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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78화 (78/114)

78화. 머리 쓰는 고양이

평화로운 어느 날의 늦은 아침, 해인은 혼자 거실에서 동전을 세고 있었다.

그 속에는 꼬깃꼬깃하지만 지폐도 섞여 있었다.

“둘…… 넷…… 여섯…….”

오늘은 내내 기다리던 날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태일은 하은과 본가로 인사를 하러 떠났고, 아무리 빨라야 늦은 밤에나 귀가 할 예정이었다.

시율은 때마침 병원에서 당직이었다.

고로, 오늘 하루 종일 해인은 자유의 몸이었다.

“만, 사천, 오백, 칠십 원!”

해인은 그간 모아온 잔돈을 주머니 가득 짤랑거리며, 정확하게는 소파 밑이나 옷장 아래를 뒤져서 모은 비자금을 챙겨 들고는 당차게 집을 나섰다.

오늘은 가는 데만 2시간 20분이 걸리는 자신의 작업실에 가볼 생각이었다.

그간 계속해서 가볼 틈을 노렸지만 태일이 집에 없는 동시에, 시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지금 와서는 시율이 저를 몰래 따라와 주면 좋겠지만, 그에게 들키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지만…….

이놈의 자의식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절대 누군가에게 흔적을 남기는 걸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안 되는 걸 하려고 들면……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 두통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만둘 때까지 점점 강도가 심해졌다.

지금도 시율이 따라왔으면, 하고 바라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안 되는 거 알아!’

손오공의 머리에 씌어져 있다는 금고아가 이런 걸까? 말썽을 부리면 옥죄면서 길을 들인다는 전설 속의 신물.

아무래도 사신의 주술이 좀 더 성능이 좋은 것 같지만 말이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해인에게는 시율이 필요한 게 있으면 쓰라면서 준 카드가 있었지만, 그걸 사용할 순 없었다.

카드를 쓰면 자신이 어딜 다녀왔는지 흔적이 남겠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가지고 나올 수도 없었던 것이다.

해인은 동전으로 묵직한 주머니를 느끼며 혀를 찼다.

“……쳇.”

자신이 자신의 정신을 마비시킬 수도 없는 노릇인데, 지금은 스스로가 가장 거슬리는 존재였다.

투덜거리며 해인은 작업실로 향하는 노선을 확인했다.

버스 한 번, 지하철을 두 번을 갈아타고도 꽤 많이 걸어야 하는 긴 노선이었다.

***

정확히 3시간이 걸려서야 해인은 겨우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초행길이다 보니 뜻하지 않게 헤매야 했고, 중간중간 갈아타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휴대폰이 없으니 길을 찾는 데 더 애를 먹어야 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검색을 하고 오긴 했지만 당연히 한계가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려고 하면 ‘도 안 믿어요.’ 하고 지나쳐 버리기 일쑤였다.

인색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나도 도 같은 거 안 믿어!’

물론 저승은 믿지만.

여하튼 해인은 고생 끝에 자신의 작업실이 있는 건물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안심이 되기도 하면서, 씁쓸하기도 했다.

이곳도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뜰리에 아리아]

지그시 뜬 눈으로 간판을 올려다보며 대충 어림해보니, 무려 아홉 달 만의 방문이었다. 문제의 사고가 있기 몇 주 전에 들렀으니까.

“다들 잘 지내려나…….”

해인은 정말 오랜만에 같은 건물에서 지내는, 안면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장르는 다르지만 모두 작가 활동을 하는 지인들로, 함께 작업을 하거나 전시회를 열고는 했다.

그리고 모두 이 건물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 아뜰리에 아리아는 시에서 창작활동을 지원해주는 작가들이 많이 입주해 있었으니까.

20대여야 하고, 신진이어야 하며, 수상경력이 있어야 하는 등 조건이 조금 까다롭기는 하지만 충족만 되면 시에서 무료로 작업실을 임대해줬다.

이곳에 입주했다는 건, 어느 정도 장래가 유망하다고 볼 수 있는 셈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딱 2년 임대해주는데 벌써 1년이나 그냥 까먹었네.’

문득 아까운 점을 상기하며 해인은 1층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지나치다가 유난히 수북한 자신의 작업실 우편함을 발견하고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종 고지서며 광고 전단지가 어마어마했다.

해인은 부랴부랴 빼내서 옆구리에 대충 끼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돌아갈 걸 생각하면 서둘러야…….

“해인 씨? 어머, 해인 씨 아니야!”

“……민 선생님.”

“난 작업실 뺀 줄 알았어! 이게 대체 얼마 만이야?”

목소리가 기본적으로 높은 소프라노 톤에, 쾌활한 어투, 항상 붉은색 립스틱을 바르고 다니는 그녀는 해인과는 제법 친분 있는 작가였다.

민이영, 우리나라에서는 드물어진 전통자수 작가로 아주 활기찬 사람이었다.

그녀는 해인을 보자마자 뒤에서 쫓아와 알은체를 했는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던 해인은 저를 아는 사람의 등장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결코 그녀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얼마 전에 산책로에서 느꼈던 고통이 저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아플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거부감이 먼저 들 만큼 그날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예상대로 곁에 시율이 없기 때문인지 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

해인은 그사이 축축해진 손바닥을 대충 코트에 문지르며 겨우 입을 뗐다.

“반가워서요. 오랜만에 뵈네요. 잘 지내셨죠?”

“그럼! 나야 항상 그렇지. 해인 씨는?”

“……어딜 좀 다녀왔어요.”

“아, 작업하러 간다고 했던 건 기억나. 그런데 그래도 그렇지, 너무 오랜만이잖아.”

“시골이 맞는지 잘 안 올라오게 되더라고요.”

“하긴, 도시가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한적하고 조용하면 아무래도 작업에 몰두하긴 좋으니까.”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이로써 아는 사람을 만난다고 무조건 발작하지는 않을 거라는 이론은 성립한 셈이었다. 방금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강원도에 있다고 했던가?”

“뭐…… 여기저기요.”

“맞다. 방랑벽이 있댔지? 그래도 얼굴 좀 보자. 바빠도 가끔 연락도 하고 그래.”

“그럴게요.”

“그래서, 뭐 좀 그렸어?”

웃으면서 당연하게 묻는 건 작가들 사이에 의례히 하는 말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

그래, 박해인으로서 자신은 이런 거였다.

“……음, 네.”

사실은 붓 쓰는 법을 까먹을까 봐 겁이 날 정도였지만 해인은 대충 웃고 말았다.

가끔 색연필로 그리는 건 본업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림이란 건 꽤나 손의 기억이나 감각에 의존해야 하는 일이었고, 한 달만 그리지 않아도 손이 굳어버려서 타격이 있었다.

“잘됐다. 그럼 전에 말했던 그 공모전 출품할 수 있겠네? 왜, 5년에 한 번 열린다고 자기가 엄청 준비했던 외국 공모전 있잖아.”

출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려둔 그림 같은 거 하나도 없었으니까.

실제로 아는 사람을 만나니 새삼 실감이 났다. 자신이 자신의 본래 삶에서 까먹은 시간이 적진 않다는 게 말이다.

“아마 못 낼 것 같아요.”

“왜? 그림도 그렸다며.”

“……다른 그림이라서요.”

“그래? 공모전용 말고 외주 같은 걸 한 거야?”

“비슷해요. 그보다 민 선생님은 요즘 뭐 준비하셨어요?”

깊이 파물으면 대답할 수 없어지기 때문에 해인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민이영은 그리 의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 쉽게 자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조만간 호텔에서 전시를 하게 됐다느니, 자신의 스승님이 이번에 무형문화제로 등재됐다느니 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잠시 듣고 있던 해인은 홀린 것처럼 툭, 하니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제 이름, 박해인이에요.”

“……응? 알아.”

“거의 여기 아리아에서 살고요.”

“나도 여기 살아. 자기 새삼스럽게 왜 그래?”

울컥할 정도로 쉽게 말해졌다.

시율에게 내내 하고 싶던 말인데. 결코 나오지 않았던 말.

이미 아는 사람에게는 역시 제재가 없구나. 해인은 복잡한 눈을 하고는 또 그냥 웃고 말았다.

***

가물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자기 생일이었는지, 아빠의 생일인지, 오래전 집 전화번호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두 번인가 틀린 뒤에야 문을 열 수 있었다.

모든 게 낯익은 것인 동시에 어렴풋해진 것이기도 했다. 9개월이란, 그럴 만큼 긴 시간이었다.

“……세상에!”

먼지 쌓인 자신의 작업실은 그중 가장 끔직한 꼴이었다.

아홉 달 동안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아서 그런지 방 안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까지 났다.

후각이 예민해져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는 몰라도 말이다.

해인은 급히 창문을 열고 공기부터 환기시켰다.

모든 게 마지막으로 작업실에 들렀던 그날 그대로였다. 대충 던져둔 앞치마와 토시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길에서 주워 온 낡은 소파도, 읽다 만 당시의 베스트셀러 책도. 모든 게 그대로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해인은 코트를 벗어서 걸어두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묵은 때 청소는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지만, 지금 가장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

닥치는 대로 쓰레기봉투에 집어넣고 정신없이 털고 쓸자 조금은 말끔해졌다.

걸레질까지 끝마치자 너무 피곤해져서 해인은 대충 수돗물을 컵에 따라 마셨다. 냉장고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소파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작업실에 돌아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나는 듯 나지 않았다. 이곳은 박해인이라는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장소였으니까.

시율을 여기 데려올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순간 또 머리가 지끈거렸다. 엄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해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열어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겨울이라 하늘이 유난히 깨끗했고, 공기는 시리지만 맑았다.

뭐랄까, 시력이 월등히 좋아진 눈으로 본 세상은…… 티 하나 없이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이전에 자신이 눈이 나빴던가.

이런 파란색을 모르고 살았다니.

문득 해인은 하늘을 그리고 싶어졌다. 파랑을 아주 많이 써서 바다 같은 빛의 하늘을 말이다.

분명 낮의 밝은 하늘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달이 있는 그런 게 좋겠다.

영감이 떠오른다는 건 이런 거였다.

해인은 벌떡 몸을 일으켜 캔버스를 쌓아둔 구석을 뒤적였다.

가장 깨끗해 보이는 10호 사이즈의 캔버스를 이젤에 걸고는 발에 차이는 화구 박스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안에서 그나마 멀쩡한 붓을 꺼내 들고 바로 쓸 수 있는 고체 물감 팔레트를 열다 말고 뛰어가 마시던 물컵을 가져왔다.

머릿속에는 온통 파란색을 쓸 생각투성이였다.

해인은 본능처럼 그를 떠올렸다.

고양이, 달, 파란색을 닮은 내 남자. 달이 비출 것 같은 파란 하늘은, 그를 닮은 것 같아. 그걸 그리고 싶어.

그냥 나중에 자신이 캔버스를 보고는 의문의 파란색 한 점을 발견하기만 해도 좋겠다.

밀물처럼 떠밀려 오는 생각들 속에서 손을 움직였다.

대충 물을 섞어서 붓으로 파란색을 찍고는, 캔버스에 대려는 순간이었다.

“쳇.”

참 이상하게도 손이 떨렸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쳇…….”

해인은 결국 붓을 떨어트렸다.

“치사해…….”

그냥, 그냥 파란 점 하나 찍겠다는 거잖아. 그것도 안 돼?

마치 대답하듯 당장 머릿속 한 구석이 욱신욱신 아파왔다.

“……정말 나빠. 너무 싫어.”

우울함을 견디기 위해 의자 위로 둥글게 몸을 웅크려야 했다.

***

해인은 부운 눈이 되어서는 작업실에서 빠져나왔다.

많은 걸 바라고 작업실에 온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

하다못해 작은 구멍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에게 줄 힌트라도 건질 줄 알았다.

사신의 주술이 이렇게 효과적이라는 걸 새삼 되새기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보일 듯 말 듯, 틈이 보이지 않았다.

“하아…….”

“박 작가!”

“어? 정말 왔네!”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서던 해인은 복도 반대쪽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낯익은 두 사람을 발견했다.

민이영과, 조각을 하는 강수문이었다.

수문이 반가운 손짓을 해 보였다. 해인은 목을 까닥이는 걸로 알은척을 하고는 그 자리에 서서 잠시 둘이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

아무래도 이영이 수문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간만에 왔으면 얼굴 좀 보고 가지. 같이 차나 한잔하면 좀 좋아?”

“꿈도 커. 박 작가가 언제는 그런 사람이야?”

“그건 그래. 해인 씨, 오랜만에 봤다고 다시 낯가리는 거 아니지?”

모든 작가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작가들은 대부분 외향적이기보다는 내향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해인 역시 그 범주여서 기분이 좋을 때보다는 심각할 때가 많았다.

또한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해서 쉽게 누군가와 친해질 수 있는 성격도 못 됐다.

반면 수문과 이영은 작가들 중에서도 유난히 성격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드물 만큼 외향적이고 밝고 쾌활하며, 활기찬 사람들.

그래서인지 둘은 아주 친해서 매일같이 붙어 다녔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모양이었다.

“제가 무슨 낯을 가린다고…….”

“가리잖아. 엄청.”

“……뭐, 조금은…… 하지만 보통이라고요.”

“전혀. 해인 씨는 꼭 무슨 고양이처럼 친해진 것 같으면 또 데면데면하고 그러잖아?”

“야야, 너 그런 말 대놓고 하지 말라니까?”

사이가 워낙 좋다 보니 둘이 사귀는 줄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냥 친구라고 했다.

그들은 종종 해인에게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권하고는 했는데, 오늘도 그랬다.

“아무튼 오랜만에 보는데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

“배가 불러서요.”

“아, 뭐 먹었어?”

“밥은 언제 먹었대?”

“그럼 술이나 한잔하지, 뭐.”

늘 느끼는 거지만 이들은 같이 뭔가 먹으면서 친해지고 싶어 하는 타입들이었다. 해인은 손사래를 쳤다.

지금 바로 돌아가도 집에 도착하면 8시나 9시였다. 태일이 오기 전에는 들어가려면 슬슬 출발해야만 했다.

“다음에요. 오늘은 바쁘기도 하고, 시간도 없고요.”

“뭐가 그렇게 바빠? 오랜만에 봤는데 조금만 있다 가라.”

“그래, 그래!”

“저쪽에 괜찮은 일본식 선술집 생겼는데, 우동도 서비스로 준다. 박 작가 그런 거 좋아했잖아.”

이 둘은 꼬시기 시작하면 은근히 끈질겼다. 하지만 해인은 지금 술 같은 걸 먹을 기분이…….

‘앗, 술?’

고개를 내젓던 해인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동그란 눈을 하고는 동작을 멈췄다.

“거기 어묵탕도 진짜 맛있는데.”

“맞다! 박 작가가 어묵 국물 같은 거 좋아했지.”

“그래, 그래서 거기 오픈했을 때 둘이 먹으면서 다음에 해인 씨 데려오자고 그랬잖아.”

“기억난다. 그랬어.”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거나 말거나, 해인의 관심사는 단 하나였다.

술! 먹으면! 인사불성……!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지고, 의지와는 상관없는 짓을 하기도 하고…….

자칫 개가 되는! 마법의 물약!

해인의 눈이 돌연 반짝반짝해지는 건 그런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의식이 불분명해지잖아? 인식도 흐려지고, 그런 거…… 아주 좋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곧장 지끈지끈거리는 두통이 찾아왔지만, 해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두통에 눈가를 찡그리면서도 입술은 웃었다.

“가렵니다!”

“엇, 정말?”

“해인 씨가 웬일로 적극적이네?”

“꼭 가렵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는 해인은, 이영이나 수문의 눈에는 낯설어 보일 만큼 기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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