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막후의 지배자 고양이
태일의 출국 전에 정말 친한 사람들만 모여서 가지는 이별의 자리다 보니 무리해서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조용한 배경 음악처럼, 천천히 오래 마시는 술자리가 이어졌다.
“형님, 여자 친구 생기셨다면서요?”
“……다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네 사람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태일과 시율이 함께 산 뒤로 곧잘 있는 자리였다.
하은을 뺀 남자 셋이서는 더 자주 모이고는 했으니 어색할 것도 하나 없었다.
“다 소식통이 있죠. 병원에서 둘이 얼레리꼴레……. 윽.”
김기도는 꼭 까불다가 시율에게 지금처럼 한 대씩 뒤통수를 맞고는 했다.
“아, 형님 진짜. 너무하십니다.”
“너무하긴.”
“그래서 여자 친구분 안 보여주실 겁니까?”
“나만 볼 거다.”
나 여기 있는데? 해인은 시율의 무릎 위에서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태일의 무릎에 앉아 있었을 테지만, 오늘은 시율의 말을 듣고 반성한 바가 있었다. 여주인은 상상만 해도 싫었으니까.
“이쁩니까?”
“예쁘지.”
“……형님 표정 보니까, 장난 아닌가 본데요.”
술이 들어간 탓인지, 해인이 제 무릎 위에 얌전히 있는 탓인지 대답하는 시율의 표정은 매우 다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부끄러움은 온전히 해인의 몫이었다.
“그럼, 넌 상상도 못 할걸.”
“오.”
“내가 태어나서 본 여자들 중에, 가장 예뻐.”
모델 사무실 매니저한테 어쩌자고 그런 거짓말을!
김기도는 전에 없던 시율의 느슨한 얼굴 표정에 내심 놀란 눈치였다. 자신의 턱을 매만지나 싶더니, 이내 직업병을 발동시켰다.
“그럼 저희 사무실에 한 번…….”
“말도 꺼내지 마.”
“그럼 사진이라도…….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또 매를 버는 김기도였고, 그 모습에는 구경하던 하은도 태일도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정말 즐거운 자리였다.
네 사람은 제법 잘 어울렸다.
정확히 하자면, 이하은이 시율을 다소 어려워하는 것 빼고는 아주 완벽한 멤버였다.
“김기도.”
“예?”
“보니까 술이 부족한 것 같은데.”
평소 술을 그리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김기도가 사온 술은 그리 많은 양이 아니었고, 안주가 훌륭했던 탓도 있어서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페이스로 봐서는 몇 시간은 더 마실 것 같은데 말이다.
“엇, 그러게요. 나가서 사올까요, 그럼?”
“그래.”
“맥주로 사오면 됩니까?”
“같이 가자고. 술 좀 깰 겸.”
시율은 몸을 일으키며 해인을 바라봤고, 해인은 만족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에게 내린 지령대로였다.
‘강, 잠시라도 좋으니까. 주인이랑 이하은이 둘만 있을 수 있게 해줘.’
‘……내가 왜.’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둘만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 헤어지기 전에. 그건 소중한 거잖아.’
고양이한테 잡혀 살고 있다고 말하면 다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집 안에는 하은과 태일만 남았다. 정확하게는 고양이가 한 마리 더 있었지만 그리 신경 쓰이는 부분은 아니었다.
“……음, 그러고 보니 둘만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게.”
“엄청…… 오랜만인데.”
태일은 선을 긋는 데 확실한 구석이 있었다.
이하은이 한 태준과 사귄 몇 년 전부터 조금 거리를 뒀고, 하은과 단둘이는 만나지 않게 됐다.
시율과 자신이 같이 산 뒤로는 집에 외간 남자가 생겼으니 하은이 자신의 집에 오는 걸 꺼렸다.
얼마 전 하은이 약혼한 뒤로는, 남들 눈이 있으니 아예 대놓고 오지 말라고 했다.
“오늘 와줘서 고마워.”
“고맙긴.”
“네 결혼식 준비로 많이 바쁠 텐데.”
“……그거야…… 뭐, 괜찮아. 네가 떠난다는데 당연히 와야지!”
“신경 안 써도 되는데.”
태일은 매사 담담한 구석이 있어서 사람들은 곧잘 그를 무뚝뚝한 걸로 착각하기도 했다.
뭔가 내색하는 법이 별로 없고, 조용한 걸 좋아하다 보니 알 수 없는 인물이라는 평을 듣기는 강시율과 닮은 면이 있었다.
‘시율이 물이라면 주인은 흙이지만.’
해인이 두 사람을 보면서 느낀 건 그 정도였다. 알 수 없기는 시율이 훨씬 더 하지만, 태일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라면 시율은 수컷 느낌이 확실해서 보기만 해도 두근거리고, 태일은 성욕이 있는 걸까 싶은, 마치 성직자 같은 경건한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이하은이 저렇게 끙끙 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사무실 사람들도 많이 섭섭해하더라.”
“그래…….”
모델 사무실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태일은 어째 단둘이 되자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버렸다.
해인으로서는 답답해 죽을 맛이었다.
겨우 둘만 있게 되었는데, 조금 더 말을 하라고 말을! 허심탄회할 수 있는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이 초식동물들아!
“물론 나도 섭섭했고.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전력으로 응원해주는 게 맞는 것 같아. 얼마 전엔…… 정말 미안했어. 내가 너무 당황했나 봐.”
“얼마 전……?”
“막무가내로 가지 말라고 해서…… 널 너무 곤란하게 했던 것 같아. 생각해보니까 나한테 그럴 권리는 없더라고. 우리는 친구지만…….”
“하은아.”
이하은은 원래 눈물이 많은 게 분명했다. 울컥하는지 눈시울을 붉혀서 결국엔 태일을 당황하게 했다.
“친구지만, 그래서 더 이해해줘야 하는데…… 넌, 외국이 더 어울릴 거라는 거 알아.”
“……그런가.”
“미안, 네가 떠난다니까, 뭔가……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나도 그래.”
“항상 내 곁엔 네가 있었는데…….”
그녀 자신도 태일과 이렇게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 다신 없을 수도.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못 할 이야기투성이였다.
“나도 내가 떠나게 될 줄은 몰랐어. 네가…… 결혼할 줄도 몰랐고. 아마 너 그래서 힘든 걸 거야. 요즘 감정 기복이…….”
“태일아, 멀어져도 우리…… 항상 친구지? 응?”
“……그럼.”
“나, 너한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친구로 있을 거야. 네가 어떤 사람이라고 해도…… 친구로 있을 거야.”
울음을 참으려 애쓸수록 하은의 어깨는 엉망으로 흔들렸다.
그녀의 등을 두들겨주다가 태일이 씁쓸하게 웃자, 하은은 결국 못 견디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렸다.
태일은 하은이 무엇을 그렇게 못 견뎌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약혼자와 관련된 게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건너서 알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걸로 아는데, 하은이 자꾸만 힘들어하니까 짐작 가는 게 그것뿐이었다.
결혼이 상당히 급하게 진행된 것도 태일을 신경 쓰이게 하는 것 중 하나였다.
“너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냐, 아무것도.”
“혹시…… 고민이 있으면 말해주지 않을래. 이젠…… 들어주지 못할 텐데.”
태일의 말은 하은을 더욱 울릴 뿐이었고, 해인은 더는 지켜보고 있기가 힘들어졌다. 둘만 내버려두고 다른 방으로 가버릴까 싶었다.
“……미안해. 나는 너한테 걱정만 시키나 봐. 항상 의지만 하고…….”
“하은아, 난 네가 나한테 기대줘서 기뻤어. 너한테 힘이 될 수 있어서. 고마웠어.”
“으…… 한 번쯤은 말할 걸 그랬나 봐.”
“뭘?”
“그냥, 한 번쯤은.”
하은은 말하는 내내 도통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해인이 낮은 자세로 몸을 움직인 건 그때였다.
……더는 못 봐주겠네.
“뭔데?”
“말하면, 네가 친구로 있어주지 않을 거야.”
“……그런 건 없을 거야. 네가 나한테 말한 것처럼, 나도 항상 네 친구로…….”
“좋아해.”
뜻하지 않게 두 사람 사이를 가른 분명한 속삭임에, 이하은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우느라 부어버린 두 눈을 크게 뜨고는 태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노려봤다.
“어……?”
“……방금.”
“……내가 말했어……?”
물으나 마나, 그건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태일은 방금 자신이 두 귀로 듣고도 그 말을 의심하는 모양이었고, 그건 하은도 마찬가지였다.
말한 기억은 없는데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가다니. 귀신의 곡할 노릇도 아니고. 바쁘게 눈을 굴려봤지만 말할 사람은 역시 자신뿐이었다.
“내, 내, 내가 말했나 봐……!”
술기운에 나도 모르게 그만 말해버렸나 봐.
“미쳤나 봐!”
이하은은 경악한 나머지 숨을 멈춰버렸고, 태일은 멍한 채로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적은 깬 건 고양이의 울음소리였다.
“야아옹!”(인생은 한 번!)
***
수차례의 자문자답 끝에 이하은은 제가 술김에 말했다는 사실로 받아들였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는, 얼른 태일에게 매달렸다.
“미안, 태일아! 못 들은 걸로 해!”
“……뭐?”
“못 들은 걸로 해! 잘못했어……. 나, 나 싫어하지 마!”
이하은이 고백해버렸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 상황에서 답은 그것뿐이었다. 선택지도 그것뿐이었고.
“왜…… 싫어하겠어.”
“그야, 넌 여자를 싫어하잖아!”
“……네?”
“아니지, 남자를 좋아하잖아!”
그건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릴까. 태일은 빠른 속도로 술이 깨는 걸 느꼈다.
그리 거하게 취한 상태도 아니었지만,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머리를 강하게 회전시키고 있었다.
누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 와중에 그의 시선에 걸리는 건 조용히 하은의 뒤를 지나가는 검은 고양이, 개냥이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걸까. 하여간 고양이는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해인은 몸을 숨겼던 하은의 뒤편 소파 아래에서 막 기어 나온 차였다. 그러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시율의 방으로 향했다.
띠리릭.
때마침 술을 사러 갔던 두 사람이 돌아오는 기척이 났고, 해인은 도도도도, 더 빠른 걸음으로 현장에서 도망쳤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어? 무슨 일 있었어?”
사태의 범인은, 해인이었다.
끼어들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말 못 하고 죽은 귀신보다는 때깔이 나을 것 같았다.
살아온 인생보다 남은 인생이 더 많은데, 이왕이면 오해를 안고 살지 않았으면 했다.
약혼자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리고 귀신같이 사태를 파악한 시율의 눈이 매섭게 저에게 꽂히는 걸 느꼈지만 말이다.
“냐옹.”(그럼 난 이만.)
***
숨는다고 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다 몰라도 시율은 알았고, 해인은 그의 방에 꼼짝없이 갇혔다.
“……솔직히 말해. 자리 비운 사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냐아옹?”
“이제 와서 말 못 하는 척이 소용 있을 것 같냐!”
시율이 오랜만에 볼 살을 잡아 늘렸고, 해인은 그 굴욕을 참을 수 없었다. 고양이인 채로 당하면 매우 흉했으니까.
“항복, 항복!”
“항복은 무슨, 너 처음부터 이러려고…….”
“……아냐! 그러려던 건 아닌데…….”
“그럼!”
“듣고 있자니…… 너무 답답해서 그만……. 아얏!”
이 녀석을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뭐, 이런 말썽쟁이가 다 있는 걸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상상이 갔다.
시율의 괴롭힘이 심해지자 해인은 못 견디고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사람, 사람 될게!”
“지금 그게…….”
“강…… 제발.”
강력한 눈빛 공격에, 시율은 결국 항복 하는수밖에 없었다.
해인을 놓아주고는 이불을 들춰줬고, 해인은 냉큼 기어 들어가더니 이내 검은 머리카락을 흘리며 시트 속에서 쏙 튀어나왔다.
시율이 고양이 쪽보다는 그 모습에 약하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한 모양이었다.
해인은 얌전한 척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자, 말해보시지.”
“내가 말한 줄 몰라. 이하은은 술김에 자기가 말한 줄…….”
“…….”
“은혜를 갚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
“……잘못했어요.”
시트로 몸을 둘렀다고는 해도, 그가 사랑하는 우윳빛 뽀얀 어깨를 드러내고, 방울방울한 눈빛 공격에, ‘당신을 좋아해요!’ 하는 표정까지 곁들이면…….
그는 더는 화를 낼 수 없었다.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던 걸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는 말이다.
“너 정말…… 그 여자 결혼이 파토 나면 어쩌려고 그래.”
“……어쩌긴, 주인이랑 결혼하겠지.”
해인은 딴 데를 보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약혼자는?”
“……뭐, 나는 주인이 행복하면 그게 더 좋아.”
“얌마!”
“왜, 강도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면 데리고 도망친다며!”
오냐오냐 해줬더니 매력을 십분 이용하다 못해 갈수록 뻔뻔해지기까지. 시율은 기가 막혔지만 할 말은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래! 나 못됐다!”
“……내가 언제 못됐다고 했냐. 제 발 저리긴.”
“지금 그런 얼굴이잖아. 그래도 알 게 뭐냐! 얼굴 몇 번 본 약혼자! 난 나한테 잘해준 주인이 행복한 게 더 좋아!”
“……그거야 나도 그렇지만.”
“이기적이라고 해도, 그게 좋다고!”
이기적인 것 하면 바로 저였기 때문에, 시율은 더 이상 해인을 혼낼 수 없었다.
그리고 해인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이라서, 안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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