”

“……아, 아냐. 반 토막 난 것도 하나 먹고. 어묵도 하나 먹었어!”

“그러셨어요.”

“정말인데…….”

제 잘못을 알긴 아는지 해인은 불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구는 게 고양이 특기라는 건 알지만…… 어린애 위장도 이것보단 많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

그는 잠시 못마땅해했지만 해인이 작은 위장을 자랑하는 게 한두 달도 아닌지라 결국 해인이 먹던 걸 제 앞으로 가져왔다.

제 몫의 우동에 이어 해인이 남긴 것까지 거의 2인분을 비우고는, 배가 불러서 토할 것 같은 얼굴이 됐다.

그는 남자치고 양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멋져.”

“어디가!”

“엄마 같아.”

“아빠도 아니고 엄마냐?”

시율이 이를 갈거나 말거나, 해인은 진심으로 설레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먹지 못한 음식을 대신 먹어주는 데서 굉장한 보살핌과 애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거참 굉장히 특이한 취향이었다.

“……뭐든 간에, 배가 터질 것 같아.”

“꿰매줄게! 터지면!”

이 여자, 노래 취향만 올드한 줄 알았더니 농담까지……. 젊은 여자는 그런 말 안 쓴다고!

시율은 화가 날락 말락 하다가 그만 웃음이 터져 버려서 배만 더 아파졌다. 알면 알수록 해인은 희한한 구석이 있었다.

“너 때문에 정말…….”

“엇, 커피도 못 먹을 정도야?”

“먹어야지. 배불러도 커피는 먹어야 돼.”

“그치? 그래야 강이지!”

“안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고.”

커피 중독자인 시율도 나름 특이한 취향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끼니를 커피로 때울 정도로 커피 없이는 못 사는 타입이었다.

시율에게서 나는 냄새 중에 커피향이 차지하는 비율이 꽤 높을 정도였다.

“저쪽에서 파는 거 봤어. 그것도 강이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야.”

해인은 시율이 화를 낼 것 같자 얼른 그를 커피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이 커플은, 서로를 알아갈수록 잔머리만 늘고 있었다.

***

시율이 부른 배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동안, 해인은 사과의 의미로 대신 커피를 사다 주기로 했다.

물론, 정말 사다 주는 것뿐이었다.

“카드 주세요!”

“……자.”

“아침이니까 카페라테 맞지?”

“맞아.”

“시럽 없이!”

그가 먹는 커피는 아침엔 카페라테, 저녁엔 아메리카노였다. 함께한 내내 그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둘은 이제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 만큼 제법 연륜 있는 사이가 됐다. 아무래도 같이 살다 보니 서로에 대한 습득 속도가 빠른 것도 있으리라.

시율은 벤치에 앉아 해인이 커피 전문점으로 쪼르르 달려가 주문하는 뒷모습을 주시했다.

해인은 곧잘 덜렁대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저러다 언제 어디로 없어질지 모른다는 것도 그의 시선을 잡아먹는 이유였다.

물론 보는 것만으로 안 질린다는 것도…….

“……?!”

조금 멍하니 힘을 빼고 앉아 있던 시율은 순간 제 눈앞을 지나간 여자를 따라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놀라서는 지나가 버린 여자를 따라 몇 걸음 걸었다.

올려 묶은 머리나, 뒷모습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시율은 해인이 커피를 사러 갔음에도 그 여자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마음이 전에 없이 급했다. 이대로는 여자를 놓칠 것 같았다.

“……응? 강? 어디 갔지?”

얼마 안 가 시율이 사라진 벤치로 돌아온 해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제가 사라지는 건 익숙하지만 그가 사라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해인은 혹시 이 자리가 아니었나 해서 다른 벤치들을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시율은 없었다. 문득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와서 머리를 날렸다.

불현듯 불안해졌다. 그가 이렇게 저를 두고 사라질 리가 없는데.

“가앙?!”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별 노래를 틀었을 때부터.

***

차로 돌아와 봤지만 그는 없었다. 차 문도 잠겨 있었고 누가 다녀간 흔적도 없었다. 게다가 해인의 휴대폰 역시 차 안에 있었다.

계속 음악을 틀었더니 배터리가 없어서 충전기에 꽂아두고는 그대로 내린 것이다.

설마하니 우동만 먹고 오는 사이에 그와 헤어질 줄은 몰랐다. 시율도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농담처럼 말했던 미아 방송이라도 해야 하나?

‘어쩌지.’

찰나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내 해인은 냄새를 쫓아 그를 찾기 시작했다. 성능 좋은 코는 이럴 때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장소가 휴게소라 그리 쉽지는 않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이라 온갖 잡다한 냄새가 뒤섞여 있어서, 이 속에서 특정한 냄새를 찾는 건 쌀 포대 속에서 현미 한 알 찾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더듬더듬, 해인은 가까스로 그의 냄새를 찾아 흔적을 따라갔다.

차들이 지나가면서 남긴 매연에 거의 가려져서 아주 흐린 냄새였지만, 따라갈 수는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차장 거의 끝에 가 있는 시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우선은 그가 거기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해인은 어느새 식기 시작한 커피를 들고는 시율에게 달려갔다.

“가…….”

차를 피해 도로를 가로지르며 막 그를 부르려는데, 그가 어떤 여자의 팔을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뭐라 뭐라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해인은 가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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