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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85화 (85/114)

85화. 고양이 주인이 아플 때

설마 우려했던 일이 터진 걸까. 해인은 기겁하면서도 얼른 시율에게 달려갔다.

바닥과 닿은 그의 무릎에 매달려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눈에 띄게 파리한 게 보였다.

설핏 식은땀도 흘리는 것 같았다. 질끈 감은 두 눈은 분명 힘겨워 보였다.

“냥?!”(강?!)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그가 쓰러지다니! 해인은 덜컥 두려워졌다.

적어도 해인의 머릿속에서 시율은 못 하는 것도 없고, 항상 자신만만한, 가끔 사람 같지 않을 만큼 대단한 남자였다.

그러니 은연중 아플 리도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냐앙!”(죽지 마!)

“……안 죽어, 인마.”

“냐아냐?(못 일어나겠어?)

“괜찮아.”

그는 여전히 미간을 가득 좁히고는 어지러운 얼굴이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이러고 잠깐 있으면…….”

시율이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해인은 당장에 진료실을 도도도, 빠져나왔다. 서둘러 로비로 나와서는 지나가는 아무 직원이나 붙잡았다.

“먀아!”(도움!)

“응?”

심지어 신발에 덥석 매달려서는 애처롭게 울어댔다.

“미야아! 미야!”(강이! 쓰러졌어!)

“갑자기 왜 그러니?”

“냐아아아아!”(이리 좀 와봐!)

평소 그리 잘 우는 고양이가 아닌데,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거의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발에 온몸을 치대는 해인이 이상하긴 이상했는지 간호사는 가던 길을 바꿔 해인을 따라왔다.

작은 머리로 꾹꾹, 한쪽으로 다리를 미는 게 아무리 봐도 저쪽으로 가자는 뜻이었으니까.

“니야니야!”(빨리빨리!)

왜 이리 재촉하나 싶었는데…… 해인을 쫓아온 간호사는 곧장 진료실 안쪽에 엉거주춤 쓰러져 있는 시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 강 선생님?”

“……저 녀석.”

시율은 그새를 못 참고 사람을 불러온 해인을 힐끔 노려봤다. 그는 책상을 붙잡고 혼자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디 아프세요? 왜 그러고 있어요?”

“그냥 좀 휘청거렸는데…… 녀석이 놀랐나 봅니다.”

그는 마치 해인이 굉장한 호들갑이라도 떨었다는 양,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간호사는 동의해주지 않았다.

“강 선생님이 휘청거리면 저라도 놀라겠는데요.”

“그 정도까지야…….”

“아, 도와드릴까요.”

“됐으니까. 차트나 좀 주워줘요.”

부축해주려는 간호사의 손길을 밀어내고는, 기어코 혼자 일어나 의자에 풀썩 앉는 시율은 여전히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기분 안 좋은 티를 내더라도 눈썹이나 조금 구기는 강시율인데, 이 정도로 컨디션이 표정에 드러나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개냥이도 많이 걱정하는데,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잠을 좀 못 잤더니 잠깐 어지러웠어요.”

“아아. 하긴, 요즘 계속 무리하시긴 했으니까요.”

간호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바닥에 널브러진 차트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해인은 책상으로 올라가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서, 이러다 얼굴이 닿겠네 싶을 정도였다.

뭔가 묘하게 취조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시율은 슬그머니 얼굴을 뒤로 빼야 했다.

“그렇잖아요? 당직한 다음 날 연달아 풀 근무를 하시질 않나. 수술도 많이 잡혔는데 쉬지도 않으시고.”

“그건…….”

“강 선생님이 원래 그렇게 빡빡하게 근무 잡으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러다 몸 상하시겠다고 매니저님도 걱정하셨는걸요.”

“맞아요. 그것 때문입니다. 요즘 쉬질 못해서.”

간호사의 걱정에, 시율은 이거다 싶었는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해인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길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젠 좀 쉬신 것 아니었어요?”

“……어제는.”

쉬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 가장 무리한 날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어제를 쉬기 위해 그간 무리한 셈이었으니까.

해인의 눈이 다시 가느다래지면서, 따갑게 그의 면전에 꽂혔다.

“그리고 요즘 무슨 다이어트라도 하세요? 살이 좀 빠지신 것 같은데…….”

“……그럴 리가. 몸무게는 그대론데.”

“기분 탓이려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일이나 봐요.”

기껏 도와주러 온 사람을 서둘러 쫓아내는 시율이었다.

간호사는 별꼴이라고 투덜대며 나가버렸고, 시율은 혼자가 되자마자 제게로 쏟아지는 의심의 눈초리에 말라오는 목을 축이며 급히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었다.

“……정말, 오해야.”

갑자기 왜 어지러웠던 걸까. 운이 나빴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해인은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이미 확신으로 가득 찬 얼굴은 변명의 여지 같은 건 전혀 주고 있지 않았다.

“그냥 좀 어지러웠던 거야. 그게 다라고.”

“냐냐.”(퍽이나.)

“좀 앉아 있으면 나을 거라니까?”

이건 꽤 큰일이었다. 하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이 녀석이 볼 게 뭐람. 태일이 가자마자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이제부터 겨우 둘만의 겨울이 시작되는 참이었는데…….

벌써 등 돌리고 앉아 있는 해인을 보며 시율은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이 고양이, 한번 아니다 싶으면 절대 아니었으니까.

***

“강샘, 아무래도 열이 있어 보이는데요.”

그날 오후.

붉어진 얼굴, 불편하게 몰아쉬는 숨, 비척거리는 걸음걸이. 시율은 아무리 봐도 환자였다. 조금 아파서는 이렇게 티가 나는 남자가 아니니 증세가 꽤나 심각해 보였다.

의사 가운을 입은 환자라니, 그건 이래저래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쵸?”

“……예?”

“저 아파 보이죠?”

열이 심해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지, 아파 보인다는 소리에 매우 기뻐하는 시율이었다. 말을 걸었던 데스크 여직원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기 같은데.”

눈이 몽롱한 데다 충혈된 게 아무리 봐도 감기 환자 증세였다.

“그러면 그렇지. 하하하.”

“마, 많이 아프세요?”

그렇지 않아도 이상해 보이는데 소리 내 웃기까지. 이 남자 왜 이러는 걸까. 여직원은 진심으로 시율이 걱정스러웠지만 슬그머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율은 지체 없이 조퇴를 선언했다.

“조퇴하겠습니다.”

“……그러세요.”

조퇴야 물론 모든 직장인의 즐거움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기뻐할 필요까지 있을까. 시율은 양기부족만 아니라면 병명은 뭐든 좋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좀 이상하더라고요.”

“네에…….”

“원장님 위에 계시죠?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에 열광하는 시율을 보며, 해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단순 감긴가?’

혹시 엄살은 아닐까? 양기 문제가 아닌 척하려고……. 이거 헷갈리는데.

원장실로 올라가는 시율을 보면서도 해인은 두 눈을 지그시 뜨며 여전히 의심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정말 아파 보였고, 엄살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평소 안 아프던 사람이 갑자기 아프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요즘 시율이 무리한 건 사실이었다. 연말 휴가를 길게 내서, 그걸 때우기 위해서도 바빴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추워진 판에 눈을 맞고 돌아다녔다.

산책도 하고, 눈싸움도 했다.

해인은 추위를 타지 않다 보니 눈만 오면 신나서 방방댔다.

그러면 시율은 얇게 입지 말라고 쫓아다니며 제 목도리며 장갑을 벗어서 해인에게 둘둘 말아주고는, 자기가 대신…… 재채기를 하고는 했다.

‘……이, 이제 보니…… 어느 쪽이든 결국 나 때문이잖아!’

감기건 양기 문제건! 결국!

문득 깨닫기로 그건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가 무리한 것도 저와의 여행 때문이었고, 전혀 취미에도 없는데 눈 오는 밖을 싸돌아다닌 것도 전부 제가 산책하자고 졸라서였다.

결국, 그가 아픈 이유가 무엇이든 모든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

“끄앙.”

해인은 그만 충격에 못 이겨 괴상한 소리를 내며 휘청거렸다.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비척비척 출퇴근용 캐리어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캐리어 안에 들어가 한쪽 면에 머리를 박은 채 침울하게 반성모드에 들어갔다.

“……오늘 저 집, 주인이나 고양이나…… 좀 이상하지 않니?”

“그러게…… 강샘도 그렇고.”

사람들이 수군수군댔지만, 굴을 파고 있는 해인의 귀에 들릴 리 없었다.

***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시율의 증세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집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몸은 거의 불덩이나 다름없었다.

시율은 아픈 와중에도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품에 안고 있던 캐리어를 현관에 내려놓고는, 또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숨을 골랐다.

해인은 캐리어에서 나오자마자 얼른 사람으로 변신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그의 이마를 만져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엄청 뜨겁다는 것 말고는 알 수 가 없었다. 자신에게 의학 지식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강.”

“……미안, 좀 자야겠어.”

많이 아픈지 시율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침실로 향했다.

혼자 옷을 벗는 것도 힘들어 보였고, 해인은 그가 바닥에 마구 벗어놓은 옷을 줍는 것 이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율은 쓰러지듯 누워서도 눈꺼풀을 불규칙하게 깜빡이며 열에 시달렸다.

그런 시율을 보며 해인은 울상이 됐다.

하필이면 태일도 없는데 그가 아파서……. 아, 차라리 잘된 걸까. 자신이 그를 간호할 수 있을 테니까.

해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약! 약 같은 거 사올까?”

“……난 감기 정도로는 약 안 먹어. 비타민C는 병원에서 먹었고.”

“그건 그냥 영양제 같은 거잖아?”

“감기에는 그거면 충분해.”

“정말?”

“정말. 이제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래도 안 나으면 그때 병원에 가볼게. 넌 신경 쓰지 말고, 쉬고 있어.”

이 의사 양반은 약은 될 수 있으면 안 먹는 주의였다. 자체적으로 이겨내보고, 안 되면 그때 주사든 약이든 찾는 타입인 모양이다.

의사면서 약을 싫어하면…… 아니 의사라서 안 먹는 건가?

“그런 얼굴 하지 마.”

“내가 괜히 산책 같을 거 하자고 해서…….”

“……산책?”

“추운데 맨날 나가자고 하고…… 그리고 옷 뺏어 입어서, 그래서 감기 걸린 거잖아.”

“그런 거 아냐. 정말 너 때문 아니니까…….”

시율은 이제 말할 기운도 없는 눈치였다.

그는 기운 없는 눈과 손으로, 괜찮다고 계속 말해줬지만 해인은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시율이 아프다는 사실이 저를 이렇게 불안하게 할 줄 몰랐다.

세상에 그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그가 아프다는 게 너무도 중대하게 느껴졌다.

약도 안 먹겠다고 하고, 손으로 자꾸만 그의 이마를 만져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해인은 누워 있는 그에게 슬금슬금 얼굴을 가까이 댔다.

거의 달라붙어서는, 그렇게 지켜본다고 낫는 것도 아닌데 불쌍한 눈을 하고는 그가 눈을 감고도 느껴질 만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 옮는다.”

시율이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으며 말했지만 해인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건 괜찮아. 난 병 같은 거 안 걸린댔어.”

“누가?”

사신이, 죽은 자들을 인도하는 무시무시한 녀석이. 참 나쁜 녀석이지. 이 모든 일들의 원흉이라는 점에서 말이야.

말해줄 수는 없지만…… 지금 시율이 눈을 감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게 있어.”

“또 비밀이구만.”

잠들려는 그의 이마에 해인은 슬쩍 자신의 이마를 기대봤다.

엄마들은 이렇게 열을 재던데, 해보니 이유를 알겠다. 손보다 열기가 더 또렷하게 느껴져서 그가 얼마나 아픈지 알 것 같았다.

‘아프지 마.’

잠시 그렇게 있는데 잠들었나 싶던 시율이 눈을 뜨고 해인을 바라봤다.

이마를 기대고 있어서일까. 얼핏 속눈썹이 닿을 것 같았다.

그가 쉬는 숨소리나 심장소리가 제 것과 겹쳐져서, 어느 것이 누구의 것인지 헷갈렸다. 그런 거리였다.

“키스해줄 거야?”

“……뭐, 뭔 소리래!”

“아니. 그런 눈이길래.”

그의 눈이 살그머니 웃고 있었지만, 해인은 결연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시율에게서 이마를 떼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기, 키스는 당분간 안 할래.”

“그거야말로 뭔 소리래.”

“나을 때까지라도!”

“와…… 그거 청천벽력이구만. 갑자기 더 아파질 거 같은데.”

“그치만, 강이 더 약해질까 봐…… 무서워.”

아픈데 키스했다가 더 아파질 것 같고, 그가 또 쓰러질까 봐 겁이 났다.

몸이 허하면 자주 아프다는데, 사실 이것도 자신이 그간 그의 양기를 빼앗아 온 결과인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게 틀림없었다.

사실은 낮에 그가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심장이 내내 벌렁거렸다. 설마 하고 우려했던 일이 정말 일어나자 그에게 미안하고, 안쓰럽고 자신이 미웠다.

“……그럼 언제 하게?”

울먹울먹한 눈을 하고는 그런 말 해봐야 시율에게 먹힐 리 없었지만 말이다.

“으음, 병이 나으면…… 하루에 한 번?”

“헤에. 다른 건?”

“일주일에 한 번!”

“누가 그걸 정하고 하냐.”

아픈 와중에도 코웃음 잘 치는 시율이었다.

“안 그러면 죽어! 정말이야. 강 이러다…….”

“그러면 넌 그렇게 해. 난 내가 알아서 할게.”

“우씨.”

진짜 심각한데, 시율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해인의 손목을 끌어갔다.

열에 들떠 뜨거운 손을 꺼내서는 도망치기 전에 붙잡고 끌어가 키스를 해왔다. 당연하게 겹치는 입술을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고, 낯설 만큼 뜨거웠다.

그의 이마도 숨결도 눈도, 전부 그랬다.

열이 나는 그의 몸과 닿은 자신의 몸이 똑같이 화끈거렸다.

“닿고 싶은데 닿지 못하면, 그게 더 괴로울 거야. 정말로.”

“……죽는다니까, 정말.”

“그것도 좋네.”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면 진심 같잖아. 겨우 누군가와 닿는 데 목숨 걸지 말라고.

“미안. 이제 좀 잘게.”

그는 더 이상은 한계인지 눈을 감자마자 까무룩 곯아떨어져버렸다.

해인은 그가 열을 이기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방금 일을 기억하지 못했으면 했다.

죽어도 좋으니까, 마음껏 닿겠다는 이야기는 싫었다. 잠들어서도 여전히 자신의 팔목을 붙든 그의 손이 그 마음을 다시 대변하는 것 같았다.

“……강, 푹 자. 옆에 있을게.”

얼마 남지 않았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한 계속. 그러고 보니 그가 죽을 만큼 제게 집중할 시간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차라리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았다면, 그게 좋은 걸지도.

***

띵동.

띵동.

시율의 곁에서 깜빡 잠들었던 해인은, 초인종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같은 소리에 잠을 방해받았는지 시율이 깨어날락 말락 불편한 신음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해인은 얼른 발소리를 죽여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평소라면 방문자가 왔다고 나갈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시율은 환자라서 푹 자야만 했다.

“누구세요?”

“아, 902호예요.”

“어디요?”

“이 라인 반장인데, 얼굴 보면 나 알거야. 잠깐 나와 볼래요?”

현관문을 열지 않은 채 대화하다가, 해인은 렌즈를 통해 문밖을 내다봤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안면 익은 중년 아줌마가 서 있었다.

“무슨 일로……?”

“별건 아니고 뭘 좀 전해주려고. 여기 집주인이 바뀌었다며?”

“그, 저기 다음에 오시면…….”

“어우, 추워! 아가씨 사람 막 밖에 세워놓을 거야? 집에 뻔히 있으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예의 아니라고.”

아줌마의 윽박에, 고민하긴 했지만 해인은 결국 문을 열어야 했다.

문을 열기에 앞서 아까 시율이 벗어둔 코트를 챙겨 입은 건 지금 옷차림이 너무 가벼워서였다.

시율이 입으면 무릎 위에서 떨어지는 코트는 해인이 입자 종아리까지 길어서, 누가 봐도 급하게 겹쳐 입은 모양이 됐다.

자칭 반장 아줌마의 눈이 빠르게 해인을 훑으며 견적을 내는 듯했다.

해인은 그 눈길이 매우매우 부담스러웠다.

“아가씨도 이 집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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