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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86화 (86/114)

86화. 고양이는 변신 못 해

“……그, 그건 왜요?”

“아니, 여기 총각 혼자 산다는 거 같아서. 전에도 그랬는데 여기 터가 그런가 봐? 그리고 세대가 바뀌었다는데 이사 오는 건 내가 못 봤거든. 근데 보니까 가구는 좀 들어오는 거 같기에 궁금하더라고.”

아줌마들은 뭔가 혼자 이것저것 말하는 능력이 있어서, 대답하지 않고 가만있어도 이야기가 진행됐다. 대신 듣고만 있으면 찾아온 온 목적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네…… 그래서 볼일이…….”

“아, 다름이 아니라, 이거 주려고.”

검은색 파일 위에 대충 잘라 붙인 제목이 보였다. 주민회의록. 반장 아줌마는 자신이 굉장한 친절을 베풀었다고 여기는지 의기양양한 기세였다.

“그거 전에 살던 사람한테 안 받았지?”

손톱깎이 하나까지 전부 주고 갔는뎁쇼.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당연히 없으려니 하고 주러 온 것 같았다.

해인은 얘기가 길어질까 싶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회의라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회의가 있거든. 부녀회 같은 거라고 하면 아가씨가 알려나?”

“알긴 알아요.”

아파트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주택가에도 비슷한 건 있었다. 그리고 시율이 이런데 참가하지 않을 건 뻔한 일이었다.

반장 아줌마도 그걸 아는 듯했고 말이다.

“어머, 그래? 매번은 못 와도 한 달에 한 번은 참가하면 좋은데 총각 혼자 사는 집들은 통 안 나오더라고?”

“네. 잘 전해줄게요.”

“그리고 이건 그냥 오기 뭐해서 좀 챙겨 왔는데. 집에 있던 거라 대단한 건 아냐.”

“……감사합니다.”

그냥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아줌마인 줄 알았는데, 이웃의 정인지 검은 봉지 한가득 담긴 귤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래서 아가씨는 이 집 총각이랑은 같이 사는 거야?”

“…….”

“여자 친구? 여동생? 아니면…… 요즘 많이 한다는 동거?”

아니, 역시 이웃의 오지랖 같았다.

해인은 예전부터 모르는 사람과 오래 대화하면 정말 두드러기가 나고는 했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정말이었다.

스트레스성이라고 해야 할까. 심히 긴장이 되면서 손발에 땀이 나고 속이 울렁댔다. 그것도 이렇게 질문이 넘치는 타입은 특히나 쥐약이었다.

해인은 슬쩍 문 뒤로 숨어버렸다.

그래, 자신은 원래 이렇게 낯을 많이 가리는 타입이었다.

“그게…….”

“뭐라고? 안 들려, 아가씨. 목소리 너무 작다.”

태일은 너무 특수한 상황에서 만났고, 시율은…… 시율은 예외였다. 그에게 자신이 착한 아이로 굴 수 있는 건 그가 그만큼 저를 온 정성으로 길들였기 때문이었다.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서 얼마든지 마음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줬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 자신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사랑스러운 계집아이였다.

사랑에 빠진 자신이 어떤 얼굴인지, 난생처음 알았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진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본래의 성격대로라면 자신은, 기껏 저를 찾아온 시율에게 이렇게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굴다 못해 웬 미친놈이 친한 척한다며 경찰에 신고를 하고도 남을 게 분명했으니까.

‘지금이랑 성격이 다르다고, 날 못 알아보면 어쩌지.’

문득 그런 심난한 걱정이 들었다.

박해인은, 혼자 있는 걸 너무 좋아하고, 타인을 불편하게 여기며, 오로지 자신의 그림만 사랑했다.

이렇게 몇 달이나 연락두절이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만큼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여자였다.

성격도 매우 고약한 구석이 있었다.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건 누구든 싫어하고 경계했다.

해인은 너무 오랜만에 낯선 사람과 사람으로 대화하고 있자니 그런 자신이 새삼 떠올라 걱정으로 머릿속이 꽉 차는 기분이었다.

“집주인이 젊은 남자 같던데. 능력도 좋아, 그 나이에 이런 집을 다 마련하고. 호호, 내 딸이나 소개해줄까.”

……내, 내 건데. 해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급해져서는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 말았다.

“제가! 제가, 여자 친군데요…….”

“응?”

말해놓고 나니 부끄러워 죽을 맛이었다.

“어머, 누가 뭐래? 그냥 농담한 거지! 아가씨 심각하기는……. 호호호! 잘 사귀어 봐. 결혼하면 부르고. 난 뷔페가 좋더라.”

이래서 아줌마들은 특히나 어려웠다.

뭔가 놀림 당한 기분이드니까. 사람을 창피하게 만들어놓고는 아무 일 없이 가버리는 아줌마였다.

해인은 한동안 문 앞에 서서는 부끄러운 얼굴이었다.

그럼 왜 물어봤대!

***

늘어지는 어느 시간, 시율은 익숙한 냄새에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잠들기 전보다 몸이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보글거리는 무언가를 끓이는 소리가 작게 귓가에 들렸고, 이내 몸을 일으키자 조금 부스럭거렸을 뿐인데 해인이 잽싸게 달려왔다.

하여간 귀가 밝은 아가씨였다.

“강!”

“응.”

“일어났어? 정신 들어? 살 것 같아?”

“……나 그냥 감기거든.”

누가 보면 죽을병 환잔 줄 알겠다. 뭐, 이렇게 걱정해주니 고맙긴 했지만 말이다. 시율은 해인이 제가 아프거나 몸 상태가 나쁜데 유난히 민감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웬만하면 아픈 티를 내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죽 끓이는 거야?”

“응!”

“헤에,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죽 정도야!”

소금이랑 설탕만 혼돈하지 않으면 성공한다는 죽이었다. 성공확률 90%를 자랑하는……. 물론 그마저도 인터넷 레시피의 도움이 있어야 했지만.

“그러니까, 밥이랑 물을 계속 끊이면서 젓다가……? 소금만 넣으면 되잖아? 맞지……?”

“이론은 완벽하네.”

“다 했는데 먹을래?”

해인이 너무 눈을 반짝거리면서 물어서, 시율은 배가 안 고파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를 먹이겠다고 뭔가 부엌에서 복작거렸을 걸 생각하면 귀엽기도 했고, 안 하던 짓을 한 게 기특하기도 했다.

“그럴까.”

“가져다줄게!”

시율은 여전히 나른한 감이 있는 몸을 완전히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해인이 이렇게 제 시중을 들어주니 굉장히 새로웠다. 매일 제가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보살 핌 받으니,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

“어, 맛있는데?”

“정말? 더 있어! 많이 먹어!”

“……얼마나 더 있어?”

“이거에…… 한, 10배 정도……?”

설마 해서 물었더니 역시나였다. 시율은 부엌에 한 솥 있을 죽이 상상이 갔다. 고양이는 역시 간병에 재능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맛이 나쁘지 않은 죽을 입안에 넣으며 시율을 픽, 하니 웃고 말았다.

“원래 양 조절이 힘들지. 초보들은.”

“으응…… 하다 보니…… 좀 많아졌어.”

“한 2박 3일 먹으면 없어지겠지.”

“……도와줄게!”

“거참 도움 되겠다.”

시율이 늘 그랬듯 느긋하게 웃으며 핀잔하자, 그게 전혀 칭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해인은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그가 평소처럼 돌아온 게 이렇게 기쁠 줄이야.

“아무튼 고마워. 맛있네.”

“그치? 나 제빵은 몰라도 이쪽은 좀 하나 봐.”

“그건 아닌 것 같아.”

“……쳇.”

얄밉긴. 입술을 삐죽이며 시율이 그릇 비우는 걸 지켜보던 해인은, 불현듯 그게 생각났다.

“맞다. 강, 후식도 있어.”

“후식? 나갔다 왔어?”

“그건 아니고.”

해인은 아픈 그를 눈앞에 두자니, 제가 감기에만 걸리면 뭔가 먹이지 못해 안달하던 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이제야 말이다.

***

죽을 치우고, 물도 가져다주고. 뿐만 아니라 해인은 특별히 귤도 손수 까서 그의 손에 들려줬다. 이건 해인으로서는 굉장한 서비스였다.

시율은 꽤나 해인의 특별 시중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프니까 좋은 점도 있군그래.”

“빨리 먹고 나아.”

“뭐, 그래도 난 키스가 좋지만.”

“……먹기나 해!”

아무래도 잠들기 전의 일이 전부 기억나는 모양이었다. 하긴 열난다고 헛소리하는 타입은 아니니까.

“그래서 이건 반장 아줌마가 줬다고?”

“응. 주민회의 나오래.”

“생각난다, 그 아줌마. 전에 태일이한테 여자 소개해주려고 엄청 그랬었는데. 그런데 보니까 괜찮은 젊은 남자 주민은 다 누구랑 이어주고 싶어 하던데.”

“……에엑.”

“그냥 멀쩡한 젊은 남녀가 솔로인 게 이해가 안 가는 거 같더라고. 어른들은 거의 그렇지.”

시율은 편하게 말하는 걸 보니 몸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해인이 까주는 대로 잘 받아먹었고, 얼굴색도 좋아졌다.

해인은 왠지 자꾸만 귤을 까주게 됐다.

봉지 한가득이던 귤은 어느새 반쯤으로 줄었고, 시율은 먹다 물렸는지 제발 그만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얌마, 우리 외할머니도 이렇겐 안 먹인다.”

해인은 안도하면서도 뭔가 부족한 기분에 그의 곁에 바짝 다가가 물었다.

“강, 물 더 갖다 줄까?”

“아니. 괜찮은데.”

“그럼 더 필요한 건 없어?”

솔직히 말하자면 더 필요한 건 없었지만, 해인이 뭔가 더 해주고 싶은 얼굴이라 시율은 그걸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해인은 항상 요구하는 게 얼굴에 빤히 나타났다.

“……음, 내 휴대폰 좀 가져다줄래?”

“여기! 그리고, 그리고?”

“너도 이제 좀 쉬어.”

“난 계속 쉬었는걸.”

해인이 무슨 소리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시율은 쭉 잠든 자신의 곁에 해인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죽을 끓이러 간 사이에도 손이 닿는 곳에는 해인의 온기가 남아서 따듯했으니까.

“그럼 같이 좀 자자.”

“으응?”

“이리 와.”

잠이나 자자는 소리에 뜨끔했던 해인은 자신인 너무 음흉하게 생각했다는 걸 곧 깨달았다.

자신의 오른쪽 이불을 걷어내고 옆자리를 톡톡, 치고 있는 시율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으니까.

‘어후, 환자를 상대로 나도 무슨 생각을 한 거람.’

대충 귤껍질을 옆으로 치우고는 꾸물꾸물 그의 옆으로 들어가 누웠다.

오늘따라 약간 높은 시율의 체온은 해인을 다시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그의 손이 평소처럼 어깨와 등을 끌어안아 주자 불안은 눈 녹듯 사그라졌다.

그가 저를 힘주어 끌어안고, 이마에 나긋한 키스를 해주자 어지럽고 혼란스럽던 해인의 마음에도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자꾸 불안하고 두려웠던 건, 그가 아파서였나 보다.

그는 이렇게나 내게 영향을 끼치고 있나 보다.

해인은 아파서 그런진 몰라도 평소보다 유난히 상냥한 시율에게 마음껏 끌어 안겼다. 아픈 건 그인데, 위로받는 건 저였다.

“내가 원래 잘 안 아픈 체질인데, 요즘 무리해서 그랬나 봐.”

“……아냐. 나 때문이야.”

“아니야.”

“내가, 강을 아프게 한 거야. 나 때문…….”

“나 때문이지. 널 안은 게 나지. 너는 아니니까.”

그가 너무 힘주어 말해서, 해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널 참지 못한 내가 나빠. 그렇지?”

“……응.”

사실 누구 때문인지는, 그도 알았다. 다만 그래서 해인은 눈물이 났다.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지금은 그것만 중요했고, 그도 그걸 알았다.

“자책하지 마.”

머리 위로 들리는 그의 속삭임에 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제가 아픈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는데, 그가 아픈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너무 이상하고, 신기했다.

“강, 만약에 말이야.”

“응?”

“내가 지금이랑 달라지면…… 어떻게 할 거야?”

“뭐가 달라지는데? 얼굴 같은 거? 그건 별로 상관없는데.”

그러다 엄청 못생겨지면 어쩌려고! 해인은 그를 올려다보며 심각하게 오늘 떠올린 문제점을 털어놨다.

주술 때문에 직접적으로는 안 됐지만, 빙 두르면 대충은 물어볼 수 있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그…… 성격이라거나…….”

“성격이라…….”

“전혀 안 귀엽게 군다거나.”

“너 원래 안 귀여워.”

“엑? 나름 강한테는…….”

“처음에 네가 어땠나 생각해봐. 나 엄청 물렸다.”

“……그건 그래.”

인정. 지금도 그의 손은 너덜너덜했고, 그중 한 부분은 해인이 낸 상처가 차지하고 있었다. 확실히 자신이 처음부터 그에게 골골댄 건 아니었다.

“뭐가 달라지는지는 몰라도.”

그가 자신을 마주 안은 손에 힘을 줘서, 해인도 덩달아 그의 허리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응.”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 그대로면. 계속 널 좋아할 거야.”

“좋아하는 거?”

자신이 좋아하는 거라면…… 단거랑 강시율 정도일까? 하지만 그 강시율을 잊어버리는 걸.

“멍 때리는 거 좋아하고.”

“……응.”

“혼자 있는 거 좋아하고, 조용한 걸 좋아하고. 아, 그리고 산책하는 것도 좋아하지.”

“맞아.”

“싫어하는 건 뭐 시키는 거랑, 먹기 싫은 거 주는 거. 특히 할 건데 하라고 하면 엄청 싫어하지.”

이 남자……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해인은 그가 자신을 꽤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일단은 안심하기로 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 남자, 자신이 좀 면박 준다고 쉽게 물러설 남자는 아니었다.

나중에 자신이 그를 새까맣게 잊어버려도, 달달 볶아서 다시 생각나게 할 것 같았다.

“……강이 뻔뻔해서 엄청 다행이야.”

“음…… 그거 칭찬이냐.”

“응.”

“기분이 별론데.”

그는 해인의 끌어안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잠시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계속 뻔뻔해야 해!”

***

시율은 회복력이 정말 엄청난 남자였다. 하루 푹 자더니 평소처럼 돌아와서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가볼까.”

“하암, 오늘도 쉬는 게 안 나아?”

“다음 주부터 휴간데 계속 병가 내려니 양심에 찔려서 말이야.”

당신한테도 양심이 있다니 거참 새로운 사실이군요.

“아, 같이 가자.”

“응! 변신할게!”

“아니, 오늘은 고양이 말고, 옷 입고 나갈 준비해. 방유나 씨한테 네 얼굴도 보여줄 겸. 같이 브런치나 먹자고 해야…….”

시율이 그저 그렇게 말하며 욕실로 돌아섰을 뿐이었다. 그저 잠깐 해인에게 눈을 뗐는데, 풀썩 소리가 나나 싶더니…… 해인은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응?”

“……에?”

“뭐야. 같이 나가자니까 왜 그 모습이야?”

풀썩 소리는 해인이 입고 있던 옷가지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고양이로 변해 버렸으니 사람 옷이 그대로 매달려 있을 리 없었다.

이미 사람이었는데, 굳이 고양이로 돌아간 해인을 보며 그는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해인이었다. 몸이 제멋대로 고양이로 변해버렸으니까.

“이게…….”

해인은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의 목깃 사이로 빠져나오며 영문을 알 수 없어 했다.

“왜 그래?”

“……사, 사람이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시 사람으로 변해보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기능 따위 없었던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변할 수 없어!”

“뭐어?”

이런 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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