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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84화 (84/114)

84화. 고양이는 어려워

창밖을 지나는 여린 눈발과, 그 사이를 헤치고 들어오는 나른한 햇살, 밖과는 다른 따듯한 방 안의 온기. 기분 좋은 늦은 아침.

그걸 방해하는 벨소리.

이불 속에 파묻혀 있던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님, 아직 주무셨습니까?]

거의 눈을 감은 채로 전화를 받던 시율은 힐끔 시계를 확인했다. 주차장에서 배웅한 지 20시간 정도 지나 있었다.

“……너구나.”

태일이었다. 하기야, 해외에서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시차 보고 전화드린 건데. 여긴 저녁 8시 40분이거든요. 거긴 아침 10시 40분일 텐데, 평소라면 일어나셨을 시간이잖습니까.]

“늦잠 좀 잤지.”

새벽이 오도록 누군가의 부재를 만끽하다가 잠든 지 몇 시간 되지 않았다는 건,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태일이 바로 그 당사자였으니까.

[방금 숙소에 도착해서 짐 풀고 있습니다. 잘 도착했다는 말씀드리려고요.]

“그런 거 건너뛰어도 괜찮은데.”

[형님이 소개해주신 숙소인걸요. 역도 가깝고 주변도 조용하고, 한국 사람도 많이 살아서 아주 마음에 들어요.]

“내가 보기에 말이지. 넌 좀 더 예의가 없어야 돼.”

시율은 얼른 전화를 받았음에도 깨버려서는 눈을 천천히 끔뻑이고 있는 해인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팔 아래서 일어날까 말까 꾸물거리다가, 더 자기로 했는지 다시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겨울의 장점은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체온이 아주 기분 좋게 느껴지는 것.

[하하, 혼자 보내신 첫날이잖아요. 조금 허전하시려나 해서.]

“난 원래 혼자 살았거든.”

[그야 그렇지만요.]

“그리고 지금은 고양이 아가씨가 있잖냐. 혼자가 아니라고. 네가 없으니까 하루 종일 내 옆에 꼭 달라붙어 있거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고. 다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라면 고양이가 아니라 진짜 아가씨라는 점이긴 했지만.

지금의 해인은 가느다란 팔다리와 하얀 등허리, 작고 아담한 손과 발을 가진 여자일 뿐이었다.

서로의 손에 깍지를 낄 수 있느냐 없느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거 저 놀리시는 거죠?]

“글쎄다. 아무튼 잘 도착했다니 다행이네.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나? 아까 간 것 같은데.”

[형님, 벌써라뇨! 14시간이나 비행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미국이 멀기야 하지.”

[공항에 내렸는데 다리에 감각이 없더라니까요? 거의 토할 뻔했어요. 내려서도 숙소까지 또 몇 시간을 이동했는지……. 으으, 죽다 살았습니다. 정말.]

장거리 비행이 힘든 일이긴 했다. 긴 시간 동안 비행기 안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시간을 때워야 한다는 자체도 고문이었고 말이다.

잠이 오면 다행인 노릇이지만 예민한 타입이라면 거의 뜬눈으로 앉아서 보내야 했다. 태일이 몸서리를 치며 말했지만 시율은 느긋하기만 했다.

“그래? 난 집에서 뒹구느라 몰랐네.”

반강제로 정숙해야 했던 태일과는 반대로, 시율은 시간 가는 걸 모를 만큼 즐겁고 달콤한 하루를 보낸 터라…….

“아야!”

[형님?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냐.”

다시 자나 싶던 해인이 그의 팔등을 야무진 손끝으로 꼬집은 건 그때였다. 뚱하니 그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얄미운 소리를 참 잘해.’

멀리 있는데도 주인은 주인인지, 놀리는 건 못 봐주겠는 모양이다.

‘얌마, 너 함께 하루를 침대에서 보낸 사람을 막 꼬집고 그래도 되는 거야?’

‘왜 안 돼? 물 수도 있는데.’

잘도 눈으로 대화하는 둘이었고, 한쪽 어깨에 휴대폰을 걸고 있는 시율을 향해 해인이 무는 시늉을 해 보였다.

이번엔 간지러웠다. 그의 팔을 붙잡고 팔목을 야금야금 깨물었으니까.

[자리 잡으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놀러 오세요, 형님.]

“으음, 봐서.”

[꼭 오세요. 여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아주 멋지더라고요.]

“크리스마스 하면 미국이니까.”

[정말로 여자 친구분이랑 오세요. 맛집 알아둘 테니까…….]

“……끊는다!”

시율은 간지러운 걸 못 참겠는 척, 얼른 통화를 끝내버렸다. 해인은 장난을 치다 말고 반짝 고개를 들어 시율을 올려다봤다.

“좋겠다. 미국!”

해인은 태일이 이제 제가 시율의 여자 친구라는 걸 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되면 같이 공항에 마중 가겠다고 떼를 쓸까 봐 시율이 숨겼기 때문이었다.

둘의 사이는 그냥 얼굴을 아는 거면 족했다.

“가본 적 없어?”

“응! 강은 있어?”

“두 번인가 다녀왔지. 학생 때 교수님 따라서 한 번, 배낭여행으로 한 번.”

“우와, 미국은 어땠어? 뭐가 좋아? 자유의 여신상은 봤어?”

“어땠더라……. 왜? 듣고 싶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해인이었고, 시율은 기꺼이 해인을 제게로 당겨오며 자신이 아는 모든 얘길 나눠줬다.

커다란 팔로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가슴에 등을 기대게 하며, 하루 종일 그렇게 속삭이고 있을 수 있을 것처럼.

***

계속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닥거리다가, 겨우 떨어져서 나갈 준비를 한 건 점심이 다 되어서였다.

오늘 시율은 오후 출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더 이상 게으름을 부릴 순 없었다.

“하아암!”

정작 나가야 할 시율은 아직도 뭉그적거리고 있어서, 해인이 먼저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상체를 일으켰다.

햇살을 받아 역광으로 빛나는, 작고 하얀 몸의 굴곡진 선은,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의 시선을 사로잡기는 딱 좋은 것이었다.

작은 어깨, 그의 손아귀에 온전히 잡히는 부드러운 팔뚝, 가느다란 손목, 우아하고 여린 손끝,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보드라운 턱의 안쪽.

만지면 골골거릴 것 같은…….

“……뭘 그렇게 본대!”

물론 가장 매력적인 건 저 새침한 눈꼬리지만. 빤히 보다 들켰는데도 시율은 느긋한 눈웃음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그냥.”

“나갈 준비나 하라니까, 정말…….”

해인은 너무 대놓고 보니까 부끄러워졌다.

열기 어린 남자의 눈 같은 건 몰랐던 때가 좋았다. 저런 눈을 봐도 그냥 ‘왜 이리 빤히 쳐다보나’ 하고 맹하니 넘어갈 수 있었던 시절 말이다.

저 눈이 바라는 게 뭔지 알게 됐다는 건, 자신에게도 너무 여러 의미가 있었다.

“아깝다.”

“뭐가?”

“이걸 사진으로 담을 수 없다니.”

“……변태야!”

“물론 농담이야. 남기고 싶을 만큼 좋다는 거지. 정말 남길 수는 없는 거고.”

시율이 몸을 일으키며 조금 가라앉은 어투로 덧붙이는 말에는, 음흉하다고 계속 화를 낼 수가 없어졌다.

그건 제가 사진에 찍히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기묘한 무언가지만.

“그런 아까운 짓은 안 해. 그냥, 네가 너무 예쁘다는 거야.”

“……으응. 끄응…….”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 우리한텐 사진 대신 그림이 있잖아.”

“……내가 강을 찍어줄 순 있어.”

“하?”

“찍어서 동물병원에서 파는 거지. 간호사 언니들한테 잘 팔릴걸.”

그림 얘기가 나오자 해인은 부랴부랴 말을 돌렸다.

“장당 500원 정도면 잘 팔……. 꺄악! 이거 놔아.”

“뭐? 500원? 겨우 그거밖에 안 해?”

“간지러워! 간지럽다니까! 꺄흐학,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럼 천 원?”

“아우, 이 아가씨가.”

시율은 이 맹랑한 여자 친구를 다시 쓰러트렸고, 해인은 그의 간지럼 공격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사람일 때는 그다지 날래지 못했다.

몸집이 커진 만큼 붙잡힐 곳도 많았고, 약점도 많았다.

너무 간지러우면 숨이 막히는 법이었다. 해인은 항복이라는 표시로 침대를 세 번 내려쳤지만 그는 적당히 하는 법이 없었다.

“끄아! 항복! 하, 항복!”

그를 놀린 죄로 붙잡혀서는 눈물이 나올 때까지 여기저기를 괴롭힘 당하다가, 얼마나 허우적댔는지 어느 순간에는 다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쳐서, 언제 장난쳤냐는 듯 키득대며 입술을 겹쳤다.

너무 웃었더니, 해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조금 나고 있었다.

“좋아. 나한테 10%쯤 주는 거라면.”

“에…… 어쩔까? 모델료로 줄까나.”

“돈 말고 다른 걸로 줘도 되는데.”

다른 거? 돈도 없지만 다른 것도 없는…….

“키스라거나.”

“우리가…… 바, 밤새 뭘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시율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그 손이 허리를 또 쓰다듬어 와서 해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는 이쪽으로도 적당히가 없었다.

어느새 그의 손이 슬금슬금 해인이 감고 있던 시트를 빼앗아가고 있었다.

“사이좋은 거. 그리고 지금은 더 사이좋은 거.”

“말이나 못 하면! 강, 출근 안 해?!”

“……지각할 수도 있지, 뭐. 살다 보면.”

그가 원하는 건 항상 같았다. 같이 있고, 손을 잡고, 키스하고. 그러다가 쓰다듬고 떨어지지 않는 거. 시간들이 허락하는 한 그렇게 오래 있는 거.

물론 해인도 같은 걸 바라는 만큼, 웬만해서는 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말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빽 소리치고는 새빨간 얼굴을 하더라도 말이다.

“양기가 남아돌아?!”

“내가 원래 한 건강 하지.”

“아우……!”

걱정이 앞섰지만 결국엔 그를 거부하지 못하는 자신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저를 바란다는 사실에 우선은 기쁘고 마는 것을.

해인은 못마땅한 기색을 그리 오래 드러내지는 못했다.

***

결국 병원에는 지각해버렸다.

어쩌면 시율은 일부러 오늘을 오후 출근으로 잡은 걸지도 모르겠다.

태일이 어제 출국한다는 사실에 휴가를 낸 것부터, 다음 날 늦게 출근하는 것까지 모든 게 계획된 걸지도…….

“재료는 그 연필 하나면 되는 겁니까?”

“음, 색연필 같은 게 더 있으면 좋겠지만…… 이제는 취미로만 그리는 거라 달리 재료가 없어요.”

“흠.”

뭐, 늦었다고는 해도 환자가 없어서 느긋한 날이었다.

시율은 방유나가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해서 휴게실로 구경하러 와 있었다. 시율 말고도 다른 여직원 몇 명이 근처에서 구경 중이었다.

그녀들의 관심은 대부분 다음엔 저를 그려주지 않으려나, 하는 것이었다.

“다음엔 나도 그려주라.”

“나도! 조금 말라 보이게 그려줄 수 있어?”

“그럼 나는 여기 점을 빼고 쌍꺼풀을…….”

“네, 고객님. 치킨 10마리 피자 10판 되겠습니다.”

하지만 방유나는 시율이 형성해버린 가격대 이하로는 받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율에게로 직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쏠렸지만, 그런다고 끔뻑할 남자는 아니었다.

그림이란 게 사실 그리란다고 뚝딱,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의 노력과 시간 정성은 또 어떻단 말인가.

10분 만에 멋진 그림을 그릴지언정, 그렇게 그리기 위해서는 10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림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해인은 그게 비싸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비싸!”

“지인 할인가 같은 거 없어?”

“이미 할인된 가격입니다만. 무려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가!”

“결국 같다는 소리네…….”

“치사하다, 야. 왜 그럼 니가 그린 개나 고양이들한테는 그렇게 안 받고.”

“어머, 그럼 언니들도 그렇게 작고 귀엽든가요. 우선 내 예술 욕구를 자극하셔야죠. 내 심미안이 좀……. 호호.”

방유나는 홍홍, 콧노래를 부르며 A4 용지 위에 해인을 그려나갔다.

연필이 사각사각 움직이며 그럴싸한 형체를 만들어 갔고, 제법 해인의 얼굴 같은 게 보이는 즈음이었다.

노려보듯 구경하던 사람들은 어느샌가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때 보니까 여기가 좀 더 넓었어.”

“에, 아니지. 입술이 좀 더 작지 않았어?”

“속눈썹이 이렇게 많았나?”

“그보단…….”

해인은 제 얼굴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적나라하게 체감하다가, 도저히 그걸 참을 수가 없어졌다.

물론 얼굴이 비슷하게 나올수록 뜨끔한 통증이 동반된 것도 문제였지만.

“먀악!”(그만해!)

바로 옆에서 구경하던 해인은 그만 못 참고 앞발로 냅다 연필을 때려버렸다.

방유나의 손에서 연필이 날아간 건 둘째치고, 스케치 한가운데로 시커먼 줄이 그어져 버렸다. 그 바람에 종이에 구멍까지 났다.

“얌마!”

흔한 고양이의 장난에 시율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해인이 단순히 심술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해인은 혼나자마자 당장에 쌩, 하니 휴게실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시율은 그걸 이해할 수 없어서 인상을 구겨댔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깜짝이야. 아니, 쌤, 뭘 그렇게 화를 내요? 고양이들이 그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원래 움직이는 거만 보면 못 잡아서 안달이잖아요.”

“……아니, 그래도.”

자길 그리는 건데. 시율은 차마 말은 못하고 답답한 속만 끓였다. 방유나는 첫 그림이 망쳐 버렸지만 차라리 잘됐다는 투로 그림을 구겨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다시 그리죠, 뭐.”

“미안하네요.”

“받은 만큼 제대로 해야죠. 그리고 그림이란 게 원래 두세 번째가 잘 나와요. 이건 연습.”

첫 번째 그림은 그렇게 해인의 방해공작 덕에 휴지통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언니들은 도움이 안 되니까, 강샘만 도와주는 게 낫겠어요.”

“그러죠.”

***

문간 뒤에 숨은 해인은,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방유나와 시율이 합심하여 저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방유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시율은 그 뒤편에 서 있었다.

‘둘이 너무 가까운 거 아냐……?’

옆에 의자가 많이 남아 있는데도 옆에 앉지 않고 서 있는 게 그나마 시율이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까워 보였다.

그림보다는 둘 사이를 방해해서 떨어뜨리고 싶었지만, 시율이 엄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어서 해인은 휴게실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 귀신같은 남자는 해인이 또 방해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코는 좀 더 작고, 콧대는 의외로 있어요.”

“음, 눈은요? 이대로 괜찮아요?”

“좀 더 커요. 속눈썹은 가늘어서…… 뭐랄까, 촘촘한데 가벼워 보이는 느낌.”

“이런 느낌이겠군요.”

“비슷해요.”

볼 수가 없어서 그림이 자신을 얼마나 닮았는지 모르니 차라리 몸살은 나지 않았다. 다만 불안함은 점점 강해졌다.

해인은 이게 그림에 대한 불안함인지, 시율과 방유나가 너무 가까운 것에 대한 불안함인지는 딱히 정의할 수 없었다.

30분쯤 지났을까. 잘 진행되나 싶었는데 방유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음, 뭔가 아닌데.”

아무리 시율이 설명을 잘해도, 방유나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어도, 그것만으로 그럴싸한 초상화가 나오질 않는 듯했다.

“제가 봐도 뭔가…… 역시 실물을 한번 봐야겠어요. 강쌤, 사진 찍는 게 무리면 몰래 한번 병원에 데려오시면 안 돼요? 감만 조금 잡으면 될 것 같아요.”

“……그럴까요.”

“네. 그래야 확실하죠.”

“알겠습니다. 데려와 보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해인은 이 계획은 자신이 알아버린 시점에서 글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몰래 하라고 귀띔을 줄 수도 없고. 대체 어쩐다.

***

해인은 일단 뭐라도 말해보기 위해 시율의 뒤를 따라 그의 진료실에까지 쫓아갔다.

시율은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다가 일이 조금 밀린 모양인지, 오른손에 진료 차트를 잔뜩 챙겨 든 채였다.

오늘따라 그는 왠지 조금 정신이 없어 보였다.

‘뭔가…… 이상한데?’

바빠서 그런 걸까?

그의 어디가 이상하냐고 물으면 콕 짚기는 힘들었지만, 그의 묘하게 좁혀진 미간이라거나, 재촉하는 발걸음이 전부 이상했다.

깜빡이는 눈꺼풀 같은 게 불안정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늘 느긋하게 구는 그다 보니 조금만 달라도 티가 났다.

특히나 하루 24시간 그를 관찰하는 해인의 눈에는…….

“에?!”

투드득.

그건 그냥 순식간이었다. 시율이 진료실로 들어서서 자신의 책상 안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넘어진 건 말이다.

그가 들고 있던 차트들이 바닥에 정신없이 흩어졌고, 시율은 잠시간 그대로 바닥을 짚은 채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뭐랄까…… 그래, 마치 어지러운 것처럼.

기운이 매우 부족한 사람처럼.

“냐악?!”(그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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