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첫눈과 고양이
아침에 병원에 벗어둔 옷은 어느새 시율의 차 뒷좌석에 얌전히 개켜 있었다.
이게 아니라고 해도 그의 차 트렁크에는 해인의 비상용 옷이 한가득이었고, 누가 보면 직업이 옷 장사나 코디인 줄 알 수준이었다.
시율이 수의사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의 취미를 여장으로 의심할지도…….
‘무슨 남자가 여자보다 옷을 예쁘게 갠담.’
마치 매장에서 팔 법하게 곱게 개어둔 옷을 다시 입으며 해인은 시율이 못하는 게 뭐였나를 생각해봤다. 전에 보니 그림을 엄청 못 그리기는 하던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방유나의 손을 잡은 건 너무했다고.
자길 좋아했던 여잔데. 막 손을 그렇게. 흥흥.
해인은 말하기도 사소한 조그만 질투를 속으로 삼키며 얼른 옷을 하나둘 주워 입었다. 날이 추워서 알몸이 되는 건 절로 몸이 오싹해지는 일이었다.
시율이 차에 히터를 틀어주기는 했지만 맨살에 닿는 가죽 시트는 여전히 차가웠으니까.
새삼 털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해인은 흥얼흥얼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불렀다.
본래는 고양이로 집에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모처럼 첫눈이 와서 둘이 공원 산책을 좀 하기로 했다.
손잡고 눈 내리는 공원을 걷는 건 해인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 상상 속에서 자신은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반지는 오늘 주는 게 아니겠지?’
조만간 여행을 가니까 그때나 주려나. 반지를 주면 그걸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본다는 듯 완벽하게 놀랄 수 있을까?
해인의 모든 생각은 지금 기, 승, 전, ‘반지’로 끝나고 있었다.
“멀었어?”
“아니, 다 입었어.”
시율이 추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차 문을 열자, 그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해인에게 양말 한 쌍을 내밀었다.
“이거 신어. 발 시리겠다.”
“응? 어디서 났어?”
“산 건 아니고, 내가 신으려고 병원에 가져다놨던 거야. 비 와서 젖으면 갈아 신으려고. 새거니까 안심하고 신어도 돼.”
그의 손짓에 해인은 자동차 뒷좌석에 걸터앉은 채로 밖으로 발만 빼냈다. 시율이 신발을 벗겨줘서, 얇은 검정 스타킹 위로 그가 준 회색 양말을 겹쳐 신었다.
남자 양말이라서 그런지 발이 작은 해인이 신자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레그워머 같아 보였다.
원래 그런 패션으로 보일 만큼, 신고 있던 운동화와도 아주 잘 어울렸다.
“따듯해?”
“응.”
해인은 그가 가져다준, 두껍고 보송보송한 양말이 마음에 들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것도 아닌 것에 신이 나서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졌다.
“다행이네. 그럼 가자.”
차에서 내리면서도 발을 내려다보고 있는 해인에게 시율이 자신의 팔꿈치를 내밀었다. 팔짱을 끼라는 뜻이었고, 해인은 냉큼 매달리며 그의 팔뚝에 발그레한 뺨을 기댔다.
눈이 내리는데도, 전혀 춥지 않았다.
다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이렇게 저한테 열심인 남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은.
그건 아마 다시 태어나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
병원과 아파트 사이를 잇는 공원은 시율이 출퇴근할 때 자주 가로질러가는 곳이었다.
평소에는 15분이면 충분했지만, 외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제법 긴 코스였고, 오늘은 눈이 내려서 걷는 모든 곳이 운치가 있었다.
까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는 입을 벌리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았다.
물론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만 말이다.
해인은 한쪽 팔은 시율에게 팔짱을 낀 채로 눈송이를 잡아보겠다고 요리조리 몸을 움직였다.
시율이 그러다 넘어지겠다며, 앞을 보고 걸으라고 타박했지만 해인은 그러면 그의 팔을 더 꼭 껴안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넘어지면 잡아주겠지, 뭐!’
그 잔망스러운 얼굴은 빤히 그런 뜻이었고, 그러면 시율은 못 이기는 척 웃어줬다.
“발은 괜찮고?”
“양말 신어서 따듯해!”
“하여간 넌 너무 얇게 입어.”
“하여간~ 강은 걱정이 너무 많아.”
서로 매일 하는 핀잔을 한 번씩 주고받으며 그냥 그렇게 함께 걷는 걸로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이 자체로 즐거웠다.
함께한 겨울은 따듯하게 기억될 게 분명했다.
둘 중 하나가 없다면, 그건 무더운 여름이어도 춥고 슬프리라.
얼마 안 가 그 여름이 덮쳐 올 거라는 사실이 지금을 더 의미 있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녁이 되니까 갑자기 춥단 말이지.”
“그러게?”
“아, 초상화는 다음 주쯤 그려준다던데. 기대되네.”
잘 걷고 있던 해인은 묘하게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다. 몸이 거부하는 이 느낌은, 좋지 못했다.
“……나도!”
“응?”
“잘됐으면 좋겠어!”
일부러 기운차게 말했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이기도 했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소용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너무 강했다. 이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인지는 몰라도.
외면해보려고 해도 절로 미간이 일그러져서, 그의 예리한 눈썰미를 피할 순 없었다.
“너…… 어째 컨디션이 나빠 보인다?”
“그, 그래?”
“갑자기 안색이 좀 파리한데.”
“……숙취 때문인가? 아니면 조명색이 이상해서 그런가?”
해인은 과장된 손짓으로 깜빡, 깜빡 불이 나갈 것 같은 주황색 가로등을 가리켰다.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해인이 왜 이상하게 구는 건지 생각해봤지만 달리 짚이는 곳이 있을 리 없었다.
설마하니 사신의 주술에 걸려서, 추리가 정체에 근접해지려고 하면 몸에 탈이 난다는 걸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가 아무리 머리를 써도, 짐작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었다.
“……적당히 마셔야지 그러게.”
“헤헤…….”
“꿀물이나 코코아를 먹이고 나올 걸 그랬나?”
“난 코코아가 더 좋더라!”
결국 그는 해인의 안색이 스치듯 나빠졌던 건 숙취 탓이라고 납득한 듯했다. 다른 얘기를 하자 금세 괜찮아지기도 했고 말이다.
“하여간 단거라면 정신을 못 차리지.”
“응!”
“이거라도 먹을래?”
시율이 걷다 말고 자연스레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줬다. 그가 곧잘 먹으라고 주는 커피맛 사탕이었다.
해인은 당연히 그가 먹기 위해 가지고 다닌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해인에게 먹이기 위해서였다.
그나마 해인이 잘 받아먹는 게 이런 자잘한 단 음식이었으니까.
오늘도 사양 않고 받아먹는 해인이었고, 포장지 쓰레기는 당연하다는 듯 시율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사탕을 주는 이유? 먹을 때의 모습만큼은 햄스터를 닮아서일까.
‘먹이를 주는 느낌이랄까.’
그걸 알면 안 먹겠다고 떼를 쓸 테지만.
시율의 속내도 모르고 오물오물 부지런히 입안으로 사탕을 굴리던 해인이 동작을 멈춘 건, 겨울이라 멈춰버린 분수대를 앞을 지날 즘이었다.
“음?!”
“……왜 그래?”
해인이 생쥐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동그란 눈을 뜰 때면, 꼭 사건이 터졌다. 있을 리 없는 레이더를 머리 위로 켠 게 보였다.
시율은 불안했다.
‘그냥 둔하고 태평한 햄스터로 있어줘! 편하고 얼마나 좋아!’
하지만 해인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마침내 레이더가 탐색을 끝냈는지 말릴 새도 없이 한쪽으로 뛰어가 버렸다.
“주인 목소리다!”
“엥?”
“이쪽이야!”
다다다 뛰어가 버리는 해인이었고, 시율은 어쩔 수 없이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양이는 고양이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얌마!”
고양이보단 햄스터였으면 싶은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해인이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그러면 참 편할 텐데.
***
“어머, 어머.”
해인은 수풀 뒤에서 숨을 죽였다.
부끄러운지 두 눈을 가리는 시늉을 하긴 했지만 결국은 하나도 빠짐없이 태일과 이하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웬일이야. 웬일!”
“내가 왜…….”
한편, 시율은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자신이 왜 숨어서 저 녀석 키스신을 훔쳐봐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정확히는 쫓아왔더니 둘의 분위기가 거시기 거시기 했고, 저쪽 눈에 띄기 전에 해인을 데리고 몸을 숨겼을 뿐이지만 말이다.
아파트 뒷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나 싶던 이하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태일에게 매달리더니 발꿈치를 들었다.
그리고 둘은 그대로 키스했다.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저 둘도 해인과 시율처럼 첫눈을 맞아 산책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기, 그럼 내일 봐, 태일아!”
태일은 입술을 가린 채 멍하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이하은은 늘 그랬듯 줄행랑을 쳤다.
기습을 당한 건 태일 쪽이었다.
하긴 태일한테는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구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커플이 키스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긴 아는데 지금 상황이 못마땅한 시율이었고,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건지 알 수 없는 해인이었다.
“풋풋하다잉.”
해인은 달아오른 두 뺨을 손으로 감싸며 영화에서 러브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태일의 키스신에 충격 받지 않는 걸 기특해해야 하는 걸까.
“이봐.”
“응?”
시율은 여전히 저쪽에 눈이 팔려 있는 해인의 팔뚝을 잡아 자신에게 상체를 끌어왔다. 그리고 돌려세우며 입술을 겹쳤다.
갑작스레 키스하자 해인은 그대로 잔디밭에 주저앉아버렸다.
쪼그려 앉아 있던 터라 뒤로 털썩 넘어진 수준이었고, 그대로 시율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왔다.
시율은 가볍게 눕히며, 가볍게 입술을 덧대며 속삭였다.
“남의 키스신에 열광할 때가 아니잖아.”
그러곤 아직도 사탕이 남아 있는 해인의 입안 깊숙이 파고들며, 저를 좀 보라고 졸라댔다. 키스는 집요하고 달았다.
놀라서 움찔거리기만 하나 싶던 해인은 이내 그의 입맞춤에 적극 응했다.
기꺼이 입술을 열고, 체온을 겹치며, 이 모든 순간의 감각을 만끽했다.
숨을 쉬기 위해 조금 떨어졌을 때는, 먼저 그에게 입술을 마주 대며 기쁘게 목을 울렸다.
“강, 한 번 더 해.”
미등에 비치는 행복한 뺨은, 마치 첫눈 같았다.
아름답고, 덧없이 녹을 것처럼 사랑스러웠다. 무수하게 그의 눈에 박혀와 잊을 수 없게 했다.
얼핏 따듯한 것 같은, 겨울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이제는 시율의 집이 될 거실에는 모든 멤버가 모여 있었다. 태일과 이하은, 김기도. 당연히 고양이인 해인도.
비행기가 뜨기 정확히 5시간 전이었다.
여기서 공항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렸고, 미국행 비행기는 3시간 전에는 가서 수속을 해둬야 해서 30분 뒤면 태일은 이 집을 떠나야만 했다.
정말, 마지막이었다. 태일은 언제 또 이렇게 다섯이 모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아까부터 울 것 같은 눈이었다.
“이봐, 이하은 씨.”
“네?”
“정말 괜찮겠어? 이런 녀석인데. 영 못 미덥잖아.”
시율이 유일하게 울 것 같은 태일을 가리키며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당사자를 옆에 두고는 잘도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모자란 녀석인데 내 눈에는.”
“……그런 면까지 좋아하는걸요. 저라고 뭐, 완벽한가요?”
이하은 이제야 좀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동안은 여러 혼란으로 뒤섞여서 계속 불안한 눈이었는데.
“이 선택,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네, 그간 바보같이 살아온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요. 이제라도 채우고 싶을 뿐이에요.”
“그야 그렇겠지만…….”
의외로 대답은 단호했고, 결연했다.
하나도 망설이지 않는 얼굴이라 도리어 놀란 건 시율이었다.
“앞으론 좀 더 저에게 솔직하게 살려고요. 겁만 내며 주변의 소리에 휩쓸리다가……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뻔했어요.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요.”
“……그렇군.”
“그렇게 끝날 뻔했다고 생각하면…… 그게 더 후회되는 일이에요.”
적어도 이번엔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본인은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시율은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후회하기엔, 지금 너무 행복해요.”
“그래 보이네.”
“하지만 제가 행복하겠다고…… 못 할 짓을 한 것도 사실이라…… 자숙하면서 살려고요.”
“뭐, 한국을 당분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강 선생님, 아니 시율 씨에게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나한테 감사할 게 뭐 있나. 그 약혼자 쪽한테 감사해야지.”
대놓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강시율뿐일 것 같았다. 이하은은 얼핏 놀란 기색이었다. 너무 정곡을 찔린 탓일까.
이내 부끄러운 얼굴로 주섬주섬 내뱉는 건 죄책감이나 미련보다는 추억, 감사, 그리고 반성이었다.
“맞아요. 맞는 말씀이에요. 평생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안하다고는 말했는데…… 그 소리보단, 고맙다고…… 해달래요.”
“헤에, 약혼자 말이지? 그 양반 엄청 남자답네.”
“태준 선배가…… 저를 사랑한다고 처음 느낀 게, 저를 놔줬을 때예요. 아이러니하죠? 사실은 내내 믿을 수 없었거든요. 날 참 좋아해주고 위해주고 아껴준다는 걸 알았지만…… 날 사랑한다는 건 실감이 나질 않았었는데…….”
“…….”
“아무리 말로 들어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제가 이렇게 잘못했는데도…… 행복하라고 말해주니까……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사랑받았다는 거요.”
해인은 이하은이 느낀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사랑이란 건, 사랑한다고 말로 속삭이는 순간들보다는 별것 아닌 자잘한 순간들에 불쑥 다가와서 느껴졌다.
그가 저를 위해 양말을 챙겨주거나,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주는 그냥 그런 대단치 않은 순간들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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