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고양이가 보는 남자들의 우정
“잘…… 된 건가요.”
“너도 이하은을 좋아하잖아. 그럼 된 거지.”
차가운 강바람에 날아가는 허탈한 웃음소리는 태일의 것이었다.
시율은 날이 꽤 차다는 생각을 하며 코트 깃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손끝이 시릴 만큼 차가운 맥주는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렇군요. 잘된 거군요.”
“네가 썩 기뻐 보이진 않지만 말이야.”
“결혼을 앞둔 여자니까요.”
“아직 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데도 널 좋아하지.”
“……형님, 사실은 문제가, 하나 더 있어요. 하은인 제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고 있거든요.”
거참, 대단하구만. 기껏 돗자리를 깔아줬는데 그 말을 못 했다니. 시율은 저였으면 그사이에 열 번은 말했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시율이 추구했던 대로 태일이 하은의 마음을 모르는 채로 아프리카로 떠났다면, 그래서 몇 년 뒤에 돌아왔다면.
그때쯤이면 이미 이하은이 애를 하나쯤은 낳고 잘 살고 있을 테니 둘의 사이에 다른 여지는 완전히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 장화 신은 고양이는 그걸 불행이라고 여겼는지 두고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모든 게 해인의 계략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심술이 나는 건 그 때문이었다.
“아직도? 너 그거 떼버려야 되는 거 아니냐.”
“그, 그게 아니라…… 하은이 말을 듣고는 너무 정신이 없기도 했고…… 제가 뭔가 말하기 전에 형님이랑 기도가 돌아와 버려서…….”
하지만 어찌 됐든, 결국 이렇게 된 거 시율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태일을 도와줄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 단순무식한 폭탄을 터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너 간과한 모양인데, 난 어제 일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거든? 분위기로 대충 짐작은 가지만.”
“아, 그러고 보니 제대로 설명은 안 드렸군요…….”
“좋아한다고 말한 거지?”
“……네.”
“이하은이.”
태일이 대답 대신 무거운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시율은 해인이 말한 걸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이하은이 말했단 말이지.”
일부러 강조하며 그는 지그시 해인을 노려봤다.
이 말썽쟁이는 은근히 위험한 짓을 잘한단 말이지. 조만간 제대로 버릇을 들여야겠다.
둘만 남게 되면, 그땐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저기…… 형님.”
“응?”
“이건 조금 다른 얘긴데 말입니다.”
“뭔데? 난 뜸 들이는 건 질색이야.”
“……저 게이 같습니까?”
풉. 하마터면 진심으로 뿜을 뻔했다. 시율은 역류할 뻔한 맥주를 겨우 목 안으로 넘기며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하은이는, 제가 게인 줄 알았답니다.”
“……거참 웃기는 여자야.”
“제, 제가 봐도 조금 오해 살 만하긴 했어요. 그래도…….”
빈정대자 꼴에 좋아하는 여자라고 편들어주는 거 보라지. 시율은 불편한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리고 이참에 전에 못 한 분풀이를 하기로 했다.
“너 그건 아냐? 그 여자 말이야…… 너랑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인 줄 알던데.”
“예에?”
충격과 공포라고 얼굴에 써 붙인 태일의 얼굴이 과연 볼만했다. 자신이 게이로 여겨진 것 이상의 충격거리가 있을 거라고는 여겨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먼저 그 충격을 맛본 시율은, 지금 태일이 슬그머니 저와 멀어지는 걸 이해해주기로 했다.
“어, 어쩌다가…….”
“네가 결혼 생각 같은 건 없다고 하면서 나랑 동거를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얼마 안 가 이하은은 프러포즈를 받았고, 받아들였지. 알 만하지?”
“……그런 건 몰랐습니다.”
“그 여자가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우연히 알긴 했는데…… 아니라고 수십 번도 더 말해도 안 믿더라고. 그래서 포기했지.”
시율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기가 찬 상황이었다.
“포기요?”
“내가 게이가 아닌 것까진 설명을 했는데, 너에 대해선 아주 단단히 믿고 있더라고. 어땠는 줄 아냐? 나한테 도리어 네가 게이가 아니란 증거가 있냐더라.”
“……아니라는 증거는, 제가 하은일 좋아한다는 것뿐이네요.”
“그래. 태어나서 그런 난제는 처음이었어.”
불만 가득한 시율의 투덜거림에 태일은 푹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가 생각해도 참 면목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되새겨볼수록 모든 걸 자초한 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저, 사실…… 걸리는 게 하나 있긴 해요.”
“흠?”
“아는 사람이 몇 명 없긴 한데…….”
“으흠?”
시율은 이제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두 번째 캔 맥주를 마저 비우며 목만 울렸다.
아주 여유롭게.
“고백받은 적이 있어요. 고등학생 때요.”
“자랑하냐? 그런 건 나도 있…….”
“아니, 남자한테요…….”
“…….”
“……기도한테는 민망해서 말 못 하고…… 하은이한테만 상담한 적이 있거든요. 어떻게 해야 할지……. 원래 굉장히 친하던 선배라, 그땐 너무 당황해서…….”
“아, 정말! 너 이 자식 진짜아!”
꽈과깍, 화난 시율의 손아귀 안에서 맥주 캔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이렇게 열 받아서 길길이 날뛰는 시율은 처음이었다.
해인은 크고 동그란 눈으로 시율을 올려다보며 두 귀를 바쁘게 파닥거렸다.
“죄송해요!”
“무릎 꿇고 빌어라, 진짜!”
“……제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방금 사과했잖아!”
“그건 도의적인 책임이죠!”
“너 이 자식…….”
시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태일은 억울한 울상을 하고는 맞을 것 같으면 당장 도망갈 태세를 했다.
일촉즉발.
그러던 어느 순간,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를 붙잡고 웃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크게 웃는 것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해인은 당최 웃음 포인트를 알 수 없어서 두 남자를 바쁘게 번갈아 봤다.
‘남자들의 핀트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알쏭달쏭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단 두 사람이 웃으니 덩달아 기분 좋은 꼬리를 했다.
***
두 남자는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웃다가 지쳤는지 벤치에 퍼져 앉아서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아직까지도 클클댔다.
“하아…… 너도 참 알수록 별스러운 놈이구나.”
“후후, 제가 생각해도 그렇긴 하네요.”
뭐가 그렇게 좋다고 웃은 걸까. 남자들만의 뭔가가 통한 걸까? 그도 아니면 취한 걸지도 모르겠다.
해인은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아봤다.
시율은 캔 맥주 두 개를 마셨을 뿐이고, 태일은 거의 마시지도 않은 채였다. 취한 것 같진 않은…….
“헤췽!”
찬바람을 갑자기 들이마신 탓일까.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겨우 그것뿐이었는데 두 남자는 낙엽 굴러가는 거라도 본 여고생처럼 또 웃어대기 시작했다.
“푸하핫, 너 고양이가 재채기하는 거 봤냐?”
“아아, 정말…… 크큭! 헤췽이라고 했어요, 방금?”
어우 씨! 왜들 이래, 갑자기. 해인은 제가 화제의 중심이 되자 민망해져서 괜히 딴청을 부렸다.
추워서는 아니고 그냥 바람이 세서 나도 모르게 나온 거라고! 이상한 소리가 나온 건 창피하지만…….
해인이 흘깃 노려보자, 시율이 웃으면서 자신의 코트 사이를 벌려 보였다.
“이리 와.”
“먁!”(싫어!)
비웃었겠다!
“춥잖아. 어서.”
사실 안 춥지만…… 그렇긴 하지만, 따뜻해 보이는 시율의 품은 탐이 났다.
해인은 조금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못 이기는 척 시율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서는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애인 품속에 폭 들어올 수 있는 여자 친구는 별로 없으리라.
“이런, 추웠나 봐요. 바로 쏙 들어가는 걸 보니까요.”
“그러게 말이야.”
시율이 코트 단추를 몇 개 채우자 해인은 얼굴만 코트 밖으로 빠져나온 모양이 됐다.
얼핏 보면 코트 한가운데 고양이 머리만 있어서 무서울 법도 했지만, 일단 두 남자 눈에는 그냥 귀여웠다.
“웃어서 삐졌어?”
“먀악!”(머리 만지지 마!)
“이런. 우리 아가씨는 까다롭다니까.”
시율이 해인을 놀리는 사이, 태일은 그 친밀한 모습을 보며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커다란 손으로 턱을 쓸어 만지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형님, 저 그냥 게이인 척할까 봐요.”
분명 웃고 있는데, 목소리도 쾌활한데, 기분이 끔찍했다.
“……미쳤냐.”
“그러면 하은이 조금은 덜 혼란스러울 것 같아요.”
“하?”
“가장 평화로운 끝일 것 같고요.”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의사 선생님! 여기 이 남자 너무 웃어서 머리가 이상해졌나 봐요! 치료! 치료! 도움!
해인은 기겁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손에서 발톱을 뺐고, 시율은 그게 아팠는지 움찔거리면서도 태일만 쳐다봤다.
“너 아직 게이가 아니라는 말 안 했냐?”
“확실하게는…… 못 했어요.”
“그럼 이하은만 고백하고 끝났던 거야?”
“기회가 없었다니까요. 아, 이젠 그게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차라리 씁쓸한 얼굴이면 좋겠는데. 그냥 나지막한 미소로 평소처럼 초연해 보이는 남자는 기어코 시율에게 매를 한 대 벌고 말았다.
“악!”
“이 미친놈이 진짜!”
“형님!”
맞은 등짝이 퍽 아팠던 모양이다. 태일은 진짜로 놀란 얼굴이었다.
해인도 덩달아 같은 표정이 되었다.
“난 아는 고자 없거든!”
“고…….”
“너 정도 초식남이면 그냥 고자야!”
“……하지만, 하은이가…… 울 것 같은 눈을 했어요. 좋아한다고 말해놓고는…… 주워 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고요.”
“그거야 네가 게인 줄 아니까!”
“그게 나아요. 이제 와서 저도 자길 좋아한다는 걸 알면 더 힘들어지기밖에 더합니까?”
“…….”
“제가 결혼식 날 쫓아가서 신부를 데리고 도망치면, 누가 우릴 축복해줍니까.”
바로잡는 건지 망가트리는 건지 그 경계를 알 수 없었다.
태일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고, 결국은 하나라도 분명하게 행복해지는 길이 있다면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용기 없는 선택일지언정,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애정 표현이기도 했다
“이대로 덮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차라리…… 사실 게이 맞다고 말해주면 하은이라도 편할 겁니다.”
“……너 같은 놈을 좋아한 이하은이 불쌍하다!”
“이제라도 제 마음을 말한다고, 뭐가 바뀔 것 같지가 않아요.”
“니가 이 모양이니까 이하은도 그런 게 자신이 없는 거잖아!”
어지간해서는 중립이나 좌시하는 시율이었지만, 이제는 태일을 들고 두들겨 패고 싶어졌다. 이 답답한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그건 아니라고 말이다.
희생과 인내는 사랑에 어울리는 감정이 아니었다.
강시율이 아는 한, 사랑에 어울리는 건 진심과 정성일 뿐이었다.
“신태일, 간단하게 생각해! 한 여자가 있고, 두 남자가 있는데. 여자가 마지막에 한 남자를 선택할 거야. 선택하기도 전에 네가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
“창피한 것도 정도가 있지! 대체 어디까지 바보짓 할 거냐?! 이하은은 자신에게 선택지가 하나 더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어. 하다못해 선택하게 해!”
“……형님, 전 제 마음이 아주 쓸모없게 느껴져요. 누군갈 좋아한다는 게 그 자체로 행복하질 못해요. 왜 혼란스러워야하는 겁니까. 이럴 바엔 차라리 없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그런 적은 나도 있어!”
두 남자 간에 적잖은 실랑이가 생겼다.
태일은 일어나려고 했고 시율은 벤치로 그를 잡아 눌렀다.
그 과정에서 해인은 코트 밖으로 떨어질까 봐 발톱을 바짝 세웠고, 이게 비싼 코트가 아니기 만을 바랐다.
“형님이요?”
“그래, 혼란스럽지. 누군갈 좋아한다는 건 원래 그런 거야. 그 상대한테 내가 어울리는지, 날 받아줄 것 같기는 한지, 우리가 얼마나 오래 함께 할 수 있을지, 행여 상처를 주진 않을지. 누구나 그걸 생각해! 그래도 사랑하는 거고!”
그거 혹시, 내 얘긴가? 해인은 코트 안쪽에 발톱을 세워 매달리며 고개만 들면 바로 보이는 시율을 쳐다봤다.
내내 태일의 일에 대해 시큰둥한 태도더니, 지금은…… 다시 반할 만큼 박력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에게도 태일은 아끼는 존재인 모양이다. 남자끼리라 내색은 안 하지만.
“네 마음 나도 알아. 그 녀석이 나랑은 너무 다른데, 내 눈에 자꾸만 예쁜 거야. 날 거들떠도 안 보는데…… 속상하고 자존심 상하는데도 포기도 할 수가 없는 거야. 집착이야. 욕심이고. 근데 너, 그것도 사랑이다?”
“형님이 그런 건 상상이 안 가는데…….”
“나 싫다는 녀석, 심지어 다른 남자가 좋다는 녀석한테 한참을 애걸했다.”
당사자로서 뜨끔할 수밖에 없는 해인이었다.
“끝이 좋지 못할 것 같고, 힘든 건 당연할 것 같고, 고생문 예약이고. 멀리 볼 수 없는 사인데 시작해도 될까. 시작하지 않는 게 서로한테 편한 건 아닐까. 내가 녀석을 괴롭히는 건 아닐까…… 너랑 똑같은 생각을 했어.”
“……정말입니까?”
“근데, 아파도 좋더라고. 날 밀어내도…… 어제보다 조금 더 받아주면 그걸로 좋더라고. 헤어지는 날이 와도, 지금은 함께하는 게 좋더라고.”
해인의 귀에, 가슴에 시율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일지도 모르지만…… 그랬다.
아주아주 진심이 담겨서 그런 건지 태일도 더는 대꾸하질 못했다.
시율이 하는 말은, 그러니까 도망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
건장한 두 남자가 공터에서 소란스럽게 굴었더니 경찰이 출동했다.
“거, 알 만한 분들이 뭐 하시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한잔하신 것 같은데.”
“조금 마셨는데…….”
신고를 받고 온 중년의 경찰 아저씨는 혀를 몇 번 차더니 신분증을 검사했고, 처음이라 봐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번엔 경고지만 다음엔 같이 경찰서에 가셔야 할 겁니다.”
“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둘이 고래고래 소리 지를 때 알아봤지. 해인은 두 남자의 눈물겨운 우정에 대해서는 일기에 적어두기로 했다.
나중에 시율이 발견하면 창피해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그걸 노리는 거였다.
“……돌아가자.”
“……예.”
경찰이 돌아가고, 두 남자는 꽤나 머쓱해 보였다. 집에서 나온 게 조금 전 같은데, 어느새 자정이었다.
“너랑 만나고 별꼴을 다 본다, 정말.”
“하하.”
“파란만장해.”
태일과 시율은 궁합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의문이었다. 해인은 문득 이 둘도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사신에게 물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다만 해인도 알 수 있는 건 시율이 태일을 걱정하긴 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말만 해줄게.”
“……뭡니까?”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너랑 내가 제법 친하다고 생각하니까 말하는 거다. 다른 놈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신경 안 쓴다고.”
“음, 절대 좋은 말은 아닐 거 같은데…….”
“너 하는 짓이 꼴불견이라 그래.”
각오하라는 투였고, 태일은 무슨 말이 나올지 바짝 긴장하는 눈치였다.
“전부 네 잘못이야.”
시율은 본래 막말을 잘하지만, 이건 조금 막말이랑은 다른 것 같았다. 좀 더 애정이 담겼달 까. 그런 소릴 하면 싫어하겠지만 말이다.
“……전부 말입니까?”
“그래. 네가 한 번이라도 용기를 냈으면 이 지경까지는 안 됐을 거 아냐. 정말 좋아하는 여자였다면 고백을 했어야지. 한 번이라도!”
“그러다, 영영 불편해질 수도 있잖습니까.”
“아주 볼품없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닌 이상은 그게 맞아. 아플 만큼 진심인데 말하지 않을 수가 있어?”
정말 좋아했다면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을 거다. 말하지 않으려고 해도 쏟아지고 말 테니까.
너무 커다란 마음은 감출 수가 없는 법이니까.
“게이 시늉을 할 정도로 좋아하면, 차라리 고백을 해!”
“…….”
“사람 창피하게 하지 말고! 알아들었으면 마무리 정도는 진심으로 하라고!”
“……예.”
“또 밍숭맹숭하면 뒤통수를 쳐줄 거야.”
시율의 손이 아주 맵다는 건 방금 학습한 태일이었다.
맞은 게 생각나서 웃음이 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말이다.
***
묘한 날이었다. 어제보다 서로 더 친해진 것 같은 그런 밤.
집으로 돌아온 이들은 모처럼 편하게 각자의 침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태일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막연히 하은에게 갔을 거라고만 짐작했다.
하은에게서 그를 찾는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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