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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스-74화 (74/114)

74화. 고양이는 너무 아파도 애교를 부린다

자정 무렵, 해인은 베개 깊숙이 코를 박고 기분 좋게 잠들어 있었다. 좋은 호텔이라서 그런지 침구에서는 어렴풋한 햇살 냄새가 났다.

새근새근.

곤히 잠들어 있는 숨소리를 들으며 시율은 해인의 어깨 위까지 시트를 덮어줬다.

대체 언제 그를 경계하며 산 적이 있냐는 듯, 해인은 시율의 곁에서 너무도 무방비한 채였다.

그는 이제 명실상부 해인이 가장 믿는 사람이었다.

가장 의지하는 동시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미우면 밉다, 좋으면 좋다, 모든 게 얼굴에 빤히 보이는 해인이다 보니 시율이 그걸 모를 리도 없었다.

“…….”

시율은 뭐, 굉장한 볼거리인 양 잠든 해인에게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고개를 돌린 건 바닥에 떨어진 그의 코트 속에서 휴대폰이 윙윙, 시끄럽게 울어댄 즈음이었다.

귀가 밝은 해인이 언제 깰지 몰라 시율은 얼른 휴대폰을 주워 들고는 욕실로 향했다.

[신태일]

짐작한 대로, 끈질기게 울려대는 전화의 주인은 태일이었다.

이미 휴대폰에는 태일의 부재중만 열 통이 넘은 채였다. 거의 하루 종일 일부러 받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그나저나 이미 자정인데도 포기하지 않다니, 태일답지 않은 끈기였다.

태일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함정에 빠진 느낌이리라. 아침부터 고양이를 데리고 사라졌나 싶더니 집으로 이하은을 보냈으니까.

그러고는 잠수했으니…….

시율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형님!]

“으흠?”

[……으흠이 아니잖습니까!]

겨우 연결된 전화에 감동한 걸까? 수화기 너머에서 반쯤 우는 태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말하는데, 계획적인 건 아니었다.”

[그걸 믿으라고 하시는 말입니까?]

“아니, 아침에 산책을 나갔는데 말이야. 집에 너도 혼자 있겠다, 거기에 이하은만 보내면 끝이 나겠더라고. 어차피 만나볼 거였잖아?”

시율은 태일에게 보일 리도 없는데 어깨를 으쓱거리며 욕조 사이드에 걸터앉았다.

[……저랑 상의 정도는……!]

“그런 건 할 만큼 했잖아.”

그는 다른 건 관심이 없었다. 다만 지금쯤이면 대충 정리가 됐을 테니 태일이 뭐라고 하나 들어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형님 정말…….]

“너무하다고? 난 봐줄 만큼 봐줬다. 네 녀석이 미적지근하게 구는 거라면 말이야.”

[……물론, 그건 알지만.]

“그거만 말해봐. 간택당했는지, 외면받았는지.”

제 일 아니라고 참 쉽게도 물으며 시율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적당히 따듯하게 물을 조절하고 있자니 그 소리를 들었는지 태일이 말을 돌렸다.

[그…… 지금 대체 어디 계신 겁니까?]

“아, 친구네.”

[집에 안 들어오시는 겁니까?]

“오늘은 어쩌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서 말이야, 여기서 묵을 생각이야. 그보다 말 돌리지 말고 네 이야기나 해봐.”

[…….]

“대답 안 하면 집에 안 들어간다.”

희한한 협박이었지만 태일에게는 제법 먹히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시율이 집 밖을 전전한다고 생각하면 양심에 가책이 극심한 일이었으니까.

[가, 가출입니까?]

“그래, 결판날 때까지 네 얼굴을 안 보는 것도 속 편하겠지.”

[굳이 말씀드리자면, 간택…… 쪽이긴…… 한데.]

거, 축하할 일이었다. 태일의 목소리가 썩 밝지는 않을 걸 보면 다른 문제들이 산재하긴 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기운이 없어?”

[이게 잘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일전에 말했지. 칭찬받고만 살 수는 없다고. 그건 욕심이야, 신태일.”

[……그런 게 아니라…… 파혼하게 되면, 하은이가 잃는 게 너무도 많습니다.]

이하은이 자신을 선택했음에도 태일이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게 큰 것 같았다.

그간 남에게 쓴소리 듣고 살지 않았던 이하은이었다.

태일과 비슷한 유순한 인생을 살았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도 받지도 않던 평화로운 삶.

그러던 어느 날 결혼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멀쩡한 약혼자의 손을 놓고 돌연 다른 남자를 택했으니 쏟아지는 비난은 당연할 터였다.

“뭐, 이하은뿐 아니라 대부분이 너희를 비난하겠지.”

[저는 아무래도 좋지만 하은인 여자잖습니까. 그걸 버틸 수 있을지…….]

입소문이 빠른 바닥이니 하고 있는 모델 일에도 영향이 갈 테고, 약혼자와는 대학 선후배 사이니 지인들 사이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두고두고 가십거리가 될 것도 분명했다. 친구를 많이 잃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이탈에 가족들의 반대 역시 극심하리라. 실망한 이들과 등을 지게 될 수도 있었다.

제3자인 시율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이하은이 태일을 고르는 건 확실히 실(失)이 많은 선택이었다.

태일은 이제 와서 그것이 실감 나 심히 괴로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너, 그런 걱정은 집어치워라. 그쪽을 버리고 널 택한 건 이하은 본인이잖아. 그렇다면 알아서 감수하겠지. 여자들이 그렇게 약하지만은 않거든.”

[……하은인, 저만 좋다고 하면 저를 따라 미국에 가겠답니다.]

“그거 괜찮네. 왜, 넌 그게 부담스러워서?”

[그럴 리 없잖습니까! 그런 게 아니라, 다만…… 저 같은 놈 때문에 하은이가 너무 많은 걸 포기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자기 일도, 가족도…… 친구들도 다 이곳에 있는데…… 저 하나 때문에…….]

차라리 강단 있는 건 이하은 쪽일지도 모르겠다. 끝끝내 주춤거리는 태일보다는 말이다.

시율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이것까지는 가르쳐 주자고 생각했다.

“너 정말 바보구나, 그걸 전부 포기하더라도 그만큼 네가 좋은 거잖냐.”

[…….]

“그 전부를 합친 것보다 네가 좋다는 거잖아. 그러니 선택했겠지. 그런데 다시 선택하라고 하면 넌 나쁜 놈이야.”

[그런…… 뜻도 되겠군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아보지 못해서일까. 태일은 저로 인해 누군가 무얼 희생하는 게 낯설고 두려운 모양이었다.

항장 자신이 희생하는 게 정답이었던 탓도 커 보였다.

누군가의 첫 번째라는 게 어떤 건지, 이제부터라도 알아야 할 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영광으로 알라고. 여자가 그렇게 생각해주면.”

[저는 미안해서…….]

“미안하면 앞으로 평생 잘하면 되는 거고.”

어휴, 이 답답한 녀석. 마지막까지 등을 걷어차줘야 하나. 시율은 모자란 동생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 건 됐다. 니들 인생인 걸.”

마침내 욕조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시율은 수도꼭지를 잠그며 내일은 집에 돌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끼익.

욕실 문이 스리슬쩍 열린 건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잠그지 않은 것 같았다. 문을 열고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민 건 당연히 해인이었다.

“아, 자세한 건 내일 듣기로 하고. 난 좀 쉬어야겠다.”

[형님?]

“또 전화하면 내일 가서 가만 안 둘 거다.”

들을 것도 다 들었겠다, 시율은 통화를 마무리하는 데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다만 비몽사몽 졸린 눈을 비비는 해인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미안. 시끄러웠어?”

“……아니, 옆이 허전해서 깼어.”

해인은 자다 깨서 온 탓에 가벼운 하품을 하고 있었다.

시율은 다시 가서 자라고 권할까 하다가, 마침 욕조에 물도 가득 받았겠다, 해줄 이야기도 생겼겠다…….

욕조를 가리키며 권했다.

거의 농담이었지만.

“잘됐네. 그럼 같이 씻을까.”

늘 하는 그런 장난이었다. 해인이 부끄러움에 파닥거리며 도망치는 것을 보는 것도 그의 즐거운 일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멍하니 커다란 욕조를 바라보던 해인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건, 아주 의외의 일이었다.

“좋아.”

그건 꼭 잠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율은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았던 터라 내심 당황하고 말았다.

***

목욕은, 정말 좋았다.

뜨거운 것과 따듯한 것의 미묘한 경계에 있는 물속에 몸을 녹이자 머릿속까지 말랑말랑하게 녹아버리는 느낌이었으니까.

그야말로 노곤함의 극치였다.

아직도 그 기분이 팔다리에 남아서 반쯤 흐느적거리는 해인이었다.

위이잉.

“너, 목욕 싫어하지 않았던가?”

“으으음…… 이 모습일 땐 좋아.”

목욕 후, 가운을 걸친 해인은 시율의 무릎 위에 앉아 그가 머리를 말려주는 대로 골골, 거리며 목을 울리고 있었다.

목욕 좋아. 강도 좋아. 입욕제 향도 좋아. 큰 손으로 머리 말려주는 거, 최고로 좋아.

해인은 이래저래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군.”

사람일 때 목욕은 오케이란 말이지?

이 의외의 사실을 머릿속 수첩에 적어두며, 시율은 다음에는 해인과 같이 온천에 가볼까 하는 궁리를 했다.

“있지, 주인은…… 뭐래?”

“들었어?”

“조금.”

해인이 지금 반쯤 조는 것 같은 목소리인 건, 뜨거운 물에 푹 늘어져서였다.

“잘됐데.”

“……엥?”

그거 설명이 너무 대충인걸?

해인은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싶었지만, 시율은 이 둘만의 시간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태일의 이야기를 길게 하려 들지 않았다.

해인은 이제 시율의 그런 습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섹시한 인간 남자는 의외로 질투심이 강한 편이었으니까.

‘수컷은 수컷이라 소유욕이 있다고 해야 하나……?’

자꾸만 감기는 두 눈을 크게 깜빡이며 해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말은 입 밖으로 해야 통한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태일과 이하은을 보면서 배운 거라곤 그런 거였다.

“강.”

“으흠?”

그래서 늘어지는 와중에도, 그의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가 시율을 마주 보도록 앉았다. 같은 체온이 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말할 때마다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작게 똑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있잖아. 개냥이 주인은 신태일이지만…… 내 주인은, 강시율이야.”

“……웬일로 기특한 소리를 하게 됐네.”

그의 어깨를 안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의 움푹한 쇄골쯤에 입술을 묻으며 잠꼬대하듯 속을 털어놨다.

“내가 사랑하는 건, 강시율이고.”

말할수록 비워지는 게 아니라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내 모든 게, 강시율 거야.”

“……정말?”

“그럼, 내 영혼의 주인도 강시율이고.”

물을 가득 흡수해서 촉촉한 손끝으로 그의 뺨을 만지며 입술을 덧댔다.

시율은 열에 달아오른 드라이기를 끄며, 해인에게 닿지 않도록 저 멀리 치우고 있었다.

그의 무릎 위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해인은 목욕 기운과, 그의 체온에 조금은 취한 기분으로 온 마음을 고백했다.

사신의 주술이 아무리 강력해도, 사랑을 속삭이는 건 방해하지 못했으니까.

“전부 줄게.”

해인은 부드러운 그의 가운 위로 뺨을 비비적거렸다.

시율은 때 아닌 해인의 폭풍 애교를 음미하며 이 아가씨가 웬일로 이렇게 인심을 쓰는 걸까. 고심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니 일단은 마음껏 즐기겠지만…….

“대신, 강도 내 거야.”

“……그거 나쁘지 않네.”

“강의 주인도 나야. 그렇게 손해는 아니지?”

“그래.”

공짜는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시율은 기꺼이 해인의 키스에 화답했다.

오늘따라 해인이 자꾸만 입술을 졸라서 몇 번이고 받아주었다.

오늘의 이 키스가 몇 번째인지도 셀 수 없는 날이었다.

지난날들 중 서로에게 가장 따듯한 날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건 해인이 오늘,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열어서였다.

사신이 방해하는 것을 빼고는 모조리 그에게 보이자고 생각했다. 아낌없이 전부. 나중에 하나라도 후회하지 않도록.

***

해인은 그의 팔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을 기다렸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고 있었다.

그가 잠들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는 해인이 잠들지 않아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깨닫기로 다들 잠들어 있는 새벽녘에도 서로를 보고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정말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유치한 착각이 들었으니까.

해인이 뜬금없이 그에게 물었다.

“강은 내가, 고양이어도 좋아?”

“……응.”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면 더 좋을까?”

“지금도 괜찮아.”

그건, 충분히 대답이 됐다.

괜찮지만 그랬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하지만 결코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해인이 잠꼬대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강은 내가 평범한 여자였으면 좋겠어?”

단서를 남기는 걸 방해하는 스스로 때문에, 만약이라고 덧붙이면서밖에 물을 수 없었다.

시율은 반쯤 잠들려던 상태라 약간은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안 되는 말을 해서 뭐해.”

“상처 안 받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줘. 만…… 약 내가, 같은 사람이었으면 어떨 것 같아?”

“그럼…… 다신 소원이 없을 것 같아.”

“……그게 좋아?”

“다시 태어나도 같은 소원을 빌 만큼, 그걸 바라.”

그는 잠기운에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하지만 해인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길 바라지 않았기에, 동그란 이마에 살며시 키스하며 덧붙였다.

“만약에일 뿐이야. 난 이대로도 좋아.”

“…….”

“알았지?”

그가 신경 쓰느라 잠들지 못할까 봐 고개를 작게 끄덕이기는 했지만, 해인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자신은 분명, 이대로 그의 곁에서 사는 ‘생’도 선택할 수 있었다.

본래의 ‘인생’을 포기한다면 계속, 그와 이런 단잠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대신에 일상생활은 불가능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는 몸이었으니까. 이 몸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고, 그에게 기생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리고 언제 또 쓰러질지 몰랐다.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기절하면 어쩌지? 그래서 또 그를 곤란하게 하면?’

바라건대, 해인은 그와 같은 온전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와 같이 늙고 싶었다.

언젠가 그의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이대론, 불가능했다.

‘평범하게 평생을 당신과 사랑하고 살고 싶어. 강, 내 소원은 그거야.’

그건 너무 쉽고, 너무 어려운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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