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고양이가 좋아하는 것
“에…… 나쁘진 않지만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닌…….”
“여보세요? 이하은 씨?”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말릴 겨를 같은 건 없었다. 이미 통화를 시작했으니까.
빨라! 게다가 바로 본론이었다.
“납니다. 강시율.”
[시율 씨……. 아니, 강 선생님? 저한테 어쩐 일이세요.]
“다른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집에 좀 와줬으면 해서.”
[……네? 지금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이하은은 갑작스러운 시율의 전화에 많이 당황하는 목소리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간은 그렇게나 연락하기 힘들던 남자가 웬일로 먼저 전화를 했으니 말이다.
“다른 게 아니라 태일이 녀석 때문에.”
[아, 그것 때문에 연락 주신 거군요. 집엔 잘 돌아왔나요? 저랑은 아직도 연락이 안 되는데…….]
“아파서 그럴 겁니다.”
[……세상에, 아프다고요? 어디가요? 다친 건가요? 혹시 무슨 사고라도…….]
“그거야 보면 알 테니까 직접 한번 가봐요. 지금 그 녀석 집에 혼자 있거든요. 나는 약속이 있어서 나와버렸으니까, 댁이 간병이라도 해주면 어떨까 해서.”
자기 일 아니라고 빨리 결정짓게 하려는 시커먼 속셈이 보였다.
집으로 아예 이하은을 불러들이다니……. 태일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을 것 같지만, 도망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 엄마가 자식은 강하게 기르는 거랬어!’
새끼를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어미 호랑이의 심정이랄까.
해인도 이제는 태일의 나약한 망설임을 더는 봐줄 수가 없었다. 물론 태일의 섬세함이나 배려심은 존중하지만, 그건 지금 상황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저는 모질 수가 없으니 엄한 시율에게 맡겨버리면 해결이 되리라. 마치 혼날 거리가 엄마에서 아빠에게로 위임이 넘어간 느낌인 듯하지만.
“그리고 난 오늘 집에 안 들어가니까, 그렇게 알고 편하게 있으면 됩니다. 아, 개냥이도 나랑 있어요.”
“냐아?”
잠깐, 그건 좀 다른 소리 같은데!
[감사해요. 얼른 가볼게요!]
이하은은 태일이 아프다는 소리에만 정신이 팔려 고양이와 밖에서 자고 간다는 시율의 말은 신경 쓰지 못하는 눈치였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해인은 잠시만 방심하면 저를 함정에 빠트리는 시율에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커플은 방해하는 게 아니거든.”
우릴 말하는 건지 그쪽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도 시율의 표정을 봐서는 양쪽 다인 것 같았지만.
“하지만 아직 그 둘은 어떻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둘이 이야기할 시간을 주자는 거지.”
“……그런가?”
“그럼. 아, 이 얼마나 친절한 룸메이튼지.”
납득이 가기는 하지만 ‘친절한’이라는 대사는 좀 태클 걸고 싶어지는 부분이었다. 해인은 여전히 뭔가 걸린다는 얼굴이었다.
“저기, 그럼 말이야. 갑자기 이하은이 집에 가면 주인이 놀랄 테니까 가면 간다고 귀띔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러면 ‘도망친다’에 이 목줄을 걸지.”
“그건…….”
“너라면 어디 걸 건데?”
해인은 차마 대꾸할 수 없었다. 시율이 말하면 다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궁지에 몰리면 태일이 정말 도망치고도 남을 거라는 걸 알기도 했고 말이다. 그의 초식성향 전적은 화려했으니까.
“이봐, 아가씨. 내 의견은 이래.”
“응?”
“그 녀석은 신경 끄고, 우리 연애나 하자고.”
“…….”
“요즘 우리 시간이 너무 부족했잖아. 그런 생각 안 들어?”
그렇긴 하지만, 태일이 걱정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함정에 빠트린 마당에는…….
하지만 시율이 이런 눈을 하고 말하면 마음이 약해지는 해인이었다.
태일이 없던 일주일 내내 딱 달라붙어 있다가 다시 내외하려니 갈증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쯤은 괜찮지 않을까? 더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잠시 망설이던 해인은 결국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았어. 그런데 강, 우리 정말 집에 안 들어가?”
“잠깐만 있어봐.”
시율은 대답 대신 기다렸다는 듯 차 뒷좌석에서 쇼핑백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 안에는 눈에 익은 해인의 옷 몇 벌이 고이 들어 있었다.
“아! 이거 어디 갔나 했더니!”
“또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미리 옷을 좀 챙겨뒀거든.”
“하여간…….”
대비가 철저한 남자 같으니라고.
옷을 받은 것만으로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변신하라는 소리였다. 강시율만 사용할 수 있는 여자 친구 소환술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어떻게든 데이트가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사실은 해인도, 싫지 않았다. 싫을 리가 없었다.
***
“우왓, 평일인데도 이렇게 사람이 많아?”
“그야 요즘 인기니까.”
근래 커플들에게 인기라는 이 카페 거리는 며칠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잔뜩 물들어 있었다.
어느 곳이고 하나같이 화려한 디스플레이를 자랑했다. 붉은색, 흰색, 녹색, 금색, 은색.
그리고 문이 열린 가게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징글벨.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사람을 없을 테니 이건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헤에…… 사방이 다 커플이야, 강.”
“푸핫, 우리도 커플이거든?”
“아, 맞네!”
그 덕분일까. 얼결에 나온 데이트지만 흥겨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해인은 시율과 팔짱을 끼고는 거리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닥치는 대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닭살 커플이라서라기보다는 해인이 팔짱을 끼지 않으면 금방 미아가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시율이 반강제로 취한 조치였다.
흥분하면 시율이 따라오든 말든 해인은 달려가 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뭐, 신 나는 거면 됐지만…….”
해인은 음식을 파는 노점을 빼놓고는 거의 대부분에 들러서 구경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건 주로 작고 귀여운 볼거리가 있는 가판이었고, 이번에 시선을 빼앗긴 건 수제 액세서리를 파는 가판대 였다.
“빨리빨리, 이것 좀 봐, 강!”
“어서 오세요.”
친절한 주인이었고, 해인은 반짝반짝한 그것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시선을 빼앗겼다.
“천천히 보세요. 전부 제가 직접 만든 것들이에요.”
진짜 금으로 만든 걸 길에서 팔리는 없으니 대부분이 은으로 된 실반지거나, 조잡하지만 예쁜 팔찌나 목걸이였다.
시율은 액세서리는 조금 더 비싼 게 좋았지만, 해인이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곁을 지켜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뭐가 마음에 드는데?”
“응? 이거. 그리고 이거랑 이거. 이건 무려 계란 프라이 모양이야!”
해인은 액세서리 중에는 목걸이를 즐겨 했는데, 그건 그림 그릴 때 그나마 덜 신경 쓰이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반지 하나쯤은 가지고 싶었지만 낄 수가 없다 보니 사본 적은 없었다.
“그거 귀엽네.”
“이것도 귀여워! 앗, 이것도! 이것도 괜찮네!”
“네 눈에 안 귀여운 건 있고?”
없긴 하지. 해인은 그런 웃음소리를 내며 가장 귀여워 보이는 반지 하나를 손가락에 껴봤다.
애들 장난감 수준의 물건이었지만 제 손가락에 끼고 보고 있자니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사줘?”
“아니! 괜찮아.”
예의상 물어보긴 했지만, 사달라면 사줄 생각인 시율이었다.
사실 그는 반지를 사줄 바에는 좀 더 제대로 된 걸 사주고 싶었다. 문제는 해인이 받을 것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조금 더 실용적인 걸 사주고 싶었다.
“강도 껴봐.”
“내가?”
“응.”
해인은 제가 손가락에 끼어봤던 계란 모양의 반지를 굳이 시율의 손가락에 끼워 맞췄다.
남자의 손은 워낙에 커서 여기저기 다 넣어봤지만 전부 실패하고 그나마 새끼손가락 중간에 겨우 걸칠 수 있었다.
“뭐야, 작잖아.”
시율이 피식 웃는 건 그런 무의미한 장난도 즐겁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 강 손이 큰 거야.”
“그래도 이건 너무하는데.”
“아냐, 그거 내 검지에 들어갔던 거란 말이야.”
“네 손가락이 얇은 거지.”
그가 웃음 섞인 목소리를 내며 해인의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그중 가냘픈 손가락 하나를 펜대 만지듯 느리게 더듬었는데, 그건 누가 봐도 연인들이나 하는 부드러운 스킨십이었다.
더 깊은 매만짐을 아는 손.
“…….”
쓰다듬을 지켜보던 해인은 불쑥, 그것만으로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몸의 다른 어딘가를 그에게 만져지는 것 같았다. 단순히 몸이 그의 손길을 기억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손을 빼자니 어색한 티를 내는 것 같아 해인은 대신 제 손을 만지고 있는 시율의 손바닥에 슬그머니 제 손바닥을 마주 대 보였다.
그건 확실히 엄청난 차이였다.
어느 정도냐면 둘이 손깍지를 끼면 해인이 손이 벅차서 조금 아플 만큼. 대신…… 좋은 기분이었다.
온전히 감싸여진 느낌이 고양이로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와 비슷했다.
“것 봐, 네가 작은 거야.”
“……응! 있잖아. 강, 우리 손잡고 다니지 않을래?”
“…….”
“이거 너무 좋은 것 같아.”
해인은 깍지 낀 손이 마냥 좋아서 바라보고 있다가, 대답 없는 시율을 올려다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낯간지러워서 싫어? 그럼 안 할게.”
“아니, 좋아.”
세상엔 싫은 것 이상의 좋은 것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누군가.
만약 제 것이 아닌 타인의 온기가 기분 좋게 느껴진다면, 그건 분명 의심할 바 없는 사랑이었다.
더 힘주어 잡아주는 시율의 손길을 느끼며 해인은 두 뺨을 물들였다.
그리고 행복한 듯 웃었다.
***
둘은 밝은 거리를 걸으며 느긋하게 시간을 때웠다.
모자를 파는 노점에 들러서는 따듯해 보이는 니트 모자를 써보기도 했다.
어울리면 어울리는 대로, 안 어울리면 안 어울리는 대로 즐거우니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누구와 함께했는지에 따라 의미 없는 순간은 단 한순간도 없으니 그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잊는 순간이 정말 오기는 할지, 이젠 오히려 그것이 거짓 같았다.
“뭘 그렇게 봐?”
“……강! 저기 봐. 전생을 알려준대!”
거리의 끝에서 해인이 발견한 것은 주황색 작은 천막이었다.
대문짝만 하게 전생을 봐준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지만 시율이 그런 것에 혹할 리 없었다.
“너…… 저런 거 정말 좋아하는구나.”
“에, 그런 건 아닌데…….”
“전에도 전생 어쩌고 하더니.”
“그게 아니라, 그냥 재미있어 보여서! 그래서…….”
사실은 당신의 전생이 궁금하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당연히 본인은 모를 텐데 말이다.
해인은 시율이 놀리는데도 주황색 천막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런 곳에서 진실을 맞힐 리 없다는 걸 알기는 했지만,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궁금할 뿐이었다.
“난 저런 거 안 봐도 내 전생 알 것 같은데.”
“뭔데?”
“음, 왕이었을 거야.”
“……정말? 정말!”
해인의 눈이 합격 발표를 들은 수험생인 양 커다래졌다. 세상에 이런 행복한 순간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반짝반짝거려서 시율은 도리어 당황해야만 했다.
“……얌마. 노, 농담이잖아.”
“아, 그렇구나.”
에이! 좋다 말았네……. 초롱초롱하던 두 눈이 식는 건 금방이었다.
시율은 금세 시무룩해지는 해인을 보며 저 쓸데없어 보이는 전생 맞히기를 정말 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이내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기로 했지만 말이다.
일부러 이쪽으로 온 이유가 따로 있었으니까.
“그보다 좋은 게 있는데.”
“……뭔데?”
“전생 체험 같은 거보다 훨씬.”
해인은 시율이 돌려세우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시율이 어느 한 가게를 가리켰지만, 시율의 전생보다 흥미롭지는 않았다.
대놓고 기운 빠진 소리를 내는 해인이었다.
“저게 뭐야…… 여자 옷 가게잖아.”
“……보통은 저거에 신 나야 하는 거 아니냐. 연예인들이 옷 사러 들리는 유명 멀티숍이라는데?”
“별로…….”
“티비에 나오잖아.”
“난 아침 드라마만 봐.”
“……이상한 녀석.”
해인의 눈은 여전히 전생을 알려준다는 천막에 고정되어 있었다.
***
“이거 좋다. 귀여워.”
“……오, 옷이.”
영이 이상하게 많은데?!
그보다 여긴 어디고, 난 누구인가.
해인은 제가 왜 이 정체불명의 휘황찬란한 멀티숍 안에 끌려 들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왜 이런 비싼 코트를 걸쳐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애인분이 센스가 정말 좋으시네요.”
“그냥 색이 예뻐서 고른 거지만.”
“호호, 저희 의상은 무조건 한 벌씩밖에 들여오지 않지만 그건 특히나 자신하는 작이랍니다. 요즘 뜨는 홍콩의 신진 의상 디자이너 Enhydra lutris 선생님이 딱, 7벌 만드신 이번 시즌 신상 코트거든요.”
핏 좋은 베이지색 원피스를 빼입은 숍의 점원은 백화점 명품 매장의 언니들만큼이나 기품이 흘렀다.
코트에 대해 뭐라고 설명을 늘어놨지만 그럴수록 해인은 두려울 뿐이었다.
“강…….”
어서 제 몸에서 이 돈 덩어리를 떼어주기만 바라며 시율을 올려다봤다. 아주 불쌍한 눈이었다.
“가서 이거랑 같이 입어보고 와.”
“……나, 이런 거 정말 괜찮은데.”
“그거 필요한 거야. 넌 겨울옷이 별로 없으니까. 올 겨울은 엄청 춥다고.”
“나 추위 별로 안 타는 거 알잖아!”
무엇보다 얼마 입지도 못할 텐데. 그와 두 번의 겨울만 보내도 코트를 받겠지만…….
“그거랑은 별개야. 무엇보다 너 그나마 있던 두꺼운 코트도 얼마 전에 엉망이 돼서 버렸잖아.”
해인이 거부하거나 말거나 시율은 팔짱을 낀 채로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일전에 죽은 강아지를 주워 오느라 엉망이 돼서 코트를 하나 버려야 했는데, 그것 말고는 전부 얇은 코트들밖에 없어서 시율이 못마땅해하긴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해인은 다시 한 번 얼핏 가격표를 보고는 흔들리는 동공을 주체하지 못했다.
연베이지색에 분홍빛이 조금 도는 얌전한 느낌의 코트는, 가격이 더럽게 흉포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안 귀여운 가격이었다. 하지만 다시 칭얼거리는 것보다, 시율이 선수를 치는 게 빨랐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입고 나와.”
“그럼…… 다른 거 입어볼래.”
“난 네가 그걸 입은 게 보고 싶어.”
“…….”
“그게 좋아. 너한테 그게 가장 잘 어울리니까.”
왜, 이 남자는 말하는 것들은 묘하게 야한 걸까.
그가 제가 이 코트를 입은 모습을 상상하는 모습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야 전부를 아니까 그의 머릿속에서는 몇 번이든 입혀볼 수 있으리라.
해인은 처음으로 깨달아야 했다.
야한 거로구나, 남자가 여자에게 옷을 사준다는 건.
깊은 사이라는 표현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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