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고양이의 금기
결국엔 코트를 선물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새 코트를 입히고 원래 입고 온 낡은 카디건은 버려버리는 시율이었다. 그게 내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끙…….”
그뿐인가? 해인은 이제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지만, 시율은 아직 부족한 모양이었다.
이번엔 새하얀 목도리를 가져와서는 목에 둘러주고 있었다.
이번엔 아예 가격표를 못 보게 하려는 건지 아예 택을 떼고 가져와 버려서 꼼짝 없이 받아야만 했다.
“으아.”
“그거 알아? 옷을 선물한다는 건, ‘널 꾸며주고 싶다’는 뜻이래.”
“……그, 그래?”
“목도리를 선물한다는 건 ‘당신은 제 마음속에 있어요.’, 장갑은 ‘좀 더 솔직하게 대해주세요.’…….”
“그렇구나, 처음 들어 봐.”
“사실은 내가 영역표시를 하고 싶은 것뿐이지만.”
은근슬쩍 해인의 손에 장갑까지 들려주는 시율이었다. 따듯한 모양새가 나도록 풀 장착 시켜두고는 그제야 만족스러운지 방긋 웃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
해인은 그가 주는 것들이 자꾸만 과분하게 느껴졌다.
분명 고맙고, 기쁘지만…… 제가 줄 수 있는 선물들이 없어서 그러리라. 그리고 이것들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게 가장 힘든 사실이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난 뭘 주지? 강 뭐가 갖고 싶어?”
“딱히 없는데.”
“저기, 생각해봐! 나도 강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고 싶어.”
“생각나면 그때 말할게. 지금은…… 너로 충분해.”
마주 닿는 느린 눈길에, 해인 달아오르는 두 뺨을 숨기지 못했다.
이 남자는 어쩌자고 이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까. 곁에 있는 여직원이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그의 애정 공세는 가끔 숨 막힐 만큼 진해서 사람을 곤욕스럽게 했으니까.
“이, 일단 얼른 여기서 나가자.”
직원 보기 부끄러운 것도 컸지만, 그가 또 무엇을 집어 올지 몰라서 불안한 해인이었다.
***
해인은 숍에서 나오자 그제야 좀 숨통이 트였다.
그리고 몸은 확실히 따듯해져 있었다. 시율이 선물해준 코트는 비싼 값을 하는지 두툼한데도 놀랄 만큼 가벼웠다.
목도리도, 장갑도 찬찬히 보니 정확하게 해인의 취향인 것들이었다.
장갑은 심플하면서도 적당히 귀여운 느낌이었고, 색감은 해인이 좋아하는 베이지와 화이트, 그리고 브라운과 연한 블루 그레이로 질 좋게 짜여 있었다.
매번 보면 대충 고르는 것 같은데 정확한 눈썰미를 자랑하는 시율이었다.
“마음에 들어?”
“……응.”
“다행이네.”
그러고 보니 그가 고른 물건 중 해인의 취향이 아닌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문득 생각하기로 신기한 일이었다.
해인이 길을 걸으며 자꾸만 장갑을 보고 있자니, 시율이 제 손을 보여줬다.
“……이거, 커플 장갑이었어?”
“으흠.”
이제 보니 똑같은 모양의 장갑을 낀 시율이었다.
이런 게 감동스러운 이유는, 아마도, 그와 제가 닭살 커플이라서일 게 틀림없었다.
그건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해인은 냅다 시율의 허리에 매달렸다.
난데없이 힘껏 끌어안는데도 받아주며 머리 위를 쓰다듬어 주는 남자의 손길이 너무 좋아서 절로 한숨이 비집어 나올 지경이었다.
“나, 받기만 해서 어쩌지? 너무 염치없는 것 같아…….”
“무슨 소리야. 네가 준 게 얼마나 많은데.”
“……뭐가 있는데?”
“키스라거나.”
짓궂게 구는 일이 많은 시율이 지금처럼 다정하게 웃어줄 때면 해인은 심장이 뭉클거리는 기분이었다.
가슴 어딘가에서 자꾸만 큰 소리가 나서, 혹시 지금 온 세상이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 있잖아. 물어볼 게 있어.”
“뭔데?”
“몸은 괜찮아?”
해인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두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눈이었다.
“몸? 괜찮은데?”
“뭐, 어지럽다거나, 토할 것 같다거나…….”
“아, 양기 말이구나.”
“어때?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말해줘야 돼.”
그를 좋아할수록, 그를 원하게 될수록 제가 그를 약하게 하는 순간이 더럭 겁이 났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속은 곯고 있는 건 아닌지.
혹여 힘든 걸 숨기고 있는 건 아닌지.
그가 내색하지 않으면 하나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고 불안했다. 그렇다고 서로를 만지지 말자니, 그게 더 고통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식사량이 조금 늘긴 했지.”
“배가 고파?”
“자주 허기가 져. 그냥 입맛이 좋아진 것도 같고.”
해인은 본인이 배를 불리기 위해 먹는 음식과 담을 쌓은 지 오래라 잊고는 했지만, 시율은 먹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거 괜찮은 건가……?”
“문제없어.”
그리고 지금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오늘만 해도 시율이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그, 그럼 지금도 배고프겠네?!”
“조금?”
“얘길 하지 그랬어!”
“네가 안 먹잖아. 나 혼자 어디 들어가서 먹기도 그렇고…….”
“옆에 앉아 있을 테니까 뭐라도 먹어. 응?”
“괜찮은데.”
전혀 안 괜찮았다. 제가 배려받는 데만 익숙해서 시율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이래서야 여자 친구 실격이었다.
해인은 기겁하며 시율의 손을 잡아끌었다.
부랴부랴 눈에 보이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데이트 코스다 보니 선택지가 한둘이 아니었고, 해인은 그중 가장 몸보신에 좋을 것 같은 가게를 가리켰다.
“고기 먹어라, 강!”
“고기? 혼자?”
“어어…… 장어라든가!”
“……장어어?”
“몸에 좋은 거잖아! 저기 장어덮밥집이 있어! 분명 그걸 먹으면…….”
몸에 좋…… 어디 좋은지 말은 못하겠지만 좋…… 거시기 뭔가에 참 좋다는데…… 해인의 머릿속으로 순간 아저씨스러운 기억이 스쳐갔다.
“……앗! 취소, 취소!”
너무 노골적인 의미일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급히 손을 내둘렀지만, 이미 늦었다. 시율은 그걸 먹기로 한 모양이었다.
“장어 좋지. 1인분만 시키긴 미안하지만, 일단 가볼까.”
해인의 손을 잡고는 반쯤 장어집을 향해 끌고 가고 있었다.
***
아무래도 유명한 맛집인 모양이었다.
마침 들어온 가게는 내부를 촬영 중이었고, 해인은 커다란 대포 카메라를 든 사람들을 보며 목도리를 한 바퀴 더 둘러 코까지 가렸다.
더울 법도 했지만 이 몸은 추위에 무던하듯, 더위에도 무던했다.
“……저기에 찍히면 또 괴물같이 나올 거야.”
정확하게는 얼굴에 소용돌이가 생기겠지. 저 성능 좋아 보이는 카메라라고 별수는 없을 테니까.
해인은 얼굴을 꽁꽁 가리고는 눈만 내민 채로 시율이 밥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같이 먹진 못하지만 이 정도면 평범한 커플의 데이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보니 혼자 먹게 하는 게 미안해서 이것저것 열심히 말을 걸게 됐다.
“그런데 우리 오늘 정말 집에 안 들어가?”
“설마, 그 녀석들 성격 봐서는 그럴 일까진 없을 것 같은데. 상황 봐서 들어가야지.”
“그치?”
“지금도 계속 휴대폰으로 전화가 오고 있거든. 그래서 무음으로 해놨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태일이 지금쯤 어쩌고 있을지 궁금하긴 했다. 집에 남아 있었다면 상황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대신 이 데이트는 못 했겠지만. 고양이 몸의 단점은 바로 그거였다.
“강! 밥 먹고 나선 우리 어디 가?”
“아직 정한 건 없는데, 왜?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눈을 빛내는 걸 보니 있는 것 같은데.”
“나…… 한강!”
“겨우?”
“이번엔 손잡고 걷고 싶어. 정말 산책.”
목줄 매고 고양이로 하는 거 말고, 둘이 손잡고 걷는 거.
눈만 보이고 있는 해인이었지만 지금 한껏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율은 이 녀석 쓸데없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또, 갈수록 기특해졌고 말이다.
***
겨울치고 따듯한 날이었다. 물가를 따라 걸으며 해인은 꼭 잡은 시율의 손을 작게 앞뒤로 흔들었다.
그래, 전에는 이게 아쉬웠다.
태일까지 셋이 왔다가 경찰에게 혼난 날도 있었고, 처음 시율과 둘이 와서 병아리 도시락을 까먹은 날도 있었지만.
모두 오늘과는 다른 날이었다.
사람으로, 연인인 채로 걷는 건 처음이니까. 오늘 이게 첫 산책이었다.
“강, 산책 좋아해?”
“음…… 보통이려나. 출, 퇴근할 때 걷는 걸로 충분한 느낌. 차라리 런닝 머신 뛰는 게 좋더라.”
“그렇구나.”
해인도 원래는 산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냐면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리는 쪽이었다.
가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두는 순간이 그나마 이 순간과 가장 비슷할까.
해인은 제가 원래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시율도 그랬다면 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날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왜?”
“아니, 그냥.”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시율과 제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오로지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본래의 생활, 대체 그 어디에서…….
해인은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럼 혹시 자주 가는 곳 있어?”
“병원?”
“아니, 그런 거 말고, 좀 더…….”
“저기요?”
태평하게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 갑자기 해인을 불러 세웠다. 방금 해인의 앞을 천천히 뛰어간 트레이닝복은 입은 젊은 여자였다.
“네?”
머리를 높이 올려 묶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아마도 해인과 또래 같았다.
해인이 멈춰 서자 시율도 따라 섰고, 그 앞으로 낯선 여자가 다가오더니 쓰고 있던 선글라스는 벗으며 해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낯이 익었다.
“……저기,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나지 않았어요?”
“…….”
아주 확실히, 분명하게, 낯익은 얼굴이었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인 박해인으로서.
저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어디서 봤죠? 아주 낯이 익은데…… 같은 헬스장은 아니고, 학원인가? 혹시 대학은 어디 나왔어요?”
“……아, 아닌데요.”
“나 몰라요?”
“전…… 모르겠는데요.”
해인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부정의 말을 꺼내 놨다. 목 안이 수축하고 입 안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여자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해인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시율은 어느샌가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는 그 여자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건,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어디서…… 음, 아마 이름이……? 김…… 아니다. 성이 뭐였더라……. 조금 특이한 이름에…….”
지금 해인도 그녀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상대와 같은 장소에서 생활한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아마도 해인의 기억이 조금 더 분명한지, 눈앞의 여자가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몇 학년쯤 함께한 모양으로, 그녀의 어린 얼굴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것이 희망이 되진 못했다.
사신이 걸어둔 주술이 확실하게 상황을 방해하기 시작했으니까. 사신은 이런 경우를 허락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절대로.
“어머?”
해인은 일순간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륵,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숨이 막혔다.
몸이 이 순간을 극심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거의 쓰러지듯 앞으로 넘어지는 해인을 시율이 가까스로 붙잡았고, 해인은 말소리도 내지 못 한 채 자신의 목을 붙잡았다.
벌린 입술 사이로는 얕은 숨도 몰아쉬지 못했다.
숨 쉬는 일을 상실당한 것처럼, 몸의 모든 게 말을 듣지 않았다.
죽어가는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래?”
“왜 그러세요? 괜찮아요?”
사신의 주술은 더없이 잔인하고, 효과적이었다.
이건 안 돼.
이거, 안 돼.
죽을 것 같아.
해인은 거의 주저앉은 채로 손에 잡히는 시율의 옷깃 어딘가를 움켜쥐었다. 손발이 극심하게 떨리며, 점점 식은땀이 흘렀다.
이 여자와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처럼 들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호소하고 싶었지만, 고통에 그 정도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내 손으로 바닥을 지탱하는 것마저 버거워졌다.
고개 몇 번 내저은 것을 끝으로, 삽시간에 무너져 버려야 했다.
“아…….”
해인은 마치 누군가에 온몸을 졸리고 있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길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누군가의 발에 밟힌 벌레 따위가 된 것 같은 까무러침이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사이로 저를 끌어안는 시율의 손길이 느껴졌지만, 감각은 차례차례 무뎌지고 있었다.
우선 말을 못하게 되더니, 손발이 움직이지 않더니, 이제는 눈앞이 보이지 않아서……. 처음 겪는 고통 속에서 해인은 사신이 자신에게 건 게 저주가 맞았음을 확신했다.
***
자꾸만 틀어막히던 의식이 돌아온 건,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서늘한 느낌이 이마에 들었고, 그 감각을 좇자 흐릿하게 눈이 떠졌다. 둔하지만 손끝이 움직였다.
해인은 지금 제 곁에 있는 게 시율이라는 걸 알고는 안도하며 무언가 붙잡고자 했다.
그냥 손을 움찔거리자 그가 손을 잡아줘서, 겨우 숨이 쉬어졌다.
“정신이 좀 들어? 괜찮은 거야?”
걱정 가득한 그의 손이 이마를 쓸어 넘겨줬다. 식은땀이 흘러서 젖어버린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손길이 위로처럼 느껴졌다.
뜨거운 것을 삼킨 듯 목이 아파서, 해인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시율이 얼마나 놀랐을까. 그걸 생각하자 가슴이 아프고 또한 서러웠다.
“왜 그런 거야?”
“……갑자기, 이상했어.”
겨우 내본 목소리는 깜짝 놀랄 만큼 갈라지고 쉬어버려서 엉망이었다.
눈을 깜빡이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은 벤치에 눕혀져 있었고, 이마에는 그의 손수건이 있었다.
“……병원, 은 안 되잖아.”
“응…….”
“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로 데려가?”
참 이상한 질문이었다. 시율이 바보같이 구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잠깐…… 누워 있으면, 괜찮을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해인은 차츰차츰 몸에 감각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자신이 그 찰나에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도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고통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고 하면, 누군간 그 기분을 알아줄까.
손조차 움직이지 않는 그 상실감이 얼마나 두려웠는지는?
그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죽으면 사신의 멱살부터 잡을 생각이었지만…….
회복된 시야로 파리해진 시율의 얼굴이 보였다.
“강…… 안색이…… 나빠.”
손을 조금 뻗어 그의 뺨을 만지면서는, 웃으려고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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