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고양이의 온 오프
화창한 어느 평일 날의 아침.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오늘은 시율과 해인의 일곱 번째 데이트가 있는 날이었다.
바로 어젯밤, 태일이 그렇게 얻어터진 채 돌아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강, 주인이 아직도 자나 봐. 벌써 10신데!”
“…….”
“숨소리도 잘 안 들리고……. 어쩌지? 괜찮은 건가?”
당연하게도 자타가 공인하는 주인바라기 해인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안절부절못하며 굳게 닫혀 있는 태일의 방과 시율의 침대 위를 오가며 시율을 괴롭히고 있었다.
시율은 여전히 침대에 엎어진 채로 자는 시늉을 했다.
일어나자마자 다른 남자 이야기를 듣는 건 질색이었다.
“강! 듣고 있어? 안 자는 거 다 안단 말이야.”
그는 기분이 별로였다.
사람 많은 곳을 질색하는 해인 때문에 일부러 쉬는 날을 평일에 맞췄건만, 아침부터 하는 모양을 보아 오늘 데이트는 글렀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해인이 태일에게 정신이 팔린 것도 문제지만, 태일이 그 얼굴을 하고는 외출할 것 같지도 않았다.
집에 태일이 있으면 해인을 데리고 나갈 수가 없으니 결국 데이트는 물 건너간 셈이었다.
산책 핑계를 대보려고 해도 그건 기껏해야 한두 시간이었다.
길게 생각해서 무엇하겠는가. 아무튼, 오늘의 데이트는 물거품이다, 이 말이었다.
시율은 눈을 감은 채 온몸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마치 반항기의 청소년처럼.
“가앙!”
“……아오, 귀야. 태일이 자식 깨겠다.”
“안에서 인기척이 안 난다니까!”
“문 닫고,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고, 깊이 잠드셨나 보지.”
이제 됐지? 시율은 별로 위로가 안 되는 진단을 내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누웠다.
그게 걱정으로 똘똘 뭉쳐 있는 해인에게 먹힐 리가 없는데 말이다. 해인은 다시 잠을 청하는 시율의 등 위로 올라갔다.
기껏해야 4킬로그램도 안 나가는 작은 몸으로 그의 날갯뼈 부근에 부지런히 꾹꾹이 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고양이가 이러면 껌뻑 죽기 마련이었다.
“그러지 말고 한번 가봐. 응? 어제도 그렇게 대충 넘겼다가 주인이 맞고 돌아왔잖아! 피투성이였다고!”
“별로, 방 안에서만 있었는데 또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잖아.”
“하지만…… 하지만! 잘못 맞으면 뇌진탕 같은 게 오잖아? 티비에서 보면 막 권투 선수들이 그래서 죽기도 하고…….”
해인이 스스로가 내뱉은 말의 공포에 빠지며 두려운 소리를 내자, 어지간해서는 꿈쩍도 안 하는 시율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너, 잘도 그런 불길한 상상을…….”
그야 한 번 죽어본 유경험자니까!
그다지 자랑할 거리는 아니었지만, 여튼 해인은 사람이 참 쉽게 죽어버릴 수 있다는 걸 안 뒤로는 전보다 걱정이 많아진 편이었다.
“그럼 그냥 잘 자고 있나만 한번 봐줘.”
“뭐…… 잘 자고 있겠지.”
“우 씨, 지금 주인은 환자나 다름없는데 강은 걱정도 안 돼?”
내가 왜? 시율은 그런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잠시 고민하나 싶었지만 결국 귀찮은지 다시 획 하니 몸을 돌려 더 자려는 시늉을 했다.
해인이 등 위에서 펄쩍 뛰었지만 그는 데이트도 못 하게 된 마당에 태일을 챙겨줄 기분이 아니었다.
이렇게 못마땅할 때가 또 있을까.
데이트도 못 가.
해인도 고양이로만 있어.
입만 열면 태일이 타령이야.
정말 너무 완벽하게 불쾌…….
“강! 일어나, 응?”
고작 몇 초쯤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 등 위에 올라앉은 무게가 순식간에 무겁게 변하는 게 느껴졌다.
등 위로 갑자기 사람이 올라앉은 것도 같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같은 무게감이 불쑥 들었다.
시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변했다는 걸.
“너…….”
“뽀뽀해줄까?”
눈을 마주치자마자 한다는 소리에, 시율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아니다. 강은 키스하는 걸 더 좋아하지.”
가늘게 웃으면서 다 안다는 듯 덧붙이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해인을 마주 보고 허리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가느다란 허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며 슬쩍 문가를 봤다.
“대담하긴. 그 녀석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럴 것 같으면 이렇게 조르지도 않는다, 뭐.”
제가 그렇게 길들이긴 했지만, 저를 내려다보는 보드라운 뺨을 가진 여자는 이제 엄마에게 떼를 쓰듯 무작정 조르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효과 있다는 걸 알게 된 모양이었다.
해인은 시율의 뺨을 검지로 콕콕 찌르며 눈을 반짝였다.
부탁할 게 있을 때만 이런 얼굴이었다.
“주인 붕대도 갈아주고, 그런 거 해줘.”
“……잘 알 테지만 내가 좀 고급 인력이거든.”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잖아. 내가 하면 주인이 미이라처럼 될걸? 애초에 내가 할 수도 없고.”
“당연한 소릴.”
“응? 그러니까 강, 부탁이야.”
아픈 주인을 위해서 사람을 부르다니, 이렇게 충직한 애완동물이 또 있을까.
언짢은 듯 부러운 듯한 시율의 뚱한 얼굴에 해인은 진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의 입가에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얕지만 길었고, 느리지만 부드러웠다.
아마도 오늘 못 하게 된 데이트 대신인지, 키스는 점점 깊숙이 얽어졌다.
쏟아지는 체온에 기분 좋게 눌리며 시율은 해인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
숨이 막힐 만큼 힘껏 끌어안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이 자세를 뒤집고 싶어질 테고, 그럼 키스로 끝날 수 없어질 테니 참아야 했다.
“너…… 이젠 키스 잘하는 거 알아?”
“정말?”
“그래.”
누가 가르쳤는지 참 좋은 선생이네.
해인은 이제는 더없이 친근해진 손길로 시율의 이마 근처를 쓰다듬으며, 제 손이 지나간 모든 자리에 점점이 입을 맞췄다.
촉촉, 소리가 나는 사랑스러운 짓을 하면서도.
그게 부끄러운 줄은 모르는 마냥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저 얼굴에는 그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끙…… 정말 어쩔 수 없네.”
시율은 결국 몸을 일으켜야 했다.
이미 키스도 받아버렸고, 붕대야 어차피 갈아줄 거였으니까.
결정적으로 여자 친구 모드일 때의 해인은 아주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조르면 무엇이든 해주는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잘 아는.
또한 그의 기분을 풀어주는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낌없이 이용당하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고양이의 애교란, 할 때는 하는 애교였다.
개와 달리 고양이는 자기들이 내킬 때와 필요할 때 딱 두 가지 경우에만 애교를 부리고는 했는데, 대신 꽤나 강력한 어택이었다.
“고마워, 강!”
“못 산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거 알지?”
부비적부비적, 해인은 그의 목을 꼭 하니 끌어안고 애정표현을 하는 데 인색함이 없었다.
손도, 코끝도, 이마도 아낌없이 문질렀다. 코와 코를 스치는 건 분명 기분 좋은 것이었다.
둘 다 반나신이라는 게 조금 문제였지만 말이다.
서로 너무 많은 걸 공유했기 때문일까. 해인은 너무도 무방비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이러면 곤란했기 때문에 시율은 시선 둘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태일만 없으면 문제 역시 없겠지만…….
띵동.
“응? 누가 왔나 봐.”
“이 아침부터?”
먼저 기척을 느낀 건 해인이었다. 사람 몸인데도 마치 두 귀를 쫑긋거리는 고양이처럼 반응했다.
“이하은일까?”
“아니면 기도?”
둘은 잠시 눈을 맞췄고, 방문자를 예상해봤다.
그나마 올 만한 인물은 그 두 사람이 전부였다.
김기도야 원래 자주 드나들었고, 이하은은 드물긴 하지만 오늘 왔다고 해도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해인만큼이나 태일을 걱정하는 데는 일가견 있는 여자였으니까.
“있잖아, 이하은이면 주인이 없다고 해.”
“아아, 얼굴이 그 모양이니까.”
“주인도 어제 그랬잖아. 그 얼굴 해서 만나고 싶진 않다고.”
“그랬지……. 일단 내가 나가볼 테니까 넌 고양이로 돌아가.”
해인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은 이쪽이 본래 모습이기 때문에, 고양이로 돌아가라는 말은 묘한 어폐가 있었다.
그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
해인은 거의 곧장, 시율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나섰다.
“냥냥?”(누구야, 누구?)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먼저 코를 킁킁대는 건 그만큼 고양이 몸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냄새로 사람을 판별할 수 있게 됐는데, 모든 사람은 특유의 체취를 풍기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면 시율은 소독약 냄새와 함께 달짝지근한 과자 냄새가 났고, 태일은 풀 냄새와 햇살 냄새가 섞인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누구나 그 사람의 생활 패턴이나, 쓰는 향수나 비누 등 여러 가지가 뒤섞여서 완성되는 고유의 체취가 있었다.
그리고 이 방문자의 냄새는, 은근히 익숙한 것이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분명 몇 번인가 맡아본 적 있는 스킨 냄새였다. 그리고 해인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냄새는 분명…….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여기 신태일 씨 댁 아닙니까.”
“뭐, 아직은 그렇죠.”
“아직?”
“우리 만난 적 있는데…… 나 기억 안 납니까?”
시율은 유난히 공격적인 태세였다. 삐딱하게 서서는 팔짱을 낀 게 대놓고 아니꼬워하는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게 방문자는 이하은의 약혼남이었으니까.
“……아, 발레 공연 날.”
바로 어제 태일을 두들겨 팬 걸로 추정되는 남자가 말끔한 슈트 차림으로 현관 앞에 서 있었다.
해인은 총총 뛰어가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다시 털을 바짝 세우고 시율의 곁으로 다가갔다.
‘가, 강을 때리기만 해봐라!’
쥐꼬리만 한 게 위협한다고 생각할 게 뻔했지만 현관 너머에 서 있는 그를 향해 해인은 애꿎은 하악질을 했다.
때리는 사람 나쁜 사람! 주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냐악!”(물 거야!)
“야야, 뒤로 가. 뒤로.”
“냐냐냐악!”(여긴 왜 온 거야! 꺼져!)
싫은 거다 싶으면 해인이 얼마나 사납게 구는지 잘 알기 때문에 혹시 정말로 물까 싶었는지, 시율은 해인을 발로 막아섰다.
하지만 그렇게 진심은 아니었다. 여차하면 질겅질겅 물게 놔둘 것도 같았다.
“어째 이 집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이군요.”
“그거야 당신이 어제 이 녀석 주인을 들고 팼으니까.”
“하, 고양이가 그런 걸 어떻게 압니까.”
“이 녀석들은 다 알죠.”
“……생각났습니다. 당신, 신태일이랑 같이 산다던 수의사 양반이군요.”
그제야 다 떠올랐는지, 일명 이하은의 약혼자 서태준은 예의상 웃어 보이며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그걸 받아주면 강시율이 아니었다.
“그런 건 별로 상관없을 테고.”
눈으로는 내밀어진 손을 보면서도 여전히 저는 팔짱을 낀 채였다. 지나치게 시큰둥한 시율의 태도는 익숙한 사람들도 꽤나 무안해하는 것이었다.
“흠.”
“여긴 무슨 일입니까?”
“……그야 신태일을 만나러.”
“또 패려고?”
“어제 그건 정당했다는 걸 아실 것 같은데.”
“주먹질에 정당한 게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그쪽은 멀쩡해 보이는데.”
서태준의 상태를 보아하니 태일이 얼마나 맞기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제 여자를 넘본 데 대한 분풀이를 주먹으로 한 걸로 추정되는 남자는 하나도 거리낄 게 없다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때리고 싶으면 때리라기에, 때린 것뿐입니다.”
“…….”
“…….”
그거 과연 당당할 만했다. 태일은 집안 망신은 다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어째 부끄러움은 시율의 몫이었다.
‘이 자식을 그냥.’
***
“찾아오실 줄은 몰랐는데…….”
딱히 깨우기도 전에, 소란을 알아챘는지 태일이 방문을 열고 걸어 나온 건 그때였다.
해인은 이 위험한 삼자대면을 막아보려고 애썼지만, 그건 그냥 고양이가 사람 발에 매달려 잠시 버둥대는 수준이었다.
“할 말이 남아서.”
“일단…… 들어오시죠.”
“이쪽 룸메이트께서는 별로 환영하지 않는 눈친데.”
해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사태였다.
또 주먹 부림이 나면 어쩌나 싶어서 이만저만 겁이 나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시율과 서태준은 대놓고 상성이 별로였다.
“전 원래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래 보이네요.”
“그래도 사람을 패진 않죠.”
“난 맞고 다니진 않습니다.”
상황이 이 모양이니, 시율은 제가 남아 있어봐야 더 좋아질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자신의 방으로 몸을 돌렸다.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
“난 내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또 싸우진 말라고.”
정확하겐 또 맞지는 말라고 해야겠지만.
시율은 큰 소리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해인은 잡혀 들어갈 뻔했지만 잽싸게 침대 밑으로 파고들어서 거실에 남을 수 있었다.
이내 거실 한가운데 둘만 남은 태일과 서태준을 주시하며 오들오들 떨면서도, 여차하면 서태준을 콱 물어줄 작정이었다.
주인을 또 때리기만 해봐라!
주인 지키는 고양이라고 들어봤나 모르겠다. 그런데 어딜 물어야 할까. 발은 냄새가 나서 싫으니까 종아리를 물어야 될까?
해인은 진지하게 그런 걱정을 하며 죽어라 서태준을 노려봤다. 그 눈길은 서태준이 싫어도 느낄 정도였다.
“……이상하게 짐승들은 날 싫어한단 말입니다.”
“샤악!”(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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