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숙취에 시달리는 고양이
새벽 1시, 시율이 병원으로 돌아오자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가 모니터 옆으로 고개를 빼며 물었다.
그녀는 시율과 함께 오늘의 당직 당번이었다.
“오셨네요? 기사님이 찾던 게 강샘 맞아요?”
바로 10분 전, 택시 기사가 병원 안으로 들어와서는 자신의 승객과 아는 사람을 찾았을 때 그녀는 잘못 온 것 같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반면 옆을 지나가던 시율은,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따라 나가보니 역시나 예상대로 곯아떨어진 해인을 발견했고 말이다.
간호사는 뒤늦게 시율의 품에 안긴 해인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얼굴로 데스크에서 걸어 나왔다.
“어머? 누구예요, 이 사람은?”
“여자 친굽니다.”
“아, 바로 그…….”
낮에 대놓고 사랑한다고 전화하던…… 닭…… 살…….
“예, 바로 그.”
“흠흠. 딱히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강샘 여자 친구가 워낙…….”
소문만 무성하니까…….
시율의 따가운 눈총에 뭔가 말을 고치려던 간호사는 더 난관에 부딪힌 얼굴이 됐다.
그녀뿐 아니라 이 동물병원의 간호사 대부분은 시율의 여자 친구에게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나쁜 뜻이나 그런 게 있는 게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이 병원에서만 몇 년 넘게 근무하면서 지켜봤지만, 시율은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남자였다.
손님은 물론이고 간호사나 미용사, 여의사에 이르기까지 숱한 애정공세를 받기가 그의 일상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차지하진 못했다.
그러니 이 의사 가운이 잘 어울리는 남자에게 반한 여자가 나타나면, 이번엔 얼마 만에 포기할지 연차 있는 간호사들끼리 모여서 내기를 걸고는 할 정도였다.
“워낙?”
“……오랜만이니까요. 호호, 제가 보기엔 한 3년 만에 생긴 여자 친구분 같은데…… 맞죠?”
“뭐, 대충요.”
당연히 시율의 눈이 엄청 높을 거라고 여겼던 터고. 그간의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으로서 드디어 생긴 그의 연인이 궁금한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숨 막히게 예쁜 사람일지, 아니면 엄청 잘 배운 지적인 여자일지. 그도 아니면 연예인급으로 섹시한…….
‘……그냥 귀엽네.’
막상 실물로 본 소감은, 여자의 눈으로 보기에도 귀엽다는 정도였다.
조금 더 화장을 하고 꾸미면 예쁠 것 같았고, 키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마른 편이었고, 얼굴에 젖살이 남아 있는 게 2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바탕이 좋다는 건 보면 알겠지만 엄청난 미인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했다.
이 의사 양반, 그렇게 까탈을 부리더니 이런 취향이었나 보다. 생각보다 평범하달까.
“이지혜 씨, 너무 빤히 보는 거 아닙니까.”
“호호. 뭐, 그냥요.”
“닳거든요.”
“……농담도.”
평소와 다르게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하는 시율이었다. 이게 농담이 아니라면 그게 더 충격적일 테고 말이다.
“진심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만 퇴근해요.”
“네?”
“원장님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집에 들어가 봐요. 혹시 급한 환자 생기면 전화할 테니까.”
급한 환자가 올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근방에 다른 24시간 병원이 없다 보니 원장의 지침상 오픈하고 있기는 해도, 밤늦게 손님이 오는 경우는 일주일에 하루 있을까 싶었다.
그나마도 그냥 산책 나왔다가 들르는 단골이 간식이나 사가거나, 새끼 고양이를 주웠다며 어쩔 줄 몰라 하며 오는 정도였다.
“그래도 될지…….”
“제가 책임지죠.”
시율은 병원의 여러 수의사 중 하나였지만 원장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실력이 좋다 보니 그를 일부러 찾는 환자가 많아서 그의 입지가 큰 것도 당연했다.
간호사는 잠시 갈등하는 눈치였지만 이미 손은 자신의 휴대폰을 챙기면서 보고 있던 미드를 끄고 있었다.
“호호호, 감사해요. 오늘 일은 비밀로 해드릴게요.”
남은 미드는 집에 가서 보는 편이 더 안락하리라.
***
간호사를 퇴근시킨 시율은 빈 여직원 휴게실에 자리를 만들어 해인을 눕혔다.
누군가 가져다 둔 이불을 소파 위로 넉넉히 깔고, 제일 두툼한 담요를 몸 위에 덮어줬다. 그러고도 부족한 것 같아서 옆에 난로를 하나 틀어줬다.
그러는 사이에도 해인은 세상모르고 잠든 채였다.
시율은 못마땅한 얼굴이면서도 꽤나 꼼꼼하게 해인이 잠들 자리를 살펴줬다.
“이봐, 아가씨. 대체 무슨 대모험을 하고 다니는 거야?”
“으음…….”
소파 곁으로 앉으며 시율이 중얼거려 물었지만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거기까진 왜 간 거고.”
제 이마를 쓰다듬는 손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인은 잠자리가 편안해진 만큼 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릴 뿐이었다.
늘 그렇듯 대답은 없었다.
시율은 이제 해인에게 뭘 물어도 대답은 없을 거라는 걸 학습해버려서,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제 곁으로 돌아와 푹 잠들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오늘 없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말이다.
“뭐…… 돌아왔으니 됐나.”
간호사를 퇴근시켰으니 데스크는 이제 시율이 봐야 했다.
오래 있지 못하고 자리를 뜨려던 그는 해인의 소매 끝에 묻어 있는 파란 얼룩을 발견했다.
그건 아주 인공적인 색이었다.
“……페인트?”
칠칠치 못하게 어디서 이런 걸 묻혀 온 걸까.
시율이 굳었으면 떨어질까 싶어 문질러봤더니, 그게 새파랗게 손가락에 묻어났다. 냄새는 딱히 나지 않았고 혀끝에 대봤더니 곧장 녹았다.
아마도 흔한 수용성 물감 같았다.
벽이나 바닥을 칠할 때 쓰는 페인트가 아니라, 그림 그릴 때 쓰는 그런 것.
시율은 그것을 한참 노려봤다.
***
한가로운 아침 무렵, 해인은 병원 창가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누가 이 병원의 터줏대감 고양이 아니랄까 봐 누가 지나가도 비키지도 않았다. 고양이로 살면서 늘어난 거라고는 이 뻔뻔함뿐일지도 모른다.
“끄, 응…….”(윽, 머리야…….)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게으르게 늘어져 있는 한 마리 검은 고양이였지만, 사실은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박 모 양이었다.
어제 과음을 했더니 두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시율이 아침에 꿀물을 챙겨줘서 그럭저럭 버틸 만한데도 속에서 자꾸만 쓴 물이 올라왔던 것이다.
그나저나 그 남자는 대체 병원의 어디에서 꿀을 구한 걸까? 미스터리한 남자였다.
고양이로 변하는 제가 할 소린 아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른 아침 시율의 재촉에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변신을 하긴 했는데…… 했는데…….
‘다, 당황스러울 만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사실은 자신이 왜 병원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 해인이었다.
아침에 시율이 왜 저를 깨우고 있는 건지도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눈을 뜨니 병원 휴게실에 자신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지독한 당황스러움이라니.
시율은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지만, 그마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지난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결국은 포기해야 했다. 필름이 끊기기는 해인의 알코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실패다. 그것도 처참하게 실패야. 기껏 고생했는데 얻은 거라고는 기억상실뿐이라니!’
그리고 숙취. 역시 술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걸까?
해인은 답답함과 무기력함에 시달리며 몸을 늘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디귿 자로 누워 영혼 없는 눈을 하고는 데스크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병원 직원들은 오늘의 일정 체크 겸 간단한 아침 회의를 하고 있었다.
“강 선생님? 근무표 보니까 어제 당직 서셨는데 오늘 또 정상 근무 하신다고 되어 있네요? 맞나요?”
“맞습니다.”
“밤새우셨는데 오전 퇴근 안 하시고요?”
“급하게 잡힌 수술도 있고, 내일 좀 쉬어야 해서요.”
“아, 룸메이트 분이 이사 가신다는 게 내일인가요?”
“비슷합니다.”
시율은 대충 말했지만, 일정 체크를 하느라 모여 있던 간호사들은 그냥 지나치질 않았다. 태일은 이 동물병원의 아이돌 중 하나였으니까.
“앗! 태일 씨 외국 나간댔죠! 그게 내일이에요?”
“어머어머, 벌써 그렇게 됐어요?”
“저 내일 쉬는데 같이 마중 가면 안 돼요?”
“저도요, 저도!”
예의 바른 남자답게 얼마 전에 병원에 들러서 신세 진 사람들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한 태일이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병원 사람들은 태일이 외국을 나가는지 뭘 하는지 몰랐을 텐데.
시율은 누가 봐도 귀찮은 얼굴로 대꾸했다.
“말할 필요를 못 느껴서 지나쳤었는데, 그 녀석 여자 친구랑 같이 나갑니다.”
“……네?”
“그럴 리가! 여자 친구 없다고 하셨는데?!”
“그거야 몇 주 전 얘기겠죠.”
“예에에?”
만인의 남자였던 태일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몇몇은 매우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시율이야 원래 난공불락이니 그렇다 쳐도, 잘 웃어주고 순해 보이는 태일은 다들 은근히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전에, 날 만나러 왔던 길쭉한 여자. 그 여잡니다. 미국에 가면 당분간 둘이 같이 살 거고.”
“설마…… 그 모델 같던…….”
“잠깐, 그럼 도, 동거? 동거하는 거예요?”
“듣자니 다녀와서 결혼한다던데.”
시율은 시원스레도 말했다.
그러니 태일이 본가에 하은을 데리고 인사하러 간 것이기도 했다.
그 둘의 꽉 막힌 성격대로라면 본래는 결혼 전에 동거 같은 건 상상도 못 할 테지만, 지금은 경우가 조금 특수했다.
사실은 내일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다만 하은에게 자숙의 시간이 필요해서 미룰 뿐.
“충격이야! 태일 씨가 그럴 줄 몰랐어요!”
“왜 김 간호사가 충격입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안 봤는데…….”
“댁의 환상은 댁의 환상이고, 태일이 인생은 태일이 인생이고.”
태일은 원체 성격이 부드럽다 보니,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도 대부분 순하고 낯가리는 여자들이 많았다.
매사에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타입들이랄까. 좋게 말하면 얌전한 타입들이다 보니 말은 못 하고 지켜만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숨어 있는 팬들까지 더해서, 그녀들은 태일의 동거 소식에 내심 충격에 빠진 모양이었다.
여자 친구가 생긴 것도 충격인데…….
“……태일 씨, 아프리카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아, 그건 내년 봄에. 미국에서는 사전 준비.”
“그럼 여자분은요?”
“아프리카에 같이 간다던데요? 조수로 잡무를 맡을 거면 동행해도 좋다고 했다나. 듣자니 부인을 데려가는 카메라맨도 있는 모양이고.”
아침 회의는 뜻하지 않게 태일의 소식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젊은 여자 비율이 높은 탓일까, 이게 관심사가 될 줄이야.
시율은 지금 태일의 인기가 제법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중이었다.
대체 그 녀석 어디가 매력인 걸까. 가끔 와서 웃으며 먹을 걸 주고 가는 게 전부인데…….
무거운 걸 잘 들어주는 거? 아무렇지 않은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거?
아마도 태일의 매력이 뭔지 말해보라면 열 가지는 술술 읊을 수 있을 게 분명한 해인을 슬쩍 바라보는 시율이었다.
구태여 물어보진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동거라니……. 전 그런 거…… 못해요. 좀 충격이에요.”
“……댁이랑 살자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댁이 충격을 받습니까?”
한 간호사의 중얼거림에, 시율은 심기가 언짢아진 게 틀림없었다.
“서른 넘은 남녀가 결혼을 전제로 같이 살겠다는데, 알아서들 하겠지. 그리고 남 얘기 하는 거 좋아하는 버릇 좀 고칩니다. 누가 우리 얘기 그렇게 하면 싫잖아요. 난 싫던데.”
“……저는, 다 좋게 생각해서.”
“좋게 생각해서 뒤에서 들리지도 않을 싫은 말을 하나?”
키도 큰 사람이 그렇게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면 무섭다는 걸 시율은 알까 모르겠다.
해인은 멀찍이서 시율이 소리 없이 화내는 걸 구경하며 그가 얼마나 남 무안 주는 게 특기였는가를 되새겼다.
그리고 누가 태일 욕하는 걸 그가 두고 보지 못하게 됐다는 것도 깨달아야 했다.
“고백을 하든가. 그렇게 좋으면.”
“누, 누가 그런 뜻으로……!”
“아예 그런 거 아니면 남 연애사에는 신경을 꺼야죠. 안 그렇습니까? 남의 남자 친구, 남의 애인, 남의 남편일 텐데.”
“……윽.”
시율은 저 모진 성격 탓에 척을 진 사람이 꽤 있었다. 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게 더 미운 점일 테지만 말이다.
‘확실히 적이면 가장 미운 타입이지.’
해인은 제가 시율을 싫어했던 때를 생각하며, 한마디 했다가 엉망으로 밀리고 있는 간호사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
“아, 나도 동거합니다. 내 여자 친구랑.”
“엑?”
“강샘?”
“정말요?!”
일타 삼피, 아니 해인까지 사피를 저지르며 시율은 신난 얼굴이었다.
‘지금 흥겨운 얼굴로 뭐라는 겨!’
분명 사실은 사실인데, 알고 있던 일이기도 한데, 이렇게 들으니 새삼 위험하게 들렸다.
해인은 마치 끓는 물 안의 개구리처럼 익숙해져서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지만, 시율과 단둘이 산다는 건 꽤나…….
“결혼하고 싶긴 한데, 해줄지는 모르겠고.”
꽤나…….
‘어, 엄마한테 허락은 받아야 될 거 같은데…….’
꽤 괜찮은 것 같았다.
***
아까 그거 뭐였지? 혹시 프러포즈일까? 그도 아니면 그냥 태일이 얘기가 나오는 게 싫어서 그런 걸까.
묻고 싶었지만 오늘은 병원이 바빠서 그와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해인은 내심 심각해져서는 진료실 맞은편의 소파 밑에 숨어서 시율을 노려봤다.
검은 고양이가 소파 아래 그림자에 숨어 있으니 보이는 건 오로지 눈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숨을 죽이고 있으면 눈치채기는 불가능했다.
‘농담이었던 걸까?’
시율은 해인이 열린 문 너머에서 자신을 10분째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무리 눈치가 좋아도 기척까지 예민한 건 아니었으니까.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차트를 뒤적이고 있던 시율이 서랍을 여는가 싶더니 뭔가를 꺼내 보며 어렴풋이 웃은 건 바로 그때였다.
각도 때문에 시율의 표정은 보이는데 그가 보고 있는 게 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지?’
고양이 특유의 호기심이 치솟았다.
당장 쫓아가서 뭔지 보여달라고 조를까? 해인은 소파 밖으로 보일 만큼 꼬리를 휙휙, 내저었다. 물론 그건 시율의 반대방향이었다.
해인이 찰나 고민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강 선생님, 환자분 오셨어요.”
“빨리 오셨네요.”
시야는 막혔지만 탁, 소리가 나며 급하게 뭔가를 서랍 안에 집어넣는 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왜 숨기는 걸까.
“수술이 있어서 미리 오신 것 같아요. 지금 들여보낼게요.”
“그래요.”
“초코 보호자분? 이쪽으로 오세요.”
천천히 닫혀가는 진료실 문을 해인은 매의 눈으로 노려봤다.
뭘까, 저 서랍 속에 든 것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해인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건 마치 먹이를 본 맹수의 사냥 자세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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