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고양이는 참견을 좋아해
‘그럼, 강시연은 본명이 아니겠네요?’
‘그렇지.’
‘그렇다면 원래 이름은 뭡니까?’
‘……비밀이야.’
‘예에?’
사실 나도 몰라. 가슴 아프게도 말이지.
시율은 멀거니 잡지를 들여다보며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태일이 황당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질툽니까?’
‘그래. 그런 걸로 해두자.’
그 속을 알 리 없는 해인이 소리 없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아침부터 잡지에만 빠져 있는 시율에게 심술이 나서 온몸으로 그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가 펼치고 있는 페이지 위로 뒹굴뒹굴 몸을 굴리며 글자를 읽을 수 없도록 말이다.
어제 저를 따돌린 일로 심술이 나기도 한 상태였다.
“……뭐 하는 거야?”
“심심해.”
“거참.”
“주인도 나가고, 강은 잡지만 보고. 따분해!”
산책이라도 시켜주든가, 아님 머리라도 쓰다듬어줘.
해인이 시율의 손안으로 제 작은 머리를 들이밀었다. 지금은 태일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고양이 모드였다.
시율은 피식 웃으며 해인이 원하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토닥여 줬다.
“여행을 갈까 해서.”
“여행?”
그러고 보니 잡지가…….
해인은 몸을 일으키며 자신이 가리고 있던 페이지를 자세히 살펴봤다. 일본의 온천투어를 주로 다루고 있는 여행 광고였다.
눈이 쌓인 온천지의 사진은 퍽 운치 있어 보였다.
“강…… 일본 여행 가게?”
“으흠.”
“날 두고? 혼자 집 보라고?!”
“뭐라는 거야. 당연히 같이 가야지.”
분명 버럭 화를 내려던 해인은, 시율의 말에 기뻐하는 대신 곧장 시무룩해졌다.
가혹한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시율이 저를 두고 여행 가는 건 섭섭한 일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제 주제가 퍽 초라했으니 말이다.
“미안, 다녀와…….”
“집 보기 싫다며?”
“……같이 못 가. 난 비행기도 못 타고, 여권도 없고…….”
“……그거 엄청 현실적인 문제구나.”
기가 죽어버린 해인을 보며 시율은 언제쯤 이 녀석이 눈치챌까 기다렸다. 다만 우울한 눈을 보자니 1분도 못 갔지만.
“걱정 마. 너도 갈 수 있으니까.”
“……위조해?”
“뭔 소리래.”
“막 영화처럼! 하지만 여권 위조 하면 범죄잖아! 아니, 그런 거 가능하긴 해?”
겁이 나는 얼굴이면서도, 가고 싶긴 가고 싶은지 해인의 눈은 꽤나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니, 배로 가면 돼.”
“……배도 여권 있어야 하는걸.”
“작은 짐승은 데리고 탈 수 있어. 캐리어가 있으면.”
“아!”
맞아, 난 고양이지! 지금도 고양이 모습이면서도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고양이라서 좋은 점도 있었잖아? 여권 따위 필요 없어!
폴짝폴짝, 해인은 새로이 깨달은 사실에 기쁨의 점프를 하며 두 귀까지 파닥거렸다.
엄청, 기분이 좋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하고 있었다.
“강 천재다!”
“그걸 이제 아셨나.”
“배삯도 굳잖아!”
“연휴랑 붙여서 휴가를 내면, 크리스마스를 거기서 지낼 수 있을 거야.”
그거 대단히 좋은 것처럼 들렸다. 크리스마스에 온천 여행이라니.
“연휴가 얼마 안 남아서 비행기는 자리가 없겠지만, 배는 아는 사람을 통하면 아마 될 거야. 갈 거지?”
“갈래, 갈래!”
“마음에 드니 다행이네.”
“당연하지!”
“가면 료칸이라는 일본식 전통여관에 묵자. 온천 하긴 그 편이 좋거든. 분명 재밌을 거야.”
그것들은 듣기만 해도 즐거운 계획이었다.
호텔에 가본 것도 시율과 함께 간 것이 처음이었는데, 료칸까지. 해인은 신 나서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흔한 여느 커플들처럼 크리스마스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자니, 자신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연말에는, 집에 가기로 했는데!’
들떠서 그만 깜빡했지만 말이다.
해인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남자 친구와의 첫 해외여행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이 크리스마스는 시율과의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연말에 부모님이냐, 남자 친구냐. 그것이 문제였다.
고양이의 몸을 하고는 이런 인간적인 고민을 하게 될 줄이야.
***
며칠간의 고민은 힘들었지만,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 엄마. 잘 지내? 집에 별일은 없고?”
[별일은, 그냥 매일 똑같지.]
“다른 게 아니라…… 저기, 연말에 집에 못 갈 것 같아. 미안해.]
불효녀를 용서해, 엄마! 해인은 심히 양심에 찔렸지만 크리스마스에는 시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인의 엄마는 매우 쿨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렴. 너 편할 대로.]
“……혼자 지내야 하는 거 아냐?”
[나도 친구 있어, 얘.]
“그, 그러면 다행이고.”
또한 엄마는 사람을 꽤 무안하게 하는 구석도 있었다. 해인은 자기 엄마가 시율과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박 잘 주는 장모와 사위라…… 왠지 상상이 갔다.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너 얼마 전에는 대뜸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뚝뚝 울더니, 이제 또 괜찮아졌나 봐?]
“전혀 안 울었거든! 창피하게 뭔 소리래!”
똑똑히 운 걸 분명 기억했지만, 지금 와서는 민망한 일이었다. 엄마에게는 이 정도 우겨도 괜찮았다. 엄마니까.
[향수병이 도졌나 했더니 나았나 보구나? 뭐, 알아서 해.]
“그…… 집엔 나중에 갈게.”
[그래라. 내가 어딜 가겠니. 네가 아무 때나 와도 난 집에 있을 거야.]
거짓말, 없었으면서.
시율을 따돌리고 기껏 집에 찾아갔더니 여행 가고 없던 엄마가 떠올랐다. 해인은 허무했던 그날의 일이 떠올라 마음에 미안함이 조금 줄어드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문득, 주술이 걸리기 전인 그때라면 시율에게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땐 아직 시율을 믿지 않던 때라서, 숨기는 데 급급했었다.
“응…… 아무튼 미안해. 아마 봄이 끝날 즘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여름 말하는 거니?]
“여름이 시작되기 전일 거야.”
[그럼 한 네다섯 달 뒤겠구나.]
“아마.”
아주 길어야 다섯 달. 사신이 몸을 완성했다며 찾아오는 날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 짧으면 짧으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연말엔 뭐 하려고? 집에 안 오는 걸 보니 친구들이랑 놀러 가니?]
“……비슷해.”
[애인이라도 생긴 거야?]
역시 엄마의 눈치는!
“응, 뭐…….”
응? 으응?
말해지네? 응? 말해지잖아? 저도 모르게 내뱉은 수긍에 가장 놀란 건 해인 스스로였다.
“……어, 엄마!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
[애인이 생겼다는 거?]
이럴 수가. 이게 된단 말이야?
[뭐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수…….”
반색하고 대답하던 해인은 목 안에서 목소리가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아, 그럼 그렇지. 여기까지로구나.
그래도 이 정도면 엄청난 발견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저기, 엄마, 나중에 그거 나한테 말해줘.”
[뭘?]
“방금 그거!”
누구랑 사귀고 있었다는 거!
또 말이 나가지 않았다. 의식이 이제야 위험을 인식하고 통제를 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시율에게 자신에 대해 단서를 남기면 안 된다는 사실에만 집중해서, 엄마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건 별로 의식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상하게 군다? 너 요즘…….]
“……끊을게!”
[너 휴대폰은 안 고치…….]
마침 동전도 떨어져서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해인은 공중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나, 사신 모달은 인간 박해인의 영혼에 금동술을 건다. 그대 저승에 대한 것이나, 인간인 자신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무언, 무행 하리라. 내 영혼의 무게를 걸고 강력히 주박을 거니, 이 결코 어길 수 없을 것이다.]
사신이, 안배해준 게 한 가지 있었다. 저주에 가까운 주술을 걸면서도 말이다. 그건 해인이 이 몸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가족들을 만나야 해. 살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한 가지 자비라면, 가족을 만날 수는 있게 해주마. 그들에겐 고양이로서의 너를 금언해야겠지.]
이건 처음으로 발견한 틈이었다.
사신이 건 금기들 사이에는 미묘한 경계가 있었다.
주술은 우선 사신탈의 정체를 들키는 데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다음으로는 인간인 해인이 이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감추게 했다.
그래서 인간인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다만, 가족들에게는 그 효력이 누그러졌다. 왜냐하면 만나야 했으니까.
그 덕에 생긴 지금 같은 균열.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시율.
주술이 걸리기 전에 이미 정체를 들켜서일까. 그에게는 주술이 별다른 효력을 내지 못했다. 그의 앞에서는 고양이로도 말하고, 사람으로 변하며 마음껏 정체를 드러낼 수 있었다.
주술은 언어로 걸었기 때문인지, 때로 형식이 완벽하진 않았다.
해인은 자신이 걸린 주술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뭐든, 생각해내, 박해인.’
***
해인은 엄마와의 통화를 마치고 빈집으로 살그머니 도둑고양이처럼 돌아왔다. 본래 제가 사는 집인데 살금살금 움직여야 하는 게 우습지만 말이다.
시율은 병원으로 출근했고, 태일은 나간 지 삼십 분도 안 됐으니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해인은 누군가 오기 전에 시율의 방에 숨어 몇 가지 실험을 반복했다.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일. 일기처럼 무언가 의식의 흐름대로 써보는 일.
아니면 자신이 보면 자신이 그렸다는 걸 분명 알 수 있을 만한 그림을 그리는 일.
계속 실패했지만 어쩌면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우연히 엄마에게 시율의 존재를 알린 것처럼, 사신 탈과는 관련이 없으면서도 자신과는 관련이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다만 한번 인식하면 두 번째부터는 차단당하기 때문에 신중해야 했다.
‘딱 한 번.’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남기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본래의 생활로 돌아간 자신이, 조금이라도 시율의 존재를 인식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저 누군갈 사랑했다는 거라도.
안 되는 걸 되게 해보려고 너무 집중한 탓인지 연필을 네 번이나 부러트렸을 때였다. 그사이 몇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는 걸 깨달은 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도어록 소리에 해인은 얼른 고양이로 변했다.
늘어놓은 스케치북과 연필은 급히 시율의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현관으로 나와 태일을 맞이했다.
“냐냐!”(주인!)
“개냥아.”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태일이 이하은과 함께라는 점이었다.
“아, 안녕?”
이하은은 현관에 선 채로 해인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겨우 고양이를 그렇게 어려워하다니, 누가 보면 엄청 괴롭힌 줄 알겠다.
솔직히, 조금 괴롭히기는 했지만.
모른 척 발톱을 세운다거나, 하악댄다더나.
“냐!”(들어와!)
“괜찮아.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 봐.”
“……그런가 보네.”
어제까지야 어쨌든, 이제는 조금 잘 해주기로 했다.
이하은이 어제 막 파혼해서는 아니었다.
그로 인해 가족들에게 따돌림 받고 있어서도 아니었고, 그냥 정식으로 태일의 여자 친구가 됐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끼고 있던 약혼반지가 없어진 손가락을 계속 매만지는 이하은은, 조금 말라 있었다.
“뭐 좀 먹을래?”
“괜찮아. 그보다…… 마실 것 좀 줄래? 따듯한 거 아무거나…….”
“차 같은 게 좋으려나. 뭐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잠깐만.”
찬장에는 다즐링이랑 밀크티가 있어! 얼그레이도 있고, 코코아도! 그런데 코코아는 내 거야!
해인은 쫄래쫄래 태일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혼자 소파에 앉아 있던 이하은도 뭔가 안정이 되지 않는지 태일을 따라왔다.
“차는, 내가 탈게.”
“그럴래? 그럼 내가 물을 올려줄게.”
부엌은 비교적 넓은 편이었지만 두 사람 발에 차이는 건 사절이라 해인은 폴짝 뛰어 식탁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졸졸, 태일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따라다녔다.
태일이 뭔가를 하다가 식탁 가까이 오면 그의 팔꿈치나 허리에 머리를 문질렀는데, 이하은은 왠지 그게 부러운 모양이었다.
“고양이는…… 원래 이렇게 사람을 잘 따라다녀?”
“아, 고양이가 원래 참견하는 걸 좋아한대.”
“아하…….”
“하지만 자기 기분 좋을 때 한정이야.”
참견을 좋아한다니! 그냥 구경하는 걸 좋아할 뿐이야! 며칠 뒤면 헤어질 테니까 많이 비비적 거려둘 뿐이고.
그렇게 들리지 않는 아우성을 치다 문득 해인이 태일의 얼굴을 보았다.
당장 다음 주면 출국하는 그는 이제 얼추 얼굴의 상처가 나아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옅은 멍 자국들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태일의 얼굴에서 상처를 볼 때마다 울 것 같던 이하은은, 상처가 거의 없어졌는데도 여전한 얼굴이었다.
“저기…… 태일아, 정말 나라도 괜찮을까?”
“……무슨 소리야.”
“너희 집 어른들도…… 자꾸만 만나주지 않으시겠다고 하고…….”
“그건 내가 잘 설득해볼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당연히 쉽지 않은 둘이었지만, 역시 가장 큰 난관은 부모님들인 모양이었다. 해인은 집에서 간혹 구경하는 입장이라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난, 너랑은 달리 한 번 약혼하기도 했고.”
“그런 건 상관없어.”
“어른들은…… 그런 거 용납 못 하시잖아.”
“하은아…….”
“너희 집은 특히나 엄격한데…… 난…….”
참 이상했다.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앞으로 함께 있겠다는데 그게 무조건 행복하지는 못하다니 말이다.
하나를 넘으면 또 하나가 있고, 또 하나를 넘으면 또 몇 개가 있고. 이래서야 언제쯤 행복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상황을 겪어 봤을 리 없는 태일은, 당연히 힘들어하는 하은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그야 친구로서 해주던 위로와 지금 연인으로서 해야 하는 위로는 많이 다르겠지만.
“……넌 괜찮아?”
“뭐가?”
“싫지 않아? 나한테, 네가 처음이 아닌데…….”
“나는…….”
그건 모태솔로의 남자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야야야! 거기서 대답을 고르고 있으면 어쩌냐! 이 남자야! 이 고구마 쑥맥아!’
해인은 구경하다 말고 답답함에 가슴을 쥐어뜯고 싶어졌다.
태일은 대답을 고르는 데 너무 신중한 나머지, 그렇지 않아도 불안감에 물든 이하은을 아예 절망의 구렁텅이로 처넣고 있었다.
해인은 시율도 없겠다, 딱 한 번만 더 저지르기로 했다.
“엇.”
“아.”
폴짝 뛰어올라, 온몸의 무게를 실어 태일의 어깨에 내려앉았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오며 이하은에게로 태일을 냅다 떠밀었다.
얼결에 가까워진 둘은 함께 넘어질 뻔했고, 태일은 하은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멈춰 섰다.
하은은 당황하는 듯싶다가, 눈을 감아 보였다.
해인은 거기까지만 보고 재빠르게 도망쳤다.
‘미안! 참견쟁이인 거 인정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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