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취객 고양이
“저기, 가기 전에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요.”
“응? 자기 휴대폰은 어쩌고?”
“고장 났어요.”
“어머, 그랬구나. 그럼 내 휴대폰 빌려줄게.”
“……괜찮아요.”
공중전화를 써야 했다. 흔적을 남기는 건 몸이 거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술이 들어가면 너도 별수 없을걸?
해인의 자신의 몸을 따돌릴 생각에 벌써 신나 있었다.
두통이 찾아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냥 술이 먹고 싶은 것뿐이야. 방해하지 말라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는 공중전화를 찾아 역 쪽으로 뛰어갔다. 시율에게 연락해야겠다.
***
[여보세요?]
모르는 번호라 스팸이려니 했는지 받지 않으려던 시율은 끈질기게 전화해대자 결국 마지못해 받은 눈치였다.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고, 한마디 만에 전화를 끊을 태세였으니까.
“강! 나야.”
[……뭐야? 너였어?]
해인은 그의 목소리에서 곧장 가시가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있잖아. 나 잠깐 밖에 나와 있거든. 조금 멀리.”
[뭐? 어딘데?]
“들어갈 거야!”
[……그래. 그럼 언제 올 건데?]
“그게…… 아주 늦게 들어갈 것 같아. 그러니까 혹시라도 놀라지 말라고. 알았지?”
해인 자신이 보기에도, 시율을 대할 때의 자신은 제법 귀여운 것 같았다. 사실은 그리 귀여운 여자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늘 오랜만에 지인들을 보면서 되새긴 자신은 참 메마른 계집애였다.
[얼마나 늦게?]
“내일 날이 밝기 전에는 들어갈 거야.”
[……태일이한테는 뭐라고 하려고?]
“오늘 같이 병원에 있다고 해줘. 당직이잖아.”
[너…….]
“부탁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아마도 그가 자신을 귀엽게 보기 때문일까. 그의 앞에서는 마냥 살갑고 어려지는 기분이었다.
뭐든 부탁할 수 있고, 어떤 어리광도 부릴 수 있고, 그는 해인을 그렇게 만들고는 했다.
본래와 다르게.
[……위험한 거야?]
주어도 없었는데 알아듣는 대단한 남자라서일까.
“그건 모르겠어.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될 거야.”
[또, 아프거나 하는 거 아냐?]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해인이 알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불안한지 대답이 없었다.
해인은 그를 생각하면 힘이 나는데, 지금 조금 아픈 것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데. 그때만큼 아파지더라도…… 상관없는데.
아픈 건 분명 싫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건 더 두려운 일이었다.
“강, 내 말 듣고 있어?”
[아아…… 뭐, 하지 말란다고 안 하는 너도 아니…….]
“사랑해.”
이렇게 전화로 말하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사실은 입 밖으로 낸 게 채 열 번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해인은 그가 조금은 덜 불안하길 바라며, 자신이 조금은 더 용기를 내길 바라며, 소리를 입 밖으로 냈다.
이것 역시 너무도 자신답지 않은 부끄러운 말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말할 생각이나 해봤을까?
갑작스러웠기 때문인지 그는 잠시간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 후 화답했다. 주변에 북적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아 병원 한가운데 같았지만 말이다.
[나도 사랑해.]
그의 ‘사랑해’는 마치 흔한 인사말처럼 기분 좋은 어조였다. 달달 떨리던 해인의 고백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래서 더 와 닿았다.
해인은 이런 닭살 커플이 또 있을까 싶었다.
“……벼, 병원인데 그런 말 해도 돼?”
[내가 못할 소리 했어?]
“그건 그렇지만…… 사람들 듣는데…….”
[그리고 네가 먼저 했잖아.]
하여간 할 말 없게 만드는 남자였다. 그리고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남자.
[그런 말 할 거면 그냥 하지 말고, 예고 좀 해라.]
“누가 이런 걸 예고를 해!”
[녹음이나 하게.]
“엣…… 끊는다. 그럼!”
이 남자는 진심이었다.
해인은 다시 말해보라고 재촉할까 싶어서 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큰길에서 이영과 수문이 얼른 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었다.
“좋아. 어디 힘도 얻었겠다…….”
이젠 술의 힘을 빌려볼까!
시율에게 보고도 했겠다, 알라바이도 만들었겠다. 해인은 술 먹을 만반의 준비를 끝마쳤다.
아자! 망가져 주겠어!
두통 속에서 이상한 다짐을 하며 말이다.
***
“박 작가, 아까부터 물어볼까 말까 했는데…… 갑자기 눈이 왜 그래?”
안주가 나오길 기다리는 사이, 이영이 내내 걸렸는지 눈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해인은 아직도 조금 부어 있는 자신의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이건 누가 봐도 펑펑 울고 난 것 같은 눈이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작업실 청소를 했더니…… 먼지가 많이 날려서. 그것 때문인가 봐요.”
“아하. 알레르기 있나 봐?”
“그보단 방이 엄청 더러웠거든요.”
“그래서 방은 자주 환기시켜줘야 한다니까.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하며 끝이 없어요.”
이영은 쉽게 납득한 듯했다.
해인은 이래서 의심 없는 사람이 좋았다. 눈치 없는 사람도 좋았고.
그런데 어째서 속아주는 법이 없는 시율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건지는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기본 안주로 나온 김과자를 깨물어 먹으며, 왜 그 남자 생각을 하루 종일 그만둘 수 없는 건지 고뇌했다.
“그보다 나도 궁금한 거 있는데.”
“……뭔데요?”
수문이 딱히 질문 타임도 아닌데 손을 들으며 물었다.
“해인 씨 말이야…… 뭔가, 달라진 것 같아.”
“어, 나도 그 생각 했는데.
“그치? 어딘가 느낌이 묘하게…….”
두 사람의 가느다란 시선이 저를 향하자 긴장이 됐다. 누가 예술가 아니랄까 봐 그런 방면으로는 눈썰미가 기가 막혔다.
본래의 얼굴과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신탈이라 어딘가 다르긴 다른 걸까?
“그, 그래요? 살이…… 조금 쪘나?”
해인은 말을 조금 더듬으며 슬그머니 제 얼굴을 가려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전이랑 분명 똑같은 얼굴인데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어. 표정도 달라지고.”
“맞아. 그리고 머릿결도 좋아졌고……. 피부야 원래 좋았지만 더 좋아진 것 같고.”
“가장 큰 건, 어딘가 섹시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알았다! 박 작가 혹시 남자 생긴 거 아냐?”
이영이 족집게처럼 물었고, 해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인 침묵으로 응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 역시 그런 거구나? 그렇지, 그렇지?”
“야, 그런 거 성희롱이야.”
“여자끼리는 괜찮거든?”
“아니거든.”
“맞거든.”
두 사람이 티격태격거리기 시작할 무렵, 술이 나왔다. 해인은 꿀꺽, 긴장으로 목을 축였다.
술이 과연 도움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
“나쁜 색기! 으허헝!”
“……누구?”
“그 나쁜 자시이익! 가만 안 둘 거야! 흑흑…… 두고 보자!”
이 못된 새 새끼! 꼬치구이로 만들고 말거야!
해인이 테이블에 엎어져 눈물을 쏟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정확히 안주로 나온 닭꼬치를 본 순간부터였다.
“누, 누가 저렇게 많이 먹인 거야?”
“자기가 먹은 거야!”
“말렸어야지?!”
“박 작가 원래 술 잘했잖아! 겨우 저거 먹고 취할 줄 누가 알았어?”
“세상에…… 저렇게 취한 거 처음 보는데…… 남자 친구가 엄청 못된 놈인가 봐.”
그게 사신 얘기라는 걸 알 리 없는 이영과 수문은 둘이 속닥거릴 수밖에 없었다. 술에 한 맺힌 사람처럼 안주는 안 먹고 술만 퍼붓는 해인이었다.
마치 끝장을 보겠다는 듯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닭꼬치를 향해 자꾸만 화를 내고 있었다.
“새면 다냐! 날아다니면 다냐고!”
“저기, 박 작가…… 무슨 나쁜 일 있어? 너무 무리하진 마.”
보다 못한 이영이 말려봤지만, 오늘 해인의 술을 향한 열정은 보통이 아니었다.
“……괜찮아요. 더 먹을래요.”
“어…… 그만 먹어야 될 것 같은데?”
“전 먹어야 돼요! 그래야……. 우웁.”
결국 해인은, 달리고 있었다. 화장실을 향해.
본래의 계획대로는 되어주지는 않고 있었다. 술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
이영와 수문은 앞으로는 해인에게 함부로 술을 권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제가 그거 얘기했어요?”
“으응?”
“그 사람이요. 정말정말 파랗고요. 또, 되게 고양이 같고요. 또…… 전생에 왕이었고요. 아마 그럴 거예요. 아니면 어쩌지 싶지만…… 아니어도 그 사람이 좋고요. 제가 다 까먹을 거니까요. 기억했다가 알려주세요. 네?”
아까부터 뭔가 열심히 말하고 있는 해인이었지만, 혀가 꼬여서 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 앞뒤가 맞질 않아서 뭐라고 하는지 해석이 되질 않는 수준이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긴 하는데……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나중에, 나중에 저한테 꼭 말해주셔야 돼요. 네?”
“……오늘 술주정한 거 말이야?”
“네! 꼭이효!”
“아, 알았어.”
창피할 텐데……. 못 알아들을 말을 엄청 중얼거렸다고 전해주면 되는 걸까?
이영과 수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랬다가는 해인이 저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그만둘 기세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제가, 그 사람을 정말정말 좋아하거든요. 꿈에 나올 만큼. 나중에 꿈에라도 봤으면 좋겠을 만큼요……. 그래서, 그래요.”
한마디 정도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인은 자신이 깜빡 잠들어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이 달리는 차 안이라는 것도.
감았던 눈을 몇 번인가 깜빡이자 어렵지 않게 이곳이 택시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응?”
팔다리가 무거웠다. 목이 칼칼했고, 귓가에는 심야 라디오 소리가 들렸다. 흐릿한 시야로 창밖의 한강이 보였다.
버릇대로 취해서 일단 택시를 탄 모양이었다.
해인은 비몽사몽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주머니가 가벼웠는데, 제가 먹은 술값이라며 수중에 있던 동전을 탈탈 이영에게 털어주고 온 기억이 났다.
정확하게는…… 수문이 계산하는 동안 가게 앞에 택시가 지나가길래 덥석 타버렸다.
이영은 그사이 해인이 건네주다가 바닥에 우수수 떨어트린 동전을 줍고 있었다.
아마 그 둘은 지금쯤 해인이 어디로 사라졌다며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사님……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응? 아가씨 이제야 깼구만.”
해인의 술버릇은 예전부터 그랬지만 갑자기 사라지는 거였다. 술만 먹으로 귀소본능이 매우 발달해서, 혼자 주변에 말도 없이 집으로 가고는 했다.
“동물병원으로 가자며?”
“……아.”
“거기로 가면 되는 거 맞지?”
택시 아저씨가 영 불안한지 연거푸 물었다. 하지만 해인은 목적지를 확인하고는 안심이 돼서 다시 잠이 오고 있었다.
아, 시율에게 가는구나. 그럼 안심이야.
“엥? 아가씨! 다시 자는겨? 아가씨?!”
***
시율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알 수가 없었다.
“이 아가씨가 여기로 가달라고 하던데…… 아는 사이 맞지?”
그는 택시 뒷좌석에서 제대로 곯아떨어져 있는 해인을 보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이 말썽쟁이 같으니라고.
“거, 택시에 타더니 다짜고짜 이 병원으로 가자고 하더라고.”
“……하아.”
무슨 대단한 계획이라도 있는 것처럼 비장하게 말하기에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술에 취해서 돌아올 줄이야.
그것도 택시를 타고……. 이건 차라리 너무 평범한 일이라 시율은 웃음이 났다.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여기 맞다고 계속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야?”
택시비를 못 받을까 봐 불안한지 택시 기사는 시율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제 여자 친굽니다.”
“어휴, 거 안심이구만!”
시율은 우선 뒷좌석으로 들어가 해인을 깨웠다.
그러나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자꾸만 늘어져서, 결국 안아 들어야 했다. 그러자 싫다는 듯 밀어내며 버티기는 힘이 제법이었다.
“이봐, 나야, 나.”
“으엉……?”
해인은 누가 자신을 안아 들려 하자 꼬물거리며 반항하다가, 조금 뜬 눈으로 그게 시율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언제 밀어냈냐는 듯 그에게 꼭 안겨서는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스킨십이 진해지는 술주정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강.”
기쁜 듯 목을 울려 그를 불렀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마신 거야?”
“……그게, 잘 안 됐어.”
“뭐가?”
“제재가…… 너무 강해.”
하지만 그의 물음에는 곧장 시무룩해졌다.
대체 뭐라는 건지. 혀는 다 꼬여서…… 시율은 어쨌든 해인은 택시 밖으로 안고 나오는 데는 성공했다.
코알라처럼 딱 달라붙는 통에 시율이 손을 놔도 붙어 있을 것 같은 해인이었다.
아이 안듯 제대로 끌어안고 있는 시율의 손을 보면 절대 놓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택시비는 41,340원인데…… 누가 줄겨?”
“…….”
“거, 여자 친구 지갑에서 주든가…… 선생이 주든가.”
택시 기사는 택시비가 조금 비싸게 나왔다는 걸 알긴 아는지, 시율의 수의사 가운을 보며 이래저래 말을 덧붙였다
“심야 할증도 붙었고…… 시외 장거리라서 그래. 미터기 나오는 대로 받는 거야. 정말이야.”
“……그건 상관없고.”
“오, 그래? 자네가 내줄 건가?”
“그보다 택시, 어디서 탔습니까?
시율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으며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해인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해인은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비비적비비적, 그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힌트를 한 가지 물고 왔다는 건 꿈에도 모르는 얼굴인 채로.
시율은 못된 술주정을 받아주며 재차 물었다.
“택시를 탄 곳 말입니다. 골목이든 가게든, 뭔가 있을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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