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고양이가 생각하는 해피엔딩은?
오늘도 역시, 시율을 따라 병원으로 출근한 해인이었다.
그녀는 이제 이 동물병원의 마스코트나 다름없었고, 대부분의 단골손님과 안면이 있었다.
제집처럼 병원 내를 돌아다니는 건 물론이고 불안해서 우는 녀석들이 있으면 꼭 쫓아가서 조용히 시켜야만 직성이 풀렸다.
가정 내의 평화를 지키는 것처럼 병원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힘쓴다고 본묘(本猫)는 우기지만, 시율이 보기에는 그냥 심심해서 그러는 것뿐이었다.
“강.”
“으흠?”
병원이 한가한 시간에는 지금처럼 시율의 곁에서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진료실은 손님이 오지 않는 한 둘만 떠들기 좋은 곳이었다.
“어젠 말이야, 강답지 않더라.”
“그랬나?”
“그렇게 웃고, 화내는 거 처음 봤어. 그러니까 보통 남자 같았어!”
스핑크스처럼 앉은 해인의 말에, 시율은 보고 있던 잡지에서 눈을 떼며 피식 웃었다.
“나 보통 남자 맞는데?”
“……에, 뭐랄까. 평소에는 엄청 쿨한 척하잖아.”
“그야 그게 살기 편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긴 했다.
철저한 마이페이스인 시율은 남들이 자신에게 필요 이상 말을 거는 것도 싫어했고, 일이 아닌 다음에야 매사에 아주 비협조적이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딱, 고양이 같은 남자였다. 그런 시율이라 어제 일은 더 의외였다.
“그런데 어젠 왜 그랬어?”
“뭐가? 난 웃으면 안 돼?”
“그게 아니라, 원래 어떻게 되든 참견하기 싫어했잖아.”
“그랬지. 그런데 어쩌겠냐, 여자 친구가 참견을 좋아하는 걸.”
“……그렇게 되나?”
“그렇게 됩니다요.”
이게 바로 커플은 닮는다는 건가! 해인이 그런 깨달음을 얻는 동안, 시율은 해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가 다시 잡지로 시선을 돌리면서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져야지 어쩌겠는가 생각하면서.
“하아…… 내가 어쩌다 이런 냥반에게 걸려서.”
“엣?! 쪼, 쫓아다닌 건 내가 아니라…….”
RRR.
“네, 진료실입니다.”
[선생님, 통화 괜찮으세요?]
전화기에 초록불이 들어오는 걸 봐서는 내선 전화였다. 병원 내에서 걸려온 전화.
데스크 간호사인 모양이었고, 그 덕에 해인은 하려던 말을 못 해서 불만스러운 눈이 됐다. 누가 보면 제가 쫓아다닌 줄 알겠다.
시율은 일부러 보란 듯 통화를 하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통화하고 싶다는 분이 계셔서요.]
“보호자분입니까?”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이하은 씨라고, 이름을 전해드리면 아실 거라고 하셨어요. 지금 통화 대기 중이고요.]
“아하…….”
[연결해드려도 될까요?]
평소라면 바쁜 척 전화를 외면했을 테지만, 그랬더니 병원까지 찾아온 전적이 있는 이하은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왜 전화가 왔는지 대충 짐작 가기도 했다.
아무래도 태일을 만난 모양이었다.
“네, 연결해주세요.”
시율은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미 집에서 나가고 없던 태일이 떠올랐다. 씻고 좀 자면 정신이 들 거라고 다독였던 어제의 마지막 기억도.
드디어 둘이 뭔가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눈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굳이 해인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둘이 잘됐으면 싶은 시율이었다. 더 이상 장님처럼 눈앞에 사람을 두고 헤매는 모양을 봐주기도 힘들었으니까.
[……여보세요?]
“접니다.”
[아, 안녕하세요. 이하은이에요. 갑자기 전화드려서…….]
“됐고, 용건이 뭡니까? 태일이는 만난 겁니까.”
본론부터 묻자, 전화기 너머로 잠시간 이상한 침묵이 돌았다.
시율은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뭡니까?”
[태일이…… 가, 저를 만나러 간다고 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닙니까?”
[그럼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아요. 전 이별 파티 뒤로 태일이를 만나지 못했거든요.]
그럼 이 녀석은 대체 어딜 가 있는 거지? 시율도 곁에서 듣고 있던 해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럼 무슨 일로 전화한 겁니까?”
[태일이가 연락이 되질 않아서요. 아침에 저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받자마자 끊어졌어요. 그러고 나서…….]
“연락이 안 된다?”
[네, 뭔가 자꾸 불안한 기분이라서…….]
이하은에게 간 게 아니라면…… 다른 일을 하러 갔나 보다. 어제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 하고 멍 때렸으니 일이 밀렸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요?]
“괜찮을 겁니다. 당신한테 간 줄 알았는데…… 잘못 알았나 보네요. 출국 때문에 수속할 게 많으니 여러모로 바쁜 모양입니다.”
하은의 절절한 걱정에도 시율은 태일의 행방불명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단순히 용기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샌 모양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전화도 안 받고…….]
“저녁에 집에서 만나면 걱정한다고 전해드리죠. 그럼 되죠?”
[……네.]
“뭐, 별일 있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통화를 마친 시율은 자신의 휴대폰으로 태일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분명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거참, 내 전화도 안 받네.”
“……주인은 어딜 간 걸까?”
“알 게 뭐야. 그런 겁쟁이 녀석.”
그는 매우 못마땅한 소리를 내며 턱을 괴었다.
도대체 태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이하은에게 전화했다는 걸 보면 만나러 갈 생각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시율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해서일까. 해인은 애써 태일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시율을 설득하는 건 정말 진땀 나는 일이었다.
“아마 아직 용기가 안 났나 봐. 하루아침에 고민이 해결될 순 없잖아?”
“그렇게 얘기하고도 무슨 더 고민할 게 있다고.”
“강은, 고민 같은 거 하는 타입이 아니잖아! 그래서 그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거야! 주인은…… 주인은! 강이 설거지할 때 물컵을 넣어도 될지 말지로도 엄청 고민하는 타입이란 말이야!”
“……거, 대단한 고민이네. 그리고 나도 고민쯤은 있거든.”
한쪽 눈썹을 비뚤게 만든 시율이 턱을 괸 채 삐딱하게 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너, 내 고민이 뭔 줄은 알아?”
“……나?”
“잘 아네.”
“그야 그렇게 빤히 보니까…….”
“내가 풀지 못하고 있는 고민은 그거 하나야. 우리에게도, 해피엔딩이 찾아올지. 뒤늦게라도 말이야.”
그거 참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해인은 할 말이 없어지면 으레 그렇듯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진료실은 아주 좁았기 때문에, 뒷덜미를 잡히기 전에 서둘러 도망쳐야 했다.
“나, 난 또 누가 울고 있진 않은가 호텔 칸에 가봐야겠어.”
“오늘은 원래 있던 녀석들밖에 없는데?”
“……그럼 인사를 좀.”
내빼는 건 해인이 확실히 잘했다. 아무렴 고양이니까.
***
오후에 병원으로 환자가 몰리는 바람에 다소 늦어진 퇴근이었다.
시율이 겨우 아파트로 돌아오니 여기저기 치킨이며 피자 같은 걸 시켜 먹었는지 야식 냄새가 엘리베이터 안에 진동을 하고 있었다.
해인은 군침을 삼키며 물었다.
“강, 집에 먹을 거 뭐 있어?”
“네가 좋아하는 단거는…… 우유맛 사탕 정도?”
“초콜릿은?”
“다 먹고 없는데. 뭐 간단하게 만들어 줄까?”
“응!”
시율의 간단한 건 간단한 게 아니지!
얼른, 얼른, 해인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꼬리로 빨리 움직이기를 재촉했다.
입이 근질거리는 걸 애써 참으며 어서 집 현관문이 열리길 기다렸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깜짝 놀라 숨을 멈춰야 했다.
집 안 어딘가에서 웬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흐엑?”
“왜 그래?”
“……으양!”(피!)
“흠?”
태일의 방 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서 해인을 말을 할 수가 없어졌다.
대신 얼른 그의 품에서 뛰어내려 냄새의 근원지로 토다다, 달려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거실 테이블 옆에 있는 작은 쓰레기통 안에는 피 묻은 휴지 조각이 가득했다.
“응!”
“뭔데 그래?”
“으읍!”
말을 못 하니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시율이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자 해인은 냅다 쓰레기통에 몸통 박치기를 해버렸다.
쓰레기통은 볼품없이 넘어졌고, 그제야 시율은 해인이 발을 동동거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피 묻은 휴지 조각들이 꽤나 섬뜩해 보였다.
“……신태일!”
두 남자는 여간해서는 서로의 방을 침범하는 경우가 없었지만, 이번엔 특별한 경우였다. 이 정도 피면 엄청 다친 게 틀림없었으니까.
시율은 급한 마음에 노크도 없이 냅다 태일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너……!”
“형님?”
“냐악?!”
“뭐야, 그 꼴이!”
문을 벌컥 열자 얼굴 여기저기에 피멍이 든 태일이 보였다. 혼자 붙인 게 확실한 이마의 엉성한 거즈 조각이며 멍든 팔뚝, 찢어진 입술까지.
의사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그건 분명, 어디서 실컷 맞고 온 모양새였다.
“아하…… 하.”
본인도 그리 자랑스럽진 않은지 어색한 웃음을 흘렸는데, 당연하게도 시율보다 먼저 해인이 태일에게 달려갔다.
또 계란 프라이 같은 눈을 하고는 울어대기 시작했다.
“느아앙!”(이거 왜 이래!)
“괜찮아, 괜찮아.”
“냐앙!(누가 이런 거야!)
까칠한 고양이 혀로는 핥아주기도 미안할 만큼 태일은 몸 이곳저곳이 성치 않았다.
얼굴의 상처가 유난히 심했고, 무릎이나 발등도 붉게 부어서 멍이 들기 시작한 채였다.
낮에 전화로 뭔가 불안하다던 이하은의 말이 생각나서 해인은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난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냐냐냥!”(미안해, 주인!)
“……자자, 도움 안 되는 고양인 좀 비키고.”
시율은 해인이 저보다 태일 때문에 더 자주 우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눈물이 많은 건 알겠는데, 그걸로 치료가 되는 건 아니니까.
그가 억지로 둘을 떼어놓고는 태일의 상처를 살펴봤다.
깊진 않지만 여기저기 찢어졌고, 멍이 든 모양을 봐서는 아마도 주먹에 맞은 자국 같았다. 슬쩍 태일의 주먹도 봤지만 때린 흔적은 전혀 없었다.
맞기만 했다는 소리였다.
“꽤 심한데…… 어쩌다 이런 거야?”
“……맞을 만했어요.”
“세상에 그런 건 없거든. 무슨 싸움에라도 휘말린 거야? 그럼 경찰에…….”
“하은이 약혼자인 서태준 선배를 만났거든요.”
“아…… 그건 어쩔 수 없네.”
곧장 말을 바꾸며, 시율은 태일의 옆에 있는 구급상자를 열어서 소독약부터 꺼내 들었다.
태일의 얼굴에서 엉성하게 붙어 있는 거즈들을 몽땅 떼버리며 투덜거리는 건 약도 안 바른 채 피만 닦은 흔적 때문이었다.
“너 인마, 인간적으로 소독은 해야 될 거 아냐!”
“하하…… 형님, 저는 태준 선배가 저를 잘 모를 줄 알았거든요.”
“……내 말은 안 듣는군.”
“같은 대학 선배라고 해봐야 과도 다르고, 저랑 마주친 건 겨우 몇 번이고…… 하은이랑 친 한 거지, 저랑은 그냥 남이었거든요.”
“그런데?”
“……근데, 전에 받은 명함을 가지고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바로 저를 알아보더…….”
“잠깐! 너, 그 사람을 왜 찾아간 건데?”
소독약을 흠뻑 묻힌 거즈로 태일의 상처를 닦아주던 시율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에 신경 쓰느라고 잠시 간과했는데, 애당초 대체 왜 만났단 말인가!
“아, 그게 아침에…… 하은이한테 만나자는 전화를 하다가 깨달았는데, 이게…… 비겁한 일이더라고요.”
“……이하은한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네. 지금 하은이랑 사귀고 있는 그 사람한테 먼저 말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아주 때려달라고 작정을 하고 갔구나?”
시율은 그만 기가 막혀서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뭐, 100원 주웠다고 경찰에 가져다주는 놈보다 더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야비하잖습니까.”
“라이벌 간에 그런 건 안 따지거든……?”
“몰래 얘기하는 건 정말 비겁한 짓이고요.”
“……못 말린다, 정말.”
“하은이랑은 상관없이, 제가 제 마음을 한 번쯤은 말하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당장 주먹이 날아오더라고요. 하하.”
오, 하느님. 시율은 태일이 살아 돌아온 데 감사해야 했다. 전에 한번 본 그 약혼자의 몸집으로 보건대 무슨 운동을 했어도 제대로 했을 게 틀림없었으니까.
마음먹었다면 죽도록 패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텐데. 사자 입으로 토끼가 뛰어 들어갔다 나온 꼴이었다.
태일이 이런 짓을 저지를 줄 알았다면 차라리 제대로 고백하는 법에 대해서 과외를 해줬을 거다.
오로지 직진할 것, 이라고!
“너 지금 웃음이 나오냐……?”
“……하지만 그 선배, 알고 있었대요. 하은이가 오래전부터 다른 누군가를 좋아했다는 거요.”
“…….”
“어렴풋이 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대요.”
그거라면 이하은에게 들은 적 있는 이야기였다. 이하은이 시율의 병원에 찾아왔을 때 말이다. 시율은 입을 다물었지만 입안은 씁쓸했다.
“형님 말씀대로 제 잘못이 맞나 봐요. 제가 너무 겁쟁이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
“태준 선배 비서가 들어와서 말리는 바람에, 반쯤 쫓겨났어요.”
“비서도 있냐.”
“그 선배 알아주는 집안 장남이거든요. 회사 이름 말하면 형님도 아마 아실 겁니다.”
“됐다. 그건 듣고 싶지 않네.”
태일이 하은의 약혼자에 대해 자신과는 상대가 안 되는 남자라며 전의조차 불태우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하은이 낮에 널 찾던데.”
“제가 전화를 안 받아서 그런가 봐요.”
“내일이라도 만나 봐.”
“글쎄요. 상처가 좀 나을 때까지는 못 만날 것 같아요.”
“……바보냐! 그 약혼자가 무식하게 팼다고 일러야지, 멍청아!”
어차피 고백한다고 고백해서 맞고 온 건데 알 게 뭐냐!
하지만 시율이 이를 갈거나 말거나, 태일은 느슨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러면 하은이가 속상해하잖습니까.”
“으와! 바보다, 정말 바보!”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났지만 태일은 기분 나쁜 기색도 아니었다. 요 근래 시율에게 워낙 욕을 많이 들어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얼추 치료가 끝나자마자 시율은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더 잔소리해주고 싶었지만 태일은 많이 지쳐 보였다.
“됐으니까…… 일단 좀 자라. 그리고 내일도 어디 갈 거면 나한테 꼭 허락받고.”
“무슨 허락이요?”
“또 혼자 멋대로 굴지 말고 상담을 하라고!”
“너무 형님에게 기대는 것 같아서…….”
“차라리 그냥 해!”
제발! 버럭 소리친 시율은 은근슬쩍 태일의 방에 남으려는 해인을 붙잡았다.
“너도 나와!”
“니양!”
반강제로 방에서 끌려 나가며, 해인은 이 남자가 엄청난 츤데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까칠한 것 같지만 다정하고, 다정한 것 같지만 까칠한 시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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