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양이 키스-81화 (81/114)

81화. 고양이는 심각해

보여달라고 조르는 대신 숨죽이고 있는 편을 택한 건, 시율이 곧 수술에 들어갈 거라는 걸 알아서였다.

얼마 안 가 진료실이 비자 해인은 지나가는 간호사 하나를 붙잡고 조르기 시작했다.

“미야앙.”(문 좀 열어주세요.)

다리에 이마를 문지르며 눈빛 공격을 가하자, 상대는 이유도 모르면서 시키는 대로 하고 말았다.

“개냥아, 안에 강샘 없다니까 그러네?”

“냐앙.”(알아알아.)

“어휴, 자, 봐. 아무도 없지?”

“냥!”(고마워!)

“응? 거기 있을 거니?”

문이 열리자마자 해인은 냉큼 안으로 들어가서 시율의 의자 위로 뛰어올랐다.

간호사에게 보란 듯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녀는 그런가 보다 하고는 가던 길을 가버렸다.

고양이란 원체 뭘 하고 싶은 건지 알기 힘든 동물이었으니까.

‘후후, 이게 바로 완전범죄지.’

해인은 시율이 수술을 끝내고 돌아오기 전에 서랍 속을 보고 나갈 작정이었다.

들킬 일은 없으리라.

서랍을 여는 건 이제 고양이 손으로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몸으로 지낸 지도 열 달쯤 되니, 고양이의 손이 얼마나 많은 걸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우선 떨어트리는 걸 제일 잘했고.

그다음으로는 미는 거. 그다음으로는 쓰러트리는 거. 그다음으로는 넘어트리는 거……. 아, 밥 그릇 엎는 것도 잘하지.

‘뭐, 결국 말썽 부리는 거지.’

아무튼, 서랍 여는 건 나름 기술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문도 열고 창문도 여는 요망한 고양이의 손에 걸리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해인은 지나가는 기척에 신경을 쓰며 시율의 책상 서랍을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열어봤다.

맨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밑에서 두 번째에도 휴대폰 충전기 말고는 별다른 게 없었다.

한 칸 더 올라갔을 때, 해인은 마침내 자신이 찾던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숨겼던 건…….

작은, 상자였다.

정확하게는 반지 케이스. 그것도 해인도 알 만큼 결혼반지로 유명한 모 고급 브랜드의…….

“……에?”

순간 얼마나 얼이 빠졌는지, 해인은 지금 자신이 고양이 모습이란 것도 잊고 사람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내, 내 건가.”

다행히 금세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랍을 닫기는 했지만, 쉽사리 평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뭘 본 건지 순간 납득할 수가 없었다.

***

아까 본 그게 자신의 20년 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반지 케이스라는 걸 해인은 결국 부정할 수 없었다.

딱, 그만한 크기에 그런 상자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건 못 봤으니까.

그리고 시율이 자기 반지를 혼자 사서 끼지는 않을 테니…… 제 것일 확률이 높다는 것도.

‘……이왕이면 목걸이 줄 같은 걸 같이 줬으면 좋겠는데.’

해인은 아직 저에게 준 것도 아닌데 그런 설레발을 치며 목 근처를 긁적였다.

사람일 때는 반지를 낄 수 있지만 고양이일 때는 낄 수 없으니까. 평소에 목걸이로 하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았다. 줄을 좀 짧게 해서…….

‘너무 김칫국인가?’

살짝 그런 생각도 들긴 했지만, 제가 받을 선물을 미리 발견해버렸다는 게 결론이었다.

어떻게 생긴 반지인지도 봐둘 걸 그랬나?

하지만 고양이 손으로 그것까지는 무리였다. 반지 상자는 대체로 슬쩍 민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해인은 머릿속에서 자꾸만 반지가 떠다녀서 그걸 모르는 척하는 게 힘들었다.

시율이 수술을 끝내고 소독약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을 때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으니 말이다.

그나마 지금 고양이라서 표정이 별로 티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수술 잘 끝났고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다행히 건강한 아이라 회복도 순조로울 것 같습니다. 개들도 평소에 운동을 시켜두는 게 중요하거든요. 체력이 있고 없고로 수술 결과가 갈리는 건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으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선생님 말씀 듣고 산책을 열심히 시켰거든요.”

“잘하셨습니다. 말은 쉬워도 실제로 쉬운 일은 아닌데.”

해인은 시율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병원에 따라와서 하는 일도 대부분 그것이었고 말이다.

남들은 결코 못 느낄 만큼 사소한 저 남자의 다정한 면을 발견하는 순간이 행복했다.

“그럼, 퇴원은 언제쯤……?”

“경과를 봐야겠지만 다음 주에는 가능할 겁니다. 더 오래도 괜찮겠지만…… 집에서 통원하는 편이 초코 마음이 편하겠죠.”

물론 반지를 발견한 순간만큼은 아니겠지만.

해인은 예상치 못한 거라 당황하긴 했지만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웃음이 나오는 쪽이었다.

누가 저에게 반지 같은 걸 준 적이 있어야지, 뭐.

그런 너무 평범하고, 흔한 연인들의 행위라서 오히려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해인은 민망함에 시율의 눈길을 자꾸만 피하게 됐다.

반지 같은 걸 주는 건, 너무도 정중한 행위였다.

속박하고 싶다는 소유의 표시인데 거절 못 할 만큼 진지하기도 했다. 물론 반지를 나눈 모든 커플이 결혼을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나, 난 그 서랍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몰라. 정말이라고.’

보호자가 나가고 단둘이 된 다음에는, 해인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릴까 봐 입을 꾹 하니 깨물고는 때아닌 무언 시위를 했다.

어차피 점심 무렵의 병원은 말하고 싶어도 계속 사람이 들이닥쳤지만.

“선생님? 퇴근하시기 전에 시간 나면 어제 왔던 다롱이 보호자한테 전화 좀 부탁드려요.”

“어제면…… 치매 진단 받은 말티즈 말씀하시는 거죠?”

“네, 걱정이 많으신가 봐요. 개도 치매에 걸리는 줄 모르셨던 것도 같고……. 아까 수술하시는데 전화 왔더라고요.”

“알겠습니다. 전화해서 설명드리죠.”

몸을 반쯤만 진료실 안으로 들이민 간호사는 바쁜지 차트를 뒤적이며 빠르게 전달사항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주 전에 교통사고로 뒷다리 인공관절 수술한 요크셔 말인데요. 퇴원하고도 너무 아파한다고 진통제 같은 걸 처방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그래요? 수술은 잘됐는데.”

“그러니까요. 회복 경과도 문제없었어요.”

“음, 그 녀석 엄살이 아주 심하던데……. 주인이 오냐오냐하니까 더 보살핌 받고 싶어서 아픈 척하는 것도 같고. 가끔 그런 습관 든 녀석들이 있어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은 한번 내원해달라고 말해줄래요?”

“네, 그럴게요. 다음 예약 환자는 3시 반……. 어머? 눈이 오네요.”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나 싶더니, 간호사가 웃으며 알려줬다.

“선생님, 첫눈이에요.”

***

시율은 해인을 품에 안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이미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서 첫눈을 구경하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상당히 커 보이는 눈송이가 하늘이 하얘 보일 만큼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그건 나름 장관이었다.

“나가서 볼까?”

“냐냐.”(젖는 거 싫어.)

“그래?”

해인은 시율의 품에 안긴 채로 유리창에 손을 올렸고, 그러자 고양이 발바닥이 그대로 창문에 찍혔다.

밖은 추운데 안은 따듯해서 생긴 습기 위로 말이다.

그건 제 발바닥인데도 제법 귀여운 자국이라, 해인은 손이 닿는 여기저기에 타타타, 손자국을 냈다.

“이거 꽤 오겠는데요?”

“그러게요. 쌓이겠네요.”

“듣자니까 크리스마스 때도 올 예정이라던데.”

“일기 예보는 너무 자주 틀려서.”

“계속 확인해야지, 뭐.”

“에휴, 오면 어떻고 안 오면 어때……. 어차피 집에서 귤이나 까먹으면서 ‘나 혼자 집에’나 볼 건데.”

간호사 하나가 진심 어린 한탄을 내뱉었고, 연달아 여기저기서 한숨이 쏟아졌다.

“난 근무…….”

“난 쉬긴 쉬는데 부모님이랑…….”

“어우야…….”

이제 보니 크리마스가 코앞이라 솔로인 사람들의 외로움이 극에 달한 모양이었다. 시율은 저에게 솔로들의 시선이 향하는 걸 느꼈다.

“쌤은 크리스마스 때 뭐 하세요? 일정표 보니까 휴가 길게 내셨던데…….”

“일본 여행 갈 건데요.”

“여자 친구분이랑……?”

“그야 당연히.”

그 묘한 원망과 부러움이 얽힌 시선이라니.

시율은 괜히 해인을 안고는 옆으로 조금 물러섰다. 이 사람들 왜 첫눈을 보며 절규하는 거람.

“……으아아! 부럽다!”

“선생님은 그렇다 치고, 태일 씨까지 여자 친구 생기고!”

“너무한다!”

“사람들이 말이야! 솔로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해!”

그건 대체 무슨 배려지. 시율은 눈이 솔로를 자극한다는 것에 대해 논문을 하나 써볼까,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둘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그렇지 않아도 추운데 눈이 와서 옆구리가 더 차가워지게 하는 게 문제일까? 아니면 눈이 커플들의 천국이라는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해서?

시율은 해인만 만족하면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사실 그는 눈이니 뭐니 하는 감성적인 것에 오래 취하는 타입이 못 됐으니 말이다.

“냐냐!”(내 발자국 봐라!)

하지만 해인이 너무 신나 보여서 그는 조금 더 창가에 머물러야 했다.

“크리스마스에 여행…… 러브러브 하시네요.”

문득 조금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서 옆을 돌아보니, 방유나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유리창에 손으로 고양이를 그리고 있었다.

아마도 해인이 유리창에 장난치는 걸 보고는 저도 뭔가 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 병원의 미용사이자, 시율에게 가장 대놓고 어필했던 여자이기도 했다. 물론 무참하게 차였지만.

“……방유나 씨.”

“네…… 선생님……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예쁜 사랑하세…….”

“나 좀 도와줘야겠습니다.”

돌연 시율이 방유나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습기 찬 유리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손을, 모두가 보는데 아주 꽉.

순간 해인의 눈이 팟, 하니 흉흉한 빛을 내며 마치 한 마리 야수 같은 모양을 했다. 마치 밀림의 흑표범 같았다.

볼을 부풀리는 건 그리 흑표범 같지 않았지만.

“어머! 강쌤 이러시면…….”

방유나는 깜짝 놀라면서도 그리 싫은 기색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제 여자 친구 얼굴 기억납니까?”

“에……? 뭐, 대충은요?”

얼마 가지는 못했지만.

“유나 씨 사람 얼굴 잘 기억하잖습니까. 1년 전에 한 번 온 손님도 다 기억하고.”

“그쪽으로, 자신 있긴 하죠……?”

“그림도 그리고.”

시율의 목소리가 얼핏 고양됐다.

방유나는 해인이 죽은 강아지를 안고 병원에 왔을 때, 딱 한 번이지만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게 뭐……?”

“분명 그림 전공했다고 안 했습니까?”

“전공까지는 아니고…… 조금 했어요. 예고도 나왔고……. 뭐, 취직이 바로 되는 직종을 찾다 보니 지금은 미용사지만…… 동물도 좋아한다고요!”

시율의 알 수 없는 압박이 강해지자 당황했는지 방유나가 이래저래 말을 늘어놨다.

해인은 그제야 시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저거구나.’

방유나가 그리고 있던 유리창의 그림이나, 이 병원의 벽에 걸려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 스케치들로 눈을 돌렸다.

전부 방유나가 취미 삼아 그린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뭐, 뭘요?”

“제 여자 친구 말입니다.”

“에? 그걸 내가 왜요?”

“……선물이, 하고 싶어서요.”

이 남자, 자기를 좋다고 쫓아다녔던 여자한테 대체 무슨 부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기나 하는 걸까?

물론 모를 남자는 아니겠지만…… 방유나가 그런 걸 들어주고 싶을 리 없었다.

일방적으로 대시했던 거긴 하지만, 그래도 불쾌했다.

“강샘, 알긴 알았지만 정말 잔인하시네요…… 제가 이래 봬도 강샘 좋아했던…….”

“방유나 씨, 이렇게 부탁합니다.”

“……윽.”

해인의 얼굴을 봤고, 몽타주를 그릴 만큼 그림 실력이 있는 사람이 방유나밖에 없다는 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지금까지는 해인의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볼 생각을 하지 않아서였다.

막연히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까 얼굴에 관해서는 무의식중에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유나 씨만 믿을게요. 네?”

“아무리 그러셔도…….”

평소에는 일 관련된 것 아니면 말도 안 섞던 남자가, 이런 절박한 눈을 하고는 자신에게 매달린다는 사실에 방유나는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콧대 높은 이 작자가 이렇게 저자세로 자신에게 무언가 부탁하는 순간이 올 줄이야.

솔직히 말자하면, 나름 기분이 괜찮았다.

그간 무시당한 것이 조금 위로가 된다고 해야 하나.

심지어 품 안의 고양이까지 반짝반짝 눈빛 공격을 쏘아내고 있었다.

평소 시크하기 이를 데 없는 둘이 동시에 애걸하는 눈을 보내고 있으니 결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방유나는 그리 모진 사람이 되지 못했다.

“으으……. 딱, 한 번 봤는데 그리는 건…… 사실 어려워요. 사진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사진은 없는데.”

“엑? 그렇게 사이좋은데 어떻게 사진 한 장이 없어요?”

“그 친구가 사진 찍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그림이라도 있었으면 해서.”

“……내 참, 뭐, 그런…….”

“비슷하기만 해도 됩니다! 몽타주 같은, 그런 정도만 되어도 정말 고마울 겁니다.”

시율은 해인이 스스로를 그리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리게 하면 된다는 걸 이제야 깨닫고는, 기뻐서 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봤자 그의 특성상 겉으로 티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으에…… 너무 어려운데, 차라리 전문가한테 부탁하시는 편이…….”

“갑자기 생각나서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고 싶어요.”

“크리스마스면 일주일도 안 남았잖아요?”

“피자 열 판 살게요.”

“…….”

“치킨도 열 번.”

“……흠흠, ……으음, 일단 한 번이라도 더 봐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절대 치킨에 넘어간 건 아니고요.”

해인은 그의 품에서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의 바람대로 됐으면 좋겠다. 그가 생각하는 방법이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

당장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지만, 말하지 않을 테니까.

어떻게든 참아볼 테니까.

‘하느님, 한 번쯤은 그가 실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첫눈이 오고 있잖아요?’

첫눈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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