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고양이는 놀라면
저녁 무렵, 퇴근하고 집에 도착한 시율은 집 안에 떠도는 한 가지 이상 기류를 감지했다.
그것은 그가 유난히 감이 좋은 남자라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로 숨 막히는 기류라면 어지간히 둔한 사람이라도 당장 알아챌 수 있으리라.
“형님 오셨어요!”
“아, 아…… 안녕하세요!”
“……안녕.”
모든 것이 수상하고 어색했다.
이하은과 태일이 소파에 앉아 있다 말고 벌떡 기립자세로 일어나 허겁지겁 인사를 하는 것부터, 둘 사이에 거리가 심하게 널찍한 것까지 전부 말이다.
저 둘은 왜 하필 4인용 소파의 끝과 끝에 앉아 있는 걸까.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한데.’
또 저 녀석이 뭔가…….
시율의 시선이 대번에 해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곧장 범인이 저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얼굴에 써 붙인 고양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해인이 그의 눈을 피할 때는 분명 뭔가 잘못한 게 있을 때뿐이었다.
그의 귀가에 반갑다고 뛰어나오는 대신 천장 한 귀퉁이를 보며 휙, 휙 크게 흔드는 꼬리만 봐도 뻔한 일이었다.
“저기, 그럼…… 강 선생님도 오셨겠다! 전 이제 가볼게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던 이하은이 급하게 자신의 가방과 코트를 챙겨 들었다. 마치 뭔가 죄진 사람처럼 도망치려는 모습이었다.
“거기 잠깐.”
“네?!”
“저, 저흰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그저 불러 세웠을 뿐인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이하은은 토끼눈을 하고 태일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래서야 모른 척해주고 싶어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시율의 시큰둥한 목소리에, 자기들도 행동이 수상하다는 걸 알았는지 둘은 누구랄 것 없이 새빨간 얼굴이 됐다.
이 치미는 어색함에는 구경하는 고양이가 다 민망함을 느낄 정도였다.
어쩌면 이렇게 속이 훤히 보이는지. 저 둘은 법 없이도 살겠지만 대신 야생에 내놓으면 제일 먼저 죽을 타입들 같았다.
“그게, 그러니까…….”
“그보다 기도가 나한테 전화했던데.”
차마 속아주기 힘든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태일이었고, 시율은 안 들어도 알 것 같아서 대충 잘라버렸다.
“기도가요?”
“너희 둘 다 연락이 안 된다고. 오늘 저녁에 한잔하기로 했다며.”
“아.”
“앗!”
“……뭘 하면 그렇게 잊어버리냐. 아니, 대답은 됐다.”
뻔하니까. 시율은 딱 그런 표정이었고, 태일과 하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식은땀만 뻘뻘 흘려댔다.
‘키스밖에 안 했어.’
그런데 저 상태였다. 다만, 시율의 머릿속에서는 아무래도 진도가 더 나간 것 같았지만.
시율은 휴대폰을 보며 말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중간 연락책이 됐다는 게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집에 가보고 여기 있으면 알려준다고 했거든.”
“……그게, TV를 보느라.”
“어련히 그러시겠지.”
“저, 정말인데요.”
눈에 띄게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태일을 보며 해인은 진실도 저렇게 말하면 미덥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둘은 분명 텔레비전을 켜 놨다. 집 안에서 보일 리 없는 먼 산만 봐서 그렇지.
일단은 연애 선배라서일까. 해인은 키스 정도 가지고 뭘 저리 수줍음 타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얼마 안 가 자신도 처음엔 그랬었다는 걸 떠올렸지만 말이다.
다만 시율은 태일과 달리 부끄러움 탈 시간을 안 줬을 뿐이었다.
“아무튼, 너희가 여기 있으면 자기가 이리로 오겠다는 것 같던데.”
“형님도 계시는데요?”
“난 별로 상관없어. 듣자니…… 뭐라더라? 누가 게를 왕창 줬다나. 모여서 먹자던데.”
게! 지금 게라고 했냐!
순간 해인의 눈이 번쩍 뜨인 건 꼭, 해산물에 열광하는 고양이의 특성 탓은 아니었다. 사실 사람 중에도 게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해인처럼 가장 좋아하는 음식 베스트에 들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아, 기도 친척 중에 이맘때면 꼭 대게를 보내주시는 분이 계세요. 그래서 저희 셋이 모여서 먹고는 했거든요.”
“아하.”
해인은 홀연히 잊고 있던 자신의 로망을 한 가지 되새겼다.
언젠가 소문으로 듣고는 한 번쯤 실현해보고 싶었던 소망이 있었던 것이다.
‘남자 친구가 발라서 주는 게살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새우도 남자 친구가 까줘야 제맛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확실한 건 갑각류는 항상 남이 발라서 주는 게 제일 맛있다는 거였다.
해인은 게 파티가 시작될 기미가 보이자 얼른 시율에게 친한 척을 시작했다.
“잘됐네요! 올해는 형님도 같이 드시면 되겠어요.”
“어머, 그러게요. 항상 너무 많았는데.”
사람 좋은 커플이 태평하게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매번 셋이 즐기던 일에 시율이 끼는 데 한 점 거리낌도 없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굉장히 반기는 눈치였다.
이상하게도 시율은 불친절한 것치고 꽤나 사랑받는 남자였다. 원하는 게 있어서 태일에게 조금 잘해준 것 빼고는 매사 가시덩굴 같은 남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시율은, 저를 향한 무조건적인 호의나 친한 척을 한다는 것을 느끼면 일단 정색하는 경향이 있었다.
간지러운 짓은 별로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해인은 그게 가끔은 그의 부끄러움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알게 됐다.
아주 근래에 와서야 말이다.
“뭐…… 같이 먹어주지.”
좋다는 말을 왜 틱틱거리는 걸로 대신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게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찜기는 아마 베란다 창고에 있을 텐데…… 제가 꺼내 올게요.”
“그럼 내가 찔 준비를 할까.”
“앗, 그럼 전 이리로 오라고 기도한테 전화할게요! 술도 사올까요?”
이하은이 매우 신나 보이는 건, 이 구성이 그녀에게 행복한 요인 중 하나이기 때문일 거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노닥거리는 건 정신건강에 좋은 일이니까.
물론 이 구성에 시율은 깍두기겠지만.
“술은 내가 나가서 사올게. 마침 이 녀석도 들러붙어 있고 말이야.”
게도 좋지만 산책도 좋지! 해인은 들러붙어 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맞다, 기도 녀석이 말하는 중요한 할 말이라는 게 뭐야?”
“글쎄요? 그 얘긴 저희한테도 하긴 했는데…… 오늘 만나서 이야기하자고만 했어요.”
“뭔 얘기래.”
두 남자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마주 으쓱거렸다.
그러는 동안 해인은 시율의 등짝을 타고 위로 오르고 있었는데, 그의 어깨에 도착했을 즈음 이하은이 뭔가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혼자만 뭔가 짚이는 게 있다는 얼굴이었으니까.
***
사람이 없는 으슥한 길목을 지날 때였다.
“있잖아, 김기도는 무슨 일 같아?”
시율의 어깨에 얌전히 매달려 있던 해인이 입을 연 것은.
둘은 마트에서 술을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율이 불안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해인은 반경 몇 미터 안에 아무 인기척이 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괜찮아! 아무도 없어.”
“확실한 거야?”
“그럼, 내 센서는 제법이라고.”
“……글쎄. 기도 녀석이야 워낙 존재감이 그저 그래서 무슨 생각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엥? 강이 그런 사람도 있어?”
척 보면 척 하는 것 아니었어?
“얼핏 평범한 것도 같은데 은근히 속을 모르겠는 타입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별로 관심이 없어서.”
“으음…… 아직도 터질 게 남아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지?”
한동안 어떤 의미로 시율과 해인을 괴롭혔던 태일과 하은의 일도 끝나가고 있었다.
하은의 약혼자, 아니 전 약혼자는 마치 아무 미련 없는 것처럼 하은이 원하는 대로 파혼절차를 밟아줬고, 대신 모든 인연을 끊었다.
이하은의 집안과도, 하은과 이어진 지인들과도 벽을 두르고 돌아서서 사람들은 이하은과 그 약혼자 중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이 외면한 건 당연하게도 이하은 쪽이었다.
물론 그 정도면 버림받은 입장치고 약혼자는 아주 신사적인 태도를 보여준 셈이지만. 그로 인한 실질적인 타격은 제법 커서, 이하은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쫓겨나듯 출국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있잖아, 강. 난 이하은은 불쌍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
“부러울 건 뭐야?”
“일단 분명 행복해질 거잖아. 힘들 땐 힘들더라도…… 자기가 선택한 걸로 행복해질 수 있으면, 그건 정말 행복한 거야.”
“고양이가 별걸 다 안다니까.”
선택의 결과로 지금은 무던히 욕을 먹고 있었지만 말이다.
모델 업계에는 애초에 그 둘이 사랑의 도피를 준비했다느니 뭐라느니 말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었지만, 그런 후폭풍까지도 그들의 몫이었다.
누군가에게 잔인한 짓을 한 것 분명하니까.
그로 인해 이하은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모델 일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점도. 어쩌면 남은 평생을 구설수에 시달릴 거라는 것도 말이다.
그럼에도…… 해인은 이하은이 부러웠다. 정말 진심으로.
“그리고 말이야…… 주인이 출국할 때 나도 따라가면 안 돼?”
“안 돼.”
아까부터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다 했더니, 본론은 그거였군.
시율은 해인의 요청을 단박에 거절했다.
“왜에? 이렇게 얌전히 매달려 있으면 안 돼?”
“공항에서 고양이 못 풀어놓거든요.”
“어…… 그럼 여동생으로 갈게!”
그것도 안 돼. 이미 사실을 말했거든. 그 말을 하면 이젠 당연히 따라간다고 조를 테니 말해주지 않겠지만 말이다.
“안, 돼. 그 모습으로 울기라도 했다간…….”
“안 울어!”
“못 믿어.”
“강~ 강강강. 갈래갈래!”
“아무리 졸라도 안 돼.”
시율은 해인이 어깨에 매달려 있거나 말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강하게 내저었다.
***
그날 가장 많이 술을 마시는 건 김기도였다.
평소에도 이 중에 시율 다음으로 술이 센 편이기는 했지만 저렇게 벌컥벌컥 들이켜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태일은 답지 않은 기도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너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아, 괜찮아.”
“할 말이 뭔데 그래?”
“……조금 이따가 말할게.”
김기도가 술의 힘을 빌려서까지 하려는 말이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시율뿐이었다.
그는 자신 몫의 게살을 발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는데, 오늘은 도통 먹는 데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해인이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얀마!”
“냥!”(앗!)
들켰군!
식탁 위로 살금살금 올렸던 손을 탁, 소리 나게 맞은 해인은 대번에 부루퉁한 얼굴이 됐다. 치사해. 애정이 식었어!
“고양이는 이런 거 먹으면 안 되는 거 몰라?”
“냐아냥!”(난 먹어도 돼!)
“이게 염분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
“니야악!”(나도 먹고 싶단 말이야!)
“사람 음식은 먹지 말라고!”
시율은 해인이 사람 모습일 때는 케이크이든 뭐든 먹겠다는 대로 주면서, 고양이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매우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수의사의 본능이 꿈틀대기라도 하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먹고 싶은 거 못 먹게 하면 서러운 법이었다.
“냥! 냥냥냥!”(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이 게살 좀 먹겠다는데 거, 너무하네!)
해인은 이래저래 불만으로 들어찬 소리를 냈다.
분명 다른 고양이들은 이런 걸 먹으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해인은 썩은 음식을 먹어도 탈 나지 않는 몸이었다.
알코올 빼고는 뭐든지 오케이랄까.
그렇게 소리치지 못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오늘따라 왜 이래! 안 그러던 녀석이!”
“냐!”(안 죽어!)
해인은 분명 식탐과는 거리가 먼 고양이였는데, 오늘따라 고집이 장난 아니었다.
결국엔 시율의 어깨로 타고 올라와서는 그가 입에 넣는 걸 빼앗아 먹으려 들었다. 거리감이 너무 없어지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에 시율은 이를 갈아야 했다.
그리고 결국, 입에 넣은 것도 빼앗길 지경이 되자 질 수밖에 없었다.
시율은 조름을 이기지 못하고 해인에게 게살을 조금 떼어주고 말았다.
“……미리 말하지만, 고양이한테 이런 거 주면 안 됩니다.”
“……네.”
“아, 예.”
뭐든지 패배한 사람이 말하면 설득력이 없는 법이었다.
해인은 결국 아득바득 이겨서는 게살을 한 입 입에 넣었고,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걸 확인 할 수 있었다.
남자 친구가 먹여주는 게살은 더 맛있는 게, 맞다!
“……형님 엄청.”
“뭐, 뭐뭐!”
“아니…….”
“나도 아니까 말하지 마!”
졸지에 모두의 앞에서 고양이에게 지는 남자라는 타이틀이 생긴 시율은, 태일이 그걸 말하게 두지 않았다.
대신 애먼 기도를 잡고 있었다.
“너는 할 말 있다고 사람을 불렀으면 그거나 해!”
“……그럴까요. 밤도 늦었고.”
김기도는 반쯤 등 떠밀리긴 했지만 기회다 싶었는지, 슬슬 말할 마음이 들었는지 내내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조용히 내려놨다.
술자리가 시작됐을 때는 조금 긴장한 얼굴이더니, 해인과 시율이 게살을 두고 티격태격거리는 사이 조금 풀어진 모양이었다.
“사실은 될 수 있는 한 오래…… 말하지 않으려던 건데.”
“……뭔데?”
“갑작스럽지만 너희가 떠나게 되고, 이번에 느낀 게 있어. 이번 기회에 나도 달라지자는 생각이 들었거든.”
“뜸 들이긴.”
“인생은 역시 솔직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아마도 태일의 반응이 가장 걱정되는지, 김기도는 유난히 태일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은인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긴데.”
“……?”
“나, 사실 남자를 좋아해.”
태일은 염려의 대상이었던 만큼 가장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자신의 오랜 친구가, 가장 친한 친구이자 흔히 말하는 거시기 친구가…….
“뭐?”
“우리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말 못 했다.”
“……에엑?”
“물론 널 좋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되는 걸까. 하지만 그게 전혀 위안이 되지는 않아서, 태일은 곧장 패닉에 빠진 모양이었다.
시율도 만만치 않게 한 방 맞은 얼굴이었다.
해인은 먹음직스러운 집게발 하나를 입에 물었다가 그대로 떨어트렸다.
진짜는 엉뚱한 데 있었다니. 왜 저쪽에서 커밍아웃이…….
“너, 너…… 여자 친구도 있었잖아!”
“그땐…… 나랑 맞는 여자를 못 만난 건 줄 알았지.”
“하아?”
“알고 보니 그냥, 나한테 여자가 안 맞는 거였어.”
이하은이 그간 태일의 성향에 대해 그렇게 단단히 맹신하고 있었던 이유는 김기도도 한몫했던 모양이다.
“사실 외면한 것이기도 하고. 설마 아닐 줄 알았거든. 나름 평범하게 살아보려고 노력은 했는데, 잘 안 되네.”
“기도야…….”
“그런데 어느 날 깨닫기로…… 모두에게 평범한 일이 나한테도 평범하라는 법은, 없더라고.”
김기도는 이제야 후련한 얼굴이었다. 웃는 낯이었고, 목소리는 편안했다.
“그걸 인정하고 깨닫는 데, 완전히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어. 그래서 너한테 말할 힘까지는 없었다.”
“……그래도, 진작 말하지 그랬냐.”
“인생이란 게 쉽고 행복할 수만은 없으니까. 끝까지 비밀로 할 생각도 했었는데…… 너희를 보자니 용기가 생겼어. 앞으로는 커밍아웃 하고 살까 해.”
그런 엄청난 결심을 겨우 우리를 보고 해도 되는 걸까.
태일은 썩 자신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자신들이 잘한 게 그 무엇도 없어서, 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에 있기도 했다.
“숨긴다는 게 좋지만은 않잖아. 선택은 본래 힘든 거고…….”
“하지만 너…… 이제 너 혼자 남을 텐데…….”
“괜찮아. 누군간 나를 이해할 수 없어서 비난하더라도 내가 꼭 틀린 인생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 너희랑 같아.”
기도는 태일과 하은의 사랑을 응원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시원해 보이는구만.”
그나마 가장 먼저 제 정신을 차린 건 시율이었다. 해인은 아직도 제가 입에 집게발을 물고 있는 줄 알고 입을 반쯤 벌린 채였으니까.
말귀 알아듣는 티를 너무 내는 고양이였다.
“후련해졌어요. 그간 마음이 많이 무거웠거든요. 이 녀석들을 좀 더 도와주지 못한 것도 내내 미안했고, 나 때문에 더 꼬인 것 같아서…….”
“그건 아냐!”
하은이 강하게 부정했지만, 아예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김기도는 그냥 웃고 있었다. 어딘가 시원섭섭해서 울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너희, 운명인가 보다. 안 될 것 같더니 이렇게 풀리는 걸 보면. 가서 잘 살아라! 그 말이 제일 하고 싶었어, 오늘.”
오랫동안 친구 관계를 유지해온 셋 사이에 너무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둘은 연인이 됐고, 떠나게 됐다. 하나는 숨겨왔던 어떤 진실을 벗겨냈고. 하지만 그런다고 영영 헤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한동안 못 보겠지만…… 보고 싶을 거다. 물론 친구로서.”
“……만나러 와.”
“그럴게. 너, 나 어색해하면 안 된다.”
“안 그래.”
“내가 어색해할지도 모르지만…… 그땐 봐주라.”
갑작스러운 사실에 얼이 빠져 있던 태일이 그제야 웃어 보였다. 김기도는 그게 안심이 되는 모양인지 둘러앉은 사람들을 면면히 살펴봤다.
“그리고 너흴 축하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줘. 꼭…… 행복하게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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