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짐승 앞에 고양이
“……뭐, 그쪽을 골랐어도 엄청 불행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혀, 형님……?”
“왜.”
“……제 편이신 건 맞죠?”
“물론 네 편이지만 그 남자도 그렇게 싫지는 않더라고.”
내 여잘 건드린 것도 아니고. 시율이 웃으며 말하자 태일은 툭 건드리면 정말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역시 태일보다는 이하은 쪽이 강한 성격 같았다. 여러 면에서.
“장난이야, 인마.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잘 다녀와.”
“……예.”
“뭐, 겨우 미국이니까.”
겨우라니, 누가 보면 옆 도시로 가는 줄 알겠다. 시율은 지금 기분 좋기가 큰 축제를 앞둔 사람 같았다.
반면 해인은 나갈 시간이 가까워지자 시계를 보며 불안하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중에 돌아오면 또 질리게 보겠지.”
“그렇겠죠?”
“그럼, 돌아올 거잖아.”
“그러네요. 왠지 10년 뒤에도 형님은 그대로일 것 같아요. 이 자리에서, 이렇게 웃고 계실 것 같아요.”
“그랬으면 좋겠네.”
누군갈 찾으러 다니느라 바쁘지만 않다면, 여기 있겠지.
시율은 담백하게 웃으며 그대로 시계를 가리켰다. 배웅해줄 시간이었다.
“잘 가라.”
“……같이 안 나가세요?”
“엑? 형님도 같이 공항에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시율은 왜 벌써 작별 인사를 하는 걸까. 그는 마치 당장 헤어질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다.
“나가. 근데 공항엔 안 가.”
“……예?”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당연히 함께 갈 줄 알았던 터라 태일과 하은, 기도는 당황한 얼굴이었고, 해인은 때아닌 소리에 뾰족 눈을 해야 했다.
그럼 휴가는 왜 낸 거래, 이 남자!
“앞에까진 나가줄게.”
시율은 굉장한 인심 쓰듯 말하고 있었다.
대체 태일의 출국보다 중요한 볼일이 뭐란 말인가.
***
시율이 한 매정 하는 남자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형님…… 정말 안 가시는 겁니까?”
“안 갈 건데.”
“……에.”
“내가 간다고 뭐 달라지나? 출국하는 거 10분 보자고 3시간이나 쓰긴 좀…….”
그는 진심이었다. 주차장까지 나왔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공항까지 왕복하면 다녀오는 데만 3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해인이 불만의 뜻으로 아까부터 그렁그렁 목을 울렸지만 시율은 들은 척 만 척이었다.
태일 역시 꽤나 섭섭한 눈치였지만 시율은 그런 데 휘둘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사내자식의 불쌍한 눈 같은 건 웃으면서 씹어 먹었다.
“……형님, 편지 쓸게요.”
“귀찮아. 메일 보내.”
“형님! 너무하시는 거…….”
“됐고, 시간 됐다. 얼른 차나 타.”
이제는 거의 내쫓는 수준이었고, 태일은 정말로 등 떠밀려 차 문을 열어야 했다.
“태, 태일아…….”
“내가 같이 갈게. 어? 편지도 괜찮아, 나는.”
하은이 불안하게 따라붙고 기도가 다독여 봤지만 태일에게는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흐이엥.”
“……개냥아.”
지켜보던 해인 역시 못 참고 슬픈 소리로 울었다.
딴에는 안 울겠다고 손에 바짝 힘을 주고 있던 참이지만, 슬픈 걸 안 슬픈 척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해인에게도 태일에게도 말이다.
시율의 품에 안겨 있는 해인을 돌아보는 태일의 얼굴이 또 계란프라이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물론 시율은 당장에 질색했다.
“야야, 울지 마.”
“……요즘은, 개냥이가 저한테 안 오는 거 아십니까?”
“아마 너랑 정을 떼야 한다는 걸 아는 모양이지.”
“계속, 형님한테만 안겨 있고…….”
저 미련 넘치는 눈을 보건대, 해인을 한번 품에 안아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마지막이었고, 떠나는 길이니까…….
시율은 아주아주 안 내킨다는 얼굴로 물었다.
“……한번 안아볼래?”
“네…….”
하지만 웬걸. 당장 두 손을 벌리고 품을 옮겨 갈 줄 알았던 해인이 극렬한 거부를 했다.
태일이 손을 뻗어 오자 시율의 품으로 파고들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은 것이다.
‘안기면 울 것 같단 말이야!’
그에 태일은 마치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이건 엄청난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개, 개냥아……?!”
“……어쩌냐. 안 간다는데.”
“미야! 먀!”(주인! 행복해야 해!)
반면 시율은 너무 대놓고 기뻐했다.
어느 정도냐면, 자신의 팔과 허리 사이로 숨어드는 해인을 굳이 반짝 공중에 들어서는, 통통한 오른쪽 앞발을 태일을 향해 손처럼 흔들어 주는 서비스까지 해 보였다.
그것도 대사까지 쳐주며.
“바이, 바이.”
그를 지켜보는 한 마리 고양이와, 두 남녀는 차마 입 밖으로 말은 못 내뱉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해야 했다.
‘잔인해…….’
‘야, 얄밉다.’
‘나쁘다!’
태일은, 그렇게 떠났다. 슬픈 배웅을 받으며.
***
“미이이야아앙……!”(주이이인이이……!)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보며 해인은 울음 반, 슬픔 반, 그리움 많이로 범벅된 소리를 흘렸다.
품에 한 번 안길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태일의 품에 하루 종일 달라붙어 울어버릴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먀먀앙…….”(정말 가버렸어…….)
“휴, 가긴 가는군.”
“캭!”
“안 갈까 봐 걱정했잖아.”
이 매정한 남자는 해인과는 반대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겨서 안 떠날까 봐 그걸 걱정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해인은 버둥대며 소리쳤다. 이 남자는 고양이 말을 알아듣는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
“냐악냑!”(이럴 거면 연차는 왜 낸 거야!)
“자, 우리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볼까. 진정한 우리 집으로.”
“냑?! 냑냑냐아!”(엉?! 공항도 안 따라갈 거면서!)
“말했잖아. 다른 중요한 일이 있다고.”
그게 설마 야한 짓은 아니겠지! 해인은 진정으로 불안해졌다.
****
“이게 다…….”
시간까지 재가며 바쁘게 태일을 쫓아낸 이유가 바로 이것들 때문이었나 보다.
해인은 그사이 시율의 재촉에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변하자마자 곧장 밀려들어오는 커다란 물건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들어갑니다! 조심하세요!”
“다쳐요. 거기 비켜주세요!”
“뭐, 뭐야, 뭐야?”
“옷장, 화장대, 책상.”
시율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가르쳐줬지만, 해인도 그 정도야 가구 포장을 보면 짐작할 수 있었다.
해인이 물은 건 대체 이런 걸 다 언제 주문했는지였다.
그것도 태일이 떠나는 날에 시간까지 칼같이 맞춰서……. 하여간 귀신같은 남자였다.
태일이 비우고 떠난 방은 빠르게 하얀 가구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치수는 언제 잰 건지 착착 사이즈까지 맞아서, 해인은 구경하는 걸로 벅차졌다.
“아, 이쪽이 남편분? 여기 사인 좀 해주시죠.”
“빠짐없이 도착한 겁니까?”
“네, 주문하신 대로 전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잠깐! 남편 아니잖아! 신혼부부 아니잖아! 그리고 이게 다 얼마치야?!
해인이 겨우 황망한 정신을 수습했을 때는 이미 그럴싸한 방이 완성된 다음이었다.
전문가로 보이는 남자 여럿이 달라붙으니 뚝딱 여자 방이 하나 꾸며지는 대는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럼, 다음에 또 이용해주세요.”
배달에 조립까지 끝마친 가구점 직원들이 우루루 빠져나가고 집에 정말 단둘이 남았을 때.
해인은 시율에게 바가지를 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 이런 건 나랑 상의를…….”
“뭐가, 내 집에 내가 가구 좀 산 건데.”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넌 분명 반대할 거잖아? 보나 마나 언제 가야 할지 모른다는 소리를 하면서. 하루를 살아도 편하게 살자고.”
그리고 벌써 알 수 있었는데, 만약 결혼한다 해도 저는 절대로 시율을 이길 수 없다는 거였다.
이론으로 말발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으…….”
“네 방, 만들어 주고 싶었어. 숨어서 지내는 거 힘들었잖아.”
“……그치만.”
“그냥 기뻐해주면 안 돼?”
시율이 곁으로 다가와 느리게 어깨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물론, 기뻤다. 너무 고마워서 말이 안 나올 때가 있었다. 꼭 지금처럼. 다만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건지 자신이 없을 뿐이었다.
해인은 숨 막히는 사람처럼 끙끙대다가 겨우 말했다.
“……고, 고마워.”
“그래. 그거면 됐어. 내가 바란 건 그냥 그거거든.”
“너무…… 많아서…….”
“많기는? 방에 안 들어가서 못 산 것도 있는데.”
“그리고 내가 작은 방 써도 되는데…….”
시율이 방이나 구경하자는 듯, 큰방으로 해인을 이끌었다.
이 집에는 태일이 쓰던 가장 큰방과 시율이 쓰는 중간방, 옷방으로 쓰는 작은방이 있었다.
그리고 시율이 해인에게 꾸며준 건 하필이면 가장 큰방이었다.
어차피 비었으니 방을 하나 준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집주인인 시율이 가장 큰 방을 쓰는 게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다. 염치와 도의를 아는 인간으로서 해인은 기쁨과 미안함에 동시에 떠밀리는 중이었다.
“음, 짐 옮기기 귀찮잖아.”
“……나 울기 싫어!”
해인은 울컥, 소리쳤다.
이러기 정말정말 싫은데, 그래서 태일이 떠나는 것도 겨우 참았는데. 이러다 또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저에게 잘해주는 걸까. 차라리 생색이나 내면 좋겠는데.
“그렇게 마음에 들어? 어때, 태일이 녀석 가버린 건 생각도 안 나지?”
“……생각은 나.”
“크큭, 울지만 마. 그러면 돼.”
혹시, 일부러 기쁘게 해주려고 그런 걸까.
태일이 가고 나면 분명 상심할 걸 알아서 이런 걸 준비한 걸까. 해인은 울음을 참느라 붉게 물든 눈을 애써 비비적거리며 방을 훑어봤다.
하얀 가구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여성스러운 것들이라, 시율 본인에게는 쥐꼬리만큼도 필요가 없어 보였다.
“……예뻐.”
“그래? 하얀 거랑 원목 느낌 중에 고민을 좀 했거든.”
태일의 방은 본래 벽이 남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 덕에 하얀 가구들이 적당히 세련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해인은 이런 예쁜 모양의 방을 가져보기는 처음이었다.
본가의 부모님과 살던 집은 초등학생 때부터 쓰던 곳이라 낡고 칙칙한 갈색 가구와 할머니가 물려주신 자개 장식장 따위가 대충 뒤섞여 있었다.
독립하고 살았던 작업실은 일을 하는 곳이다 보니 예쁘게 꾸밀 수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물감을 써대니 남아나는 가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이 얻어 온 가구였는데, 여기저기 흠집이 나거나 알 수 없는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들이었다.
이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지금 고양이 모습이었다면 열심히 귀를 파닥거렸을 텐데.
“……내가 살아 본 방 중에 최고로 예뻐!”
“방이 있었던 적은 있다는 거네?”
“그야…… 뭐.”
“내가 몇 번째 주인이려나.”
시율이 그런 걸 궁금해하는 와중에, 해인은 문득 자신의 방에서 이상한 점을 한 가지 발견했다. 왜 이 방에는 모든 가구들이 있는데…… 딱 하나만 없는 걸가.
“있잖아, 강.”
“으흠?”
“침대만 없는데?”
“안 샀는데. 어차피 밤에는 같이 잘 건데, 뭐.”
설마 했는데 역시나.
시율의 끔찍이 다정한 시선이 돌연 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애써 회피해봤지만, 이젠 단둘뿐이었다.
이 집의 어디에서도. 딱, 둘뿐.
“그렇지?”
“……으응.”
시율이 대답을 요구하며 불쑥, 가까이 다가왔다.
그저 느린 손길로 허리를 끌어안으며 저를 보게 했을 뿐인데도, 해인은 귀 끝까지 발갛게 달아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상황이긴 한데, 이렇게까지 두근거릴 줄은 몰랐다.
이 순간 속에서 간질간질한 것들이 막 치밀어 올라 목을 조르는 듯했다.
“에…… 잠깐.”
“뭐가?”
“나, 낮인데……?”
“밝으니 좋네.”
그가 기분 좋게 대꾸하며 촉, 촉, 해인의 뺨과 이마에 자잘한 키스를 쏟아냈다.
말하는 와중에도 그의 손이 허리를 끌어안고 제게로 가까이 당겨가서, 해인은 두 손으로 시율의 가슴팍을 밀어내야 했다.
하나도 밀리지 않기는 했지만.
“……아니, 그치만…….”
“무슨 문제 있어?”
문제라면, 그렇지 않아도 애정공세가 극심한 이 남자가 앞으로 더 걷잡을 수 없게 될 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바짝 달라붙은 그의 몸이 단단한 근육이 느껴질 만큼 저에게 익숙하다는 점.
이 순간 저도 모르게 말랑말랑하게 마음 놓고 녹아버릴 것 같다는 점.
이래서야 정말 신혼부부 같았다.
누가 돌아오지 않는 둘만의 공간이라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아무 때나 키스하고, 아무 때나 달라붙어 있어도 거리낄 게 없어.
허겁지겁 떨어지지 않아도 돼.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아무 문제 없는데. 우리가 이런 시간을 보내기에는 말이야.”
“꺄윽.”
“……방금, 그 소리 뭐야?”
시율이 돌연 귓가에 입술을 파묻어서, 그 느낌이 너무 따듯하고 생경해서 해인은 저도 모르게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난 절대 야한 생각 안 했거든? 그냥 간지럼 탄 거거든?
“모, 모르겠는데? 내가 안 그랬는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해인은 도망가려고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이제 이 집에 그런 장소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너무 단단하게 붙잡혀 있었다.
도저히 그의 품에서 도망갈 수 없자 해인은 시율의 옷깃만 꽉 붙잡았다.
태일이 멀리 가버렸다는 데 슬퍼할 겨를은, 아무래도 없을 것 같았다. 시율에게 있어서는 반강제였던 제어장치가 없어졌을 뿐인 것 같으니까.
해인은 마른 목을 축이며, 먹이로 붙잡힌 짐승처럼 불쌍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이 순간 시율이 영락없는 포식자의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강하고, 매서운, 굶주린 짐승 같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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